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 A Nightmare on Elm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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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둘, 프레디가 와요
               셋 넷, 어서 문을 잠가요
               다섯 여섯, 십자가를 꼭 쥐고
               일곱 여덟, 늦게까지 깨어있어요
               아홉 열, 절대로 잠들면 안 돼
 

 

사무엘 바이어(Samuel Bayer)가 감독(했다고 하지만, 제작자 마이클 베이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한 게 분명)한 2010년의 <나이트메어(A Nightmare on Elm Street)>는 이벤트 무비와 리메이크 무비의 사이에 있는 작품입니다. <나이트메어>시리즈를 알고 있는 팬들에게는 향수를, 몰랐던 관객들에게는 고전의 투박함을 현재 기술력의 세련함으로 포장해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 영화입니다. 팬심을 제거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해도, 제게 <나이트메어>는 60% 정도 아쉬운 영화입니다. 

웨스 크레이븐(Wes Craven)이 창조한 꿈속의 살인마 프레디 크루거는 유머 감각이 있는 아동살해범입니다. 80년대에 탄생한 다른 살인마들과 비교해볼 때 특별한 점은 바로 그가 유머를 이해한다는 것이죠. 그는 살인마이긴 했지만, 아이들의 특성을 정말로 잘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천부적인 살인마였습니다. 특히 '꿈'이라는 그의 무대는 그의 창조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장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세계는 고딕 미술의 세계서부터 팝 아트와 코믹스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이 예술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원하거나 바라는 것으로 유혹한 뒤, 아이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빠졌을 때 나타나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시리즈의 일곱 번째이자 <나이트메어>의 창조자 웨스 크레이븐이 감독한 진정한 속편인) <뉴 나이트메어(Wes Craven's New Nightmare)>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프레디 크루거는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와 같은 존재입니다.  

 

원작의 이런 유머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프레디 크루거의 모습에서는 이런 면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원작의 프레디가 유머 감각이 있는 아동살해범인 반면, 리메이크의 프레디는 냉혹한 아동학대범입니다. 웨스도 처음에 프레디를 기획했을 때도 이렇게 그리려 했지만,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학대 사건 때문에 방향을 틀었습니다. 리메이크의 프레디는 더 이상 이죽거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이해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변태로 나옵니다. 그렇기에 그가 만든 꿈은 정말이지 한심합니다. 어떻게 할 줄 아는 놀이가 술래잡기밖에 없는지... 그는 아이들을 유혹하지 않고 겁만 잔뜩 줍니다. 그는 면도칼 장갑으로 아이들을 베고 찌를 뿐입니다. 창의적이어야 할 장면에서는 답습을 하고, 그대로 가져가도 될 설정들은 비틀어버린 경우라 해야 할까요? 

 

프레디는 시종일관 베고 찌르기만 합니다. 그의 매력은 꿈을 현실화시켜주는 건데 말이죠. 

 

가장 아쉬운 것은 영화의 이야기가 별 개연성 없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원작에서 아이들이 죽는 이유는 그들 부모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프레디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감행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그는 아동살해범이었으니, 일거양득이었겠죠. 이 무서운 연좌제의 공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성서의 율법! 공적 복수와 사적 복수의 차이! 그런데 리메이크는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 수많은 아이들을 살해합니다. 리메이크의 프레디 크루거는 원작의 프레디 크루거와는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씬 시티(Sin City)>의 노란 녀석(that yellow bastard)과 흡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프레디와 노란 녀석이 노리는 여자아이의 이름이 같군요.    

 

"그렇지, 낸시(Nancy)?"

 

하지만, 원작에 관심이 없는 관객들에게는 재미있게 다가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는 굉장히 즐기면서 봤거든요. 사운드 디자인은 꽤 뛰어납니다. 꿈속의 프레디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에 그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고 꽤 근사하게 들립니다. 

이래저래 원작의 팬인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나름 개연성도 있고 즐길만한 영화였습니다. 어차피 공포 영화는 항상 쓰레기 취급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이 영화가 시간의 흐름을 견뎌 고전의 위치에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돈은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벌써 속편을 제작한다니 말이죠. 

 

 

*덧붙임: 

1. 이 글은 장르영화에 관한 글이지 현실에 관한 글이 아닙니다. 

2.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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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 The housemai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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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61년 작 <하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리메이크라고 해야 한다면,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 역시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의 리메이크라 해야 할 것입니다. 임상수 감독은 원작의 기본 설정 -부잣집에 하녀가 들어와 그 집안을 파탄 낸다- 만을 가지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 때 그 사람들(1970년대)>, <오래된 정원(1980년대)>, <바람난 가족(1990년대)>에 이은, 임상수 감독이 2000년대를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한 여인의 불안한 표정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먹고 담배피고 술마시고 노는 여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노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 돈을 내는 사람들과 돈을 받는 사람들. 임상수 감독은 현대 사회를 가감 없이 심드렁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순간, 갑자기 한 여인이 건물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비명도 들리고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살한 여인을 구경거리로 여깁니다. 너도나도 구경하려 애쓰고 감탄사도 들려옵니다.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 자살한 여인의 죽음은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나중에는 희미한 핏자국과 하얀 실선으로 표시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 구경꾼들 중에 은(전도연)도 있습니다. 은은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다가 하녀장 병식(윤여정)의 면접을 보고 저택의 가정부로 들어갑니다. 이제 영화는 현실에서 시작해서 알레고리로 점철된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녀가 들어간 대저택은 현실의 축소판입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한 일들을 당합니다. 심지어 목숨도 잃을 뻔 하지요. 그래도 그녀는 묵묵하게 웃으며 버팁니다. 주인들이 그러는 것은 다 이유가 있고, 자신이 제대로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은은 이 영화에서 완전히 바보로 나옵니다.  

