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기운이 살짝.


뭔가 되려고 읽은 것은 아니었는데, 읽으니 자꾸 뭐라도 되고 싶은 욕심이 난다. 채 얼마 읽지도 않았으면서 염치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들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한없이 앉아있을 텐데. 아무래도 살아 지나온 시간들이 너무 가볍다. 글로 옮기면 활자들이 날아올라 옅게 증발할 것 같은 말들, 경험들, 기억들. 소소해서 보잘 것 없거나, 혹은 소소한 것들 사이에서 선함과 아름다움을 캐어낼 눈과 손이 없거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syo야, 이놈 자식아, 니가 지금 읽는다고 읽지만, 봐, 사람 앞에 앉혀두고 십 분을 이야기 나눠도 듣는 게 있고 말하는 게 있는데, 책 한 권과 두 시간을 씨름하면서 읽기만 할 뿐 쓰는 게 하나도 없다면, 뭔가 이상하잖아?


결국 읽는 일도 지금 똑바로 굴러가고 있지 않다는 것. 



171001 ~ 171010 27권


문학 10권




1. 히로시마 내 사랑

: 고통은 사랑이 되고 사랑은 망각이 되고 망각은 이름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마침내 고통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 밤 이후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건, 결국 모든 일의 행로는 한 군데다. 히로시마와 느베르는 그들 바깥의 그 무엇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향하는 그곳으로 가기 위한 연쇄충돌 가운데 한 지점일 뿐이다.


2. 법 앞에서 

: 마음의 밑바닥을 박박 긁는 글쓰기. 카프카의 글에 공명하려면, 내 마음에도 바닥과 맞닿은 데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카프카를 읽다가, 와, 내 이야기 같아,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날 저녁은 혼자서 보내지 않으시기를 권합니다.


3. 그늘의 발달

: 이게 다 박재삼 때문이다.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시가 좋아 많이 읽으면서도 내 또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슥슥 받아들이는 뇌구조가 되지 못하고,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고민 없이 문태준을 꼽는 것도. 모든 게 다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때문이야.


4.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사랑받는 시집은 사랑받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들을 다 알아 내 그러모아도 사랑받는 시집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랑받는 시집은 사랑받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5. 밤이 선생이다

: 오래 읽은 사람이 쓰는 글, 오래 쓴 사람이 읽는 세상. 오래 오래 읽고 쓰시기를.


6. 녹턴

: 며칠 전 쓰기를,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읽겠다는 전략의 문제였는지 뭔지, 너어어어어무 재미없어서 잠만 잘 잤다." 했는데, 통렬하게 반성한다. 재밌다. 웃긴다. 웃길 줄 아는 사람이다.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읽은 책에 대해 다시는 지껄이지 말자. 그건 읽은 거 아니다.....


7. 창백한 언덕 풍경

: 우울하고, 괴기스럽고, 떠도는 이야기들. 안개처럼 흐릿하고 퍼져 있어 실체를 드문드문 비추는 서술들.


8.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쓴 글들이라 그런가, 뭐 쏘쏘임. 그나마 최근 것들 읽으면서 이 사람 에세이는 솔직히 나랑 잘 안맞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굉장히 많이 나아진 거였어.


9.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시기에 쓴 이 글들은 또 낄낄 웃으며 재밌게 읽었다. 무라카미의 에세이는 정말 알 수가 없다. 허허.


10.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 이 책 읽혀주고 싶은 사람 많다. 대구 경북에는 더 많다. 읽고 알았으면 좋겠다. 자기가 헤쳐온 삶에 문제가 없음을 확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보일 수 있는지를.




힘내라, 마르크스!! 9권




11. 마르크스 평전

: 그야말로 "평전"다운 구성이다. 벌린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반면 아탈리는 그의 외모, 말투, 버릇, 인간성부터 철학과 투쟁이 전개되는 과정들을 고루 묘사한다. 재미는 이쪽이 좀 더 있다. 아무래도 사람 냄새가 더 난다.


12. 칼 마르크스 전기 2

: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라는 책에서 이 책을 제외한 그 어떤 마르크스 평전도 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소개해놔서 기어이 사서들로 하여금 도서관의 보존서고를 뒤져내게 시켜 찾아낸 책이다. 1권은 소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소련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가 1973년 출판한 작품인데, 칭찬받을 만하다. 정말 건조한, 미사여구가 거의 없는 건조한 서술에 두 권 합치면 1000페이지가 되는 방대한 양. 그런데 그 건조한 서술이 독자를 혼란시키는 일 없이 돌직구로 쏙쏙 꽂아준다. 물론 100퍼센트 객관적인 책이라고 할 수는 없고, 소련에서 나온 책들이 열심히 까인다는 말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최고의 전기라 우긴다면 그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본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가장 "정통적"이고 "완벽한" 전기라는 말은 인정. 아, 갖고 싶다, 이 책.


13.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 왜 이 책을 개론서 가운데 최고라 부르는지 책이 스스로 여실히 증명했다. 이 책 한 권 들면, 필요 없어지는 자잘한 책들의 목록이 길다.


14.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 입문서는 단연 앨피, 아직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는 탄탄한 시리즈. 


15. 자본과 노동

: 마르크스가 직접 손을 댄 <자본>의 입문서. 희한하긴 한데, 읽는 사람이 거의 없는 분위기. 


16.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운동 공산주의 선언

: 정말 하나도, 하나도 틀린 말, 혹은 틀려진 말이 없는 200년 전의 말. 이런 글을 뚝딱뚝딱 쓰는 남자. 멋진 남자 마르크스.


