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 Late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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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유려한 데칼코마니처럼 보이는 영화지만, 실상은 정확이 두 부분으로 나눠진 영화다. 상처를 주는 남자(들)의 이야기와 상처를 받는 여자(들)의 이야기. 남자(들)과 여자(들)은 언뜻 소통이 되는 듯 보이지만, 자신(들)의 진심은 전해지지 못한다. 애나(탕웨이)와 옥자(김서라), 훈(현빈)과 왕징(김준성).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마른 낙엽들처럼 그들은 그렇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애나는 훈의 터무니 없는 약속을 믿은 것 같지 않다. 약속 장소에서 "오랜만이에요"라고 나직하게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서 살짝 짓는 웃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설렘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자조적인 웃음처럼 보인 것은 나만의 과민반응이었을까?     

 

2. 김태용 감독의 <만추>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두 주인공 간에 육체 관계가 없는 점이다. 이만희 감독의 원작은 보지 못했으니 제외하더라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과 김수용 감독의 <만추>에서의 섹스 신은 두 주인공 간에 급격한 진전을 이루게 하는 계기가 되는데, 김태용 감독은 이 중요한 설정을 과감히 버렸다. 김태용 감독은 애나와 훈의 관계에 어떤 강조나 방점을 찍는 것을 거부한 게 아닐까? 둘 사이의 섹스를 제외한 대신 김태용 감독은 그 둘 사이의 감정의 결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육체 관계가 아닌, 다른 소통의 방법으로. 

 

3. 전작 <가족의 탄생>과 비교해보면, 김태용 감독의 영화는 후반부에 폭발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 폭발력이 워낙 강렬해서 영화의 전반부가 거의 무효가 될 정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내가 잘못된 것이겠지만,) 마치 후반부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보고나서 잊혀지는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것은 이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런지. 

 

4. 그저 좋은 기억만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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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CinDi) 영화제 (8.18~24)
엉클 분미 -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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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개막작인 <엉클 분미>가 상영되기 전, 감독인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겨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대로 <엉클 분미>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화자를 바꿔가며 영화 내내 다시 시작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분미 아저씨는 신장 질환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분미 아저씨를 따라 처제인 젠 아줌마와 통이 시골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통, 젠 아줌마 그리고 분미 아저씨는 오래전에 사별한 후아이의 유령과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사라진 아들 분쏭을 만납니다. 분쏭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 원숭이가 되어 있습니다. 후아이의 유령이 분미 아저씨를 돌보기 시작하고, 분미 아저씨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정글 속의 동굴에 갑니다. 분미 아저씨는 그 동굴에서 자신의 전생인 미래(!)를 봅니다.  

비유를 비유로써 허락한다면, <엉클 분미>는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팀 버튼의 감수성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물론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이들 두 거장의 아바타란 얘기는 아닙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껴안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처음 맞이하는 저녁식사에서, 아피차퐁 감독은 초대받지 않은 두 존재, (후아이의) 유령과 (아들인) 원숭이 괴물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라오스 출신의 불법체류자인 자이까지 이 자리에 불러들입니다. 인간과, 유령과, 괴물(혹은 동물)까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그의 따스한 시선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왜 우리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으면서, 그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반성하는 생각도 들곤 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깜짝 놀란 것은, 이 이야기가 분미 아저씨의 기억이 아니라, 통이 꿈을 꾸며(혹은 애도하며) 돌아가신 분미 아저씨를 추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분미 아저씨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끼어 있습니다. 영화 중간에 갑자기 끼어드는 공주와 시종과 메기(혹은 물)의 이야기도 그렇고, 분미 아저씨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가 길게 진행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의 죽음조차도 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아팟치퐁 감독의 따스함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물론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분미 아저씨의 죽음 이후는 아무리 서사를 만들어보려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제 입장을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뒷부분은 다른 존재가 된 분미 아저씨의 시선(혹은 미래를 기억하는 죽음 이후)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찌됐건, 우리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를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 영화에서 내재적인 의미를 뽑아내어 평을 할 것이고요. 저는 전에 아피차퐁 감독의 <세계의 욕망>을 예로 들면서, 이 감독이 새로운 거장인지 혹은 사기꾼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엉클 분미>를 본 이후로 제가 생각하는 아피차퐁 감독은, 거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기꾼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세상에는 (비평가들의) 설명이 필요한 영화가 있고, (관객들 스스로가) 온전히 경험해야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엉클 분미>는 명백히 후자의 영화입니다. 사기꾼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만큼은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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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8-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해 전에 열대병이라는 제목과 그 전부터 종종 들려오던 아핏차퐁- 이라는 이름에 대한 찬사에 (그리고 이름 자체의 울림에) 끌려서 본 적이 있어요. 어안이 벙쪄서 이게 도대체 뭔가, 했죠. ㅎㅎ 엉클 분미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요.

