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심리학 / 꿈꾸는 20대, 史記에 길을 묻다>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꿈꾸는 20대, 사기史記에 길을 묻다
사마천 지음, 이수광 엮음, 이도헌 그림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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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미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그가 삶의 치욕을 안고 평생에 걸려 기술한 『사기(史記)』는 이후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로, 예술의 원천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워낙에 방대한 분량이라 그런지 일반 독자들에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이수광 작가가 편저한 『꿈꾸는 20대, 사기(史記)에 길을 묻다』는 『사기(史記)』의 '베스트 모음집'이라 불릴만한 책이다. 그는 『사기(史記)』의 내용을 맛깔스럽게 윤색해서 고전에 거부감이 있는 이들이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냈다. 시원스러운 편집에 매 에피소드마다 포함되어 있는 이도현의 그림은 읽는 이의 흥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엄선한 내용 또한 (어떤 의미에서건) 흥미로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일단은 책의 독자층을 20대로 한정시킨 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기(史記)』의 내용들을 무리하게 교훈에 맞추어 편집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는 열린 텍스트이다. 사마천은 각각의 이야기에 교훈을 의도하지 않았고, 설령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2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 『사기(史記)』를 읽는 우리는 사마천의 의도와는 다른 의도로 책을 접할 것이다. 하지만 이수광 작가는 자신이 느낀 교훈을 독자들에게도 역설한다. 충분히 열려있는 흥미로운 텍스트의 가능성을 가두어 놓은 꼴이다. 교훈에 맞추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는 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차라리 교훈이 아닌 상황을 이야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조금 더 능동적인 독서. 하지만, 독서 자체가 능동적인 독서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안타깝더라도 이렇게 『사기(史記)』를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하지 않을까.  

조금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꿈꾸는 20대, 사기(史記)에 길을 묻다』는 『사기(史記)』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이다. 이 책을 읽고 『사기(史記)』에 관심이 생겼다면, 원전에 도전하는 것도 어떨는지. 물론 만만치 않은 구성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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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국영화 최고의 10경 - 영화평론가 김소영이 발견한
김소영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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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소영(이제는 감독이라고 불러야 마땅한)의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은 그가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과 『씨네 21』의 「전영객잔」꼭지에서 발표한 글을 모은 평론집이다. 그의 글은 같이 「전영객잔」을 이끌었던 정성일, 허문영 평론가의 글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었다. 정성일의 글이 엄격하고 냉엄한 영화 사랑에서 나오는 글이었다면(그래서 그가 지지 혹은 비판하는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엄청난 인용과 사유를 풀어내야 했다), 허문영의 글은 누가 읽더라도 (그가 평하는) 영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글이었다. 반면 김소영의 글은 이 둘의 필력에는 다소 못 미쳤다. 정성일처럼 엄청난 사유를 풀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허문영처럼 누구나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어중간한 글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그것은 그저 스타일의 차이일 뿐, 그가 다른 두 명의 평론가보다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쓴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을 읽어본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김소영의 글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는, 원어의 사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제일 처음에 실린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원어 그대로를 쓰는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런 현학적인 글들은 일반 독자들이 쉽게 떨어져나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요즈음의 독자들의 독서 태도에도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 <팜므 파탈>을 이야기하면서, "현대의 관객들은 괴롭힘을 당하기를 원하지, 유혹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독서 자체를 능동적이라 생각하지, 능동적인 독서를 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저자가 쓴 글은 항상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야지, 그 안에서 사유하고, 단어의 선택에 대해 고심하고 사전을 찾아보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소영의 글은 그런 능동적인 독서를 요한다. 하지만, 이런 독서를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물론 그의 글이 전부 다 이렇지는 않다. 「전영객잔」에 실린 글들은 비교적 최근의 영화들이고, 단어의 선택 또한 저널의 특성을 따라 쉽게 따라갈 수 있게 했다. 그가 이번 책에서 다룬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영화들이지만, 그녀의 경계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있다. 첫 장에 재중감독 장률의 영화를 다룬 것도 그렇고, 전후 60여년의 영화에서 보이는 어떤 공통점과 경향을 다룬 것도 그렇다. 그는 한국영화의 영역을 넓힌 동시에, 영화와 그것을 만드는 감독, 그리고 그것을 수놓는 배우를 통해 한국을 이야기한다. 그가 그동안 그렇게 이야기한 '트랜스(trans)'의 의미가 이 책에서 빛을 발한다고나 할까?  

