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처음 '오페라의 유령'을 접한 것은 다름 아닌 TV에서였다. 아마도 <주말의 명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페라 극장에서 벌어진 아주 기괴한 분위기의 스릴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 미국을 배경(응?)으로, 성악가 지망생 크리스틴이 오디션에 참가하는데 그 주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납치당한다는 이야기였다. 오페라와 살인이라는 흔치 않은 주제를 이토록 재미있게 버무린 것에 깜짝 놀라 그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목은 <오페라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게 아니라, 할리우드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보면 모르겠지만.  



 
 

몇 년 후, 음반가게에서 독특한 재킷의 음반을 발견했다. 하얀 마스크에 빨간 장미가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성음사에서 발매한 <오페라의 유령> OST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타이틀을 보고 바로 몇 년 전에 TV에서 봤던 영화를 떠올리며, 이 음반이 그 영화의 OST인줄 알고 덜컥 사버렸다. 영화도 재미있었지만, 음악도 괜찮았었기에 천천히 감상할 요량이었다. 근데 이 음반이 바로 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바로 그 유명한 뮤지컬이었을 줄이야...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스피커를 꽉 채우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을 뒤흔드는 선율들. 정말 굉장했었다.   

 

2002년 영국에 갔을 때, 그 살인적인 가격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티켓을 끊었다. 4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자리는 왼쪽 제일 꼭대기 층이었던가. 무대와 내가 앉은 곳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망원경이 필요할 지경이었다(좌석 앞에 50P를 내고 망원경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투덜거림도 뮤지컬이 시작되자 조용해졌다. 화려한 음악과 마술과도 같은 진행은 나도 모르게 3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줄은 알 수 없었지만,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를 (보는 입장에서는) 재미있게 비튼 미녀와 야수 이야기랄까? 암튼,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을 때, 일부러 보러 가지를 않았다. 그 때 받은 감동이 희석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2004년에 제작된 <오페라의 유령>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중학교 때 봤던 <오페라 유령>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페라의 유령>을 검색해보니, 관련 영화가 7편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다(TV영화나 모티프를 차용한 작품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목록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최근에 제작된 것이야 뮤지컬 때문이라고 쳐도, 1925년부터 1998년까지 6편이나 주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면, 원래의 이야기가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게 내가 가스통 루르의 원작을 들게 된 이유다(물론 동생이 샀던 책이 집에 있었기도 했지만). 

간단하게 총평을 해보자면, 가스통 루르의 『오페라의 유령』 '지루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좋은 이야기부터.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진짜 유령 같이 신출귀몰하는 '오페라의 유령' 에릭은 그가 정말 사람인지 유령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크리스틴과 라울 백작, 그리고 에릭의 삼각관계는 충분히 애간장을 태우며, 오페라 극장의 지하의 묘사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지하세계 모리아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굉장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살인과 음모 그리고 주술과도 같은 미신의 맹신 등은 이 소설을 굉장히 특별하게 만든다.  

이번엔 따끔한 이야기. 구슬은 서 말이나 있었는데 제대로 꿰질 못했다. 미스터리를 쌓아가는 과정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나 안일하다고나 할까. 독자와 머리싸움을 하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잔재미를 무시한 채 가스통 루르는 너무 쉽게 자신의 패를 드러냈다. 미스터리의 해결은 등장인물의 고백에서 설명되며, 정말로 궁금했던 초현실적인 미스터리는 그냥 두루 뭉실 지나친다. 게다가 절정부분은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시점이 바뀐다. 물론 소설이 '오페라의 유령' 사건에 대한 진술 모음집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런 시각이 존재할 수 있지만, 좀 뜨악하게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이 난삽한 이야기는 글로 장황한 설명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와 소리로 보는 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이 이야기는 영화와 뮤지컬로 다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책이 지루했던 다른 이유는, 번역의 고색창연함도 한몫했다. 성귀수 씨의 번역은, 원작의 문체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책으로 연극 대본을 만든다면, 배우들이 이 대사를 어떻게 육화시킬지 굉장히 궁금할 정도로, 좀 뜨악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원작의 배경이 보헤미안들이 예술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롭게 활동했던 시기인 것을 보면, 그 정도의 고색창연함은 감안해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뮤즈가 떠난 창작자의 최후는 어떨까? 그는 뮤즈의 도움으로 불멸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원할까 아니면 뮤즈의 사랑을 원할까? 『오페라의 유령』은 바로 이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읽는 이로서 감히 평가하자면, 소설로서의 매력은 떨어지지만,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출중한 작품이다. 이걸 '프랑스 소설의 어떤 경향'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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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7-1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영화는 정말 좋았는데, 하다못해 고 장국영 주연한 야반가성도 좋았다는 거 아닙니까?
오래 전 이책, 저는 문학동네판 가지고 있는데 읽다가 덮어버린 기억이 나네요.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요. 그래도 님은 다 읽으셨네요. 축하해요. 박수, 짝짝짝!

