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라쇼몽 - Rashom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은 인간의 불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정말 간단합니다. 한 나무꾼(시무라 다카시)이 숲에서 나무를 하던 중, 무사(모리 마사유키)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범인이 잡히는데, 그는 이 근방에서 유명한 산도적인 타죠마루(미후네 도시로)입니다. 그리고 이 살인 사건에서 몸을 피한 무사의 아내(교 마치코)가 관청에 불려옵니다. 이들은 각자 사건을 진술하는데, 큰 줄거리는 대략 맞으나, 자세한 내용은 각기 다릅니다. 관리는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의 혼을 불러 진술을 듣지만, 귀신의 진술 또한 이들과 각기 다릅니다. 진실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본 나무꾼만이 알고 있습니다.  

타죠마루, 무사, 그리고 그의 아내는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진실을 새로 구성합니다. 타죠마루는 무사의 아내를 보고 음심이 발동해, 무사를 함정에 빠뜨려 묶은 후, 그의 아내를 겁탈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진실입니다. 문제는 이 이후부터 각자의 상황에 맞게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타죠마루의 기억 속에서, 그는 무사의 아내를 데려가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승부를 걸어 자신을 택해달라는 말에 타죠마루는 무사와 긴박한 일전을 벌이고 그를 죽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무사의 아내의 기억 속에서, 타죠마루는 그녀를 겁탈하고 그냥 떠나버립니다. 아내는 무사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리지만, 무사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봅니다. 단검을 꺼낸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을 하다 정신을 잃습니다. 그녀는 무사를 죽인 것입니다.  

무사의 기억 속에서, 타죠마루는 그의 아내와 함께 떠나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남편을 죽여 달라고 합니다. 분개한 타죠마루는 부인을 짓밟고 무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더러운 년을 죽여 버릴까?" 그리고 그는 무사를 풀어주고,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부인을 보내고, 그는 단검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영화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사악한 동시에 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약함을 숨기는(혹은 드러내는) 방어기재입니다. 결국 이런 것들이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이끌게 됩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의 세상은 곧 지옥입니다.   

 

<라쇼몽>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인간의 체면과 욕심이 불신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 사건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들은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진술만을 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체면과도 관계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을 다 본 나무꾼이 관청에 진실을 진술하지 않은 것은, 그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는 사건 현장에서 진귀한 단검을 주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에 덕지덕지 붙은 이런 찌꺼기들을 제거하면, 인간은 불신의 벽을 넘어서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희망이 얼마나 실현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간절히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패전 후 재건의 몸부림을 치는 일본에 살면서, 그리고 바로 옆 한 때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살육으로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 자신의 조국을 보면서, 구로사와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그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왜 불신으로 시작했을까요? 만든 지 60년이 지난 영화이지만, <라쇼몽>은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소 도식적으로도 보이지만, 도저히 외면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희망에 대한 결말은 그래서 진한 감정의 여운을 남깁니다.  

 

 

*덧붙임:  

<라쇼몽>은 아시아 최초로 해외 영화제(베니스)에서 수상한 영화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출품한 사실도 몰랐으며, "황금사자상이 뭐야?"라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은,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한 일본인을 구로사와 감독인양 대신 수상하게 했다고 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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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7-27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포스터 밑에 原作이 芥川龍之介라고 적혀 있는데, 그러고보면 원작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고민이 훨씬 깊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구로사와 감독의 재능이겠지만요. 실제로 원작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많이 회자되는 듯도 하구요.
'羅生門'의 뜻을 삶들이 그물처럼 펼쳐진 곳으로 새기면,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 그물의 갖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Seong 2010-07-28 09:42   좋아요 0 | URL
원작과 영화를 다 본 분들에 따르면,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원작은 산적, 무사의 아내, 무사의 영혼 이렇게 세가지 시선만 있었던 반면,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에는 진실을 목격하는 나뭇꾼의 시선이 첨가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원작을 못 읽어서...
아마도 <라쇼몽>을 가장 잘 창의적으로 이용한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

굿바이 2010-07-2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쇼몽>을 연극으로 다시 보았는데, 영화로 볼 때와 다르게 또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의 진술이 진실인지 그것이 참 궁금했었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에서 진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왜 거짓을 만들어 내는지, 그것을 통해 획득하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여전히 봐야 할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Seong 2010-07-28 09:46   좋아요 0 | URL
연극은 어떻게 무대를 꾸밀지 궁금하네요. 영화와 같은 이야기를 차용했다면, 무대가 적어도 8번에서 12번은 바뀌어야 할텐데... 장소도 3군데로 한정되어 있고...
세월이 흘러도 남아있는 고전은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아쉬운점은, 영화는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발전하기에, 세월이 흐르면 굉장한 작품이더라도 낡아보인다고 할까... 그 낡음이 촌스러움으로 느껴져 대중이 외면하는 사실은 꽤 안타깝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영화에서는 축복이자 저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