아무리 임상수 감독의 <하녀>가 원작과 별 관련이 없다 해도, 약간의 비교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기영 감독이 그린 <하녀>의 권력은 문화입니다. 여주인공들은 (부인을 포함해) 모두 노동자들입니다. 세 명의 노동자 여인들이 피아노로 대표되는 문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노동자 여인들은 돈을 벌수는 있지만, 교양을 돈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 안에서 무력한 남편은 세 여자들에게 이리 저리 휘둘릴 뿐입니다. 60년대에 (이층집과 피아노로 대표되는) 부유층은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계급이었습니다. 반면 임상수 감독이 그린 권력은 자본입니다. 지금의 모든 권력은 자본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저택의 주인 훈(이정재)은 (거대한) 자본을 차지하고 있기에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자본은 문화를 종속시키고 윤리를 뛰어 넘습니다. 물론 오만함과 자의식은 덤이지요. 그들이 무슨 일만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답게 <하녀>는 시종일관 차갑습니다. 임상수 감독은 적을 정해놓고 공격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조롱합니다. 영화는 클라이맥스가 없습니다. 카타르시스도 없습니다. 관객들은 1시간 50분 동안 대저택에 사는 부유층들의 기만과 위선을 조롱하고 동시에 '병신 같이' 당하고만 사는 은, 아더메치하지만 그래도 살아야하기에 이곳저곳에 박쥐처럼 붙는 병식을 조롱합니다(그녀는 바보에게 따귀도 맞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0분, "찍소리라도 내야겠"다는 은이의 복수는 너무나 참담합니다. 임상수 감독은 모든 계급을 시종일관 조롱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처음, 우리는 한 여자의 죽음을 구경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극장을 나서면, 우리는 영화를 잊어버리고 현실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임상수 감독은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들도 이 바보 같은 여자와 다를 게 없다고. 당하고만 살지 말고, 좀 깨달으라고. 

  

 

*덧붙임:  

배우 이야기를 뺄 수 없습니다. 전도연 씨야 워낙에 뛰어나니 별로 언급할 게 없습니다. 단, 워낙 답답한 역이라, 본인도 연기하는데 애를 먹었을 것 같습니다. 대신, 결말부에서 폭발하는 전도연 씨의 연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은 화면보다는 스크린에서 알아챌 수 있는 디테일한 모습이나 표정 때문에 깜짝 놀랐으니까요. 

이정재 씨는 정말 (아마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역을 만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만함과 자의식 과잉의 인물이면서도 젠틀함을 보여주는 모습은 이정재 씨 이미지와 가장 맞는 것 같습니다. 서우 씨의 인공적인 외모와 아이 같은 이미지 또한 영화의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윤여정 씨는 김기영 감독의 71년 작 <화녀(하녀의 첫 번째 리메이크)>로 데뷔해 감계가 무량할 것 같습니다. 윤여정 씨가 맡은 병식 역은 71년의 하녀가 지금까지 하녀 생활을 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를 온 몸으로 견뎌온 인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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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5-1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시>의 표를 끊으며 <하녀>도 볼까 곁눈질 했는데 리뷰를 보니 보고 싶은 마음이 부쩍 생기네요^^

Tomek 2010-05-16 10:48   좋아요 0 | URL
호불호가 갈리지만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한 번 보시길 바라요. 아마도 2010년의 <박쥐> 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괴물들이 사는 나라 한정판 (인형 랜덤 삽입)
스파이크 존즈 감독, 마크 러팔로 외 출연, 포레스트 휘태커 목소리 / 워너브라더스 / 2010년 5월
품절


<괴물들이 사는 나라> 한정판 DVD입니다. 계속 알라딘에서 품절이었다가 어제 아침에 재고가 있는 것으로 나와서 재입고 된 줄 알았는데, 그새 또 품절이네요. 운좋게 제가 구입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DVD 시장은 미루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살 수 있을 때 재빨리 사야지요...

영화는 아직 감상을 못했습니다. 극장에서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이렇게 DVD로나마 만나게 되어 아쉬움을 조금 달랠 수 있게 됐습니다.

인형은 괴물 인형과 맥스 인형 두 개가 랜덤으로 들어있는데, 전 맥스 인형이 걸렸습니다. 괴물 인형이 생각보다 조악해서 맥스가 걸렸으면 했는데, 바람이 이루어 졌습니다. ^.^; 하지만, 조잡한 것은 어쩔 수 없네요. MADE IN CHINA라는 마크가 크게 찍혀있습니다.

사는 김에 모리스 샌닥의 원작 동화도 같이 샀습니다. 오랜만에 외관만으로도 사랑스런 책과 DVD를 구입한 것 같아 기분이 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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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5-0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무슨 내용일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인형 나름 귀여운데요? ^^

Tomek 2010-05-10 08:03   좋아요 0 | URL
영화도 사랑스럽습니다. 기회되시면 꼭 보셔요.
고맙습니다. ^.^;

LAYLA 2010-05-07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차 귀엽네요!!! 영화이야기도 올려주실거죠?^,^

Tomek 2010-05-10 08:04   좋아요 0 | URL
내용물도 귀엽지만 서재에 올려놔도 그런대로 잘 어울립니다. ^.^;
고맙습니다.

아포지 2010-05-0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명작 동화인데.. 영화도 나왔었군요..

Tomek 2010-05-10 08:05   좋아요 0 | URL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해 국내 개봉이 물건너갔습니다. 극장에서 봤으면 했는데...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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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대한 포부를 히로에가 묻자, 기리하라의 대답은, 한낮에 걷고 싶어, 라는 것이었다.
"기리하라 씨, 그렇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 인생은 백야(白夜)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
 

 

박신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는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부터 말이 많았던 영화인데, 그 이유는 원작 소설의 독특함 때문이었죠. 소설은 1973년 10월부터 1992년 12월까,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점층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기간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시간이죠. 게다가 소설은 총 3권, 11개의 챕터(chapter)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챕터의 화자가 각기 다릅니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은 가라시와 유키오와 기리하라 료지이지만, 작가는 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들 주위에 있는 주변인들의 관찰로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지요.  

작가가 주력한 것은 시대상황입니다. 1973년부터 1992년의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은 오일쇼크와 버블경제 성장 그리고 몰락의 시작입니다. 작가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저작권, 인베이더와 슈퍼마리오 게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각 장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컴퓨터라는 디지털 매체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해서 처리하던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인성은 텅 비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읽어낼 수 있지요. 이때의 범죄는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사람을 학살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지요. 료지가 범죄의 판을 크게 벌리기 시작하는 것도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를 접하고부터 입니다. 

 

"그렇게 만든 카드는 물론 진짜와는 내용이 다르지. 비밀번호가 다르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을 기계가 판정할 능력은 없어. 기계가 확인하는 것은 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번호와 인간이 누르는 번호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오직 그것뿐이야."
명백한 범죄였지만 도모히코에게 죄악감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조카드를 만들기까지의 경위가 너무나 게임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돈을 훔치는 상대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리하라로부터 늘 듣는 말이 머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것과 남의 것을 내 것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 어디가 달라? 돈이   든 가방을 멍하니 놓고 가는 게 나쁜 거 아냐? 이 세상은 빈틈을 보이는 자가 지는 거야."
도모히코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전율과 함께 오싹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물론 『백야행』은 장르소설입니다. 그런데, 소설의 장르는 분명 ‘미스터리 추리극’이지만, 작가는 독자와 두뇌 싸움을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습니다. 소설은 이들의 범죄 사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원작소설을 읽으면, 이들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렇다고 인물 묘사에 치중한 것도 아닙니다. 하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유키오와 료지의 내면 묘사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고통에 빠져 사는지, 아니면 이렇게 벌이는 범죄를 즐기는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의 내면은 텅 비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이들은 가장 믿어왔고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유키오와 료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들 괴물이었고, 이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갑니다. 소설 초반에 유키오와 료지가 읽던 소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스칼렛 오하라의 억센 모습은 유키호에게는 롤모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설정은 영화에도 그대로 삽입됩니다.  

