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 The Bad Sleep We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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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悪い奴ほどよく眠る)>는 악(惡)과 죄의식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인간으로서 발동하는 죄의식은 그 악함에 따라 어떻게 얼마나 작동하는지 구로사와 감독은 보여줍니다.  

영화의 시작은 정부 주택공사의 부회장 이와부치(모리 마사유키)의 딸 요시코(카가와 쿄코)와 그의 비서 니시 코이치(미후네 도시로)의 결혼식으로 시작합니다. 이 축하의 자리에 갑작스레 신청사 뇌물 수수 건으로 후루야가 투신자살을 했던 건물 모양의 케이크가 도착하자,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이와부치, 모리야마(시무라 다카시), 시라이(니시무라 코우)는 안절부절하지 못합니다. 알고보니 니시는 후루야의 숨겨진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호적을 교환하고 원수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니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옥죄기 시작하지만, 모리야마가 니시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사건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명백히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프를 따왔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는 니시는 햄릿이고, 탐욕수런 이와부치는 클로디어스며, 이와부치의 아들 타츠오와 딸이자 니시의 부인인 요시코는 레어티즈와 오필리아의 현현입니다. 니시와 호적을 바꾼 친구 이타쿠라는 호레이쇼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를 <햄릿>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인간의 악(惡)한 기질을 다루었습니다. 인간의 악은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제도라는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그 바로미터를 죄의식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와부치, 모리야마, 시라이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죄를 미루면서 그들은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편안함이 죄의식과 맞부딪힌 순간,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염치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염치는 직급이 낮을수록, 그러니까 시스템의 상층부에 있는 거대한 악(惡)에서 멀어질수록 느낄 수 있습니다. 와다와 시라이는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이들은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악을 자행합니다. 특히 영화에서 이와부치로 대표되는 악(惡)은 자신의 피붙이마저 이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악을 응징하는 니시는 선(善)한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니시 또한 복수를 위해서 이와부치의 딸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원수와 같이 지내면서, 자신의 복수심이 나약해지는 것을 깨닫고 더 큰 증오로 자신을 단련합니다. 그가 행하는 복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편법을 통해 정의를 행하는 주인공들을 그렸습니다. <요짐보>처럼 기회주의적인 주인공의 모습이 그렇고, <붉은 수염>조차도, 병원의 경영을 위해 때로는 관청 직원의 약점을 이용하기도하고, 부자에게는 엄청난 약값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똘레랑스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미 이 세계는 지독히 나빠져 있고, 나쁘면 나쁜 만큼 그 나쁨을 이용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쁜 놈 대 나쁜 놈의 이야기. 그래서일까요? 구로사와 감독은 니시를 정말 갑작스럽게 퇴장시켜 버립니다. 정말 그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는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영화의 마지막, 자식은 아버지를 저주하며 떠나고, 아버지는 자식을 붙잡는 대신 울리는 전화기를 듭니다.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그동안 신경 쓰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며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가 악(惡)의 실체라 생각했던 이와부치는 결국 악(惡)이라는 거대 시스템의 한 줄기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 ‘나쁜 놈’인줄 압니다. 그리고 누가 숙면을 취할 것인지 압니다. 그리고 암전되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글씨. “悪い奴ほどよく眠る(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구로사와 감독은 누가 나쁜지, 무엇이 나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는 바로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덧붙임 