Tomek 2010-08-19 07:50   좋아요 0 | URL
저는 전작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확실히 신비로운 영화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개봉하면 다시 보고 싶어요.

치니 2010-08-1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위터에서 정성일씨가 이 영화와 인셉션을 비교하면서 인셉션을 좀 까는 뉘앙스가 되어,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으, 근데 어디서 봐야 하나, 보고 싶은뎅.

Tomek 2010-08-20 01:50   좋아요 0 | URL
토요일 14시에 압구정 CGV에서 상영합니다. 온라인분은 모두 나갔지만, 현매는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D

2010-08-19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0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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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영화에 대해서 길게 말할 게제가 못됩니다. 영화 중반, 정경철(최민식)이 간호사를 강간하려는 장면에서 전 가방을 들고 영화관을 나가려고 했었습니다. 만약 수현(이병헌)이 그 자리에 조금만 늦게 나타났더라면, 전 미련 없이 극장을 나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합니다. 물론 바꿔 말하면, (힘들지만)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영악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제가 느낀) <악마를 보았다>는 종교 수난극입니다. 국정원 요원인 수현의 애인은 잔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수현은 "널 이렇게 만든 놈에게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순간 신(神)이 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국정원 요원이라 얻을 수 있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함을 이용해 연쇄살인마 정경철을 찾아냅니다. 영화 초반, 그는 정경철을 처단할 수 있었지만 유예합니다. 그리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이용해 정경철이 악한 짓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 자리에 나타나 정경철에게 벌을 내립니다. 그의 복수는 일반인들이 피해자가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니까요. 그는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는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럿 넘기고, 자신의 나약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반면 정경철은 그 자체로 악마입니다. 그는 모든 연쇄살인범의 공식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성적인 이유도 아니고,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냥 여자를 잡아서 죽이고 삽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가족을 만났을 때도 그는 전혀 다른 이유로 광분합니다. 그에게 인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악마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면 혹은 악마가 되려면, 인간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윤리와 시스템은 물론이고 인성마저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신과 악마는 우리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말 그대로 악마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일까요? 악마는 되기 쉬워도 신은 될 수 없는.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쩌면 하늘에서 추락한 천사장들(Fallen Angels)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현이 통곡하는 모습은, 결국 그걸 깨달은 자의 절망의 눈물입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뜰 때, "악마를 보았다" 뒤에 쉼표(,)가 있습니다. 어쩌면 진짜 제목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봅니다. <악마를 보았다,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수많은 악마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2010년의 대한민국을 거의 절망의 시선으로 망연자실 쳐다보는 영화입니다. 자포자기의 절망. 카타르시스 없는 장르 영화. 통한의 눈물. 그러나 차마 다시 돌아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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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08-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운 감독 영화 잘 만들기로 유명한데 별이 세개군요.
하긴, 생각해 보면 그 감독은 카타르시를 위한 영화는 만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영화 자체를 위한 영화를 만든다고나 할까?
왠지 걱정되는군요. 이명세처럼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Tomek 2010-08-18 15:00   좋아요 0 | URL
제 별점은, 첫째 알라딘에서 별점을 입력 하지 않으면 리뷰가 등록 안 돼서 본의아니게 입력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기왕에 입력해야 한다면 영화를 봤을 때의 제 느낌을 표시하자는 생각으로 입력하고 있습니다. 전 별점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영화적 완성도로 본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정말 잘 만든 영화입니다. 다만 전 그 정서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김지운 감독의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시면 아마 확실히 느끼실 수 있으실 거예요.

