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7인의 사무라이 - The Seven Samur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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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는 정말 굉장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구로사와 감독의 대표작이자, 일본을 (아직까지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작가 이오우에 히사시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연극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소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듯이, <7인의 사무라이>를 본다면 영화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상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3시간 20여분에 가까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영화는 사건이 사건을 만들어가며 끊임없이 긴장감과 재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국시대. 산적들이 보리가 익을 때를 기다려 한 마을을 습격하려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주민들은 공포에 떱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임을 안 농부들은 차라리 맞서 싸우자는 결심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감히) 사무라이를 고용하러 길을 떠납니다. 농부들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던지, 노련한 사무라이 감베이(시무라 다카시)를 중심으로 고로베(이니바 요시오), 규조(미야구치 세이지), 헤이하치(치아키 미노루), 시치로지(가토 다이스케), 가츠시로(기무라 이사오) 6명의 사무라이와, 사무라이라고 하기엔 좀 가벼워 보이는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합류해, 총 7명의 사무라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사무라이들은 농부들과 함께 산적들과의 처절한 전투를 벌입니다.  

사무라이는 명예를 중시하는 계급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들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런 사무라이들이 비천한 농민들의 목숨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이들 사무라이들의 명예를 깎아내리기는커녕, 더욱 드높였습니다. 높은 계급을 위해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나, 농민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나, 이들 사무라이들의 결단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농부들의 억센 생명력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그리 순진하지만은 않습니다. 영악하고 잔인한 습성이 이들에게는 있습니다. 강한 자에겐 한없이 약하지만, 강자들이 한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가차 없이 등 뒤를 내려치는 족속들이 바로 농부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순박한 농부들을 영악하게 만든 것이 바로 사무라이들을 비롯한 지배계층 때문이었죠. 전쟁이 아니었다면, 전쟁에 진 병사들이 도적이 되어 마을을 습격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농부들도 그저 순박한 모습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는 명쾌하지만, 그가 그린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복잡합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토록 한없이 약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은 구로사와 감독의 이상을 투영하는 것 같습니다. 각기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협심하여 커다란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한없이 나약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고루한 유교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한다면 굳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이 걸작을 만들어낸 1950년대와 60년대는 분명 인성이 사라진 ‘미친 세상’이었고, 그가 바라는 인간들의 따스함을 찾기 위해선 인간 스스로 깨우치는 힘도 필요하지만, 그만큼 사회의 안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 시대엔 필요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굳이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7인의 사무라이>는 활동사진의 쾌감이 스크린 곳곳에 투영된 작품입니다. 특히 마지막 빗속의 결투는 글로 설명하려면 할수록 언어의 빈곤함을 느낄 뿐입니다. 이 영화는 (가능하면 스크린으로) 직접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작품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는 작품 자체가 하나의 클리쉐가 된 영화입니다. 이후 일본의 시대극은 항상 정의로운 사무라이와 나약하고 영악한 농부들, 그리고 평원에서의 대전투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스타일로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아무도 바꿀 수 없는 성역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뛰어난 영화가 일본영화를 본의 아니게 50여 년간 붙잡아 둔 것입니다. 이후 1997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에 이르러서야, 이런 전통적인 방식이 깨지기 시작했고,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모두 하고 있습니까?>와 <자토이치>에 이르러서는 패러디와 유희의 대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영향력은 무거웠고, 그 무게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4명의 사무라이가 죽고, 그보다 더 많은 농민이 죽어서야 마을엔 평화가 찾아옵니다. 살아남은 헤이하치가 감베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린 이번에도 승리했군요." 감베이가 이야기합니다. "아니, 농민들의 승리야!" 구로사와 감독은 전쟁의 승리를 사무라이가 아닌 농민들에게 돌렸습니다. 마을엔 평화가 찾아왔고, 그들은 열심히 하루를 살아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사무라이들은 인간의 삶을 위한 일이라면, 다시 그들의 목숨을 걸 것입니다. 그것이 구로사와 감독이 그린 사무라이들의 명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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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AT9] Cine Live - 제프 벡 로니 스콧 라이브 (7.22~8.4)
제프 벡 로니 스콧 라이브 - Jeff Beck at Ronnie Scott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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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와츠 감독이 기록한 <제프 벡 로니스콧 라이브 씨네 사운드 버전(Jeff Beck Performing This Week... Live at Ronnie Scott’s)>은 영국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로니 스콧에서 2007년 1회 공연한 공연 실황입니다. 이 영상물은 이미 영국에 60분으로 편집해 방영되었으며, 미국에서는 DVD로 판매되어, 음악 장르사상 가장 많이 팔린 DVD로 기록에 남았습니다. AT9에서 작년 <퀸 락 몬트리올 씨네 사운드 버전>에 이은 두 번째 영화 콘서트로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신기에 가까운 제프 벡의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제프 벡은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함께 흔히 회자되는 3대 기타리스트이지만, 저와 같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렇게 친숙한 이름은 아닙니다. 아니, 이름은 들어봤을지 몰라도 그의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이, 그의 연주가 다른 기타리스트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교와 힘으로 포장한 다른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와 달리, 그의 연주는 감성을 자극합니다. 이번에 상영하는 <제프 벡 로니스콧 라이브 씨네 사운드 버전>에서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로니 스콧이라는 장소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성향이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주 중간마다 각 연주자들하고의 잼은 가끔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찔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서로 주고받는 즉흥적 연주는 듣는 이들은 물론이고, 연주자들 서로가 희롱 혹은 유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이에 끼지 못해 질투를 느끼는 순간이었지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면의 컷이 너무 빨리 전환된다는 점입니다. 진행이 빠른 곡은 이해하지만, 느린 곡임에도 불구하고 컷이 너무 빨리 전환되어 그만큼 연주자의 연주에 빠져들지는 못합니다. 청자 스스로 컷을 만들고 편집하는 실제 공연과 달리, 기록물의 특성은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골라 보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 마련이지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다가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제프 벡 로니스콧 라이브 씨네 사운드 버전>은 음악 다큐멘터리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시네 콘서트'라는 조금은 어정쩡한 영화로 소개되었습니다. 공연이라 평하기엔 상대적으로 콘서트에 비해 생동감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새로운 형태의 영화는 아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극장을 활용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SET LISTING
1) Beck's Bolero
2) Eternity's Breath
3) Stratus
4) Cause We've Ended As Lovers
5) Behind The Veil
6) You Never Know
7) Nadia
8) Blast From The East
9) Led Boots
10) Angel (Footsteps)
11) People Get Ready - with JOSS STONE
12) Scatterbrain
13) Goodbye Pork Pie Hat / Brush With The Blues
14) Space Boogie
15) Blanket - with IMOGEN HEAP
16) Big Block
17) A Day In The Life
18) Little Brown Bird - with ERIC CLAPTON
19) You Need Love - with ERIC CLAPTON
20) Rollin' And Tumblin' - with IMOGEN HEAP
21) Where We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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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8-0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엔 동영상을 달 수 없어서 이렇게 댓글에 답니다.