역시 만만찮은 주제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특히 화면이 '우수수 쏟아지는 듯한' 역동적인 미장센은 볼수록 감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결말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대부 1, 2>편에서 ‘거의 인용 수준으로’ 활용했습니다. 결혼식 장면은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 소개와 이야기의 배경을 영화적인 방법으로 친절히 설명해줍니다. <대부 1편>도 그랬지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을 지켰지만, 결국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홀로 남은 권력자의 모습에선 <대부 2편>의 결말부가 그대로 오버랩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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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붉은 수염 - Red Bear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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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항상 '인간'을 다뤘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은 항상 서로 속이고 기만하고 질투하며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가 그리는 인간군상을 보고 있자면, 정말 세상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탄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신뢰와 사랑이 무너진, 지극히 염세적인 세상.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볼 때면, 항상 먹먹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65년 작(作) <붉은 수염(赤ひげ)>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여전히 염세적인 세상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을 그리지만,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를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야스모토 노보루(가야마 유조)는 나가사키에서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입니다. 그는 막부의 의료원에서 의사 생활을 할 야심을 갖고 있는데, 아버지의 강권으로 하층민들이 진료를 받는 시골의 진료소에서 인턴 생활을 합니다. 붉은 수염이라 불리우는 이곳의 원장 니이데 쿄조(미후네 도시로)는 강건하고 불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환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합니다. 이 진료소를 벗어나려는 생각에 야스모토는 엉망으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야스모토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요약한 줄거리로만 본다면, 너무나 뻔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이 뻔한 이야기를 전인미답의 경지로 찍었습니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야스모토의 성장담입니다. 그는 이 진료소에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진정한 의사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야스모토는 여러 환자를 맡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종종 환자의 이야기로 빠져듭니다. 중구난방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는 야스모토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처음에 표면적으로 등장합니다. 성교 후 남자들을 죽여서 진료소에 갇힌 미친 여자, 12살의 나이에 유곽에서 손님을 받아야하는 어린 소녀 오토요, 진료소에 몰래 들어와 환자들 죽을 훔쳐가는 7살 꼬마 쵸보는 너무나 전형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왜 이런 삶을 살아가는지, 왜 이들이 경계를 풀지 않고 항상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안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을 너무 표면적으로 단정 짓고 산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이들은 의사들의 치료를 받을 뿐 아니라, 의사들(더 소급하자면 야스모토)의 비뚤어진 삶마저 치유합니다. 의사니까 병을 고치고, 환자니까 진료를 받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먼저 다가가고 서로 소통하면서, 인간들 사이를 둘러싼 오해의 껍질을 벗기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이런 형이상학적 주제는 보통 인물들 간의 대화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위대한 점은, 절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진득하게 보여줍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온갖 영화적 기교를 동원해가며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감독의 진심을 느낍니다. 그것은 구로사와 감독이 영화를 보는 우리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교훈을 주는 영화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배움을 얻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배움에는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 영화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덧붙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인 미후네 도시로는 이 영화를 끝으로 구로사와 감독과 결별했으며, 20세기 폭스에서 제작한 진주만 공습 영화 <도라 도라 도라>는 미국의 베트남전과 일본의 반미감정으로 인해 취소됩니다(이 영화는 후에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과 후쿠사쿠 긴지 감독의 공동 연출로 제작됩니다). 심기일전하여 1970년 처음으로 칼라로 찍은 <도데스카덴(どですかでん)>은 처음으로 흥행 참패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자살미수... 이후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다시는 따뜻한 세상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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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7-1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라 도라 도라>가 무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그리고...배우 이름은 미후네 도시로입니다.

이하나 누나가 우리 옆집에 살면 좋겠습니다.가끔 가다가 제가 요리도 해줄텐데요.

Tomek 2010-07-17 16:36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 지적 고맙습니다. 기억에 의지하고 쓰니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수정했습니다.

반영한 자료는 아래와 같습니다.

Production on Tora! Tora! Tora! took three years to plan and prepare for the eight months of principal photography. The film was created in two separate productions, one based in the United States, directed by Richard Fleischer, and one based in Japan. The Japanese side of the production was initially directed by Akira Kurosawa, but after two years of work with no useful results, 20th Century Fox turned the project over to Kinji Fukasaku and Toshio Masuda, who completed it.

http://en.wikipedia.org/wiki/Tora_Tora_Tora

노이에자이트 2010-07-17 18:42   좋아요 0 | URL
아...원래 구로자와 상이 일본측 감독을 하기로 되었군요.