Tomek 2010-07-13 17:18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덮어버렸던 게 한두번이 아니에요. '크리스틴의 고백' 부분만 넘어가면 나머지는 그나마 수월한 편이죠. :D

굿바이 2010-07-1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품을 소설로는 읽지 못했어요, 아마 LG아트센터 개관 공연이 [오페라의 유령]이었을 거예요. 그 당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무료 티켓을 얻어 첫 공연을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몸은 지치고, 여기저기 VIP고객들이라 분류된 분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짝 긴장한 상태였는데, 공연이 시작되자 그 모든 긴장이 턱 풀어지더라구요.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화려한 무대에 완전히 몰입해서^^ 물론, 스토리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래도 그 감동이 참 오래가서, 일부러 영화는 피했다고 할까요. 이제 슬슬 영화도 한 번 볼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Tomek 2010-07-13 17:19   좋아요 0 | URL
우와~ 앞자리에서 본 느낌은 어떤가요? 저도 무리하더라도 그런 경험을 했어야 했는데... ㅠㅠ
저도 조만간 영화 보려고 해요. 옛날에 TV에서 했을 때 오프닝 부분 보고 꺼버렸거든요. 이제는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마그 2010-07-1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굿바이님이랑 비슷한... 경험이.
아는 동생이 관련 일을 하고 있어서... 아트센터 VIP로 봤지요. 정말... 충격이었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뒤로는 뭐.. 뮤지컬에서도 저런 감흥은 느끼기 쉽지않더라구요
국내 초연이었음에도 너무..진짜 너무 멋진 공연이었거든요.
공연 보고나서나중에 책을 읽었는데. 그닥 재미없었더라는...^^;;;

Tomek 2010-07-14 09:37   좋아요 0 | URL
뮤지컬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던 것 같아요. 화려한 볼거리에 마술적인 요소도 끌고오고, 뮤지컬 넘버도 굉장했고, 뭐 하나 뺄 수 없는 작품이었죠.
근데 소설은 좀... :D
 
축구는 문화다
홍대선.손영래 지음 / 책마루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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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유난히 감정이입이 잘 되는 스포츠다. 한국-일본, 잉글랜드-아르헨티나, 독일-잉글랜드, 브라질-우루과이-아르헨티나의 경기는 일반 A매치 이상의 긴장감이 돈다. 선수들은 사력을 다해 경기를 하고, 국민들은 혼신의 힘으로 응원을 한다. 그렇게 해서 이기면 승리의 도취감을 즐기지만, 지면, 그만큼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 이상의 치욕감과 굴욕감을 느낀다. 왜 이런 단순한 공놀이에 수많은 사람들은 일희일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전쟁이기 때문이다.  

축구는 전쟁이다. 다른 말로 표현할만한 적당한 것이 없다. 축구는 말 그대로 전쟁이다. 세상엔 정말 많은 스포츠가 있지만, 축구만큼 관중과 선수들이 격하게 반응하는 운동이 없다. 그라운드는 전쟁터이고, 11명의 '전사'들은 승리하기 위해 90분 동안 쉴 새 없이 공을 몰고 뛰어다닌다. 전쟁엔 온갖 전술과 술수와 협잡이 들끓기 마련이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반칙은 용인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온갖 치사하고 은밀한 반칙이 자행되기도 하고, 할리우드 액션까지 선보인다. 특히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 가나와 우루과이의 8강전에서 수아레즈의 '신의 손' 반칙에 대해선 스포츠맨십에 대한 장렬한 토론(이라기보다는 비난내지 비방)이 이루어졌다. 분명 과정은 나빴다. 하지만 수아레즈는 자랑스러워 했다. 전쟁에서는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에는 많은 미신과 주술이 따르듯이 축구에도 많은 것들이 따른다. 프랑스 도미니크 감독의 별자리 맹신도 그렇고, 축구의 신 펠레의 예언은 저주로 굳어진지 오래다. 이번 월드컵에서 엄청난 스타가 된 문어 푸욜의 신탁(!) 역시 화제가 됐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축구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적중률이 높아질수록 그 권위는 공고해진다.  