굿바이 2010-08-18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서, 그저 김지운 감독의 스타일을 감안해 영화를 짐작해 봤습니다. [종교 수난극]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남습니다. 영화보고 다시 읽어볼께요. 그런데, 걱정입니다. 다들 영상이 좀 격하다고 해서요, 제가 보기와는 다르게 비위가 약해서 말입니다.^^

Tomek 2010-08-19 00:01   좋아요 0 | URL
표현 수위에 대해 말씀드리면, 그렇게 '직접적인' 잔인한 장면은 생각 외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을 회 뜰려는 장면의 분위기가 영화 내내 지속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대신 이 영화의 정서적 잔인함은 그만큼 지독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업영화 안에서 끝까지 달린 경우라 할까요...

2010-08-18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년학 - Beyond the yea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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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사무침에 사로잡혀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어떤 영화도 날 이렇게 사무치게 만들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을 4년 만에 필름으로 다시 보면서 느낀 감정은, 이제야 오해에서 벗어나 그의 영화에 겨우 한 발 들어설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모두들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100번 째 영화를 이청준 작가의 소설 『남도사람』의 세 번째 연작인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로 찍는다고 했을 때, 옛 영광을 다시 한 번 누리고 싶어 하는 자화자찬으로 생각했다. <천년학>은 마치, 그의 최고 흥행작이자 그 당시 한국 영화사의 관객 기록을 갱신한 <서편제>의 두 번째 이야기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100번 째 영화라는 엄청난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너무 쉽게 무시되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져가는 줄 알았다.  

한 사내가 선학동의 선술집에 찾아든다. 그의 이름은 동호(조재현).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 유봉(임진택)과 누이 송화(오정해)와 함께 소리 공부를 하면서 이곳 선학동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그는 누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중이다. 이들은 모두 피가 섞이지 않은 유사 가족들이다. 동호는 송화를 사랑하고, 아비 유봉을 의심한다. 지독한 가난을 이기지 못한 동호는 집을 나와 유랑극단에 들어가 밥을 번다. 그 안에서 배우 단심(오승은)과 결혼을 하지만, 동호의 송화에 대한 집착으로 파국을 맞는다. 동호는 이곳 선술집에서 그 옛날 송화에게 연정을 품었던 용택(류승룡)에게 송화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아버지 유봉이 이곳에 암장됐으며, 아버지의 북을 받는다.  

영화는 시작부터 잘게 잘린 쇼트로 연결되어 있다. 굳이 자를 필요가 없는 부분을 임권택 감독은 기어이 잘게 잘라서 연결했다. 그럼으로써 받아들이는 감정은 왠지 영화가 매번 끊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끊어지는 느낌의 연속 속에서 송화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들어와 현실과 과거를 잇댄다. 끊어진 현실을 잇는 과거의 기억. 동호는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가 송화에게 보내는 집착은 사랑, 애틋함, 미안함 등의 감정이 오롯이 섞여 있다. 그는 송화를 찾아다니지만, 그녀를 만나도 그냥 떠나보낸다. 그에게 송화는 어떤 간직해야할 다짐과도 같은 것이다.   