Tomek 2010-07-19 08:15   좋아요 0 | URL
확실히 시기를 잘못 잡았던 것 같아요. 조금 더 빨랐던가, 아니면 늦었던가. 영화 역사에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전쟁 영화 한 편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요. 그래서 많이 아쉽습니다.

L.SHIN 2010-07-17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터를 보니까 생각이 난 건데요.
저는 <자토이치> 영화를 재밌게 봤답니다. 순전히..'기타노 다케시'라는 배우이자 멋쟁이
감독때문에 본 거지만..( -_-)ㅋ 내용은 괜찮았어요.
특히, 코믹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 엔딩에서 다같이 (나쁜놈이든 좋은놈이든)
춤을 추는 모습을 좋아하는 외계어린이 취향의 추천이었습니다. ㅋㅋㅋ

Tomek 2010-07-18 07:35   좋아요 0 | URL
<자토이치> 저도 봤어요. 아무도 보러 가지 않아서 씨네코아에서 혼자 봤던 기억이... 영화 자체로는 재미있었지만,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으로 봤을 땐 너무 아쉬운 작품이었어요...
금발의 맹인 검객이라! 가타노 아저씨 확실히 나르시즘이 강해요! :D

L.SHIN 2010-07-18 17:01   좋아요 0 | URL
엥,금발이 아니라 백발 아니었어요. 내 기억에는 그렇게...
그래서 '젊지만 백발 검객' 이러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기타노 아저씨의 영화들은 뭐랄까, 자세히 뜯어보면 독특한 철학을 숨기고
있죠. 그리고 그 특유의 유머러스까지. 그래서 전 그가 좋습니다.
괴짜잖아요. 전,괴짜를 좋아하거든요.(웃음)

Tomek 2010-07-19 08:23   좋아요 0 | URL
백발이 맞군요! 제 기억력이 탈색되어 가는지... 아니면 제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만 기억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ㅠㅠ

저도 기타노 아저씨 좋아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감독이자 배우, 화가이자 시인인 자아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는 아직까지도 당황스러운 면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자토이치> 이후의 영화는 사요나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는 다시 하드보일드-야쿠자 세계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결과물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나티네>가 나오든, <브라더>가 나오든 굉장하기는 하겠죠!

김기영 감독 영화는 어떠세요? L.SHIN 님이라면 정말 좋아하실 것 같은데!(웃음)

노이에자이트 2010-07-1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후네 도시로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은 텔리비전에서 해준 '레드 선'이었어요.알랭 들롱 찰슨 브론슨과 함께 나오는데 검객역을 했지요.미후네는 무사 역을 하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Tomek 2010-07-19 08:29   좋아요 0 | URL
저는 <1941>에서 처음 봤습니다. 물론 그 때는 누군지도 모르고 봤었어요. 나중에 그 장군(!)이 미후네 도시로라는 것을 알았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는 3~4년 전 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굉장한 배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스크린으로 보니까 그 매력이 엄청나게 다가오더군요!