축구라는 전쟁을 수행하는 각 국가의 팀은 각자 고유의 스타일이 있다. 이것은 전술이나 전략과는 다르다. 축구란 1골을 넣든 10골을 넣든 결국 이기면 되는 경기이기 때문에, 골을 넣기 위한 공격과 상대팀의 골을 막기 위한 수비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축구의 스타일은 바로 이 공격와 수비의 과정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스타일은 각국의 국민성에서 기인한다.  

잡설(雜說)이 너무 길었다. 홍대선, 손영래 작가가 공저한 『축구는 문화다』는 바로 축구를 통해 바라본 유럽과 남미의 문화사이다. 남아공 월드컵 특수를 노리고 졸속 제작한 책이 아닐까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글들은 <딴지일보>에서 필독의 ‘축구문화사’라는 글로 연재됐던 글을 묶은 책이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공들여 써 온 것이다.  

잉글랜드는 왜 거칠고 투박한 킥 앤 러시의 축구를 하는지, 이탈리아는 왜 카테나치오 수비를 그렇게 신봉하는지,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쇼로서 축구를 어떻게 길들여왔는지, 독일은 어떻게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 국민'이 될 수 있었는지, 프랑스 대표팀의 전성기와 몰락은 똘레랑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을 다룬다. 책 제목대로 축구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 전반을 다룬다. 로마제국에서 도시 국가로 분화한 이탈리아의 역사와 세리에 A의 연고지를 구분한 것과,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앙숙 관계는 프랑코 독재서부터 저 멀리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의 세기의 결혼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두 저자들은 축구라는 공놀이를 매개로 유럽과 남미의 역사, 정치, 문화, 종족, 기질, 경제, 지리를 아우른다. 추구를 보면, 그 나라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지식들을 나열한다.  

졸속 제작은 아니지만, 월드컵 기간에 출판하려 해서인지 띄어쓰기, 오탈자가 간혹 눈에 띄어 거슬리지만, 내용만큼은 정말 어디하나 뺄 수 없는 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와 국가를 바라보는 방법을 축구를 통해서 하나 더 배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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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2010-07-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 스타일은 그나라의 국민성이라!
리뷰 읽고나니, '아내가 결혼했다'가 생각나네요. 축구에 대해선 깜깜이라 이 부분에선 쭉 건너뛰고 읽었거든요. 그래선지, 작가가 참 '별종'이다 했어요.
이 책 읽고나면 또하나의 세상을 만나겠죠? (감사)

글구, '간판'바꾸셨네요!

Tomek 2010-07-12 16: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에파타 님. 그간 너무 격조했습니다. 잘 지내시죠?

책은 기본적으로는 축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문화사적인 이야기도 꽤 비중이 큽니다. 말 그대로 축구로 바라본 유럽과 남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책 참 재미있어요. :D

느린산책 2010-07-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잖아도 요즘 제가 축구 문화사에 꽂혀 살림에서 나온 책을 읽고 뭔가 아쉬워 하던 차였는데, 이 책이 해갈이 될 수도 있을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Tomek님~^^

Tomek 2010-07-13 17:21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마음에 드실 거예요. :)
 
'군대'마저도 긍정하는 주호민의 힘
짬 시즌 2 - 예비역들의 수다
주호민 글.그림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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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아니 군필자들에게 있어 군대란 기억은 거의 대부분이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난 분명 전역을 했는데 전상상의 실수로 다시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절망적인 통보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군대에 가니 그 지옥 같던 선임들이 날 기다리고 있더라는 꿈은, 정말이지 아마 대부분 꿔봤을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시대와 공간과 사람이 전부 다른 개별적인 경험이 어떻게 똑같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는지.  