이 영화를 동호-단심-송화 혹은 유봉/백사-송화-동호의 멜로로 볼 수도 있지만(어떻게 보아도 정말 가슴 시린 냉정한 이야기다), 가장 심금을 울렸던 장면은 (노인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이었다. 송화를 소실로 들였던 백사 노인은 친구들과 함께 송화의 노래 소리를 듣고 벚꽃이 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죽음을 준비한다. "백사는 이 절경을 놔두고 아쉬워서 어떻게 가려나?" 그리고 맞이하는, 탄성이 흘러나오는 장관의 백사의 죽음. 그리고 우리는 유봉의 죽음을 듣는다. 유봉의 죽음은 용택의 부인에게서 대화로만 전해진다. "그 어른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 묏자리를 보러 이곳에 왔었지요. 아니, 자식도 없는 분이 뭐 그리 명당자리를 고집하시냐고 물으니까 그 분 말씀이, 그 자리는 후대에 명창이 나올 자리라고 하데요." 자기 자신은 명창이 못됐으니, 자신은 이 예술의 끝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아닌 다른 후손들에서 꼭 명창이 나오길 바라는, 저 예술가의 애절한 바람! 그 자신이 이미 소리를 하면, 선학동에 학이 날아드는 명창인데도, 그는 자만심을 느끼지 않고 언제나 예술에 대한 허기를 가지고 있다. 난 이 장면에서 임권택 감독의 모습을 본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 째 영화 <천년학>은 자신의 자화자찬이 아닌,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다짐이기도 한 동시에 자신을 뛰어 넘는 명창(명감독!)이 되라는 감독의 애절한 유서와도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행히도(혹은 당연히!) <천년학>은 그의 유작이 되질 않았다. 100번째 영화를 만든 이후, 그는 데뷔작을 찍는 마음으로 <달빛 길어 올리기>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그가 디지털로 작업한 첫 번째 영화다. 그는 언제나 과거에 머무는 것을 경멸하는 감독이다. 유봉의 북과 송화의 소리가 신작로로 뒤덮인 선학동을 다시 옛 모습으로 바꾸고 학을 돌아오게 했듯이, 그의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라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선경(仙境)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덧붙임: 

2010년 8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임권택 감독 전작展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KOFA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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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8-1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이 영화 본 기억이 납니다.
영상미도 좋고 애잔한 영화였어요.
전 몇편 보진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이 항상 좋은 영화만 만들었던 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극과극을 달렸다는 말도 있고.
(아, 토멕님 앞에선 아는 체 하면 하면 안 돼요.ㅋ)
그런데 그 사람처럼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를 잘 표현하는 작가도 없다고 생각해요.^^

Tomek 2010-08-18 08:40   좋아요 0 | URL
감독님 스스로 말씀하시길, 6, 70년대 만들었던 영화들은 명백히 습작(혹은 쓰레기)였다라고 말씀하실만큼, 당시 영화들은 80년대 이후 걸작들과는 확실히 다르긴 하더군요. 하지만, <만다라>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것처럼 그 시기의 영화들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새마을 영화 <아내들의 행진>, <길소뜸>, <법창을 울린 옥이>를 보았는데, 정말 굉장하더군요. 요즘 말로 쿨하다 못해 콜드했어요.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무시무시했습니다.

2010-08-17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8-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하는 사람들이 그런다면서요~ 다음 영화를 위한 밑천만 생기면 성공한 영화라구요^^;

Tomek 2010-08-18 08:43   좋아요 0 | URL
그 밑천은 물적 토대일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감독 자신이 비전을 갖느냐 못갖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ㅠㅠ
 