조금 다른 의미로, 왕우와 함께 '무뢰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인 것 같아요. :)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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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원작을 충실히 따르던가, 아니면 모티프만을 가져와서 감독이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던가.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원작의 관점으로도, 독립적인 영화로 보더라도 선뜻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과 강우석 감독의 작품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작품입니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윤태호 작가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골에 내려가는 류해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왜 이들 부자가 7년간이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는지, 이장과 마을 사람들은 왜 류목형의 시신을 그렇게 빨리 치우고 싶어 하는지, 류해국과 박민욱 검사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류해국이 도착한 그 마을의 이상한 기운을 느낄 뿐입니다. 윤태호 작가는 에둘러 설명을 하지 않고 곧바로 이야기를 향해 돌진합니다. 모호함과 불길함에 둘러싸인 인물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실체를 지니게 되고, 결국 이야기는 가장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서 대한민국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담론까지 치고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가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윤태호 작가가 미스터리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이 살아있기에, 이야기가 산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 강우석 감독은 미스터리를 거세했습니다. 그는 이 복잡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영화 초반, 박민욱 검사(유준상)의 말을 빌려 영화 제목의 뜻마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책이야 독자 자신의 호흡에 맞추어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한자리에서 한 번에 감상해야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화나는 것은 강우석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단순히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끼』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독자들이 미스터리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화는 매 회마다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과 해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럼으로써 텍스트는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은 '사건→설명→사건→설명'의 순으로 이야기를 연결해, 관객들은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만하면 됩니다. <이끼>는 관객이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캐릭터 역시 아쉽습니다. 굳이 원작과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은 모두 텅 비어있습니다. 유해국(박해일)이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집착하는지,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지 전 도통 모르겠습니다. 유목형(허준호)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장(타락천사)처럼 보이고, 전석만(김상호), 하성규(김준배), 김덕천(유해진)의 폭주는 뜬금없이 보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원작과 실제 배우들의 이미지에 기대어 이 캐릭터들을 그려냈습니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면, <이끼>의 캐릭터들은 영화 안에서는 도저히 이해불가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원작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모두 담으려는 강우석 감독의 야심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상업영화로선 재앙인 3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이지만, 영화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저 정신없이 허겁지겁 진행될 뿐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이끼』를 <공공의 적 2-1>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장(정재영)이라는 거대한 악(惡)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정의(正義)의 검찰 박민욱 검사와의 한 판 대결! 이건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원작과 비교하면 박민욱 검사의 비중이 굉장히 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필요 이상으로 검찰청 직원들이 일하는 장면과 회의하는 장면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압권은 이장과의 만남이지요. 원작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강우석 감독은 이 장면을 참으로 오그라들게 찍었습니다. 주인공 유해국이 한 일은 사건의 전말을 박민욱 검사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가장 멋있게 극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박민욱 검사입니다. 영화가 6월에서 7월로 개봉한 이유가, 월드컵 때문이 아니라 '떡검파문'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괜스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공공의 적 2> 강철중 검사

<공공의 적 2-1> (혹은 <이끼>) 박민욱 검사

 

원작에서 '이끼'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축축하고 습기 찬 미끌미끌한 것이 손에 들러붙는 듯한, 그래서 불쾌한'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만화의 분위기도 이런 것들이 주인공 류해국에게 '들러붙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이끼>는 너무도 매끈합니다. <이끼>는 원작에 대한 오독이자 관객에 대한 모독입니다.  

 

 

*덧붙임:  

1.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영화 자체는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한반도>도 그랬습니다.  

2.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명지(유선)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초반부터 그녀의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그에 반해 다른 캐릭터들은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전석만이 유해국을 뒤쫓는 장면은 <13일의 금요일> 시리즈가 떠올라 혼자 박장대소했던 장면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고 느릿느릿 걷는 김상호 씨의 모습은 제이슨의 재림이었습니다. +,.+

4. 원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영화에서는 너무 허겁지겁 묘사했습니다. 과감한 각색이 아쉬운 장면입니다. 원작의 팬이라면 이런 장면이 너무 많다는 점이 아쉽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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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끼moss, 2010 _비평 (심각한 스포일러 경고)
    from 예촌의 영화영상연예 블로그 II 2010-07-16 19:47 
    (심각한 스포일러 경고, 더불어 쓰지 않으면 평론을 제대로 완결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스릴러물임에도, 스포일러 유출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작 웹툰 자체가 이미 거대한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스포일러성이 강한 몇몇 문장은 흐린 회색 처리(나중에 복구 예정) 하였다. 영화 독특하고 전율적인 스릴러, 그러나 다소 이끼가 낀 감독 강우석은 다시 한번, 한국 영화의 여전한 주류 트렌디 요소인 '비주얼' 보다는 '내러티브',..
 