그가 평한 영화들 중, 절반 정도는 봤지만, 절반 정도는 보지 못했고, 쉽게 볼 수도 없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한 영토 안에서 우리는 이 책을 지도삼아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원래 구불구불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것이다. 길을 떠나는 자만이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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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의 철학>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디오니소스의 철학
마시모 도나 지음, 김희정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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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도나의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야심이 가득한 책이다. 현대인들(그 중에서도 한국 남성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술을 소재로 철학사를 두루 살핀다. 술과 철학 둘 중 어느 하나에라도 관심이 있다면 선뜻 들게 될 책이지만, 책장을 펼치면 그 현란한 사상의 인용과 나열에 술에 취한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책이다(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술이란 독특한 음료이다. 제아무리 이성적인 삶을 단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술에 취하면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이성의 무장해제, 감정의 고양은 술자리를 즐겁게 하기도 하지만, 술자리를 망치기도 마련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특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면 한 술자리에서 이 두 가지 상황이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인들의 생각도 별로 다를 바 없어서, 술 취함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철인들도 있는 반면, 술 취함을 죄악으로 바라본 철인들도 있다. 마시모 도나는 고대 철학부터 현대 철학까지 술과 관련한 인용을 모조리 찾아내어, 철인의 사상과 삶과 술의 상관관계를 밝힌다.  

마시모 도나는 인용하는 철학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술을 한 잔 걸친 듯, 디오니소스의 후예답게 에둘러 설명하지 않고 바로 핵심으로 다가간다. 때문에 이 책은 어느 정도의 철학사를 이해하고 있어야만 '즐길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이 책으로 철학사를 살펴볼 요량이라면, 지긋이 반대한다. 식전의 술은 입맛을 돋우기도 하지만, 이 책은 취할 정도의 과음이다. 술을 정말로 사랑해서 다른 이면의 모습도 바라보길 원하는 사람이나, 혹은 술과 철학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책이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이지만, '술과 철학'의 궁합은 '커피와 담배'와 같은 조합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이미 빠진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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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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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강의 퐁네프 파사주. 이곳의 가게는 왁자지껄 분주하지만, 유독 잡화상 한 곳만은 그렇지 않다. 잡화상의 물건들은 "처량하게 매달려 있었"으며, "먼지와 습기로 썩어가고 있는 진열장 속에서 모두 빛깔 잃은 남루한 회색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두 여인이 있었다. 젊은 쪽의 이름은 '테레즈'고, 나이든 쪽은 '라캥 부인'으로 불렸다. 

   라캥 부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약해빠진 아들 '카미유' 때문이었다.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삶의 기쁨과 목적을 아들 카미유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미유는 어렸을 때부터 특유의 허약함과 나약함으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맞이했다. 라캥 부인의 "인내와 수고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카미유는 진즉에 죽을 목숨이었던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은 "한없는 간섭"으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그녀는 카미유를 정성껏 돌봐주는 간호사 역할을 테레즈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테레즈는 라캥 여사의 조카다. 군인인 아버지가 테레즈를 맡기고 전사한 후, 라캥 여사는 테레즈를 카미유와 같이 지내게 했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부터 "마치 허약한 애처럼 사촌오빠와 약을 나누어 먹고 어린 병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갇혀 지냈다." 그녀는 이런 부당함과 답답함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내면에서 타오르는 듯한 격정은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병자가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지닌, 가혹한 욕망을 지닌 젊은이였던 것이다. 라캥 부인의 욕심으로 자매지간 같이 지낸 테레즈와 카미유는 부부사이가 된다. 

   카미유는 작고 허약한 몸에 나약한 성격을 지녔다. 라캥 부인의 "한없는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런 어머니의 희생에 적당히 길들여져 있는 상태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부인인 테레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년같은 존재다. 소년과 젊은이의 결혼은 애당초 무리였다. 

   목요일 저녁마다 라캥 부인은 손님들을 초대해 도미노 게임을 한다. 멤버는 노망기가 든 노인 모습의 경찰 간부 출신 '미쇼', 광대뼈가 불거져 나와 볼썽사나운 경찰서 보안계 주임 경관 '올리비에'와 그의 부인 '쉬잔', 그리고 카미유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철도국 서기 '그리베'다. 테레즈는 이들을 볼 때마다 "기계적인 시체들", "종이로 만든 인형 같은 인간들"같다는 생각이 들어 몸서리친다. 그가 살아온 10여년의 시간이 이런 생기 없는 분위기였으니 그럴만하다. 테레즈는 목요일 밤이면 "그냥 노곤히 잠들고 싶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만 했다. "그녀는 한탄이나 비난은 물론이고 내색도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모든 의지는 자신을 극도의 친절과 극기의 수동적 도구로 만드는 데 집중되었다." 