17. 마르크스 21세기에 끌려오다

: 마르크스의 이름은 절반 정도는 훼이크고, 제국, 문화, 종교, 타자, 세계화, 젠더 등 21세기를 진동하는 굵은 이슈들을 다루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쇄신되어야 하는지를 폭넓게 따져보는 좋은 책.


18.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철학적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푸는 책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사실 오히려 비전공자 입장에서 마르크스는 의외로 어렵지 않은 철학자다. 그러나 본격 경제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어떨까.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엄청 어렵고 복잡한 세계가 기다릴 걸? 근데, 한 번 열어보고 싶지 않니? 위협하면서도 유혹하는 희한한(어쩌면 유혹이 다 그런건지도) 책 되겠다.


19.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 선언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선언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는 다수의 혁명들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일품이다. 게다가 고병권 선생님의 해제는 그야말로 용 눈알에 점을 찍는다.




그 외 8권




20. 일요일의 인문학

: 의외로(?) 속눈썹이 긴 장석주 선생님. 이 책이 유독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제 장석주를 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글들이 마음을 흔들기보다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존재 자체로 여전히 가치 있는 작가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내 독서는 내 개인의 문제니까. 


21. 물욕 없는 세계

: 그러니까, 지금 자본주의의 목에 칼을 가장 깊숙이 대고 있는 전사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들이 자본주의 소비와 소유 자체에서 일제히 이탈하여 자본을 굶기는 일이라는 것인데, 흥미롭다. 자본이 그렇게 쉽사리 죽어주진 않겠지만. 병행 전략으로 의미가 있겠다.


22. 강영계 교수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

: 크다, 넓다, 든 것이 많다, 낡았다.


23. 자크 라캉의 세미나 읽기

: 아니야, 아직 아니었어.....


24. 푸코 & 하버마스

: 백만 년만에 슬쩍 다시 간 보고 있는 푸코. 진정한 빨갱이가 되려면 알아야 할 게 많다.


25. 시몬 드 보부아르 익숙한 타자

: 지금 보부아르는 번역된 책도 구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입문서조차 충분치 않은 실정이다. 좀 더 알고 싶다 싶을 때쯤 휙 넘어가는 아쉬운 책이지만, 아쉬우나마 시작하기에는 이보다 더 마땅한 책이 없다.


26. 영어어순훈련 수식

27. 뉴욕 의사의 백신영어




연휴 전에 읽겠다고 쌓아 놓은 책탑은, 사실 망했다. 연휴라서 더 많이 읽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syo는 친구가 꽤 많은 놈이었고, 연휴가 길다 보니 친구들도 이런 저런 생각 끝에 syo를 떠올린 모양이고, 줄창 술을 마시다 보니 몇 번을 토했는지 모를 지경이다..... 가로수야, 미안하다. 그런 봉변은 처음이지?


계절이 바뀌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진지하게 한 번 또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140년 쯤 더 살 계획이니까, 휴, 생각할 게 산더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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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10-1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드리기 엄청 조심스러운데요. ㅎ
syo 님이면 <자본론> 바로 들어가실 것 같은데,
얼마나 관련서 더 읽으시려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syo 님 자꾸 이러시면 전 죽기 전 <자본론> 못 읽을 거 같습니다. ㅠㅠ

syo 2017-10-10 21:03   좋아요 1 | URL
하하하, 제가 겁쟁이라서 자꾸 도망치고 있었는데 북다님한테 딱 붙들렸네요.

기왕 말씀 나왔는데, 지금 읽고 있는 알튀세르 한 권만 다 읽고 당돌하게 자본론 도전해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10-10 21:12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가 쓴 <알튀세르~> 뭐 인가요? 저도 사서 쟁겨 놓은 책입니다. ㅎㅎ
syo 님의 <자본론> 리뷰 학수고대 합니다. ^^

syo 2017-10-10 21:16   좋아요 1 | URL
말씀하시는 책이 뭔지 모르겠어요 ㅎㅎ 그냥 알튀세르가 쓴 책 중 그래도 제일 쉽다는 <아미엥에서의 주장>입니다.

<자본론> 리뷰는 가능할까요 과연.....ㅠㅠ

북다이제스터 2017-10-10 21:23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 ~> 뭐 였습니다.
ㅎㅎ 죄송합니다. ^^

서니데이 2017-10-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저만큼 읽으려면 매일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읽으셨을것 같은데요. 연휴에도 책읽느라 바쁘셨겠어요.
syo님 편안하고 좋은밤되세요.^^

syo 2017-10-10 21:18   좋아요 1 | URL
못 마시는 술과 술과 술로 점철된 연휴였답니다....
어제까지 삐져 있던 syo의 간이 이제 좀 온화해졌네요.

서니데이님도 하루 마무리 잘 하셔요^^

cyrus 2017-10-10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마르크스 관련 글을 읽을 때마다 syo님에게 합동북이라는 헌책방을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대구에서 가장 큰 헌책방인데, 이곳은 80년대에 나온 마르크스, 레닌 관련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어요. 요즘 나오는 사회주의 서적과 비교하면 철 지난 내용이지만, 그래도 잘 살펴보면 건질만한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

syo 2017-10-10 22:09   좋아요 0 | URL
이런 걸 왜 이제 알려주셨나요.....
<아미엥에서의 주장>이 있네요! <칼 마르크스 전기 1>의 다른 번역본으로 보이는 책도 있고....