 
잉크냄새 2010-07-1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장역에는 변희봉 선생이 제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Tomek 2010-07-16 16:19   좋아요 0 | URL
아마 그랬으면 더 탄탄한 구조의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 목에 방울걸기 같아요. 자신만의 비전이 없다면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
 
환상의 빛 - Mabor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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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幻の光)>은 이야기를 대신 일상의 순간을 다룹니다. 이 영화는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면, 아마도 (막장극까지는 아니더라도) TV 아침드라마에서 다루는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만을 남겨놓은 채, 남겨진 사람들의 결을 따라갑니다.  

어린 시절 유미코는 할머니의 가출을 막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죽기 전에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 유미코와 작별을 합니다.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유미코는 자신의 실수로 할머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지니고 삽니다. 시간이 흘러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왔던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절을 보내는 유미코와 이쿠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이쿠오가 자살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 유미코는 중매로 오사카에 사는 타미오(나이토 다카시)와 결혼을 합니다. 유미코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지만, 간간히 떠오르는 남편의 기억과 자살의 의문으로 괴로워합니다.   

 

아무런 내색 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던 중,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져올까요? 자살은 의지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부재는 수많은 질문을 가져옵니다. "도대체 왜 죽었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래서 죽었을까?", "왜 아무런 말 내색도 없이 갑작스레 죽음을 택했을까?" 남편을 잃고 유미코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유미코는 남편의 부재를 견뎌냄과 동시에 남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한다면, 유미코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유미코의 기막힌 인생유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이런 기막힌 삶의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환상의 빛>은 담담한 영화입니다. 아마 다른 감독이었다면, 유미코의 고통을 굉장히 강렬하게 찍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유미코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트라우마 같이 각인된 할머니와의 작별과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을 겪은 후에도 유미코는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어찌됐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이죠. 때론 즐겁고 행복한 모습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일상의 어느 순간, 갑작스레 자살한 남편의 기억이 찾아옵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기억과 후회, 번민, 미련, 의문 등이 점철되면서 우리의 일상은 갑작스레 휘청거리기도 합니다. <환상의 빛>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결을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 또한 평범한 일상을 지내면서, 갑작스레 찾아오는 고통스런 기억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끝까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 물론 해답으로 볼 수 있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전남편의 알 수 없는 자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유미코에게 현 남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바다에 나가 있으면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반짝 반짝 빛나는, 어떤 빛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대. (전 남편도) 아마도 그 빛이 불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말은 남편의 죽음을 설명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의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삶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사 대부분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은 희미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이라는 해답'을 추구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 우리는 그토록 할리우드 영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했습니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상업) 영화는 모든 것이 명쾌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정확히 나누어져 있고, 선과 악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의 연속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되는 할리우드의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고 나쁜 영화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태도(attitude)의 영화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해답을 제시하는 영화는, 영화를 보는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도록 요구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주입식 영화와 주체적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환상의 빛>은 주체적인 영화입니다.  

 

 

*덧붙임: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 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과 김연수 작가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연수 작가의 생각을 조금 옮겨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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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7-1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이벤트 참여하고 싶었는데, 알라딘도 예스24도 다 안 됐어요.
아까워라...ㅜ
이동진 씨는 이 시간에 뭐했나요?

Tomek 2010-07-14 19:10   좋아요 0 | URL
영화 끝나고 대담시간이 있었어요. <환상의 빛> 영화와 원작의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과의 인연, 관객과의 질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전부 참석하지는 못했지만요... :)

2010-07-1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4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7-1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다 오해하는거죠~ 자기만의 방식으로다가~

Tomek 2010-07-14 19:15   좋아요 0 | URL
그렇기 때문에 노력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herenow 2010-07-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이동진님과의 만남도 궁금했는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네요...
덧붙인 김연수님의 글귀도 좋았습니다.