디센트: Part 2 - The Descent: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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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마샬 감독의 <디센트>는 걸작은 아니어도 수작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장르 팬들보다는 평론가들이 사랑한(혹은 기특하게 여긴)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장르 팬들이 즐길만한 여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100분 정도의 영화이지만, 괴물이 나오는 것은 거의 60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야 나오니까요. 게다가 괴물의 모습은 창의적인 모습은 거의 없는, 골룸의 지루한 반복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장르가 액션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지요. <디센트>는 순혈주의 장르 팬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고 때론 불경스러운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디센트>는 눈에 보이는 공포를 다룬 것이 아닌, 인간이 숨겨놓은 치부가 밝혀지는 순간의 공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사라는 자신의 딸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 주노는 친구 사라의 남편과 불륜관계인 점 그리고 (피치 못하게) 친구 베스를 죽이고 도망쳤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인간들의 유대를 강화하는 우정과 사랑이 얼마나 나약한 위선인지를 보여줍니다. 괴물의 습격 후 주노가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을 찾으러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근처에 있던 레베카가 동생 샘의 입을 막으며 이렇게 말을 하지요.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돌아다니면, 괴물들이 다 쟤한테 갈 거야." 이것은 간단히 비난할 문제가 아닙니다. 친한 친구가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윤리 따위는 정말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법과 윤리(그리고 하나 더 첨가한다면 자본)로 통제되는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허술하고, 어느 순간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디센트>의 결말이 두 개라는 점입니다. 닐 마샬 감독은 두 개의 엔딩 중 어느 것을 넣을까하다가 아예 두 개 다 집어넣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결말은 그저 사족이 아니라, 보는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결말입니다. 사라가 현실 세계로 나가건, 그 동굴 안에 그대로 있건, 어쨌든 그곳은 그녀에게 죽음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하나 더 추가된) 죄의식으로 미쳐서 살아가든, 동굴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든 결국엔 죽음입니다. <디센트>는 장르적 쾌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감독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인 인상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 이후로 쏟아진 평론가들의 찬사였습니다. 이 영화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에 비견될 만큼 수많은 평론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장르의 궤에서는 심심하지만, 영화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평론가들에게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영화였지요. <디센트> 덕분에 그의 전작이자 데뷔작인 <독 솔져>까지도 호평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독 솔져>의 마지막 장면은 그저 유머에 불과했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 장면을 "미디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 치켜세웠습니다. 아... 그 장면은 그저 한 번 웃으면 되는 장면입니다. 2002 월드컵 잉글랜드와 독일의 유럽지역 최종 예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별 의미가 다가오지 못하는 내수용 유머를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다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닐 마샬 감독은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이후로 그는 <둠스데이>라는 정말 끝내주는(!) 무념무상 액션영화를 만들었고, <디센트>로 호의적이었던 평론가들은 "천재감독 아무나 하나"라는 말을 남기며 대부분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붙어있는 '천재감독'이라는 말을 지우기 위해 <디센트>의 속편을 기획합니다. 실제 기획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 영화의 속편은 아무리 생각해도 만들어질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감독직을 존 해리스에게 맡겼다 하더라도, <디센트: PART 2>는 전편을 갉아먹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디센트>의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물들 간에 할 이야기들은 다 다루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감독들이라면, 새로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센트: PART 2>는 전편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이야기를 꾸렸습니다. <디센트>에 나왔던 등장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모두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이야기나 주제가 참신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전편(아, <디센트>가 전편이 되어버리다니...)에서 다루었던 내용의 지루한 반복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미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공간의 활용 면에서, 존 해리스 감독은 전편과는 다른 접근을 택했습니다. <디센트>가 양 옆을 어둡게 표현해 꽉 조이는 듯한 동굴의 폐쇄공포를 느끼게 해주었다면, <디센트: PART 2>는 넓은 스크린을 스펙터클하게 활용합니다. 그리고 골룸 괴물들의 잔혹성과 난폭성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전편도 나름 잔인했지만, <디센트: PART 2>에서는 잔혹도가 한층 더합니다. 이 정도면 장르 영화에서 관객들이 바라는 만큼의 영화입니다. 존 해리스 감독은 전편의 사색적 요소를 모두 휘발시키고, 장르의 순수한 쾌감을 위한 영화를 만든 셈입니다.  

<디센트>는 <에이리언>과 비교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하지만 <디센트: PART 2>는 <에이리언 2>와는 비교를 불가합니다. <디센트>는 <언덕이 보고 있다>와 비교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디센트: PART 2>는 <힐즈 아이즈 2>와 비교해도 상관없을 작품입니다. <디센트: PART 2>로 닐 마샬 감독은 자신에게 지워진 평론가들의 찬사를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부담감 없이 그의 새로운 신작 <센츄리온(Centurion)>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 덧붙임: 영화를 보신 분들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전편에서 살아남았던 주인공 사라와 주노는 결국 장엄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닐 마샬 감독도 아마 이런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영화에서 겨우 살아남은 엘렌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하지요. 아마 감독인 존 해리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기껏 영화를 만들었는데 잊혀질 운명인 셈이니까요.

익스트림무비 시사회로 8월 6일 20시 롯데시네마 4관에서 관람했습니다. 스크린은 크지만, 좌석이 너무 붙어있어 불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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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8-13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는 안봤고 궁금하지 않은데...
원작 소설은 많이 궁금하고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재와 설정이 독특하더라구요. 지구의 속에, 지표면 아래에 인류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새로운 종족과 문명이 있다...라는.

2010-08-14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