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 - 전3권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미생 열풍이다. 우리 모두 "미생"이기에 깊이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다. 직장 생활을 잠깐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기에 굳이 러브 라인이 나오지 않아도 재밌다. 금요일 저녁만 되면 TV앞에 목을 쭉 빼고 앉아 있곤 한다. 드라마 미생 1-2국을 본 후 절판 위기에 처한 리미티드 에디션을 구매했다.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보다 먼저 내달리고 싶었다. 장그래와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리미티드 에디션은 생각보다 더 근사하였다. 총 9권을 3권씩 합본하여 만들어서 상당히 무겁다. 어디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없다. 그냥 제자리에 얌전히 모시고 읽어야 한다. 잘못하면 흉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근사한 책이 처음 온 날, 내 옆에서 아들도 함께 읽었다. 드라마를 같이 본 터라 저도 궁금했었나 보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면 충분히 읽을만하다.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장면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은 직장인의 애환을 공감할 능력이 안 되어서 잠깐 같이 읽다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10년 넘게 바둑 프로 기사가 되기 위해 정진했던 장그래는 결국 꿈을 접어야 했다. 바둑을 끝낸다는 것은 어쩌면 장그래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나이 26세,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아무런 스펙도 없이 낙하산 발령을 받아 대기업 인턴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졸 출신인데 낙하산이라니....그 이유만으로 다른 인턴들에게 밉보이고 장그래의 힘든 인턴 생활이 시작된다. 26세 동안 오직 바둑판만 보며 살았던 장그래에게 있어서 회사라는 거대한 바둑판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승부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살아남아야 함은 물론이다. 미생은 세기의 대결이었던 조훈현 9단과 중국 녜웨이핑 9단과의 마지막 승부를 에피소드 앞에 배치하여 바둑과 삶과의 연관성을 철학적으로 풀어주고 있다. 바둑을 잘 모르는 문외한이지만서도 두 바둑 고수의 대결 또한 정말 멋지다. 바둑과 삶을 이렇게 연관지을 수 있다니 작가와 바둑해설가의 내공이 대단하다 싶다.

 

  다양한 스펙을 필요로 하는 종합 상사에서 장그래는 뭐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특유의 통찰력과 좋은 멘토(오과장, 김대리)의 조력으로 점점 상사맨이 되어간다. 드라마에서는 오과장이 초반에 장그래를 굉장히 무시하고 핍박하는 성깔 있는 상사로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아니다. 오히려 장그래를 챙겨주는 편이다. 오과장, 천과장, 김대리, 장그래가 활동하는 영업 3팀은 다른 부서와는 참 다르다. 다른 팀처럼 일을 하는 것은 같지만 영업 3팀은 끈끈한 동지애로 팀웍을 중요시하는 부서이다. 장그래 팀과 안영이가 속한 자원팀은 그런 면에서 사뭇 대조적이다. 오과장이 장그래를 팀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 혼자 하는 일이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 또 우여곡절 끝에 오과장의 마음을 얻던 날 오과장 입에서 " 우리 애만 혼났잖아" 하는 말이 장그래의 기억 속에서 무한 반복된다. 두 에피소드는 결코 우리 일이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협력하여 만들어 내는 결정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속한 직장은 장그래가 속한 종합상사보다는 출퇴근이 정확하고, 위계질서가 깍듯하지도 않으며, 다 된 일이 누군가의 정치로 뒤엎어지거나,  술 대접을 해야 하는 등의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여기도 직장이기에 장그래와 오과장이 겪는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미생에 열광하는 것은 장그래와 오과장, 김대리 즉 영업 3팀이 느끼는 열정, 절망, 희망, 분노 등을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오과장이라는 인물은 윗사람에게는 가히 이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가시 같은 존재다. 능력도 있으면서, 신념도 있고, 정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며 아부를 모른다. 그런 오과장이기에 회사에서는 버릴 수도 내칠 수도 없다. 오과장의 그런 성격이 누구나 꺼려하는 내부 고발도 하게 만들고, 그 일 때문에 오과장을 비롯한 영업 3팀은 다른 부서들의 눈총을 받기도 한다. 오 과장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군중들은 그의 신념과 용기를 칭찬하고 격력해주기 보다 오히려 " 너 혼자 잘 났냐?" " 너 혼자 깨끗하나?" " 모 나면 정 맞는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오 과장이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고뇌하는 모습이 남일 같지 않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도 모두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 자기가 속한 사회를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오과장의 고뇌을 이해할 수 있다. 조직에서 곪아터진 것을 밖으로 꺼내려면 그걸 말하는 사람의 고통 또한 아주 크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알던 선배는 하도 속앓이를 해서 늘 장이 안 좋았다. 그만큼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힘들다. 왜 그들은 자기 몸을 축내면서까지 그런 일을 굳이 하는가! 그냥 남들처럼 열심히 일만 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면 될 것을 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일까.  