 

 

이런 미완성의 소재는 영화나 TV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지요. 약간의 터치로 캐릭터에 살을 붙여 더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영화는 방대한 내용을 무리하게 압축하는 대신 현재의 이야기와 14년 전에 벌어진 사건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을 즐겼던 분들이라면, 이 설정에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2시간 분량의 영화에 원작의 그 방대한 에피소드를 다 담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박신우 감독은 원작의 내용을 과감하게 가지치기한 후 원작에 없는 요소를 삽입했습니다. ‘어른들의 사과’가 바로 그것입니다. 원작에서 유키오와 료지의 부모들은 모두들 괴물들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럼없이 인륜을 저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욕망이 인륜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드러낸 것이지요. 영화에서도 이들은 괴물로 나오지만, 인성을 지닌 괴물들입니다. 반성을 할 줄 아는 괴물들이지요. 영화에 삽입된 사건을 수사하는 한동수 형사(한석규)의 아들 이야기는 뜬금없기는 하지만, 수사가 끝난 14년 전의 사건을 가슴에 묻어두는 계기가 됩니다. 그 사건은 그의 (사건 해결의) 욕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피를 흘리며 요한(고수)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차이라면, 유미호(손예진)와 요한의 멜로입니다. 소설에서는 유미호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정확하게 지칭하고 있지 않습니다(언급하긴 하지만, 전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녀가 사랑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일지도).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연인의 사랑이라기보다는 근친간의 사랑처럼 보입니다. 한동수 형사도 이야기하지요. 이들은 샴쌍둥이 같은 존재들이라고. 박신우 감독은 원작의 이야기에(유사) 가족 이야기를 덮었습니다(삐뚤게 본다면, 이 이야기는 14년간 기다려온 남매간의 사랑을 말리려는 부모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삐걱거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현재와 14년 전의 이야기를 오가는 구성이라 플래시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는 씬이 좀 모호합니다. 소설의 서사를 알지 못하면 이 부분은 좀 불친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미호와요한의성장에대한에피소드가없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바로는 이들은 사건이 벌어진 후 14년간 조용히 지내오다가, 갑작스런 계기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모습은 너무나 능숙해 보입니다. 원작에서도 료지가 살인을 벌이긴 하지만 완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영화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요한의 살인과 뒷정리는 거의 해결사 수준입니다. 똑똑하기 보다는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감성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멜로로 보이는 것이 가능했겠지요.  

 

 

유미호의 모습은 소설보다 더 애매합니다. 유미호의 웃음은 본심을 숨긴 억지웃음입니다. 물론 그녀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진짜 웃음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 유미호의 자연스러운 웃음과 이전의 억지웃음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차이’가 필요한데, 아쉽게도 그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요한에게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하는 장면조차, 저게 진심인지, 그냥 떠보는 것인지 좀 애매합니다. 

 

 

"난 말이지……. 태양 아래에서 산 적이 없어. (…)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하얀 밤. 유미호의 인생은 태양이 없는, 언제나 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원작에서 그녀의 빛이 그녀의 삶을 포장해줄 ‘돈’이었다면, 영화에서 그 빛은 ‘요한’입니다. 사회적 함의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영화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문제로 좁혀놓은 것 같아 아쉽지만, 전 이 설정도 마음에 듭니다. 소설의 유키오는 여전히 하얀 밤을 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유미호는 어둠속을 걸을 것입니다. 

 

 

유미호 역할을 맡은 손예진 씨는 원작의 이미지와 거의 흡사합니다. 원작의 유키오가 우아함과 청순함 속에서 가끔 천박함을 드러냈다면, 영화의 유미호는 천박함 대신 슬픔을 드러냈습니다.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은 관객들이 그녀에게 심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어린 시절의 유미호(이지아) 역할을 맡은 주다영 양은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합니다. 특히 한동수 형사와의 눈치싸움은 소설에도 언급되어있지만, 영화만의 매력을 듬뿍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을 맡은 고수 씨 또한 냉혹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단, 원작의 료지의 눈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어둠 그 자체였다면, 요한의 눈은 좀 더 깊은 슬픔과 회한의 감정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한동수 역할의 한석규씨는 (<쉬리>까지 포함한다면) 무려 일곱 번째 형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본인도 매너리즘에 빠질 것을 우려해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박신우 감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제는 좀 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석규 씨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다른 성격의 영화가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냉철하면서도 감성 있는 연기로 유미호와요한, 두 아이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연기자는 한석규 씨 외에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도 사사가키 준죠 형사의 대사를 읽으면 이상하게 한석규 씨 톤이 머릿속에 떠오를만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역할이었습니다. 

 

약통(임지규)은 원작의 소노무라 도모히코를 차용했습니다. 원래는 약통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상영 시간 때문에 삭제된 불운한 캐릭터입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장 개연성 없는 캐릭터가 되었지요. 삭제된 장면은 삭제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미호와 결혼할 예정인 대기업 총수의 후계자인 차승조(박성웅)는 원작의 시노즈카 가즈나리, 시노즈카 야스하루, 다카미야 마코토를 합친 인물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돈이 많다는 점이겠지요. ㅡ.ㅡ;;; 

 

차승조의 딸 차영은(홍지희)은 원작의 시즈노카 미카와 후지무라 미야코를 합친 인물입니다. 덕분에 차영은의 행동은 소설에서 보다 더‘지독스러워’ 졌습니다.  

 

그 외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은 소설의 캐릭터를 합치거나 나눈 경우입니다.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에서 원작소설의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될 것 같습니다. 

 

원작의 너비를 생각한다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는 흥미로운 작품이 나온 것 같습니다. 열광할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넘길 작품 또한 아닙니다. 이제 32세인 신인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덧붙임: 

1. DVD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본편과 감독, 배우들의 음성해설이 수록되어 있고, 두 번째 디스크에는 다양한 서플먼트가 들어있습니다.  

 

2. 음성해설은 박신우 감독, 이창재 촬영감독, 손예진 씨, 고수 씨가 참여했습니다. 촬영에 대한 뒷얘기와 영화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지만, 서플먼트의 다큐멘터리와 대부분이 겹치는 내용입니다.  