조만간 방문예정입니다.

아타락시아 2017-10-1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 연휴동안 힘들게 9권 읽었는데, 27권 이라니. 더구나 쉬운 책은 하나도 안 보이네요. 대단하세요.^^

syo 2017-10-11 09:42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30권을 읽어도 3권 읽는 효과밖에 없는 모질이 독서법입니다.^^

독서괭 2017-10-1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단에 많은 소소한 애서가들이 뜨끔 공감할 것 같네요.
가로수야 미안하다 에서 빵 터졌습니다. 왜 그러셨어요?ㅋㅋㅋ 역시 인생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군요. 그래도 그 와중에 이만큼 읽으시다니 훌륭하십니다^^

syo 2017-10-11 16: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 와중에 ㅎㅎㅎㅎ

그 가로수 죽거나 그러진 않았겠죠, 설마?
 


1


철원의 하늘에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이 박혀 있었지만 밤이 더 어두웠으므로 겹겹이 둘러친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자. 그저 저 어둠으로부터 무엇인가 걸어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높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이윽고 말이 되었다. 그 말에 묶인 우리는 낮은 사람이었으므로, 공포탄이 든 총을 메고 밤마다 한없이 어둠을 쏘아보며 시간을 녹여야 했지만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저 어둠이 적을 품고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어둠이 많았다. 우리가 두 시간을 마주보고 서 있으면 어둠도 몸을 뒤척인다는 것을, 때론 완전히 돌아눕기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 가고 조금 더 짙은 어둠이 오는 그 희미한 경계선, 어쩐지 그 시간은 항상 나의 몫이었다. 어둠에 시선을 바치며 하루 하루 줄어드는 날을 아껴 헤던 밤들, 쏘지 않은 총을 둘러메고 새벽을 되밟아 다시 돌아오던 그 길들이 쌓여서 어쩌면 우리의 눈동자도 조금은 더 어두워졌을까.  






가장 밑바닥 후미진 곳에 사는 조개 속에 진주가 숨겨져 있는 법이다. 지금 세상에야 그렇다는 사실을 종종 잊거나 아니면 부정하는 세태로까지 되고 말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검은색이 사실은 가장 밝은 색이듯이, 그리고 검은색 속에야말로 세상의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듯이, 그러나 우리가 다만 검은색으로 보고 있을 따름이듯이, 바로 그 진실을 잊어먹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그 어둠이라는 것을.

_공선옥 김미월,『내가 사랑한 여자』



난 달을 사랑해서 울어요, 그 사람이 말했다. 어렸을 때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단 한 번 봤어요, 하지만 이 궁전에 갇혀 있어 달에 닿을 수가 없어요, 밤중에 풀밭에 드러누워 달빛에 입을 맞추기만 해도 좋을 거예요, 하지만 이 궁전에 갇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이 궁전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_안토니오 타부키,『꿈의 꿈』



이제 사람들은 하나로 융합되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눈이 내면을 향하고, 머릿속에서는 옛날 일들이 펼쳐진다. 그들의 슬픔은 휴식 같고, 잠 같다.

_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 1』



여기는 세상 끝이야. 세상 끝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 세상 끝에 있었다는 것은 멀리 멀리 여행하기를 사랑한다는 뜻이야. 멀리 가보거라.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더 보자꾸나.

_정혜윤,『인생의 일요일들』




2


그 많은 밤을 당신과 함께 깊어졌으므로, 어찌 당신과 나 사이에 이야기가 없겠습니까.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풀어낼 마음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우리는 어리고 어리석었지만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저 수많은 어둠들이, 오늘도 그 땅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어둠들이, 당신과 내가 내려놓고 나온 빈 총을 지금 다시 메고 선 앳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녹이고 있을 우리의 그 어둠들이 모두 다 보았는데요. 그 어둠 속에 묻어놓고 왔다고 생각한 긴 이야기들을 당신과 내가 무엇이라 부르건, 술잔을 마주 든 우리의 눈동자에 이미 그 어둠이 묻었는데요. 이야기가 있는데, 어찌 이야기가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야기와, 이야기에 엉킨 어둠까지, 이제 당신과 나는 당당하게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칼, 네가 너무 이성적이라는 점이 슬프구나. 너는 내 편지를 깊은 사랑의 척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아주 많이 느끼면서도 말은 아주 적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_자크 아탈리,『마르크스 평전』



그들은 달라진 공기 속에 고립되어 흩어져 있던 당신과 나였다. 스스로 또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벽, 우리의 생존이 생존하는 만큼 두터워지는 벽. 우리가 서로를 향해 둘러친 벽. 그 벽에 갇혀 있던 당신과 나였다. 각자의 구속에 길들여져 있던 당신과 내가 다시 광장에 모인 것이었다. 그날 대기는 생동하는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발하고, 즐거워하고, 빛나고, 춤추고, 떠돌고, 잡히지 않는 공기였다.

_김은산 외,『기억극장』



삶의 어떤 부분은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가볍고 우스운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느 날 삶을 텅 비게 하는 것, 쓸모없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 아무것도 없는 오늘을 견뎌야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_전지영,『책, 고양이, 오후』



만약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예정이었던 인생'까지 동시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_가시라기 히로키,『절망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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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0-1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스스로가 <마르크스 평전> 인용문에 꽂히는 사람일거라 예상했는데ㅎㅎㅎㅎㅎ
실상은 <절망독서>인용문에 눈이 번쩍하네요. @@

첫 문단 넘 좋아요.