   어느날 목요일 모임에 카미유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창 '로랑'을 데려온다. 그는 "훤칠한 키에 건장하고 얼굴빛이 싱싱"한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로랑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똑바른 시선을 받자 테레즈는 좀 어색했다. 가슴이 몹시 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죽어있고 바래있는 무덤 같은 공간에 로랑의 등장은 테레즈의 가슴을 뛰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 느끼는 이끌림에 당황했지만, 이내 "이 남자의 다혈질적인 천성과 큰 음성, 기름진 웃음, 그리고 몸에서 풍겨나오는 거칠고도 달콤한 냄새에 마음이 쏠려서 초조하고 괴로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로랑 역시 테레즈가 자신을 대하는 미묘한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성욕과 식욕이 왕성한 사내니까. 하지만 로랑은 신중한 사내다. 모든 욕망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지만, 그 전까지 그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로랑은 테레즈에 대한 욕망과 카미유와의 관계, 라캥 부인과의 관계를 저울질 한 후 테레즈를 '취하기로' 결정한다. 로랑은 테레즈를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를 욕망한다. 그는 그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다. 

   "처음부터 두 연인은 서로의 관계를 필연적이고 숙명적이며 아주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아 너무도 태연했고, 너무도 뻔뻔스러웠다." 로랑은 우악스러운 무모함과 대담함, 신중함을 지녔다. 테레즈와 불륜을 저지르기 직전까지 그는 관능적 호기심, 공포, 거북함, 의심으로 주저했었으나 그의 욕망이 이런 것들을 상쇄시켰다. 로랑과 달리 테레즈는 "정열이 이끄는 대로 주저하지 않고 몰두했다." 습기 찬 공간에서 시체와 다름없는 환자와 지낸 그녀는 처음으로 육체의 열락과 환희를 맛보았다. 산 채로 매장당해 끝난 인생인줄 알았던 그녀에게 로랑은 축복이다.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서 로랑과 정사를 벌인다. 그것이 자신의 청춘을 더럽게 만든 라캥 부인과 카미유에 대한 복수인양. 그녀는 로랑과의 불륜으로 성의 쾌락과 복수의 쾌락을 맛본다. 가혹한 희극, 인생의 기만, "흥분과 고요와 위안이 뒤섞인 이런 생활"이 8개월간 지속된다. 

   이런 그들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로랑의 지속적인 근무지 이탈로 그는 회사에 경고를 받게 된다. 애초 테레즈를 사랑하지 않고, 욕망의 대상으로만 봐왔던 로랑이었지만, 그 욕망의 정도는 그의 능력을 벗어났다. "그는 본능에 복종하고 몸의 요구대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테레즈 역시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로랑이야말로 이 무덤 같은 현실에서 잠시 숨 쉴 수 있는 도피처였던 셈이다. "이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의 죽음을 생각했다. 테레즈의 이런 생각은 로랑이 엉뚱한 생각에 미치게 했다. 테레즈의 육체와 라캥 부인의 유산,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유자적한 생활. "그의 모든 이해관계는 그를 범죄로 밀어붙였다." 

   어느 소풍날, 로랑은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테레즈는 남편의 죽음을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약한 카미유는 물에 빠지기 전에, 로랑의 목을 물어 뜯었다. 물에 빠진 카미유는 테레즈의 이름을 외치며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죽기 전까지 친구와 부인을 믿고 있었던 카미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원한으로 가득 찼을까, 아니면,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로랑과 테레즈는 드디어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 욕망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이 범죄는 그들을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들이 잊고 있던 게 있었다. 그들이 괴물의 탈을 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카미유의 죽음은 로랑과 테레즈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카미유를 살해함으로써, 서로를 꼭 껴안아도 채우지 못했던 극성스러운 육욕을 만족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살인 범죄는 그들의 포옹에 싫증과 구역질을 나게 하는 강력한 환락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카미유에 대한 죄의식이 유령이라는 실체로 나타나게 되었다. 공포는 모든 욕망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이들의 욕정은 살인으로 변했고 급기야 결혼으로 진행됐다. 