 

3. <백야행>은 극장 상영 시에 디지털 버전과 필름 버전으로 상영했었는데, 디지털 버전이 필름 버전보다 10분 정도 깁니다. 이번에 발매된 DVD는 디지털 버전이 수록되었습니다.  

 

4. DVD 서플먼트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박신우 감독의 단편 <미성년자 관람불가>입니다. 약 10분간의 짧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마치 『백야행』을 모티프로 한 작품 같습니다. 이 영화 때문에 박신우 감독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편을 찍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5.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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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5-07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의견을 참고하니 급 영화가 보고싶어졌습니다^^

Tomek 2010-05-10 08:06   좋아요 0 | URL
최고의 칭찬이세요. 고맙습니다. ^.^;

novio 2010-05-07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봤을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 때의 감동과 충격은 개인적으로 상당했습니다. 이제 CD로 나왔나 보네요. 좋은 영화였습니다. 이 글 역시 좋네요^^

Tomek 2010-05-10 08:07   좋아요 0 | URL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의외로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박찬욱 감독이 뱀파이어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모두들 기대한 것은 ‘제대로 된 장르영화’였을 것입니다. 그의 전작에서 볼 수 있었던, 폭력의 극한까지 치닫는 묘사와 유려한 액션 씬 연출, 그리고 금기를 넘나드는 소재는 뱀파이어 이야기의 원형처럼 보였으니까요. 차기작 제목을 <박쥐>로 정하고, 주연으로 송강호 씨와 김옥빈 씨가 발탁됐다는 소식, 한국 영화 최초로 할리우드(정확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합작으로 제작을 했다는 점, 제작비가 (마케팅비를 포함해) 100억 원에 가깝다는 이야기,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정사씬’을 찍었다는 이야기 등은 이 영화의 기대치를 한껏 높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박쥐>는 기대했던 장르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영화가 아니라, 『테레즈 라캥』이라는 원작이 있었고, 거대한 살육이 있기는커녕, 남의 피를 몰래 훔쳐 마시는 ‘찌질한’ 뱀파이어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잔인한 장면도 없었으며, 정사씬은 애교수준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에 대해 악평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관객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예로 들며, 100억 원을 어디에 썼는지 회계장부를 공개하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개봉 후에도 악평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박쥐>에 호의적인 평을 쓴 평론가들까지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사실을 가지고도, ‘깐느가 타락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이 영화에 대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쥐>는 대중의 기대와 감독의 비전이 서로 달랐던 점, 그리고 CJ의 과대 포장으로 대다수의 관객들이 오해한 영화라 생각합니다. 이전 작품들은 시각적으로 화려한 방법을 썼지만, <박쥐>에서는 그런 시각적인 요소들을 거의 배재해서, 보는 재미가 좀 심심해졌다고 할까요? 예전에 영화 잡지 『키노(No 77)』에서 임필성 감독이 “감독들을 보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영화가 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영화는 다 다르”다고 이야기하자, 박찬욱 감독이 “그게 비극이지”라고 대답했는데, <박쥐>는 바로 그 비극이 실현된 영화입니다. 

하지만, <박쥐>는 (그렇게) 엉망진창인 영화가 아닙니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양식화된 과잉의 분위기가 없을 뿐이지, 이 영화는 계속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닌, 삶의 아이러니 혹은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영화의 제목은 ‘박쥐’이고, 영어 제목은 ‘Thirst(갈증)’입니다. 전자는 일반명사고 후자는 추상명사라 두 제목 사이의 간극이 꽤 넓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결국엔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박쥐는 ‘새’이기도 하고 ‘쥐’이기도 한 경계의 동물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현상현 신부(송강호)는 사람을 살리는 사제이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살인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순교를 가장한 자살과 자살적인 순교를 하지요. 그리고 갈증은 ‘(욕구보다 더 강한) 욕망’을 나타냅니다. 그의 피에 대한 욕망은 저버릴 수 없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제인 그는 살인을 저질러야 하니까요. 그리고 피에 대한 생존의 욕망이 육욕으로 옮아가면서, 그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더욱 심해집니다. <박쥐/Thirst>라는 제목은 주인공의 실존적인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영화의 오프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그의 전작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나 <친절한 금자씨>의 오프닝과 비교해보면 이 영화의 오프닝이 얼마나 단출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박찬욱 감독의 전작을 본 많은 관객들이 영화 처음에 효성 씨(서동수)가 현상현 신부에게 카스텔라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하는 초조한 불안감). 

  

현상현 신부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에 괴로워합니다. 그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치료제 개발에 스스로 자원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에이즈 항체나 한센병 항체를 스스로 몸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명백한 자살행위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바쳐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는 순교행위이기도 하지요. 

엠마누엘 연구소장: 자, 아까 같은 판에 박힌 소리 말고... 정말 무슨 목적으로 이 실험에 자원했습니까? 간혹 기도가 무력해졌다고 느끼는 분들이... '극적인 자살'의 방편으로 여기 오기도 하는데, 저희로서는 정말 맥 빠지는 일입니다. 본디 심리적인 차원에서 순교와 자살을 구별하기란 어렵습니다만, 당신은 물론 그런 분이 아니겠죠?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의 첫 번째 죽음은 자살인지 순교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엠마누엘 연구소에 오기 전에 유 간호사(라미란)의 고해성사를 해주었습니다. 유 간호사는 헤어진 애인 때문에 계속 자살 생각을 합니다. 그녀에게 상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상현: 신하고 직접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고 저도 모르게 불행을 경애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악마가 잘 파고들지요. 성 브루노 말씀대로 자살은 '사탄을 위한 순교'거든. 살인 중에서도 제일 죄질이 나빠요. 무기징역 감이야, 지옥에서. 

