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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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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와 철학(哲學). 하나만으로도 벅찬 대상이 둘이나 모였다. 문학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언어의 정수라고도 표현되는 시와,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읽는이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철학. 이 둘이 만난 책이라니. '도대체 저자는 무얼 얘기하려는 것일까.' '잘난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어렵고 힘든 춘추전국 시기에, 저자의 자뻑을 읽어야 하는가.' 책을 펼치기 전, 심난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불안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나서, 글을 읽기 시작하자, 그런 불안한 마음은 이내 봄눈 녹듯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 책은 두 무시무시한 사유의 결정체인 시와 철학을 한데 묶어 감상한다. 서양의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시를 분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 반대로도 볼 수 있다. 난해한 주제이고 시도이긴 하지만, 어렵지 않다. 저자는 시와 철학을 마치 '장르 영화'를 다루듯이 다양한 해석과 분석을 통해 시와 철학이 우리 실생활에 얼마나 많이 밀접해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두 주제는 철학도나 문학도라면 관심을 갖고 덤벼들만한 매력적인 주제여서, 자칫하면 '자뻑'으로 흐를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지만, 저자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적정선에서 시와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즉, 본격적인 연구서라기 보다는 입문서에 가깝다. 빼놓고 이야기했는데,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동녘 출판사에서 발행됐다. 동녘이라면, 바로 그 『철학 에세이』의 동녘아닌가! 그러니까 이 책은 '현실에서의 철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동녘의 그 꾸준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물론 철학을 순수하게 학문으로 다루지 않고, 시를 해석하는 도구로써 사용된 것에 대해 분개하는 원리주의자 철학도들도 있겠지만, 그대들은 그대들의 머릿속 우주에서 무한사유 하시고 이 비천한 땅에는 감히 오시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은 고상한 그대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철학과 시 따위는 고상한 사람들의 것이지 우리에겐 TV나 어울려"하는 현실에 지친 고단한 우리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저자는 21개의 시와 21명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야기하며, 이 모든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우리가 사는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시는 우리의 현실을 시인만의 독창적인 언어로 노래한 것이고, 철학은 우리의 현실을 여러 철학자들의 개념을 빌려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로 풀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와 철학은 우리의 삶에 밀접한 것이다. 

   강신주 씨가 언급한 21명의 철학자 - 네그리, 비트겐슈타인, 아렌트, 알튀세르, 바타이유, 벤야민, 레비나스, 니체, 푸코, 가라타니 고진, 하이데거, 들뢰즈, 사르트르, 아도르노, 데리다, 아감벤, 퐁티, 리오타르, 바디우, 호네트, 박동환 - 의 사상과 21명의 시인 - 박노해, 기형도, 김남주, 강은교, 박정대, 유하, 원재훈, 황동규, 김수영, 도종환, 김춘수, 최두석, 최영미, 최명란, 오규원, 한하운, 정현종, 이상, 황지우, 박찬일, 김준태 - 의 시는 무작정 읽으면 그 언어의 사유세계에 헤어나오지 못해 절망에 빠져들기 쉽지만, 적절한 인용과 친절한 소개로 읽는이가 '이거 한 번 읽어볼만 하겠는걸?'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진중한 무거움(혹은 어려움과 난해함)은 없지만, 쉽게 읽히고, 더 나아가 시인의 다른 시와 철학자의 다른 사상까지도 관심갖게 만드는 책이다. 시와 철학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진정한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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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10-03-0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강신주님에 대한 신뢰가 강한 편입니다. 리뷰를 읽어보니, 더욱 읽어봐야겠다 싶어지네요!

Tomek 2010-03-03 09:14   좋아요 0 | URL
저는 이번 기회에 알게 됐습니다. 다른 저서도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어려운 주제를 굉장히 찰지게 쓰셔서 그 내공이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

파고세운닥나무 2010-03-29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철학자가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게 저는 아쉬웠습니다. 현대로 범위를 좁혀놓았대도 윤노빈이나 김영민, 김상봉 같은 이들을 넣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Tomek 2010-03-29 16:02   좋아요 0 | URL
그만큼 한국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나, 혹은 의제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저는 철학에는 문외한이라 이정도 언급만이라도 정말 좋았어요. 언급하신 철학자들의 저서를 찾아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

파고세운닥나무 2010-03-29 16:21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이 책 소개할 때도 댓글을 달아봤는데, 박동환은 저자의 대학 스승이기도 하죠. 책에서 간간이 언급하는 김상환도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인데 그 대학 철학도들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지 않나 생각이 들었어요. 김상봉도 그 테두리안에 들겠지만요.
윤노빈이야 기구한 인생 때문에 단 한 권의 책 밖에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지만 그 책을 보고 저는 경이감을 가졌습니다. 그의 제자 김영민은 자신만의 견고한 철학을 만들어가고 있구요.
중언부언했습니다.