   목요일 모임 멤버들은 테레즈와 로랑을 결혼시키려고 라캥 부인을 설득했다. 그들이 테레즈와 로랑의 결혼에 그토록 매달린 것은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목요일의 모임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이 모임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라캥 부인 역시 나날이 말라가는 테레즈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은 며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에서였다. "테레즈를 잃고 파사주의 축축한 상점 구석에서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 늙은 부인은 자기를 아직 살아 있게 도와주는 그나마의 위안마저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며느리를 재혼시키고 싶었다." 

   결국 로랑과 테레즈는 결혼을 했지만, 그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란히 앉아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참으려 해도 무서운 생각이 스치며 그들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그들의 정욕은 시들고 모든 과거는 사라졌다. 난폭한 그들의 육욕은 없어지고 이제부터는 겁내지 않아도 좋으리라는 생각으로 기대하던 아침의 그 깊은 기쁨을 망각하기가지 이르렀다.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 끝장을 내려고 애썼던 미친 듯한 사랑의 발작 때문에 그들은 더 깊은 공포 속에 처박혔다." 

   아들을 잃었을 때 약간의 마비 증세를 겪었던 라캥 부인은 전신마비가 되었다. 거의 반쯤 살아있는 시체로 로랑과 테레즈는 두 구의 시체와 함께 사는 셈이 되었다. 죄의식과 자책감으로 반쯤 미친 그들은 라캥 부인 앞에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고 만다. 하지만 라캥 부인은 눈짓으로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분노와 고통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녀의 육체 속에서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요일 모임에서 그녀는 놀라운 의지력으로 손가락으로 글을 써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라캥 부인은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지낸다. 

   테레즈와 라캥"은 서로 죄가 없음을 주장하고, 악몽을 쫓아내고 스스로를 기만하려 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며, 과거를 지워버릴 수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테레즈와 로랑의 결혼 생활은 물리적인 싸움으로 번져갔다. "라캥 부인은 로랑이 테레즈를 발길질하면서 마룻바닥에 끌고 다닐 때면 불타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급기야 그들은 외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심한 염증을 느꼈으며, 방탕한 생활이 회한의 비극을 더욱 조장시킬 뿐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과 공포를 서로 느꼈으며, 이런 생각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계획을 알아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모습은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똑같은 죄의식에 시달린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다. 결국 이들은 동반 자살을 택한다. 이들의 죽음은, 인간의 밑바닥을 봤다는 탄식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그래도 이들이 인간이었다는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이들이 죽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목요일 도미노 모임은 물론이고, 심지어 라캥 여사조차도.

   
 

뒤틀려 엎어진 두 시체는 등피를 씌운 램프의 노란빛을 받으며 밤새도록 식당의 마루 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경까지 약 열두 시간 동안, 뻣뻣한 몸으로 말없이 앉아서 라캥 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두 발 밑의 두 시체에 무겁고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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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4-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메님 안녕~^^
그냥..토메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힛.
이거 말이죠. 이 리뷰 말이에요. 제목에 혹했어요. 오전에.
그래서 더욱 더 안 봤어요. 내가 좋아할만한 내용일게 뻔하거든요.
또 책을 지를게 뻔하거든요. 지금 읽어야 할 책이 박스채로 있는데도.늘 지름신이..-_-
그런데도 이렇게 읽고 앉아 있다니, 전 정말로 활자중독인가 봐요. ㅜ_ㅡ

Tomek 2010-04-27 07:33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L.SHIN님~ 바쁘실텐데 이렇게 와주시고... ㅠㅠ
전 요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망상과 때마침 찾아온 알라딘 비접속으로 머리가 텅 비어있는 상황이에요. 정신을 차리려면 여행이 필요할 듯...

그래도 이 책 재미있으니 꼭 읽으세요. 히힛. 정말 19세기에 나온 소설인지 깜짝 놀랐습니다. ^.^;

프레이야 2010-04-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박쥐를 보고 이 책을 읽었어요.
정말 재미나게요. 박감독은 단지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지만
인간의 성격이 아닌 기질에 대한 연구,라는 면이 꽤 매혹적이었어요.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Tomek 2010-04-27 07:36   좋아요 0 | URL
저도 <박쥐>를 보고 이 책을 읽었습니다. 뱀파이어 이야기와 『테레즈 라캥』이야기를 합친 게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려서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에밀 졸라가 <박쥐>를 봤다면 화냈을지도.. ㅎㅎㅎ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5-0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졸라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있는 편이 아닌데 읽으셨군요.이 양반의 소설에서는 성직자의 추한 모습이 꽤 나오는 편이죠? 그러고 보니 소설가들은 성직자와 기자를 좋게 묘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Tomek 2010-05-05 08:19   좋아요 0 | URL
이름만 들어오다가 <박쥐>를 보고 읽은 경우입니다. 다른 소설들은 읽지 못했어요.
고맙습니다.