Tomek 2010-07-15 08: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소설도 좋다고하니 조만간 읽어보려고요. :)
 
호수길 - Hosu-g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은 단순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견디기) 힘든 영화입니다. 먼저 단순한 이유. <호수길>은 서울 은평구 응암 2동 골목 '호수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재훈 감독은 재개발이 결정난 응암 2동의 호수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에 동네가 철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힘든 이유. <호수길>은 다큐멘터리이지만,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전혀 다른 형식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는 (사람들의) 대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수길>은 마치 해설자의 내레이션이 빠진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황을 지켜 보고 들을 수만 있습니다.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집니다. 전반부는 호수길의 평화로운 일상입니다. 정재훈 감독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호수길의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 하지만 우리는 이미 동네 어귀에 걸려있는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플랜카드를 봤습니다. 이 평화로운 일상은 철거와 이주라는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지만, 그 천진난만한 얼굴은 언젠가 일어날 사건에 대한 불안으로 일그러져 보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줄 알고 있습니다. 굳이 용산의 비극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철거와 재개발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재훈 감독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철거 예정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장소를 담았습니다.  

영화는 낮과 밤을 오가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던 어느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한, 혹은 경계하는 듯한 불길한 개 짓는 소리가 들리고, 영화는 갑자기 장르를 달리합니다. 평화로운 일상의 다큐멘터리는 초현실적인 공포영화로 돌변합니다. 아이들이 뛰놀던 동네는 텅 비어있고, 거리는 온통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포클레인의 굉음으로 가득합니다. 주인 없는 폐허가 된 집과 바람에 열리고 닫히는 문, 그리고 기괴한 소리들이 덧붙여져 영화는 점점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40여 분간 (졸음을 참으며) 지켜봤던 일상은 순식간에 악몽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화면이라면 포클레인 옆에서 로우 앵글로 잡았을 장면을 정재훈 감독은 멀리 떨어져 위에서, 그리고 뒤에서 찍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포클레인이라는 기계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괴수가 지구를 파괴하는 장면이랄까. 할리우드 영화의 괴수는 지구를 파괴하지만, 정재훈 감독이 찍는 괴수는 소박하게(?!) 응암 2동 호수길을 파괴합니다. 할리우드의 괴수는 물리치면 (영화는) 끝이지만, 정재훈 감독이 찍는 괴수는 끝이 없습니다. 괴수라기보다는 좀비에 가깝습니다. 재개발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라도 무덤에서 기어올라 기어이 부숴버리고 마는 공포영화 같은 악령들. 하지만 <호수길>에는 이 괴수를 물리칠 용사나 과학자 혹은 지구방위대는 없습니다. 정재훈 감독은 이 참혹한 현장을 그저 바라만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은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극영화입니다. 다만,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가짜를 진짜인양 담은 것이라면, <호수길>은 현실을 그저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다만 현실의 초현실성과 장르성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죠. 정말이지 현실은 영화를 압도합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비몽사몽간에 봤습니다. "소리는 있지만 대사는 없는 침묵에 가까운 다큐멘터리"인지라 보는 게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에는 "도대체 왜 이렇게 영화를 찍었나"하는 감독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까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조금씩 영화를 떠올리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제가 오해를 하지 않았나 생각을 했습니다. <호수길>은 명백히 경험의 영화입니다. 관객은 속절없이 40여분에 가까운 의미 없는 (사건 없는) 평화로운 호수길의 일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후의 철거 현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현실을 체험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불꽃의 이미지와 (비명에 가까운) 개짓는 소리로 끝납니다. (정재훈 감독에 따르면) 철거 현장에서는 불이 자주 난다고 합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빨리 알아채는 존재입니다. <호수길>은 여전히 재개발 중이고, 여전히 불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호수길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영화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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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7-0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나라의 재개발과 난개발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도 없습니다.
말못하는 자연이라고 그 순수함까지 포크레인의 굉음에 묻혀 온나라가 파헤쳐지고 있으니 이를 어쩐답니까?

Tomek 2010-07-01 13:34   좋아요 0 | URL
이제 토건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우석훈 교수의 말을 믿어야지요. 한 순간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험적으로 각인하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