이랬던 그가 자살을 하러 연구소에 왔습니다. 그의 큰 바탕은 순교이지만, 그가 죽어도 확실한 치료제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자살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자살이냐 순교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현은 이 실험에 자원하는 것으로 그의 욕망을 처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상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입술과 혀를 짓찧으시어 그것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며,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세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상현의 기도는 염세적이고 자학적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쾌락에 무관심한 성직자로써의 숭고함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를 듣다보면, 결국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고, 그의 궁극적인 죽음은 순교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순교의 욕망을 이 절절한 기도문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상현이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부활했을 때에도 이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를 바란 것 같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상현은 한국에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붕대감은 성자’라 부르며 그를 경배합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옛 친구 강우(신하균)와 그의 어머니 라 여사(김해숙), 그리고 강우의 처 태주(김옥빈)를 만나게 됩니다. 죽었다 살아난 신부는 이제 『테레즈 라캥』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에밀 졸라가 26세에 쓴 소설 『테레즈 라캥』은 인간의 본능과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해부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소설의 내러티브를 재해석 없이 거의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심지어 그 눅눅하고 축축한 분위기까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의 발단 부분 없이 갑자기 전개 부분부터 시작합니다. <박쥐>의 발단은 뱀파이어가 된 신부 이야기니까 굳이 원작의 내용을 알 필요는 없지만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는 판단 하에,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은 소설의 발단 부분만 정리해보겠습니다.  

센강의 퐁네프 파사주. 이곳의 가게들은 왁자지껄 분주하지만, 유독 잡화상 한 곳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잡화상의 물건들은 “처량하게 매달려 있었”으며, “먼지와 습기로 썩어가고 있는 진열장 속에서 모두 빛깔 잃은 남루한 회색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쪽의 이름은 ‘테레즈(태주)’고, 나이든 쪽은 ‘라캥 부인(라 여사)’으로 불렸습니다. 

라캥 부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약해빠진 아들 ‘카미유(강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삶의 기쁨과 목적을 아들 카미유에게 투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미유는 어렸을 때부터 특유의 허약함과 나약함으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맞이했습니다. 라캥 부인의 “인내와 수고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카미유는 진즉에 죽을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맹목적인 사랑은 “한없는 간섭”으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그녀는 카미유를 정성껏 돌봐주는 간호사 역할을 테레즈에게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테레즈는 라캥 여사의 조카입니다. 군인인 아버지가 테레즈를 누이인 라캥 여사에게 맡기고 전사한 후, 그녀는 테레즈를 카미유와 같이 지내게 했습니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부터 “마치 허약한 애처럼 사촌오빠와 약을 나누어 먹고 어린 병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녀는 이런 부당함과 답답함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내면에서 타오르는 듯한 격정은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병자가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지닌, 가혹한 욕망을 지닌 젊은이였던 것이지요. 라캥 부인의 욕심으로 자매지간 같이 지낸 테레즈와 카미유는 부부가 됩니다. 

카미유는 작고 허약한 몸에 나약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라캥 부인의 “한없는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런 어머니의 희생에 적당히 길들여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부인인 테레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년’입니다. 소년과 젊은이의 결혼은 애당초 무리였지요. 

목요일 저녁마다 라캥 부인은 손님들을 초대해 도미노 게임을 합니다(수요일 저녁 마작 모임. 일명 오아시스). 멤버는 노망기가 든 노인 모습의 경찰 간부 출신 ‘미쇼(댐 경비과장 승대, 송영창)’, 광대뼈가 불거져 나와 볼썽사나운 경찰서 보안계 주임 경관 ‘올리비에(댐 환경과장 영두, 오달수)’와 그의 부인 ‘쉬잔(이블린, 메르세데스 카브랄)’, 그리고 카미유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철도국 서기 ‘그리베’입니다. 테레즈는 이들을 볼 때마다 “기계적인 시체들”, “종이로 만든 인형 같은 인간들”같다는 생각이 들어 몸서리칩니다. 그가 살아온 10여년의 시간이 이런 생기 없는 분위기였으니 그럴만하지요. 테레즈는 목요일 밤이면 “그냥 노곤히 잠들고 싶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한탄이나 비난은 물론이고 내색도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녀의 모든 의지는 자신을 극도의 친절과 극기의 수동적 도구로 만드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요일 모임에 카미유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창 ‘로랑’을 데려옵니다. 그는 “훤칠한 키에 건장하고 얼굴빛이 싱싱”“인간다운 인간”입니다. 로랑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똑바른 시선을 받자 테레즈는 좀 어색했”습니다. “가슴이 몹시 뛰고 있었”지요. 모든 것이 죽어있고 바래있는 무덤 같은 공간에 로랑의 등장은 테레즈의 가슴을 뛰게 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녀는 난생 처음 느끼는 이끌림에 당황했지만, 이내 “이 남자의 다혈질적인 천성과 큰 음성, 기름진 웃음, 그리고 몸에서 풍겨 나오는 거칠고도 달콤한 냄새에 마음이 쏠려서 초조하고 괴로운 기분에” 빠져들었습니다.   

원작의 로랑은 영화에서는 (당연히) 현상현 신부입니다. 하지만, 로랑이 우악스러운 무모함과 대담함, 신중함을 지닌 지독히 계산적이고 게으른, 욕망에 충실한 인물인 반면, 현상현 신부는 나약하고, 즉흥적이며, 설득력마저 떨어지는 궤변을 언사 하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개인적인 욕망을 자제하는 사제이지요. 그런 그가 이제 태주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신앙과 신념에 반하는 살인과 간음에 빠지게 됩니다.    

 

태주를 만나고 처음 뱀파이어로써의 자각을 느낀 상현은 그날 밤, 뱀파이어가 됩니다. 그가 수혈 받았던 뱀파이어의 피가 6개월이라는 잠복기를 거쳐 드디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인간을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존재입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만 보더라도, 뱀파이어의 능력에 매혹을 느껴 그들을 흠모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죠. 하지만, 상현에게 그런 능력은 저주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싶었던 그가 사람을 죽여야 연명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요? 

상현: 수혈 받은 피를 내가 고른 건 아니잖습니까! 저, 좋은 일 하러 거기 갔던 거 아시잖아요!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살인하지 않고 사람의 피를 어디서 어떻게 구한단 말입니까! 

상현의 욕망은 순교의 욕망에서 피에 대한 욕망으로 변했습니다. 아니,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변한 게 아니라, 욕망이 하나 더 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대사를 베푸는 숭고한 자리에서, 그는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 안타깝고 슬퍼하는 대신 흘러나오는 피를 욕망합니다. 그의 첫 번째 기도가 순교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기도였다면, 그의 두 번째 기도는 피에 대한 욕망을 드러냅니다. “베로니카의... 모든 죄를 사합니다”라는 기도문을 읊을 때, 그는 주춤합니다. 순수하지 못하고 욕망에 앞선 내가 과연 신의 대리인으로 죄를 사해줄 자격이 있을까, 그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상현: 이 성수로 이미 받은 세례를 기념하며 몸소 수난과 부활로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를 생각합시다. 오 베로니카, 고백하십시오. 나는 교황 성좌로부터 위임 받은 권한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 베로니카에게 전대사를 베풀며 베로니카의... 모든 죄를 사합니다. 아멘.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를 가볍게 해주소서. 아멘. 