그 말에 묶인 우리는 낮은 사람이었으므로..

이 문장이 일면 슬프면서도 근사해요.

syo 2017-10-09 00:10   좋아요 0 | URL
보초 서기 참 싫었어요. 같이 서던 사람들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겨우겨우 버텼던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다 추억이지만요 ㅎㅎ

독서괭 2017-10-0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아주 많이 느끼면서도 말은 아주 적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 전 이 문장이 좋네요.
철원의 하늘, 이 글은 참 먹먹합니다. 새삼 분단의 현실과 거기서 파생되는 각종 비극들을 가슴 아프게 되새기게 하네요..

syo 2017-10-09 21:55   좋아요 0 | URL
직접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들이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먼지처럼 흩어지네요.

연휴가 완전 끝났네요. 독서괭님 좋은 한 주 되시기를.

다락방 2017-10-1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예정이었던 인생‘까지 동시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문장 너무 좋아요, 쇼님.


잘 지냈어요?

syo 2017-10-10 11:55   좋아요 0 | URL
저야 항상 연휴니까요!! 다락방님은 즐거운 여행 다녀오셨어요?? ㅎㅎㅎ

사진 많이 올려주세요^^
 

 

 

응구기 와 티옹오 와 가즈오 이시구로 와 노벨 문학상

 

 

1

 

노벨 문학상 예측하는 영국의 "래드브룩스"던가 하는 도박사이트는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망하지 않는 것일까. 오르한 파묵 이후로 10년이 지났는데 맞히는 꼴을 본 적이 없을 뿐더러, 배당률 3위 안에 수상자가 있기만 해도 선방이다. 이것은 물론 스웨덴 아카데미의 "옛다, 빅엿" 전략전술의 탓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예측했었어야지. 남의 돈 먹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매너리즘에 빠져가지고 벌써 몇 년째 1,2 위에 계속 무라카미와 응구기를 박아 놓더니, 잘 한다 잘 해.

 

그러나 솔직히 올해는 응구기 와 티옹오(이하 응구기, 우연히 응국이로 오타가 난다면 정다워 굳이 고치지 않아 볼까 합니다)가 받을 줄 알았다. 무라카미는 어쩐지 미운 털 박힌 느낌이고, 인종이나 대륙적 안배부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이번에는 응구기다, 한두 해 깜짝 선정 했으니, 올해는 무난하게 응국이다, syo는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며칠 전 책을 정리하면서 박스에 들어가 있던 여러 출판사의 세계문학 전집들을 꺼내어 책장에 주욱 꽂는데, 딱 한 권 있는 응구기의 책이 어찌나 번쩍번쩍 빛나는지, 아, 이건 징조다, 올해는 응국이가 득세할 것이야, 하는 느낌이 뽝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중 가장 오른쪽(syo는 전집류를 정리할 때 번호와 무관하게 오른쪽부터 읽을 순서대로 채워나가므로, 가장 오른쪽이 제일 먼저 읽을 책, 가장 왼쪽이 제일 나중에 읽을 책이 된다)에 응구기가 당당히 꽂혔다. 노벨상 발표 나면 바로 읽는다, 응국이. 마르크스가 책상 위에 바글바글하지만, 응국이 퍼스트.

 

그랬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라니. 밥 딜런급 충격을 먹은 syo는, 딱 한 권,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이 내게도 있었음을 기억하고 먹던 숟가락을 내동댕이 치고는 방문을 벌컥 열어 책장을 쳐다봤는데, 있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녹턴>이. 응구기의 책 바로 오른쪽에. 그러니까,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응국이의 책 바로 옆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 가운데 가장 나중에 읽어도 될 녀석으로 취급받은 가즈오의 책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아, 어쩔거나, syo의 이 무시무시한 안목을.  

 

 

 

 

 

2

 

매년 노벨 문학상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사실 syo는 세계문학에 조예가 없다. 처음 응구기가 한국 언론에 이름을 드러내던 시절, 내가 처음 본 응국이 기사에서는 그의 이름을 "응구기와 시옹오"라고 적어 놓았다. 그 무자비한 띄어쓰기 덕에 무지몽매한 syo는 그만 응구기 와 티옹오가 "응구기"와 "시옹오" 듀엣이거나 그들을 주축으로 하는 문학창작집단인 줄 알았다. 철이와 미애, 김앤장.

 

가즈오 이시구로도 그렇다. 한동안 계속 그 이름이 귀에 오르던 때가 있어서 읽어 보겠다고 처음 집어 든 것이 저 <녹턴>이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읽겠다는 전략의 문제였는지 뭔지, 너어어어어무 재미가 없어서 잠만 잘 잤다. 숙면엔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의 훨씬 더 재밌는 작품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벌써 색안경 착용 끝났고, 잘만큼 잤다. 결국 여지껏 그의 책은 한 권도 펼쳐보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사실 syo가 응원하는 것은 쿤데라다. 다들(syo포함) 이제 그가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예측하지만, 쿤데라는 노벨상 받기 전에는 절대 눈을 감지 않겠다는 듯 장수하고 있다. 노벨상을 받기 전까지는 내 눈에 흙이 들어오는 것은 안 돼. 응원한다. 그에게 주거나, 사후에도 받을 수 있게 규정을 고치거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쿤데라의 장례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쿤데라, 화이팅!