원경험에서 2차로 각색된 군대 이야기는 대부분 비장하거나, 악몽이거나, 슬픈 이야기였다. 간혹 <동작그만>, <쫄병수첩> 등과 같이 코미디의 소재로도 쓰였지만, 그것은 고참의 시선으로 바라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대는, 고참일 때는 (그나마) 추억거리가 있다. 그러나 쫄병일 때는 온 세상이 지옥이다.  

주호민 작가는 그의 데뷔작인 『짬』에서 이전과는 다른 군대 이야기를 펼쳤다. 군대 이야기가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는 처음으로 군대를 추억했다. 군대라는 시스템을 추억한 게 아니라, 군대에서 겪은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짬』이 이룬 성취는 군대에서 겪은 시절을 공포, 폭력, 위선, 불합리한 명령 등으로 얼룩진 끔찍한 기억으로 다룬 게 아니라, 젊은 시절 겪었던, '새로 만난 사람들과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따듯하고 가슴 훈훈한 군대이야기라니! 일면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말을 주호민 작가는 정말이지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그가 『짬』에서 다룬 내용은 '좋은 기억들'을 (적당히) 윤색한 것이다. 물론 그라고 왜 군대생활이 훈훈하기만 했겠는가.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그는 『짬 시즌2』라는 제목으로 다시 군대 이야기를 그렸다. 이번엔 연대기적 회고록 형식이 아닌,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와 그의 친구들)의 기억을 채웠다.  

여전히 재미있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군대 내 폭력행위라던가 부당 행위, 사회에서 만난 친한 친구의 배신(?) 등의 어두운 이야기도 담겨 있다. 특별한 점이라면, 아무리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작가 본연의 필체인 따스함은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천성이 그렇지 않은가 감히 미루어 짐작해본다. 그만큼 그의 만화는 따스함이 있다. 이런 가교가 있었기에 88만원 세대의 비루한 일상을 따스하게 그릴 수 있었고(『무한동력』)을 완성하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성찰과 반성의 영역(『신과 함께』)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짬 시즌2』는 이전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쉬어가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주호민 작가는 언제나 ‘주호민스러운’ 재미있고 따스한 작품을 그리니까. 그가 바라보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여전히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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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 여자는 왜 살찔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착한 여자는 왜 살찔까? - 다이어트와 심리의 비밀에 관한 모든 것
캐런 R. 쾨닝 지음, 이유정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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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불치병 같은 비만이 있고, 그저 음식이 좋아서 비만인 경우도 있다. 병이든 음식 사랑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만을 의지의 문제로 본다. 참으로 이상한 게, 담배와 술에는 그렇게도 인자한 사람들이 어째서 비만이나 대머리에는 적대적(혹은 비하)인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현대사회에서 비만은 자기 관리의 실패, 의지 부족, (좀 넓은 의미로서의) 루저(loser)로 여겨진다. 이 말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리다. 분명 비만은 음식에 탐닉하는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걸린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다르게 할 수 있다. 왜 비만인 사람들은 음식에 탐닉할 수밖에 없는가?  

심리 치료사인 캐런 R. 쾨닝은 이 문제를 ‘착하다’는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비만인 여자들은 대부분 착한 여자들이다. 여기서 ‘착하다’는 뜻은 ‘선하다’라는 뜻이 아닌 ‘친절하다’ 혹은 ‘잘 대하다’라는 뜻에 가깝다. 캐런 R. 쾨닝이 그동안 치료한 ‘착한 살찐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 맞춰서 자신의 삶을 운용한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자신의 남편과 친구가 바람이 나서 밀월여행을 간 것을 안 순간에도 집에 찾아온 친구를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감정보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우선한다.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힘들고 바쁜 상황에서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은 음식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몸은 데친 브로콜리나 연두부를 원하는 대신 달디 단 초콜릿이나 티라미슈 케이크를 원한다. 당분 섭취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몸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가족들 사이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이들의 고민과 요구를 하루 종일 짊어 맨 착한 여자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오직 먹을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은 먹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먹는 것만큼(그것도 인스턴트)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책의 제목인 『착한 여자는 왜 살찔까?』는 친절하기 때문에 음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음식에 대한 의존은 그녀들의 순교자 같은 성격 때문인 것이다.  