마늘빵 2010-08-03 16:23   좋아요 0 | URL
와우 제프벡!

Tomek 2010-08-04 07:22   좋아요 0 | URL
멋진 연주입니다. :)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천국과 지옥 - Heaven And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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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은 유괴극입니다. 나쇼날 슈즈(구두회사)의 중역 곤도(미후네 도시로)는 그의 지독스런 제작 방식 때문에 회사의 다른 중역들과 마찰을 빚습니다. 그들은 주총에서 지분을 확보해 곤도를 몰아내려합니다. 하지만, 곤도는 꿍꿍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돈과 수단과 인맥을 동원해 나쇼날 슈즈의 주식을 매입합니다. 이제 돈 오천만 엔을 건네기만 하면, 곤도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할 수 있는 회사의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승리를 누릴 바로 그 순간에 곤도의 아들을 납치했다는 유괴범의 전화가 옵니다. 아들을 찾고 싶으면 삼천만 엔을 당장 준비하라는 전화지요. 당황한 곤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들을 구하겠다고 말하며 은행에서 돈을 바꿀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무 일 없이 돌아옵니다. 알고 보니 유괴된 것은, 곤도의 아들이 아니라, 운전기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유괴범은 그 사실을 알고도 삼천만 엔을 지불하라고 요구합니다. 곤도는 이제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신의 아들과 상관없는 운전수의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에서 모든 것을 건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유괴범의 협박 전화는 계속 울리고, 곤도는 고민에 빠집니다. 곤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유괴범에게 돈을 주기로 결심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딜레마에 관한 내용이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곤도의 딜레마는 그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옆집에 사는 아이를 납치했으니 죽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당신 전 재산을 보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 누구라도 곤도가 처한 상황에서는 어서 빨리 돈을 지불하라고 소리칠 것이지만, 내가 곤도라면, 그런 행동을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평범한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언급한 줄거리는 딱 이 이야기의 절반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는 후반부에 담겨 있습니다.  