저절로 2010-05-1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밤을 꼴딱 새며 읽었답니다.
저는 읽으면서 파트리크 쥐스킨스 '향수'가 줄곧 생각났어요!

Tomek 2010-05-14 14:35   좋아요 0 | URL
재미 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예요! ^.^;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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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권 작가의 『한(漢)나라 이야기』는 제목대로 중국 역사를 다룬 책이다. "왜 하필 지금 한나라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저자 서문에 친절히 밝혔으니, 여기에서는 책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책 제목은 『한나라 이야기』지만, 책은 진시황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왜 진시황부터인가?'에 대한 대답은 자세히 내놓고 있지 않지만, 봉건제처럼, 친인척에게 땅과 군사를 나누어 대륙을 통치하는 것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절대권력'으로 통일 중국을 통치한 것이 진시황이기 때문이 아닐까. 시황제의 군현제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은 군국제를, 당(唐)은 3성 6부제를, 송(宋)은 2성 6부제를 통치제도로 삼았으니, 한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자면, 당연 통일 진나라, 그리고 그 진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야 했을 것이다.

   『한나라 이야기』는 『십자군 이야기』와는 달리 시원시원한 구성으로 가독성을 높였다. 한 페이지에 3컷 이상을 나누지 않는 구성, 하단에 각 페이지에 대한 각주, 그리고 한 장(章)마다 자세한 내용 설명을 겯들여 꽤나 유용한 '학습' 만화를 선보였다. 게다가 그 독특한 화풍은 이 만화를 더 특별한 자리에 올려놓았다. 우리의 유전자에 저장된 그 흔한 동양인의 묘사가 아닌, 이국적인 모습의 등장인물들은 지금까지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아온 중국 역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게다가 시황제의 얼짱각도 포즈는 얼마나 아찔하며, 예의를 갖춘 진중한 성격과 그 안에 감추어둔 매의 눈빛을 표현한 그림은 '김태권'이라는 작가가 컨텐츠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작가가 아닌, 뛰어난 '만화가'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게 한다. 

   그러나, 김태권 작가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으니, 바로 고우영 작가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이다. 김태권 작가는 사마천의 『사기』를 순진하게 믿지 않고 끊임없이 회의하며 만화를 진행한다. 때문에 그당시 역사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여지는 제공하지만, 만화 자체로만 본다면 삐걱거리는 구성이다. 그에 반해 고우영 작가는 『사기』에 실린 내용을 의심없이 수용했다. 고우영 작가의 『십팔사략』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질주한다. 여불위의 드라마틱한 성공이야기, 진시황의 고뇌와 인륜을 저버린 피의 숙청, 이사와 조고의 음모 등 엄청난 힘으로 읽는이를 압도한다. 만화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나라 이야기』의 패배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재미를 쫓는 독서가 아닌, 만화라는 접하기 쉬운 매체로 한나라와 동아시아를 돌아보는 깊은 독서를 원한다면, 『한나라 이야기』를 추천한다.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 또한 반영한 우리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이번에는 전 10권이 모두 완간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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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4-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10권 모두 완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우영 작가의 책은 보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한 번 읽어볼까 합니다. 김태권씨는 확실히 자기 색깔이 있는 것 같아, 늘 기대가 됩니다. 그나저나 십자군 이야기는 포기한걸까요?^^

Tomek 2010-04-17 08:10   좋아요 0 | URL
『십팔사략』은 정말 끝내주죠. @.@ 특히 달기와 여태후 이야기는 아직도 오금이 덜덜덜.... 에구구... 『한나라 이야기』리뷰하면서 『십팔사략』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신간평가관리자님께 혼날 듯. >,.<

외국소설/예술MD 2010-04-1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우영 십팔사략은 서사의 진행이라는 측면에서는 전무후무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옵니다. 한나라 이야기와는 지향점이 다른 것 같아요. 둘 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 리플을 단 것은.. 십자군 이야기 때문인데요. 기존 출간된 십자군의 개정판과 추후 시리즈가 연내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태권 작가 블로그에서 확인한 내용입니다.

Tomek 2010-04-17 08:11   좋아요 0 | URL
『한나라 이야기』얘기는 정작 많이 하지않고, 다른 부수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요. 반성 중... >,.<

그나저나 『십자군 이야기』가 나온다니 반가운 소식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