 

어쨌거나 이제 가즈오 이시구로 읽어야지, 노벨상인데. 세상에는 노벨상 띄지를 둘러 책 파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을 장사꾼이라 욕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소에는 책 한 권 안 읽다가 노벨상 받았다고 하니 꼬물꼬물 읽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을 속물이라 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좋은 책 읽는데 동기나 계기가 뭐 그리 중요할려고. syo는 어떤 이유에서든 한 권 더 읽는 사람들의 편이고, 누군가의 서재에 책 한 권이 더 꽂히는 과정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응원한다.

 

 

 

 

 

 

 

3

 

노벨상 관련해서 소소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로쟈님께 최초로 전한 사람이 syo였다.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날 그 시간 로쟈님은 남산도서관에서 강연(정확하진 않지만,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배운 것 같다)을 하시는 중이었으며, syo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아주 총명한 눈으로 강의를 듣던 중이었다. syo가 물었다. 선생님은 노벨상, 누구로 예측하세요? 로쟈님은 즉답을 피했으나, 조심스럽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번역된 책에 서문인지 추천사인지를 쓰셨다고 하신 것 같다. 받을 것 같다는 말씀은 아니구요,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말씀도 하신 것 같고.

 

강연은 이어지고, 1분 단위로 검색창에 노벨문학상을 때려 넣던 syo의 시야에 마침내 기사가 잡혔다. 로쟈님의 이야기가 잠깐 멈춘 틈에 syo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크라이나 작가가 수상했다고 기사가 났습니다. 로쟈님이 대답했다. 아, 기사가 났습니까? syo가 대답했다. 네. 그때 로쟈님이, 안경을 살짝 올리시며 말씀하셨다. 우크라이나 태생이지만, 벨라루스 작가입니다. 세상 그럴 수가 없이 득의양양한 눈빛이셨다. 아니, 선생님. 받을 것 같다는 말씀은 아니셨다면서요.

 

쉬는 시간에 전화를 받으러 나가시던 로쟈님은, 쉬는 시간이 끝나고도 5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강의실에 돌아오셨다.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저한테 노벨문학상 축하 전화를 하는군요. 하셨다. 장내는 빵 터졌다. 밤은 늦었고, 피곤하셨을텐데도, 이어지는 강연에서 로쟈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신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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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7-10-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즈오 이시구로, 최악의 선택입니다. 이러니 제가 그 상을 밸(창자)이 없는 인간들이나 받는 노밸상이라고 비아냥거리고 다니지요.

syo 2017-10-06 13:03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폴스타프님께서 가즈오 이시구로 탈탈 터셨던 기억이 납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였었나요....

Falstaff 2017-10-1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예. 그 작품이었지요. 응국이하고 비교하면 응국이 화내요. ㅋㅋㅋ 응국이 한국 원주에도 왔었다네요. 피의 꽃잎 대빵이고요, 그만 못 하지만 십자가 위의 악마도 괜찮던데요.

syo 2017-10-06 14:09   좋아요 0 | URL
역시 당초 계획대로 응국이를 먼저 읽어야겠군요...... 응국이 화 내기 전에ㅎㅎ

시이소오 2017-10-0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구기와 시옹오 ㅋㅋㅋ
웃다갑니다. 쿤데라 죽기전에 줘야할텐데 걱정이네요 ㅎ

syo 2017-10-06 18:43   좋아요 0 | URL
쿤데라는 죽지 않아요. 쿤데라는 불멸입니다. 한림원것들이 제 아무리 버팅겨도, 노벨상 받고 떠날 겁니다. 쿤데라 화이팅. ㅎㅎㅎㅎㅎㅎ

사마천 2017-10-0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틀리니까 사이트가 돈 버는 것 아닌가요? 배당금 돈 줄 필요도 없고 ^^

syo 2017-10-06 21:13   좋아요 2 | URL
세상에, 그런 단순한 비밀이 있었군요..... 굉장히 일을 잘하는 단체였네요.

다락방 2017-10-1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시구로 두 권이나 읽었지롱요. 딱히 재미없는 녹턴이랑 재미있는 [나를 보내지마] 이렇게 두 권이요. 그리고 한 권 더 가지고 있어요. 후훗.

그나저나 로쟈님과 그런 일화가 있었단 말입니까? 재미있네요. 후훗.

syo 2017-10-10 11:58   좋아요 0 | URL
와하하, 저는 저 글을 쓰고 대구 시내에 있는 도서관을 뒤져서 이시구로 책을 싹 다 긁어왔어요.

이시구로가 책을 쓴 순서대로 읽기 시작해서 지금 두 권 읽었으니 녹턴까지 해서 세권이지롱요^^

근데 다시 읽으니까 녹턴 재밌었어요....

다락방 2017-10-10 12:13   좋아요 0 | URL
분하다....어쩐지 뭔가 다 분하다....(부들부들)

syo 2017-10-10 12:23   좋아요 0 | URL
뭐가 분해요. 제가 방구석에서 이시구로 읽는 동안 이시구로가 사는 나라에 다녀오신 분이.....

cyrus 2017-10-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나오기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이시구로의 책 한 두 권 만나 볼 수 있었어요. 당분간은 이시구로의 책을 파는 사람들이 없을 거예요. ^^;;

syo 2017-10-10 22:10   좋아요 0 | URL
역대급 판매고라는군요. 최근 몇년간 노벨상 특수 가운데 제일 큰 규모라네요.

cyrus 2017-10-10 22:11   좋아요 0 | URL
이 정도면 민음사의 완벽한 승리군요.. ㅎㅎㅎ

syo 2017-10-10 22:15   좋아요 0 | URL
고은이 받았으면 이만큼 못 벌었을걸요 ㅎㅎㅎ 앉아서 돈벼락.