Tomek 2010-03-29 18:3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몰랐던 사실이였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명의2>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명의 2 : 심장에 남는 사람 명의 2
EBS 명의 제작팀 엮음 / 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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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장사꾼은 많지만 의사는 없다는 이 세상에서, 이 책에 나와있는 17명의 의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일까? 혹시 이 책도 TV 3사의 맛집 소개프로그램처럼, 촌지와 과대포장으로 얼룩진 그런 내용이 아닐까? 책을 읽기 전, 온갖 잡다한 생각이 다 들었으나, 책을 읽고난 후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지독한 열정과 고집, 그리고 성실성. 명의(名醫)를 정의하는 말은 많이 있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는 명의는 바로 저런 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의사들이다. 

   이 책에서 '명의'라 여기는 의사들은 다음과 같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의사 역시 '기능공'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기능공들은 나무나 돌 등 무생물을 깎아내지만, 의사들은 사람의 몸을 다룬다. 의학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을 뜻한다. 의사들 역시, 매일 새롭게 발전하는 기술을 따라가기 위해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외과의사들은 기질상 승부욕 같은 게 큰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거라면 더 하고 싶고, 어려운 병일수록 공부하고 연구해서 수술하고 싶은 욕심이 있죠. 물론 어려운 수술을 해내고 환자가 드라마틱하게 살아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성취감을 주는 일도 없죠. 

- 서울대병원 간담췌외과 전문의 김선회 교수            

 

   지금까지는 아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위험부담은 따르지만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수술해서 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당연히 도전해봐야지요. 산과를 전공하는 교수로서 꼭 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의식이 있었지요.  

- 강남성심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이근영 교수          

 

   그리고 그런 노력이 환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면, 힘들더라도 의사가 해야할 의무라 생각한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아무래도 가야 할 길인 것 같았어요. 복강경 수술을 하게 되면 환자들에게 많은 장점이 있잖아요. 우선 아주 조금만 절개하니까 흉터도 거의 안 남고, 많이 아프지 않으니까 회복도 훨씬 빨라져요. 결국 입원기간도 단축되면서 환자들의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가 굉장히 빠르거든요. 개복수술보다 수술비가 비싸지만 입원기간이 짧으니까 충분히 상쇄가 되는 부분이 있으니 환자한테는 더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문제는 의사들이 새로운 의술을 배우기가 어렵고 시간이 거린다는 것뿐이죠. 하지만 만약 그런 이유라면 그 길은 가는 게 맞는 거죠. 

-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남주현 교수            

 

   자신의 길이 사명이라 생각하고 신념이라 여기며, 그에 관한 일이라면 그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영훈 교수는 언제, 어디서든 '응급처치'의 중요성을 알리는 자리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응급처치든, 진료든 환자의 심장을 살리는 일이라면 모두 '심장내과의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의 의사가 진료실에서 환자의 심장을 살리는 일 못질않게 절실한 것은 누구나 응급처치로 다른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이라는 신념 때문에 그토록 '심폐소생 교육'에 열정을 다하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환자의 그 아픈 고통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고 이겨낸다. 

   엄마가 된 다는 것.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어요. 우울증 때문에 못 버티겠다고 울면 모성애가 없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는 분들이지요. 하지만 호흡기를 낀 아기를 보면 저도 힘들고 엄마도 힘들어요.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면 전 야단도 치고, 원망도 듣고 욕도 먹으며, 또 같이 울어줄 겁니다. 

- 강남성심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이근영 교수           

 

   천상천하 유아독존, 독불장군이 아닌, 각 파트의 소소한 부분까지 챙기는, 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생각하며, 각 스태프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감싸안는 위대한 지휘자이기도 하다.  

   중환자치료가 힘든 게 어떤 한 부분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 되는 게 아니라 많은 부분 오케스트라랑 비슷한 면이 있어요. 저나 장윤실 교수가 중심이기보다는 지휘자의 역할 같은 거죠. 각 파트의 연주가 잘 될 수 있는 게 지휘자의 역할이듯이 저의 역할도 스태프 선생님들이 가장 편안하고 능력 발휘 잘해서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거니까요. 