어쩌면 비만에 대한 단순한 접근인 것 같기도 하지만, 비만에 대한 일반론적 접근이 아닌, 착한 성격과 여자라는 특별한 상황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편한 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비만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 인식과 그에 따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거의 매 장(章) 반복되는 이야기들이라, 읽는데 좀 지루함을 느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저자가 밝혔듯이, 살을 빼기 위해선 자신의 성격을 개조해야하는데, 그것은 하루아침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배우듯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시켜야 하기 때문에,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 것이라 생각한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참아야 하는 것처럼, 살을 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성격을 바꾸는 것 또한 평생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캐런 R. 쾨닝은 비만인 착한 여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는 남을 그만 신경 쓰고, 음식에 의존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 의존하며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다. 시지프스의 돌처럼 다른 사람들의 고민과 요구를 들어주고 인내하는 반복되는 삶에서 지쳤던 당신이라면, 굴러 떨어지는 돌을 무시하고 그녀의 손을 잡기를 권한다. 세상에는 음식 말고도 의지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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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8 15: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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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8 2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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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8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8 2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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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합본판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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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별 레미나』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토 준지는 장편이라는 호흡에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그가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토미에 시리즈와 소이치 시리즈, 사거리의 미소년 시리즈와 오시키리 시리즈 등이 바로 전형적인 이토 준지의 연작 장편들이다(『프랑켄슈타인』이라는 긴 호흡의 장편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창작이 아닌, 메리 셜리에 대한 오마주임으로 제외하기로 한다). 물론 작가 자신이 단편이나 연작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거대한 프레스코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 준지에게 장편이란 프레스코에 합당한 작품이 있을까? 있다. 『소용돌이』가 그렇다.  

『소용돌이』는 이토 준지의 다른 장편 연작들과 마찬가지의 형식이다. 동일한 등장인물이 매 에피소드별로 이상한 일을 겪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용돌이』는 다른 연작들과는 차별점이 있다. 다른 연작들이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매 회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면, 『소용돌이』는 매 회 같은 인물들이 소용돌이라는 같은 사건을 겪는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키리에와 (작가 자신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슈이치지만, 주인공은 이들이 아니라 '소용돌이'라는 현상과 그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마을 '쿠로우즈'다. 소용돌이가 중심을 향해 돌 듯, 이들을 비롯한 쿠로우즈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용돌이의 저주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이토 준지는 『소용돌이』에서 소용돌이라는 소재를 거의 끝까지 활용하는 동시에, 장편으로서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한 편, 한 편, 개별적인 에피소드로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각기 하나로 모이고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소용돌이가 되고 나서야 쿠로우즈 마을의 저주는 끝난다. 게다가 이토 준지가 『소용돌이』에서 그리는 인물들은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운 선으로 연결된 인물임인 동시에 끔찍한 형상들로 탈바꿈한다. 미(美)와 추(醜)를 하나의 흐름으로 잡아내는 이 지독한 악취미! 각 마을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끔찍한 비극은 이 긴 장편을 한달음에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이번에 시공사에서 합본판으로 다시 출간한 『소용돌이』는 지난 판본에서 (별것 아닌데) 삭제했던 장면이 다시 복원되어 있고, 출간되지 못했던 특별편 「은하」가 수록되어 있다. 이번 합본판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종이다. 지난 판본과는 다른 종이를 사용해서 그런지, 눈의 피로도는 많이 떨어졌지만, 책의 무게가 상당해져서, 보통 누워서 책을 읽는 내게는 굉장히 힘든 독서를 요했다. 물론 이런 면이 내 나쁜 독서 태도를 고치는데 일조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별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 시공사에서 출간한 세 편의 이토 준지 작품에는 어떤 하나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은하」→『블랙 패러독스』→『지옥별 레미나』 혹은 『블랙 패러독스』→「은하」→『지옥별 레미나』의 순으로 읽는다면, 이토 준지의 어떤 흐름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토 준지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다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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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7-0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이토 준지 작품은 토미에가 주로 생각나더구요^^

Tomek 2010-07-07 08:49   좋아요 0 | URL
계속 자가증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니 이토 상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토미에로 데뷰를 했으니 작가 스스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