유괴범에게 돈을 전달하고(후에 일본에서도 모방 범죄가 일어났을 정도로 정말 기막힌 방법입니다)난 후, 영화는 유괴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카메라(로 대변되는 형사들)는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닙니다. 곤도가 사는 곳은 산위의 펜트하우스입니다. 유괴범이 사는 곳은 산 아래 더럽고 지저분하며 찌는 듯한 더위에 짜증이 나는 지옥 같은 곳입니다. 곤도가 산 위에 사는 것은 오로지 부자이기 때문이고, 유괴범이 산 아래에 사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유괴범은 전후 일본사회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 것은 자본의 재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괴범이 공범을 죽이기 위해 마약을 사는 장면을 유심히 보십시오. 돈이 있으면 그 어떤 쾌락도 누릴 수 있는 디스코텍을 거쳐, 돈이 없어 모두들 무덤에서 일어난 좀비처럼 보이는 마약쟁이들이 사는 마약촌의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천국과 지옥을 대변합니다.  

유괴범은 자신도 천국을 느껴보고 싶어서 돈을 뺏었습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유괴범은 부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자신만의 지옥을 키웠습니다. 곤도는, 아마도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나쇼날 슈즈의 사장이 됐을지는 몰라도, 아마도 지옥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곤도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경력과 재산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유괴범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 곤도를 부른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증오심에 가득 찬 자신과 같은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곤도는 편안한 모습입니다. 경력과 재산은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키워낸 지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괴범의 마지막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돈보다는 인간이 우선인 세상, 비뚤어진 증오심이 불러오는 비극. 글쎄요. 1960년대의 일본이라면, 대한민국이라면 이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2010년의 일본에서,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계급과 인간에 대해 이렇게 감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2010년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까요? 아마도 <지옥>이라고 제목을 짓지 않았을까요? 그가 생각한 천국은 이미 멀리 벗어났으니...  

 

 

*덧붙임:  

<천국과 지옥>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에드 맥베인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그밖에도 구로사와 감독은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백치』를 영화로 만들었으며,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거미집의 성>은 『맥베스』를, <란>은 『리어왕』을 구로사와의 방식대로 만들었습니다. <데루스 우잘라>는 아르세니예프의 원작을 각색했고, <밑바닥>은 막심 고리키의 원작을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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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용감해질거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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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용감해질 거야>는 인디포럼이 탄생한지 15년이 되는 해를 축하하기 위해 16명의 감독들이 편당 15만원(!)의 예산으로 만든 15편의 단편집입니다. MB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문화/예술계에 정치적인 잣대를 들어 지원금을 삭감하거나 아예 없앤 경우가 꽤 많았는데, 인디포럼도 희생자 중 하나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결과이지만, 이들 젊은 감독들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지 않고 스스로, 용감하게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제 난 용감해질 거야>는 '자생(自生)'을 주제로 한 옴니버스 영화인 동시에, 인디포럼 감독들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들 감독들은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자생(自生)'이란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각각의 영화는 정말 한 편 한 편이 의미 있고, 소중하며, 재미있고,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하지만, 옴니버스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결국 그 안에 있는 영화들끼리 경쟁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상업영화건 기획영화건 간에, 감독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자칫 방심하면 그 영화는 관객에게 잊히거나, 아니면 다른 뛰어난 영화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당신은 33명의 거장들이 참여한 <그들 각자의 영화관>의 감독 이름과 영화 제목을 줄줄이 읊을 수 있습니까? 옴니버스라는 형식은 영화제의 경쟁부문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 (마음속의 수상작은)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디포럼의 감독들은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각각의 영화는 모두 인상적이며, 장르와 형식을 자유롭게 오가고 있습니다.  