 

  얼마 전 소셜 테이너였던 신해철 씨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평소에 독설을 잘하던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도 다른 가수처럼 노래만 부르면 될 것을 사회 곳곳 후미진 곳을 둘러보고, 썪은 내가 나는 곳을 후벼파는 일을 한 덕분에 욕을 엄청 먹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도 한 명의 오과장이 아니었을까! 그가 영면을 하자 그의 몫까지 하겠다며 한 명의 가수가 나섰다. 그도 뮤지션으로만 살아도 될 것을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많지는 않지만 소수의 오과장이 존재한다. 그들은 왜 속 시끄러운 일을 자청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회가 덜 부패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일 게다. 조금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일 게다. 오과장의 말처럼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일 게다.

 

  미생에 흐르는 또 하나의 기저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 노선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이 낙하산으로 상사에 들어온 장그래가 한 사람의 몫을 해나갈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오과장과 김대리 덕분이다. 오과장 같은 사람은 윗사람 뿐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도 껄끄러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사서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니깐. 그러나 김대리와 장그래는 오과장을 신뢰하고 그의 신조나 가치관을 존중한다. 심지어 장그래는 오과장을 멘토와 아버지처럼 여기며 그가 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제 일처럼 한다. 장그래는 오과장을 통해서 회사는 단지 일만 하는 곳이 아니고,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듯하다. 장그래처럼 오과장을 만나느냐 아니면 고가점수만 챙겨 승진에만 목매는 상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나도 현장에서 수많은 만남을 통해 어떤 교육자가 되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자신만의 안위를 벗어 던지고 좀더 좋은 교육 현장과 아이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던 선배들, 40년 넘게 교단에 서시며 터득하신 노하우와 삶의 보따리를 하나둘 풀어내 주시던 선배들,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후배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하였다. 나 밖에 보지 못했던 시야가 넓어졌고, 사회와 정치에도 관심이 생겼으며, 무엇보다 수퍼남매와 가르치는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엄마와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과장도, 장그래도, 나도 미생이다. 더구나 현실은 냉정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회사의 잘못된 관행이나 비리를 고발한 영업3팀은 영웅이 되기보다 천덕꾸러기가 되고만다. 현실도 그렇다. 미생의 마지막 부분은 오과장 같은 삶의 종국은 어떤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작가는 아무런 스펙 없는 장그래와 오과장의 종착지는 현실적으로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독자로 하여금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게 만들지 않는다. 이윤말을 추구해야 하는 회사에서 오과장 같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과장 같이 살기로 했다는 것은 승진과는 멀어진다는 의미이며, 속 시끄럽게 살겠다는 것이며, 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며, 편안한 고속도로가 아닌 비포장도로를 천천히 걸어가겠다는 의미가 된다. 어떤 삶을 살지는 결국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며, 책임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 길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 배우자, 친구, 교사, 선배, 후배, 책 속의 인물들.....그들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결국 어떤 삶을 살지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오과장, 김대리, 장그래에게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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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4-11-1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으로 페이퍼 쓰다왔는데, 쓸까말까 고민되네요. ^^;
정성스럽게 쓰신 글 잘읽었습니다.

수퍼남매맘 2014-11-12 07:24   좋아요 0 | URL
아휴~~ 부끄럽습니다. 정말 재밌고 감동 받아서 열심히 써 보긴했지만 필력이 약해서
느낀 것의 1/10도 표현을 못 했네요.
서니데이님의 페이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