-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박원순 교수          

 

   숱한 시행착오로 힘들게 개발한 치료법이나 의료 기술들을 조건없이 가르치며, 더 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훌륭한 의사들로 키워내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한다.

   제가 먼저 길을 가봤고 또 답을 줄 수도 있지만 아무리 높은 산도 헬기타고 올라가면 모르지 않습니까? 과정을 알 수도 없고. 저희 치료라는 게 대개 응급으로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판단과 직관력을 기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각 장기의 기능이 모두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처치나 수술결정을 신속하게 내려야 하는데 이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 진료는 직관력을 기르기 위해 일죵의 'Q'를 준다고 할까요? 다가서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아기인데, 그런 애들의 침습적인 치료를 한다는 게 굉장히 두려운 일인데, 그런 거를 두려움 없이 할 정도의 숙련도를 익히기 위해 어떻게 보면 좀 순도 높은 담금질이라고 할까요? 

-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박원순 교수          

 

   이것이 이 책에서 밝히는 명의의 조건들이다. 가족의 관계를 거의 끊어버리듯 하고, 오로지 환자와 병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무정'한 의사들. 1%의 확율을 높이기 위해서 오늘도 고군분투하며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한계를 돌파하는 아폴론의 후예들. 이들이 있어서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 아닐까. 물론 가족을 제쳐두고 의술의 소명과 사명에 빠져든 명의의 가족들에겐 정말로 미안한 일이지만.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이 책에는 17명의 명의들과 그의 가족들, 환자들이 벌이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방송을 위해 선별해서 실었겠지만, 그 어떤 소설이나 시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현실은 그 어떤 (가공된) 예술보다 절절한 법이니까.  

 

   전 34란 숫자가 제일 좋습니다. 꿈의 숫자기도 하구요. 10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도 태아가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이 바로 34주입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수술을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일주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엄마의 뱃속 안에서 보내는 태아에게 일주일은 엄청나게 중요해요. 엄마가 일주일을 더 버티느냐 마느냐에 따라 태아의 생존은 물론이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아기의 평생이 결정됩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최후의 마지노선이 34주인 셈이지요. 그러니 아무리 어려워도 일주일만 더 버티자! 그게 제 모토입니다. 

- 강남성심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이근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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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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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이란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회한의 시절이기도 할테고, 다른 누군가에겐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미성숙의 혼란한 시절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젊음이란 설익은 지식과 일천한 경험으로 사회를, 세상을 온몸으로 부딪혀 나가는 시기일 것이다. 그렇게 쉴새없이 부딪혀 나가며, 깨어지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세상에 맞추어 살아나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젊음'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만다.  

   돌이켜보면 '젊음'은 완전한 인간으로는 미성숙한 시기이지만, 그때의 열정과 치열함, 그리고 무모함은 이제는 더이상 젊지 않은 기성세대들에겐 다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이상향'의 그리움이 묻어있는 단어다. 이문열 작가의 『젊은날의 초상』은 이런 '젊은날'을 자신의 작법으로 그리고 있다. 

   책은 총 3편의 중,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개별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장편의 한 부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각각 따로 발표되었었는데, 「그 해 겨울」→「하구(河口)」→ 「우리 기쁜 젊은날」순이다. 아마도 작가는 각각의 개별적인 사안을 중시하는 단편의 모음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소설로 이 작품들이 기억되기를 바라서 장편으로 구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부 「하구(河口)」에서 '나'는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다. 2년여간의 방황생활에서, 이렇게 인생을 마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뿐인 혈육인 형에게 연락을 한다. '나'가 머무는 강진(江盡)은 글자 그대로 낙동강물과 남해안 바닷물이 만나는 이도 저도 아닌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만난다. 그들은 더이상 강에서 버틸수도, 바다로 나아갈 수도 없는 인생들이다. '나'는 이곳 사람들을 관찰하며,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회. 이번에 떨어지면, '나'는 군대에 가야하고, 아마도 '나'의 인생은 이곳 강진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머물러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대학이야말로,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자신의 처지를 격상시켜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나'는 그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나'는 미련없이 서울로 떠난다.