 

장건재 감독의 <5시의 미정>은 어느 터미널에서 시작합니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터미널 앞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떠나기 위해서, 혹은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서야, 카메라 중앙에 목발을 지고 커다란 짐을 앞에 둔 여인이 보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힘겹게 이끌고, 큰 짐을 옮겨가며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지만, 그녀는 그런 도움 따위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저버린 듯, 마음을 다잡고 계단을 오릅니다.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견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과정은 힘겨워 보입니다. 영화는 그녀가 계단을 다 오르기 전에 카메라를 치워버립니다.  

 

김성철 감독의 <배우 인터뷰>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는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여줍니다. 배우가 되고자 했으나, 아니, 배우였으나 결국엔 현실과 타협한 이들이 현실의 벽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영화는 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 배우라는 직업이 만들어내는 진실과 거짓, 그리고 배우만이 할 수 있는 현실의 마법의 순간을 담아냅니다. 마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베티가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서, 현실이 영화가 되는 마법을 보여준 것처럼. 이 영화는 반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속았다는 느낌보다는 다행이라는 느낌이 드는 귀여운 반전입니다.  

 

임철민 감독의 <228>은 고시원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함축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꽉 눌린 느낌의 공간. 사람들의 밀도는 높지만, 각각의 관계를 틀어막은 칸막이와 방문 사이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름이 아닌 방문 호수로 기억되는 사람들. 형체가 아닌 베니어판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만 기억되는 사람들. 익명의 공간 안에서 용기 내어 228호에 다가가는 소년. 하지만 대답 없는 여인, 혹은 너무 늦은 관계의 시작.  

 

이진우 감독의 <꽃>은 한 편의 영화가 기획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감독은 이번 인디포럼에 가해진 정치적 사건을 영화로 찍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친한 배우를 앞에 두고 장황하게 설명을 합니다. 처음엔 추어탕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폼이 나지 않는다 해서 단양 쑥부쟁이 이야기를 합니다. 쑥부쟁이는 굉장한 생명력을 지닌 꽃입니다. 홍수로, 폭우로 쓸려가고 씻겨가 다 멸종됐나 생각하면 어느 샌가 자라납니다. 그런 꽃이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진짜 멸종 위기에 처했습니다. 4대강 사업과 쑥부쟁이 이야기는 MB정부의 문화 예술 탄압과 맞물려져서, 그 스스로 강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장르를 따지자면 코믹계몽영화 정도? 이 영화는 옴니버스 영화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종필 감독의 <살아남아야 한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술을 하지만, 돈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는 무리한 다이어트로 갓난아기인 아들을 홀로 남기고 유명을 달리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은 예술가였던 아버지 영정 앞에서 뒤늦은 고백을 합니다. 말하는 것을 보아 아들은 이공계 출신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거의 배를 곪는 직업군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는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을 합니다.  

 

박종빈, 박재평 감독의 <벌거숭이>는 새로 태어나는, 혹은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눈이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거리, 그리고 숲, 밤. 한 남자는 벌거숭이가 되어 어둠 속을 돌아다닙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자아를 찾는 탐험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탄생. 이 이야기는 젊음을 마치고 기성세대로 진입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일 수도, 혹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태어남은 울음으로 시작합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시작은 어쩌면 슬픔일지도 모릅니다.  

 

