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천국과 지옥 - Heaven And He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은 유괴극입니다. 나쇼날 슈즈(구두회사)의 중역 곤도(미후네 도시로)는 그의 지독스런 제작 방식 때문에 회사의 다른 중역들과 마찰을 빚습니다. 그들은 주총에서 지분을 확보해 곤도를 몰아내려합니다. 하지만, 곤도는 꿍꿍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돈과 수단과 인맥을 동원해 나쇼날 슈즈의 주식을 매입합니다. 이제 돈 오천만 엔을 건네기만 하면, 곤도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할 수 있는 회사의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승리를 누릴 바로 그 순간에 곤도의 아들을 납치했다는 유괴범의 전화가 옵니다. 아들을 찾고 싶으면 삼천만 엔을 당장 준비하라는 전화지요. 당황한 곤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들을 구하겠다고 말하며 은행에서 돈을 바꿀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무 일 없이 돌아옵니다. 알고 보니 유괴된 것은, 곤도의 아들이 아니라, 운전기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유괴범은 그 사실을 알고도 삼천만 엔을 지불하라고 요구합니다. 곤도는 이제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신의 아들과 상관없는 운전수의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에서 모든 것을 건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유괴범의 협박 전화는 계속 울리고, 곤도는 고민에 빠집니다. 곤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유괴범에게 돈을 주기로 결심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딜레마에 관한 내용이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곤도의 딜레마는 그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옆집에 사는 아이를 납치했으니 죽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당신 전 재산을 보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 누구라도 곤도가 처한 상황에서는 어서 빨리 돈을 지불하라고 소리칠 것이지만, 내가 곤도라면, 그런 행동을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평범한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언급한 줄거리는 딱 이 이야기의 절반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는 후반부에 담겨 있습니다.  

유괴범에게 돈을 전달하고(후에 일본에서도 모방 범죄가 일어났을 정도로 정말 기막힌 방법입니다)난 후, 영화는 유괴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카메라(로 대변되는 형사들)는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닙니다. 곤도가 사는 곳은 산위의 펜트하우스입니다. 유괴범이 사는 곳은 산 아래 더럽고 지저분하며 찌는 듯한 더위에 짜증이 나는 지옥 같은 곳입니다. 곤도가 산 위에 사는 것은 오로지 부자이기 때문이고, 유괴범이 산 아래에 사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유괴범은 전후 일본사회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 것은 자본의 재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괴범이 공범을 죽이기 위해 마약을 사는 장면을 유심히 보십시오. 돈이 있으면 그 어떤 쾌락도 누릴 수 있는 디스코텍을 거쳐, 돈이 없어 모두들 무덤에서 일어난 좀비처럼 보이는 마약쟁이들이 사는 마약촌의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천국과 지옥을 대변합니다.  

유괴범은 자신도 천국을 느껴보고 싶어서 돈을 뺏었습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유괴범은 부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자신만의 지옥을 키웠습니다. 곤도는, 아마도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나쇼날 슈즈의 사장이 됐을지는 몰라도, 아마도 지옥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곤도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경력과 재산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유괴범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 곤도를 부른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증오심에 가득 찬 자신과 같은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곤도는 편안한 모습입니다. 경력과 재산은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키워낸 지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괴범의 마지막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돈보다는 인간이 우선인 세상, 비뚤어진 증오심이 불러오는 비극. 글쎄요. 1960년대의 일본이라면, 대한민국이라면 이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2010년의 일본에서,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계급과 인간에 대해 이렇게 감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2010년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까요? 아마도 <지옥>이라고 제목을 짓지 않았을까요? 그가 생각한 천국은 이미 멀리 벗어났으니...  

 

 

*덧붙임:  

<천국과 지옥>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에드 맥베인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그밖에도 구로사와 감독은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백치』를 영화로 만들었으며,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거미집의 성>은 『맥베스』를, <란>은 『리어왕』을 구로사와의 방식대로 만들었습니다. <데루스 우잘라>는 아르세니예프의 원작을 각색했고, <밑바닥>은 막심 고리키의 원작을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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