 

그가 뱀파이어로써 자각을 하고 처음 만난 존재는 태주입니다. 태주는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은 집구석을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을 달리기로 해소합니다. 원작에서 테레즈는 “못 견디게 시원한 공기가 그리웠어요. 아주 어릴 때 나는 먼지 나는 길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구걸을 하면서 집시처럼 살기를 꿈꾸었”다고 했으니까요. 잠옷 바람으로 달리는 태주를 상현이 발견하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신발을 신깁니다. 그와 그녀의 관계의 시작은 이렇게 애틋하게 시작합니다.  

 

수요일 마작 모임에서, 처음으로 상현은 태주를 욕망합니다. 이미 “모든 쾌락을 갈구” 한다고 얘기한 이상, 그의 욕망은 점점 금기시되는 것을 욕망합니다. 태주 역시 상현을 욕망합니다. 그녀는 상현이야말로, 이 지옥에서 잠시나마 자신을 해방시켜줄 존재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태주: 나는 부끄럼 타는 사람이 아니에요. 부끄러워서 뛰어나간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말이에요, 부산서. 너무너무 지겨워서 그런 거예요. 저 엄마하고 저 병신 아들, 눅눅하고 컴컴한 집구석, 끝도 없이 질질 짜는 그 뽕짝들. 신부님 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땐 그냥 ‘고아원 애’ 이었지만... 창밖을 보면서... 어렸을 때요. 병신이 신부님 좋아하니까. 신부님 오면 나를 안 찾으니까. 나는 부끄럼 타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맨발로 막 나가요. 이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나가요. 저들은 몽유병인줄 알지만 난 그 시간만 깨어 있는 것 같고 나머지 시간이 자고 있는 것 같아요.  

 

태주는 “딸처럼, 강아지처럼” 키워졌습니다. 근친상간적 욕망으로도 읽을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강아지처럼’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태주는 주체적인 인물이 아닌, 애완견 같은 수동적인 인물, 말 그대로 시체처럼 살아왔습니다. 시체가 누워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런 그녀가 깨어있는 순간에 상현을 만나고, 부활절에 정사를 벌이며, 드디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상현도 드디어 그가 그토록 바란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현의 행동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는 대척되는 위치지요. 누군가에겐 해방의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겐 지옥에 빠지는 경우가 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런 삶의 아이러니를 계속 대비해서 보여줍니다. 

상현: 사제가 이러면 죄가 더 커요.
태주: 나는 신자도 아닌데요.
상현: 이러다 우리 둘 다 지옥 가요.
태주: 나는 신앙이 없어서 지옥 안 가요. 
 

 

하지만, 태주는 피를 마시는 상현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상현은 이런 태주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의 궤변으로 태주는 더 공포를 느낍니다(개인적으로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의 궤변 이후로 가장 웃긴 궤변이라 생각합니다).  

상현: 나는요, 살인은 안 해요. 효성 씨만 해도 그래요. 원래 배고픈 사람 돕는 걸 좋아했어요, 그 분이. 의식만 있었어도 자기가 먼저 피 가져가라고 했을 걸요? 태주 씨도 그 카스텔라 얘기를 들었어야 되는데, 아이 씨. 아니, 교통사고 나서 다친 사람을 욕하는 법은 없잖아요. 누가 무슨 병 걸렸다고 비난하지는 않잖아요! 난 좋은 일 하러 거기 갔던 거예요! 내가 뱀파이어인 게 뭐가 중요해요? 태주 씨, 내가 신부라서 날 좋아했어요? 아니잖아요, 거 봐요. 신부는 그냥 직업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뱀파이어인 것도, 그냥 뭐... 식성이나, 그냥 뭐... 생활의 리듬 문제, 그런 게 아닐까? 아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뱀파이어라서 싫어요? 내가 뱀파이어가 안 됐다면 태주 씨랑 잤을 것 같아요? 내가 그냥 신부였어도 태주 씨하고 그랬을까? 신부가? 응? 

 

태주의 거부로 상현은 절망에 빠져 돌아가고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일상에 지친 태주는 상현에게 연락을 합니다. 어차피 주위에 이상한 사람들이 득시들 거리는 이 지옥에서 이상한 사람이 한 명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기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상현의 한 마디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상현: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게요. 

 

태주는 상현을 도발하고 남편을 죽일 계획을 짭니다. 이 부분은 원작과 다른 부분인데, 원작에서는 테레즈가 로랑과 만나지 못하게 되자, 차라리 남편을 죽여 버리자고 로랑에게 충동적으로 얘기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태주가 치밀하게 계획을 짠 복수극으로 처리했습니다. 

태주: 나는요, 평생 그 사람들 강아지로 살았어요. 병신 먹이고 재우고 자위하는 것까지 도와주면서. 아시죠? 난 거의 처녀나 다름없어요. 걔는요, 워낙 병신스러워서 내가 같이 안 먹으면 지 약도 안 먹으려고 그래요. 어째서 난 안 죽는지 몰라. 그 이상한 약들을 내가 다 마시고 삼켰는데. 봉사활동 가는 거 싫어해요. 우리 집 병신이요.
상현: 강우고 어머니고 다 죽여 버리지! 

마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 씨가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복수하는 것처럼, 태주 역시 상현을 통해 강우를 교살합니다. 그녀는 복수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생활 속에서 그녀의 청춘은 더럽혀졌을 테니까요. 원작에서도 남편에 대한 혐오감은 대단한 편입니다. “테레즈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잠든 그의 창백한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카미유와 떨어져 누웠다. 꼭 쥔 자기 주먹을 카미유의 입에 처박고 싶었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이야기인 동시에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에 이은, 네 번째 복수극이기도 합니다.  

 

결국 상현은 강우를 살해합니다. 상현이 강우를 살해하는 것은, 치정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태주를 지옥에서 꺼내는 숭고한 행위라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아이러니를 상현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 역시 태주에 대한 욕망이 컸기 때문이었죠. 어쩌면 상현은 강우를 죽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강우를 살해하면서 상현은 (유사) 아버지인 노 신부(박인환)도 살해합니다. 이미 사제직을 버린 상현이 굳이 수도원을 찾아 노 신부를 찾아간 이유는, 어찌됐든 사람을 죽였다는 자신의 죄를 사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흔들리는 신앙생활에 버팀목이 되어 줬던 노 신부였지만, 그 역시 자신의 욕망을 상현에게 드러냅니다. 