북다이제스터 2017-10-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동경제학 학자가 얼마 안 되어 또 노벨경제학 상을 받다니 많은 걸 생각하게 됩니다.
정통 경제학은 더 이상 인정할 것이 없다라는 추정도 됩니다. 하지만, 행동경제학, 특히 <넛지>도 자본주의 태두리에 있단 생각에 많이 씁쓸합니다. ㅠㅠ

syo 2017-10-10 22:35   좋아요 0 | URL
저는 경제학은 잘 모르지만, 저 노벨상은 행동경제학이라는 것이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을 전복하기보다 주류경제학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그러니까 신자유주의적 주류경제학이 행동경제를 흡수하여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북다이제스터 2017-10-10 22:45   좋아요 0 | URL
네 맞는 말씀입니다.
<넛지> 읽어보면 마르크스보다 리카도에 많이 가깝다고 전 느꼈습니다.
언제쯤 되어야 <자본론>이 재해석되어 그런 유사 책이 노벨경제학상 받을지, 그런 날이 곧 올지... 궁금합니다. 답답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0-1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국이 ㅎㅎㅎ 저도 아직 안 읽었는데 이 글을 보니 읽고 싶어지네요^^

syo 2017-10-10 22:51   좋아요 0 | URL
저도.... 응국이 먼저 읽겠다 해놓고 이시구로 먼저 읽고 있습니다... 그놈의 노벨상이 뭔지ㅎㅎㅎ

짜라투스트라 2017-10-10 22:52   좋아요 0 | URL
ㅋㅋㅋ
 


1


연휴에 좀 쉬지 않고 책탑 쌓아 놓는 syo의 육신과 정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따뜻한 댓글 달아주시는 이웃분들, 감사합니다. 그러나 syo는 괜찮습니다. syo는 백수라서 1년이 어차피 365일짜리 연휴랍니다. 맨날 피둥피둥 잘 쉬고 있으니 심려 마시옵고, 다들 훈훈한 명절, 배려하는 대화가 오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부산스럽지 않은 버팀목임을 확인하는 단단한 명절 되시기를. 


한가위 달덩이 같은 프로필 이미지를 쓰는 syo 올림.



 "제가 탈 기차는 좀 나중에 떠납니다." 내가 말했다.


 "아, 그럼 걱정 마세요." 그가 말했다. "제 시간에 차장이 와서 깨울 겁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이 가방들을 들고서, 다시 만날 기회는 없겠지요. 여행 잘 하시길 바랍니다."


_안토니오 타부키,『인도 야상곡』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어

 살기도 한다


_박연준,「고요한 싸움」부분




2


그래도 명절인데, 뭐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한 뼘만큼이라도 바뀌어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둘러보았지만 무언가 더 가지는 일은 품이 많이 들어 결국 정리하고 버리는 일들로 한가위를 채우고 있다. 책들, 욕심에 쌓아 올린 박스들, 지난 한가위부터 열어보지 않았고 다음 한가위까지도 펼쳐보지 않을 책들을 끄집어 내 빗소리라도 좀 듣게 해 준다. 이별 선물이다. 어린 날 허영에 눈 멀어 필요하다고 믿었거나 혹은 속였거나 하면서 사들였던 아이들. 눈길은 몇 번 주고, 손길은 한두 번만 주었던, 업어올 땐 소중했던 그 아이들을 초라하게 만든 것은 다 나였으니까. 미안하다 얘들아. 





저는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을 옷을 버리듯이 내버려요. 모두들 큰 충격을 받지요. 제 친구들은 책이라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친구들은 베스트셀러는 뭐든 다 가져다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끝내버려요. 건너뛰는 데가 많을 거다, 하는 게 제 생각이지요. 그러고는 뭐든 두 번 다시 읽지 않으니 1년쯤 지나면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러는 사람들이 정작 제가 책 한 권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누구한테 주는 걸 보면 펄펄 뛰는 거예요.


_헬렌 한프,『채링크로스 84번지』



갑자기 내 모든 책이 더는 필요치 않았다. 단순한 물건들인 듯했다. 내 창작 생활의 닻이 사라지고, 나를 이끌던 별들이 물러났다. 내 앞에 새로운 빈방이 보였다.


_줌파 라히리,『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책을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쌓아두는 사람은, 개인차가 있긴 하겠으나 멀쩡한 인생을 내팽개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생활공간 대부분을 거의 책이 점령하는 주거란, 일반 상식에서 보면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멀쩡한 정신은 아니다.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그저 한도 끝도 없이 갖고 싶은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 계속 살 수밖에 없는 비틀어진 욕망 뿐이다.


_오카자키 다케시,『장서의 괴로움』



3



 바람의 일 / 문태준


 남해 용문사

 마루 끝에서 듣는

 새 우는 소리


 맑고 참 곱다


 바람이 빨라 그렇단다


 손 덜 타게

 얼른얼른

 바람이 건네주느니


 종심(從心)이려니


 바람의 이 일을

 나도 하고자


언젠가는 말에서, 글에서, 심지어는 마음에서도 나를 지워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여기까지 내 색깔, 내 냄새를 뽐내며 성큼성큼 걸어왔으니, 이제는 찍어놓은 발자국 흩으며 옅게 옅게 돌아가야 하는 반환점을 만날 것이다. 그것들은 좌절이나 포기에서 오기도 하고, 드물게는 승리 뒤의 허무로 만나기도 하겠으나, 이윽고 새 소리를 오롯이 새 소리로 그대로 건네고 얼른얼른 사라지는 바람처럼, 그렇게 말하고 쓰고자 하는 마음이 나에게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그저 허영을 양껏 껴안으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색깔을 한껏 드러내고 냄새를 끊임없이 풍겨대며, 어쩌면 색깔과 냄새를 계속 찾거나 만들어가며, 말하고 쓰며, 읽고 또 읽으며, 내가 나라고 드러내며.