기채생 감독의 <마치 낮도깨비처럼>은 제 개인적으로 가장 심금을 울린 영화입니다. 2010년은 인디포럼이 생긴지 1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게다가 올해 518 행사는 처음으로 반쪽짜리 행사가 되었지요. 영화는 518 자료화면과 갈라진 행사, 그리고 금남로의 모습과 518 묘역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이제는 익숙한(!) 화면 속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북소리 아니 드럼소리 같은 강렬한 비트가 입혀지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다른 악기들이 조금씩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비탄하면서도 익숙한(!) 장면에 갑자기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망월동 구묘역이 비춰지고, 지금까지 음악을 연주한 노래패들의 모습이 마치 낮도깨비인양 오버랩 되는 모습을 영화는 계속 보여줍니다. 망월동 묘역은 518에서 죽은 시민들의 시신을 가족들이 수습해 묻은 곳입니다.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은 망월동 묘역을 없애려 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그 묘역을 지켜냈습니다. 그 후, 망월동 신묘역이 만들어졌어도, 구묘역은 아직까지 남아있고, 시민들은 구묘역을 망월동 묘역이라 부릅니다. 스스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강렬하게 저항해야한다는 것을 기채생 감독은 설명하지 않고 우리를 느끼게 해줍니다. 낮에 나타난 도깨비는 자기 시간을 놓친 뜬금없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밤에 나타나는 귀신보다 덜 무섭지요. 하지만, 어쨌든 도깨비는 도깨비입니다. 이들의 존재감은 충분히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518과 망월동 묘역을 보여주면서, '마치 낮도깨비처럼' 같이 살아남자는 다짐과 응원을 하는 그의 작품은 영화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기채생 감독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다루면서도 헤매지 않고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김민경 감독의 <핑퐁>은 웃음이 피어나는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한 소년이 자기 동네에 있는 전설의 탁구왕 이야기를 합니다. 동네에 탁구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한 아저씨가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탁구를 칩니다. 그는 누구와 탁구를 치건 매번 지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밤, 소년은 그 아저씨의 진짜 실력을 보고 그를 탁구왕이라 부릅니다. 그는 소년의 영웅이 됩니다. 하지만, 그의 영웅은 그의 실력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소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어른의 지혜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채기 감독의 <건강>은 고정된 카메라로 일관합니다. 영화는 한 사내가 바닷가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사내가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집니다. 강한 파도가 밀려드는 텅 빈 바닷가. 그러다 저 멀리 하나의 점이 보입니다. 조금씩 다가오는 점, 그리고 사내의 형상이 드러날수록 밀려드는 안도감. 그리고 보이는 자막. "웃고 있어도/울고 있어도/울고 있어도/웃고 있어도/건강해라" <아라비아의 로랜스>에서 오마 샤리프가 지평선 끝에서 다가오는 모습은 경탄이었습니다. <건강>에서 사내의 모습은 불안함과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기쁘든 슬프든, 홀로 살아남기 위해서 ‘건강 하라’는 당연하지만 서글픈 교훈.  

 

장훈 감독의 <용기낸 자가 얻으리라>는 영화 찍기의 악전고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심해에서 올라온 어패류 1번> 이란 영화 속 영화를 감독한 젊은 감독은 영감을 받아 영화를 찍으려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여성의 나신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 그는 다짜고짜 누드협회에 찾아가 캐스팅을 부탁합니다. 많이 희화화 되었지만, 장훈 감독은 인디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옆에서 듣기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인데도, 감독은 자신의 비전을 지키기 위해서 계란으로 바위 치듯 말 그대로 용기를 내어 들이대야 합니다. 자신의 비전을 위해서라면,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은 물론 식구들의 영혼까지도 팔았을 저 위대한 탐식가들. 영화를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자신의 비전을 위해서 용기가 필요한 것은 영화 감독뿐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들이기도 할 것입니다. 

 

최아름 감독의 <2020 농사꾼>은 현실을 뒤집어 현실을 보여주는 기막힌 영화입니다. 때는 2020년. 한 일련의 학생들이 농사꾼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그는 10년 전, 갑자기 깔린 자전거 도로를 뒤엎어 농사를 짓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작지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라 불만입니다. 4대강 공사가 끝난 후, 4대강을 다시 되돌린다고 온갖 기계들이 강을 뒤엎고 있습니다. 농사꾼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계란 폭탄 제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실제로 학생들에게 계란으로 바위를 폭파(!)시키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최아름 감독은 지금 2010년에 대한민국(좀 더 정확히는 여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찍으면서, 10년 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친 세상에 미친 농사꾼의 모습은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너무 씁쓸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지만, 뒤에 사족은 괜히 붙인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제를 너무 드러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신수원 감독의 <집>은 스틸 사진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이는 이미지는 마치 문장의 '종결형 어미' 같은 느낌이 들고, 흑백의 이미지는 황량합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소년의 내레이션과 폭격과도 같은 굉음입니다. 엄청난 소리에 소년이 잠에서 깹니다. 전쟁이라도 난 듯, 집에 구멍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습니다. 집 밖에 나가보니 동네가 무너져 있습니다. 소년은 짐을 챙겨 거리로 나왔습니다. 소년은 전화 부스에서 숙식하며 어머니를 기다립니다. 신수원 감독은 재개발을 전쟁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소년은 갑자기 고아가 됐으며, 엄마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엄마는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의 전쟁, 아니 있는 자들의 학살의 현장인 재개발 지역은 정말 끔찍합니다. 소년은 혼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신수원 감독은 활동사진의 모습으로 소년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아직까지 '종결형 어미'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지연 감독의 <산책>은 시각 장애인의 산책을 그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소녀가 불안하게 길을 걷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그 모습에 잠깐 말을 걸어보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걷습니다. 익숙한 향기, 익숙한 소리. 혼자서 걷는 그녀는 산책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다가오는 사람들, 자동차들로 그녀는 잠시 길을 잃습니다. 전 그녀가 집에 잘 돌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아마 그리 먼 거리를 간 게 아니니까 안전하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장애인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 걷는 법을 택했습니다. 때로는 위험하고, 때로는 무섭겠지만, 그녀는 혼자 걸음으로서, 얼굴에 엉겨 붙는 따사로운 햇살, 귓가를 간질이는 수줍고도 시원한 바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벽의 든든함 등 삶의 즐거움을 간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느끼는 것들로 삶은 가치가 있습니다.  