노 신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바다에 일출을 볼 수 있다면.
상현: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뱀파이어는 햇빛을 볼 수가 없어요!
노 신부: 밤바다도 좋습니다. 외로운 달과 별... 불나방 한 마리라도 보고 싶어요. 뱀파이어면 어때. 장님 눈 띄워주는 게 기적이 아니고 뭐냐? 피 좀 나눠주세요. 뱀파이어 피가 이브도 몰아냈다며. 상현아! 현 신부님!

상현: 뱀파이어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에요. 그래도 내 피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노 신부: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노 신부도 결국 욕망에 충실한 나약한 인감임을 확인한 상현은 자신 앞의 번뇌를 잘라내듯 노 신부를 죽이고 그의 피를 마십니다. 한평생을 신앙 속에 살았어도 결국엔 모두들 자신의 욕망 앞에 무력한 인간임을 확인한 상현은 이제 그의 기도마저도 저열한 욕망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이블린을 앞에 두고 병원에 누워있는 태주에게 상현은 신과 망자를 모독하는 기도를 합니다. 상현은 더 이상 신부도 사제도 아닌, 욕망과 이기심에 복종한 나약한 괴물이 됐습니다. 순교에 대한 욕망은 피와 육욕에 대한 욕망으로 변질됐습니다. 

상현의 기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주 씨께 비옵니다, 태주 씨. 지친 잠에서 잠시 깨어 이 기도를 들으소서. 강우가 술을 좀 마신 상태였다고 말해두었으니, 태주 씨도 참고인 조사 받을 때 소주 한 병이라고 증언하소서. 힘든 시간이 지나면 우린 언제나 함께 있게 될 것이니 일단 내가 떠나 당분간은 만나지 말아야 할 줄 아옵니다. 내 얼굴은 비록 냉담하고 둔감할 것이나, 내 심장은 항상 당신을, 오직 당신만을 위해 뛰겠나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 날, 우리 끝내 행복해질 것임을 굳게 믿사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진 라 여사는 반신불구로 시체와 다름없이 생활합니다. 이제 상현과 태주에게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들에게 죽은 강우가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태주는 “그저 심리적인 거”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상현은 바로 그 “그냥 심리적인”경우가 기적을 행한 것을 라 여사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죄 없는 남편을 죽였다는 태주의 죄의식과 친한 친구를 죽였다는 상현의 죄의식은 강우라는 유령으로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죄의식과 공포로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상현과 같이 잠을 청해도,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태주는 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라 여사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상현은 태주가 자신으로 하여금 강우를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상현: 강우가 손댔어, 안 댔어?
태주: 그게 뭐가 중요해?
상현: 걔는 그거 때문에 죽은 거야.
태주: 핑계대지 마. 당신은 결국 죽였을 거야. 무슨 이유를 대서든 죽이고 나를 차지했을 걸?
상현: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사람 안 죽이려고? 그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뱃속에선 피에 굶주린 짐승이 울부짖고 날뛰는데, 행여 누구라도 다칠까봐 걸음까지 살살 다녔어. 너 때문에 무너진 거야. 너를 구하려고.
태주: 나를 구하려고? 근데 나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잠 한 번 푹 못자고 당신 그 싸늘한 손이 몸에 닿을까봐 벌벌 떠는 신세가 됐을까? 왜 이렇게 됐지? 

태주는 라 여사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실토합니다. 강우의 유령은 태주와 상현 모두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죄를 드러내게 합니다. 라 여사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기절합니다. 그리고 태주와 상현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태주: 오순도순 우리 세 식구 잘 사는 집에 들어와 가지고... 너는 병균이야! 퉤!
상현: 언제는 귀엽다며 씨발년아! 

 

상현은 태주를 죽입니다.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더 큰 지옥에 빠져버린 태주는 죽음을 원합니다. 상현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한 여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상현은,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피를 허겁지겁 빨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몸에 흘린 피를 마시다가, 나중에는 팔목을 그어 적극적으로 흡혈합니다. 그러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라 여사와 눈이 마주치고,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벌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태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태주에게 나누어 줍니다. 서로의 피가 순환이 되고, 태주는 부활합니다. 그녀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마다 뛰어다녀 생긴 발바닥의 굳은살, 남편 강우를 죽일 때 생긴 귀의 상처, 그리고 상현이 입힌 팔목의 상처가 치료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어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죄의식으로 자멸한 테레즈(태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녀가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그녀는 모든 죄의식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상현은 이제야 “사람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사람을 살렸지만, 그 사람은 괴물이 되었습니다.  

 

태주는 뱀파이어가 돼서 지옥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그녀 때문에 지옥이 됩니다. 신부였던 상현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뱀파이어의 능력이 태주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적응합니다. 그녀는 상현처럼 도덕적으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충실히 본능에 맞춰 살아갑니다. 강호가 전에 얘기한 “삶의 리듬”과 같은 문제를 태주는 고민하지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니까요. 살인과 흡혈이 생존인 뱀파이어에게 죄의식은 없습니다. 우리가 육식을 할 때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요. 하지만 상현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는 신부로써의 삶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뱀파이어로서의 삶 또한 포기하지 못합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을 같이 품에 안고 살아가려 합니다. 이들의 피는 서로 섞여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입니다. 상현은자신의 내부에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와 싸우면서, 자신의 또 다른 외부 자아인 태주와도 싸워야합니다. 상현은 점점 지쳐갑니다

태주: 난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순순히 내주면 그게 무슨 맛이야? 이게 더 맛있어.
상현: 너 맛있자고 몇 명이 죽어야 돼!
태주: 자꾸 인간적으로 생각하지 마. 인간도 아니면서.
상현: 그럼 뭐야, 우리가?
태주: 뭐긴 뭐야. 인간 먹는 짐승이지.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상현: 당신 살린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줘.
태주: 당신은 날 죽여도 후회, 살려도 후회야. 우리 이제 헤어져. 

 

이런 와중에 이들은 또 이기적인 사람들과 계속 엮어 지냅니다. 수요 마작 모임은 강우가 죽고, 라 여사가 반신불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됩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도 이들은 수요일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매주 찾아옵니다. 아마 이 씬이 <박쥐>에서 가장 인간의 이기심을 다룬 대목이 아닐까요? 원작에서도 이들의 이기심에 대해 서술합니다. 그들은 강우의 죽음에 대해서도, 라 여사의 불행에 대해서도 슬퍼하거나 위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지요. 이들이 바라는 것은 이 수요일의 모임이 계속 지속되는 것일 겁니다. 참으로 역겹습니다.  