그것은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비우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작은 그릇은 비어도 작은 것만 담을 수 있다. 나 하나 담고, 그저 내가 듣는 새 소리를 나 하나 듣고 마는 작은 그릇. 비어 있는 것은 비어 있으므로 큰 것이기도 하지만, 크게 비우는 것이 더 크다. 술잔은 비어 한 잔의 술을 담지만, 집은 비어 하나의 가족을 담고, 광장은 비어 수천만의 마음을 담는다. 채우며 키우고, 연후에 비울 수 있기를. 제 속을 비울 수 없는 사람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채워나갈 수 있기를.


한가위 달맞이 소원의 대본이었습니다. 달님,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쓰게 해주세요.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힘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아닐까요? 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


_정혜윤,『삶을 바꾸는 책 읽기』



"영혼이란 내가 말했던 그런 순간에 처음 탄생하는 거야." 스티븐이 막연하게 말했다. "그것은 더디고 어두운 탄생이며 육체의 탄생에 비해 더 신비한 거야.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모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_제임스 조이스,『젊은 예술가의 초상』



어찌 보면, 책읽기는 나에게 질문들과 만나는 과정이었다. 난 언제나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에게 끌렸고, 질문들을 찾아다녔다. 삶을 신선하게 가꾸어가기 위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답보다는 질문이라 믿으며, 답은 결국 내가 문제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찾아지고 마는 것이다.


_목수정,『월경독서』



배움이란 우리가 모르는 것이 분명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문을 열어 젖히는 순간 그 뒤로는 다시 세 개의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_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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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0-0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syo 2017-10-02 13:3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두요!!^^

서니데이 2017-10-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1년 365일 연휴라고 하시니 저도 그래요.^^
그런데도 주말은 주말같고, 휴일은 휴일같은 기분이 그대로인걸요.
달이 점점 예뻐지고 있겠지요.
즐거운 추석연휴 3일차, 좋은하루보내세요.^

syo 2017-10-02 16:42   좋아요 1 | URL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에브리데이 한가위입니다.

비가 멎었는데, 달이 보일까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독서괭 2017-10-0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틀어진 욕망 뿐....ㅠㅜ 연휴에는 어떻게든 읽던 책이라도 좀 끝내 봐야겠습니다.
화난 포도가 한가위 달덩이도 되는군요ㅎㅎ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syo 2017-10-02 16:44   좋아요 1 | URL
연휴동안만 달덩이 syo입니다. 달력에 오늘 날짜가 까매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분노의 포도알갱이로 돌아옵니다.

독서괭님도 충분한 독서로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북다이제스터 2017-10-0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가지 즐건 덕담 떠올랐는데,
syo 님 멋진 맞댓글 떠올라 그냥 평범한 글 남깁니다. ㅎㅎ
즐겁고 행복하고 픙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

syo 2017-10-02 21:55   좋아요 0 | URL
왜요, 왜 안 하신거예요 ㅎㅎㅎ

북다님도, 평온하고 배부른 한가위 되세요!^^

프리즘메이커 2017-10-03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syo 2017-10-03 09:18   좋아요 0 | URL
프리즘메이커님도 연휴 잘 챙기세요!! 프리즘메이커님의 멋진 글들, 계속 기다립니다^^

sprenown 2017-10-0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책읽기와 글쓰기는 진행형이군요 추석연휴 잘보내시라고 인사하고도 또 인사하기도 그렇고..컴퓨터가 없어도 휴대폰으로 이렇게 글읽고 좋아요 할수 있다는 사실..세대차이나고 꼰대 같은 말이지만 이렇게 소통할수 있다는거 좋은세상입니다 물론 저랑은 별로 소통하고 싶지 않은 알라디너들도 많겠죠 반성하고, 자제 하면서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기는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살면 얼마나 산다고.. 또 추석연휴 잘보내시길! 알라디너 여러분들께서도...

syo 2017-10-03 17:0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명절 인사야 하고 하고 또 하면 뭐 어떻습니까. 닳는 것도 아니구요.

sprenown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구요!!!
 


불국사를 다녀왔다. <불국사 마르크스 연등제> 준비차 답사 간 것은 아니고, 경주에 일이 있었던 여친과 함께 갔다가 그녀가 업무를 보는 세 시간 동안 혼자 불국사를 배회한 것이다. 혼자는 아니었다. 마르크스 평전과 볼빨간 사춘기의 신보와 함께 불국사의 이곳 저곳을 훑다 돌아왔다.


탑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높은 것은 탑 꼭대기에 걸린 하늘이었다. 아무리 고개를 꺾어봐도 꼭지를 찾아낼 수 없는 푸른 하늘이 두 개의 탑을 깔고 있었다. 하루 종일 보고 있으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파랑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탑을 놓았을 것이다. 한없이 하늘만 바라보다 하늘로 날아가 버릴까봐 하늘을 쿡 찔러 구멍을 내려 했을 것이다. 파란 구멍이 흘리는 하얀 눈물처럼 탑은 섰다. 가을의 불국사는 하늘의 눈물 흐르는 자리, 하늘의 볼이었다.