   2부  「우리 기쁜 젊은날」에서 '나'는 (그렇게도 꿈에 그렸던) 대학생이다. 그러나 대학생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숨막힐듯한 학교 수업과, 끊임없는 가정교사 생활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생활속에서 동기인 김형(金兄)과 하가(河哥)를 만나 친한 친구사이가 된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다니며 말술을 마시고, 문학 서클에 가입하고 치열한 토론을 해나간다. 하지만 60년대 말의 시대상황은 그들을 낭만적으로 머물게 하지 못했다.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모든 것이 정치적인 분위기로 물들었으며, 그런 '나'는 대학 생활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서로 상충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괴로워한다. 힘든 시기에 '나'는 우연히 혜연이란 여학우를 만나는데,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나'의 가부장적인 태도(지나친 간섭과 여자에 대한 우월감)로 결국 헤어지고 만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김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는 학교를 떠난다.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을 그리고 있지만 제목은 역설적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혼란스러움 불안함을 '어설픈 지식'으로 채우고 허기를 달랬던 그 시절. 사랑의 달콤함도 겪지만, 서로 길들이기를 원해 결국 이별을 고하는 젊은 날의 사랑. 끔찍한 시절이지만, 돌이켜보면 상처는 흔적만 남고 그 흔적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젊은 날. 작가는 이 시기를 회한에 찬 시선으로 그렸다. 술자리에서 프랑스와 비용의 유언시를 읊으며 '비용제'를 치르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대학은,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기는 했으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의문점은 해결하지 못했다. 대학은 도구로써 기능할 뿐, 목적이자 목표는 되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구도자같은 생활을 시작한다. 

   3부 「그 해 겨울」은 '나'의 구도자 생활을 그린다. '나'는 시골 객주집에서 방우(머슴)생활을 한다. 객주집에서 '나'는 술집 아가씨들의 생활을 보다 바다로 가기로 결심한다. 바다로 가는 도중, 수상해보이는 칼갈이 사내를 만나지만 그냥 지나친다. 우연히 먼 친척뻘되는 정님 누님을 만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후 길을 가다 죽을고비를 넘기고 '나'는 유언장을 쓴다. 바다로 가는 길은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는 것으로 바뀐다. 바다로 가는 길, 우연히 전에 마주쳤던 칼갈이 사내를 만난다. 칼갈이 사내는 누군가를 죽이러 간다고 했다. 바다에 도착하자 이 모든 방황의 근원이 내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나'는 이제 이 모든 방황을 끝내고 다시 돌아가자는 다짐을 한다. 내 옆에는 칼갈이 사내가 있었고, 사내 또한 복수를 포기하고 칼을 바다로 던진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늦겨울의 날씨는 풀리고 있었고, 곧 봄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3부에서는 '절망의 끝'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허무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해 점점 가학적이 되어가는 자신. 육체의 고통으로 자신 내부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얼핏 보면 구도자적인 숭고함을 떠올리지만, 한편으로는 '젊은날의 치기'로 보여진다. 하지만,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라고 얘기한, 정님의 말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이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해 겨울, 그 바다에서 '절망의 끝'을 봤다. 부정과 부정으로 끝까지 밀고 들어간 그 사유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그 해 겨울, 그 바닷가에서, '나'는 방황을 멈춘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만, '내'가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지, 다른 길을 걸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걸을 길은 더 이상 춥지 않은 따스한 봄날일 것이고, 다시는 '젊음'의 방황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젊은 날은 늦겨울의 추위와 함께 물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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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젊은날의 초상』멜로로 풀어낸 젊은 날의 방황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3-03 14:34 
      0. 들어가며     곽지균 감독의 <젊은날의 초상>을 2010년에 본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개봉한 1991년에 보는 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이문열 작가의 원작소설은 1981년에 출간됐지만, 이야기의 시대는 (정확히 지칭하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해보면) 1960년대 말이다. 동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버린 시절을 회한에 차 이야기한다. 그에 반해 영화는 80년대를 이야기한다.
 
 
Forgettable. 2010-03-0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문열의 책 한권 읽어볼까 생각중이었는데 리뷰 보니까 이 책 제가 좋아할 것 같네요.
이문열의 작품은 [황제를 위하여]하나밖에 안읽었는데 꼰대같은(?) 캐릭터가 짜증나고 막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었어요.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책 한권 보고 작가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한 것 같아서 다시 읽어보려고 해요. ㅎㅎ


Tomek 2010-03-02 14:14   좋아요 0 | URL
저 좀 전에 Forgettable님 블로그에 글 남기고 왔는데.... ^.^;

근데 이 책도 좀 그렇습니다. '올드'해 보인다고나 할까. 이 책 읽으면서 즉각적으로 떠오른 책이 홍세화 氏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였거든요. 그 6~70년대의 감수성이 그대로 정체해있다 90년대에 나온 듯한 느낌. 『젊은 날의 초상』을 읽으면서도 그런 그 감수성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읽을만 한 것 같아요. 소설인지 인문서적인지 당췌 분간이 안가는 초창기 시절의 작품.