 

김종찬 감독의 <희망구두방>은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매일 그 자리에 있던 구둣방이 갑자기 철거를 당해 없어졌습니다. 바로 어제 구를 맡긴 한 여인은 그 난감함에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골목 커피숍에 구두를 맡겨놨다는 쪽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여인은 구두를 찾습니다.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고, 또 익숙한 소재이지만, 그래도 가장 짧은 시간에 주제와 감동을 이끌어내기엔 가장 무난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웃음은 주제를 한 번 생각하게 하지만, 감동은 주제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방법이니까요. 물론 너무 익숙한 탓에, 다른 작품들과 비교가 되는 것은 옴니버스의 숙명입니다.  

 

신이수 감독의 <꿈풀이>는 젊은 커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녀가 소년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꿈속에서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이태원 해밀턴호텔 앞에서 프리 허그 퍼포먼스를 합니다. 바로 그 때 한나라당 지지자인 아버지가 나타나 오세훈 서울 시장 후보의 유세장으로 데려갑니다. 어처구니없는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래도 뭔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신기하게도 꿈은 다시 이어집니다. 이번엔 복학생 선배와 자신의 옛 남자친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반전이 있습니다. 소녀는 이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소년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만의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잘나서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소녀는 언제쯤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어쩌면 소녀는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계속 꿈을 꾸고 있으니까요. 인생은, 혼자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예술입니다. 게다가 집단 창작활동이기도 하죠. 그런 만큼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만의 비전을 생각하면서, 돈까지 생각해야합니다. 몇 몇 검증된 감독들에게만 기회를 주어 돈을 벌어오는 영화를 기획하는 '영화판' 시스템에서는 감독의 비전을 온전히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인디포럼은 작가들의 비전을 날 세우고 앞세운 최전선입니다. 그러니 정부는 제발이지, 문화/예술에 정치적 잣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저는 이들 작가들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덧붙임: 

조만간 인디 플러그(클릭) 에서 온라인 개봉을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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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7-2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라인 개봉이란 말이지요^^

Tomek 2010-07-30 08:37   좋아요 0 | URL
온라인 개봉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 공지는 뜨지 않고 있어요.
저는 운좋게 화요일에 스크린에서 봤습니다. 두 번째 참석한 인디포럼 월례비행이었는데 두 편 다 좋았어요. :D

novio 2010-08-13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리뷰네요.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이네요.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Tomek 2010-08-14 11:20   좋아요 0 | URL
novio 님만 하겠습니까? <요술>과 <영도다리>를 돈을 지불하고 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지요. 그런 면에서 전 아직입니다. :)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라쇼몽 - Rashom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은 인간의 불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정말 간단합니다. 한 나무꾼(시무라 다카시)이 숲에서 나무를 하던 중, 무사(모리 마사유키)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범인이 잡히는데, 그는 이 근방에서 유명한 산도적인 타죠마루(미후네 도시로)입니다. 그리고 이 살인 사건에서 몸을 피한 무사의 아내(교 마치코)가 관청에 불려옵니다. 이들은 각자 사건을 진술하는데, 큰 줄거리는 대략 맞으나, 자세한 내용은 각기 다릅니다. 관리는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의 혼을 불러 진술을 듣지만, 귀신의 진술 또한 이들과 각기 다릅니다. 진실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본 나무꾼만이 알고 있습니다.  