태주: 으이그, 인간들아. 너희들은 남의 집안이 아작 났는데, 마작을 하겠다고 그렇게 오고 싶니? 

 

이런 인간들을 상대로 사건의 전말을 밝히려고 애쓰는 라 여사의 모습 또한 애처롭습니다. 이제 그녀를 지탱하는 것은 복수심뿐입니다. 라 여사는 자신의 전부인 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아들 같은 상현과 딸처럼 대한 며느리 태주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태주의 복수극에서 라 여사의 복수극으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라 여사의 복수극은 무력한 복수극입니다. 라 여사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라 여사의 기지로 수요 모임은 상현과 태주가 강우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태주는 살육을 자행합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은 상현은 큰 결심을 하고 태주에게 도망갈 준비를 하자고 합니다. 그는 태주에게 죽은 사람들에 대해 피를 뽑아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은 지금까지 보인 상현의 모습에서 가장 벗어나는 부분입니다.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해 이미 죽은 시체를 다시 ‘재활용’한다지만, 이 부분은 말 그대로 ‘인명경시’인 셈이죠. 하지만 ‘뱀파이어 상현’의 모습으로는 실용적인 제안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강우를 죽일 때도 “누구 딴 사람 죽여야 되는데. 뭐 하러 그래? 어차피 죽을 애 두고”라며 강우의 피를 마시려고도 했었죠. 이처럼 <박쥐>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되물어가며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모호한 영화입니다

상현: 이... 발목을 자른 다음에 말이야. 머리를 매달아서 욕조 위에 널어놓으면, 빨래처럼. 피가 아래로 다 빠질 텐데. 중력 때문에. 락앤락 같은데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두고두고... 양수기도 생각해봤는데, 그래봤자 이만큼 철저하게 안 뽑혀.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 아닐까?  

 

상현은 태주 몰래 함께 죽음을 맞이하러 갑니다. 그는 처음에 ‘자살 같은 순교’를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의 순교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순교 같은 자살’을 택합니다. 자신과 태주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는 죽으러 가기 전, 그를 신성시하는 추종자들에게 가서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성(神聖)을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역설적으로 그의 죽음을 신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태주와 죽음을 기다리고, 라 여사가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도록 합니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라 여사에게 사죄경을 받는 것처럼. 상현과 태주는 서로 마지막 말을 나눕니다.  

 

상현: 태주 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태주: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신앙이 있는 상현은 이 인연을 지옥에서도 이어가길 바라지만, 신앙이 없는 태주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끝입니다. 이들은 결국 만날 수 있을까요? 모를 일이죠. 하지만, 그들이 떠오르는 태양빛에 살이 타면서 바라본, 아마도 모든 뱀파이어가 꿈꾸었을 낙원인 ‘피바다’와 배경음악으로 바흐의 칸타타 「나는 만족하나이다」가 흐르는 것을 보면, 상현과 태주의 욕망은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라 여사 역시 아들을 죽인 원수들의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복수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지요. 영화의 엔딩은 우울하면서도 행복한, 모호한 결말입니다. 라 여사의 복수의 시선은 원작에서도 다루었으며, 이 영화를 복수극으로도 볼 수 있게 할 여지를 남긴 부분이기도 합니다.   

“뒤틀려 엎어진 두 시체는 등피를 씌운 램프의 노란빛을 받으며 밤새도록 식당의 마루 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경까지 약 열두 시간 동안, 뻣뻣한 몸으로 말없이 앉아서 라캥 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두 발 밑의 두 시체에 무겁고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박쥐>가 2시간 내내 이야기 한 것은 ‘딜레마’입니다. 옳고 그름을 다루는 공정함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가치가 충돌하는 윤리적인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경계에 서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숙명. 그저 경계인으로의 삶을 살지는 못하는,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현은 경계인의 삶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죽습니다. 한 인간의 실존적인 고뇌와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한 죽음은 숭고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과 욕망과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합니다.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요? 

 

 

* 덧붙임 

1. 이번에 발매된 DVD에는 극장판과 확장판이 수록되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두 판본 중 어느 판본이 감독판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각 판본마다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장판은 영화의 리듬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캐릭터를 설명하는 부분을 많이 덜어냈습니다.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들고 설명을 생략해서 모호한 느낌이 들어 서사가 좀 삐걱거리는 느낌입니다. 확장판은 삭제된 캐릭터(영화 초반에 나온 심드렁한 의사와 태주에게 피를 빨리는 첫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와 상현의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씬이 추가되었습니다.  

상현: 헌데 이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떠냐 하면요. 한마디로... 선택받은 것 같아요. 아, 내가 이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게 아니었구나. 어쨌든 나한테 어떤 특별한 역할을 맡기셨구나. 이런 거. 무슨 역할이냐? 난 모르지... 유부녀 사랑하는 역할인가? 난 모르지... 뭐, 한 사람의 흡혈귀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지 않겠어?   

 

어떤 장면들은 영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지만, 어떤 장면은, 저 장면을 왜 굳이 추가했는지 의문이 가는 장면도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표현대로, 극장판이 함축적이고 시(詩)적인 느낌이라면, 확장판은 설명이 늘어난 산문(散文)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몫입니다. 

 

2. 감독판에는 박찬욱 감독과 배우들의 코멘터리가 수록되어 있고, 확장판에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함께한 코멘터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배우들과의 코멘터리는 시끌벅적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진행되며, 각 장면을 찍었을 때 에피소드들이 언급됩니다. 송강호 씨가 인공호흡 하는 장면에서 너무 세게 눌러 상대역의 갈비뼈가 나갔다는 에피소드, 연구소의 외국인 간호사는 파주 영어마을 강사를 캐스팅했다는 비화는 꽤 재미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배우는 김옥빈 씬데, 송강호 씨와의 섹스씬이나 노출씬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점이 꽤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삽질 장면이 CG가 아니라 실제로 찍었다는 점에서 더 놀랐지요. 이동진 영화평론가와의 코멘터리는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박찬욱 감독이 호응하거나 설명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쥐>를 “뱀파이어란 환상적인 소재를 가장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 혹은 과학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작품인 『테레즈 라캥』을 가장 환상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라고 스스로 자평한 부분입니다

 

3. 서플먼트 디스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록은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먼지 아이>입니다. 먼지를 의인화해 표현한 정말이지 ‘눈부신 보석 같은’ 작품입니다. 이전에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의 경우처럼, 박찬욱 감독이 정유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을 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4.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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