고맙습니다. ^.^;
 
<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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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스스로 진보적(progressive)이라 일컫는 손호철 교수가 한국일보, 프레시안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기간을 조금 벗어나는 글도 있지만, 대부분이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부터 지금 한창 이슈화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까지 MB정부 2년여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쓴 정치평론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위해 쓴 글이 아닌, 한 진보주의자의 관점으로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고 비판한 글이기에, 한나라당, 민주당은 물론이고, 여타 군소 정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역시, 감상과 애도를 배제하고 날카롭게 바라본다. 

   각각의 글들은 신랄하고 날카로우며, 때로는 모골이 송연해질정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비판하지만, 이 각각의 글들을 한데 모아 생각해보니, 어쩐지 저자의 깊은 한숨과 탄식이 들리는 것 같다. 저자가 본문에서도 여러번 언급한 '해가 져야 비상을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언제나 미리 예측하지 못하고, 사후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평가만하는 지식인의 무력함이 글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한 진보주의자의 초상'이라 불려도 좋을만큼, 이 책은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충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MB(정부)를 악으로 놓고, 민주당과 그 외 군소정당을 선으로 놓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를 정당으로 바라보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 

   예를들어, 정권만 바뀌면 개편되는 정부기구와 교과서 문제를 거론하며, 한 나라의 근간이 되는 국가기구와 역사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근간을 마련하자고 제의한다. 김용갑 의원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이념이 아니라, 그 이념을 담을 그릇, 즉, 격(格)을 이야기한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이야기한 것도, 부시 정권 8년에서 잊혀졌던, 미국의 격(decent)이 아니었던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실정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정권이 바뀔려면 3년 혹은 8년이 걸릴수도 있다. 단순히 '정권교체'만을 외치는 것으론 정권교체는 불가능하며, 또한 설령 된다 하더라도, 언발에 오줌누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차라리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구조적인 틀을 세워가며 확실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손호철 교수의 글을 읽고 든 내 짧은 생각이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 책에서도 자주 언급하는, 아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위기'를 설명할 때 쓴 말이다. 맞다. 지금은 위기다. 새로운 것이 태어날지, 아니면 다른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을 대체할지, 그것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결정을, 선택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 덧붙임:

319쪽 밑에서 7번 째, 6번 째 줄에 있는 2006년은 1996년의 오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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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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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서적은 어떤 면에서 보면, 오타쿠들의 세계와 비슷하다. 한 권의 책, 아니 한 편의 글을 읽기 위해 주렁주렁 달려있는 주석을 찾아보며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인내심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밀리터리 오타쿠와 일본 대중문화 오타쿠, 그 둘을 충족시켜야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는' 굽본좌의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이진경 씨(이진경은 필명이고 박태호가 본명이다. 직함을 붙이려면 본명에 붙여야하기에 감히 '씨'를 붙였다)와 굽본자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이 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긴. 그의 저서가 어디 쉬운 게 있었던가. 그나마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진경의 필로시네마』조차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면 거의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책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이 어렵더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각각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취합되어 역사(history)가 되는지, 수 많은 역사들 속에서 어떻게 통합적인 역사(History)가 만들어지는지, 저자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설명한다. 지금은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이라 생각하는 '맑스주의'를 통해 역사와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롭고, 주류의 역사가 아닌, 소수자, 타자의 시선으로 전복된 역사의 실례와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라는 큰 틀을 이용해 진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을사조약으로 강제적으로 맞이한 근대와 '근대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2000년대를 반추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역사를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실들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난삽하지는 않다. 각 편의 글은 설정해놓은 주제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주석들은 그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

   책을 읽으면, 2008년에 있었던 '근현대사 교과서 사건'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왜 그들이 역사를 그렇게 그들 방향으로 돌려놓고 싶어하는지. 잉여생산물이 도래하고 난 이래로 부르주아지들의 기득권은 바로 그 '잉여생산물'이었으나, 어느순간부터 '시간'을 통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계급들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생산물의 양은 물론이고, 그들의 삶조차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런 주류계급들은 그들 중심의 언어와 그들 중심의 역사로 재편하기를 원한다. 통제된 시간과 재편된 역사속에서 (표준어라 불리는) 통일된 언어를 배움으로해서 모두들 그 주류에 포함되어 있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 

   세상과 역사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있으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인문학 서적은 『공산당 선언』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 것 같다. 행동강령이 쓰여있지 않지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을 개념화하지만, 도구화하지는 않는다. 읽고 직접 느끼고 행동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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