타죠마루, 무사, 그리고 그의 아내는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진실을 새로 구성합니다. 타죠마루는 무사의 아내를 보고 음심이 발동해, 무사를 함정에 빠뜨려 묶은 후, 그의 아내를 겁탈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진실입니다. 문제는 이 이후부터 각자의 상황에 맞게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타죠마루의 기억 속에서, 그는 무사의 아내를 데려가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승부를 걸어 자신을 택해달라는 말에 타죠마루는 무사와 긴박한 일전을 벌이고 그를 죽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무사의 아내의 기억 속에서, 타죠마루는 그녀를 겁탈하고 그냥 떠나버립니다. 아내는 무사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리지만, 무사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봅니다. 단검을 꺼낸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을 하다 정신을 잃습니다. 그녀는 무사를 죽인 것입니다.  

무사의 기억 속에서, 타죠마루는 그의 아내와 함께 떠나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남편을 죽여 달라고 합니다. 분개한 타죠마루는 부인을 짓밟고 무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더러운 년을 죽여 버릴까?" 그리고 그는 무사를 풀어주고,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부인을 보내고, 그는 단검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영화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사악한 동시에 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약함을 숨기는(혹은 드러내는) 방어기재입니다. 결국 이런 것들이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이끌게 됩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의 세상은 곧 지옥입니다.   

 

<라쇼몽>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인간의 체면과 욕심이 불신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 사건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들은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진술만을 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체면과도 관계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을 다 본 나무꾼이 관청에 진실을 진술하지 않은 것은, 그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는 사건 현장에서 진귀한 단검을 주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에 덕지덕지 붙은 이런 찌꺼기들을 제거하면, 인간은 불신의 벽을 넘어서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희망이 얼마나 실현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간절히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패전 후 재건의 몸부림을 치는 일본에 살면서, 그리고 바로 옆 한 때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살육으로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 자신의 조국을 보면서, 구로사와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그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왜 불신으로 시작했을까요? 만든 지 60년이 지난 영화이지만, <라쇼몽>은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소 도식적으로도 보이지만, 도저히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희망에 대한 결말은 그래서 진한 감정의 여운을 남깁니다.  

 

 

*덧붙임:  

<라쇼몽>은 아시아 최초로 해외 영화제(베니스)에서 수상한 영화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출품한 사실도 몰랐으며, "황금사자상이 뭐야?"라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은,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한 일본인을 구로사와 감독인양 대신 수상하게 했다고 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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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7-27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포스터 밑에 原作이 芥川龍之介라고 적혀 있는데, 그러고보면 원작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고민이 훨씬 깊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구로사와 감독의 재능이겠지만요. 실제로 원작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많이 회자되는 듯도 하구요.
'羅生門'의 뜻을 삶들이 그물처럼 펼쳐진 곳으로 새기면,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 그물의 갖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Tomek 2010-07-28 09:42   좋아요 0 | URL
원작과 영화를 다 본 분들에 따르면,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원작은 산적, 무사의 아내, 무사의 영혼 이렇게 세가지 시선만 있었던 반면,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에는 진실을 목격하는 나뭇꾼의 시선이 첨가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원작을 못 읽어서...
아마도 <라쇼몽>을 가장 잘 창의적으로 이용한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

굿바이 2010-07-2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쇼몽>을 연극으로 다시 보았는데, 영화로 볼 때와 다르게 또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의 진술이 진실인지 그것이 참 궁금했었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에서 진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왜 거짓을 만들어 내는지, 그것을 통해 획득하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여전히 봐야 할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Tomek 2010-07-28 09:46   좋아요 0 | URL
연극은 어떻게 무대를 꾸밀지 궁금하네요. 영화와 같은 이야기를 차용했다면, 무대가 적어도 8번에서 12번은 바뀌어야 할텐데... 장소도 3군데로 한정되어 있고...
세월이 흘러도 남아있는 고전은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아쉬운점은, 영화는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발전하기에, 세월이 흐르면 굉장한 작품이더라도 낡아보인다고 할까... 그 낡음이 촌스러움으로 느껴져 대중이 외면하는 사실은 꽤 안타깝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영화에서는 축복이자 저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