방수 바지를 입은 아저씨가 연못 안에 들어가 웃자란 풀을 잘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대빗자루를 든 할아버지가 작지만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랑곳 않고 연못 가에 앉아 먹이를 던지고 모여드는 잉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잉어가 만드는 낮은 물고랑 사이로 들락날락하던 햇살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얼굴도 들렀다 간다. 눈부실 것 없는 정경들이 순간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앞서 걷는 두 사람의 손등이 닿을 듯 말 듯 애꿎은 공간만 움켜쥐고 있다. 그 두 손등이 스치기를, 찌릿한 순간이 찾아와 어쩌면 오늘 하려고 준비했을 어떤 말들이 세상에 나오기를, 그 말들이 두 사람의 손을 뒤집어 손등이 손바닥이 되는 조용한 기적을 만들기를 우리 모두가 응원하고 있다. 바람도 그 사이로 들지 않을 것이다. 햇살도 비켜가고 그림자는 저희 먼저 온몸을 겹쳐 볼 것이다. 세상의 눈에는 티끌같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대한 기억의 한 장면이 될 그 순간에 미지근한 미소 하나 보태어 보겠다고, 나도 계속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을 것이다.


굵은 나무 둥치 옆에 너른 돌 하나가 누웠기에, 그 위에 앉아 본다. 책을 꺼내 든다. 사람들이 두렁두렁 이야기와 그림자를 굴리며 지나가고 나는 책장을 넘긴다. 스르륵, 책장 넘기는 소리가 지나는 사람들의 뒷꿈치에 묻는다. 내가 던진 이야기들을 자기도 몰래 몸에 싣고,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투명한 소리 한 자락 업은 채 세상 구석구석으로 흩어질 것이다. 딱 그만치, 몇 줄의 이야기가, 책장을 넘기는 가벼운 소리가, 세상을 아주 조금 더 부자로 만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안경을 벗고 나뭇잎들을 바라보면, 그냥 하나의 초록이다. 경계를 빛으로 짤랑짤랑 녹여먹고, 커다란 하나의 녹색이 된다. 하나가 나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 다들, 큰 절을 다 돌았는데 마음이 아직 비어 있다면 이 광막한 초록이나 한 근씩 끊어 가시기를. 오늘 저녁상은 초록으로 배부르겠네. 




170923-170930 : 31권


문학 : 8권




1.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2.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책장은 작은데 책이 많아서, 한 덩어리 집어 내서 정독한 다음 팔아버릴 생각으로 둘러보았다. 이제 무라카미를 떠날 때가 온 것 같다. 소설은 끝끝내 팔지 않겠지만, 솔직히 무라카미의 에세이는 대부분 팔아도 양심에 찔릴만큼은 아니다. 나한테는 책장에 꽂아 놓고 일생 몇 번씩 반복해서 읽을 만하지는 않다.


3. 꿈의 꿈

: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선택한 것에 안토니오 타부키의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 들은 것 같다. 나도 지금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아, 타부키가 쓴 말로 타부키가 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4. 인도 야상곡

: 삶의 국면 국면마다 내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력을 휘둘러 나를 전작주의로 잡아끄는 작가들이 늘상 있었다. 그들은 치명적으로 왔다가 몇 년 뜨겁게 머물고 조용히 떠났다. 김용, 파울로 코엘료,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지금 제일 길게 앓는 중이니 결국 가장 이르게 떠날 것 같은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이고, 이제 막 앓기 시작했으니 결국 가장 오래 머물다 갈 것 같은 작가가 이 사람, 안토니오 타부키다.


5.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4

6.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5

7.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8.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

: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 사랑 사랑 책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책과 사랑이로군요.


 



붉은 얼굴 마르크스 일당 : 4권



9.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 우리 나라도 좋은 나라라 할 만한 것이, 이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마르크스 책들도 꽤 된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 몫을 다 읽고 나면 바로 다음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책이라 하겠다.


10.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 어떻게든 읽어냈지만, 결국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많은 맑스주의 철학자들을 각개격파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질 기억, 잊혀져 갈 추억일 뿐이다.


1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사회주의에 대한 저자의 열망이야 높이 산다. 그러나, 택도 없는 말을 내세우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본인들이 주장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정할뿐더러, 그걸 사회주의는 해결할 수 있다며, 그 논거로 꼴랑 엥겔스의 저작 두어 개와, 마르크스가 '원시 사회'에는 남녀가 평등했음을 주장했다는 점을 대는 것이다. 이윽고 해결책이라고 내 놓은 게 결국은 맨날 말하는 그 계급혁명이다. 계급혁명만 되면 다 된단다. 한숨이 다 나온다. 아이고 이 양반아......


12.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좋은 책이고 쉬운 책이다. 추천하고 다녔을 것이다. 김수행 선생님의 <자본론 공부>가 없었더라면. 아, 하늘이여, 주유를 세상에 내고 왜 또 제갈량을 내셨나이까.....




검은 얼굴 프로이트 일당 : 5권



13. 트라우마 이후의 삶

: 정말 이렇게까지 설명을 잘 할 수도 있는 것인가? 과연 정신분석 분야의 두 믿을맨, 혜성같은 쌍현, 맹정현과 백상현의 책은 손에 들면 절대 후회할 일이 없다.


14. 다시 프로이트, 내 마음의 상처를 읽다

: 가벼운 책이다. 저자의 임상 경험을 사례로 제시하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프로이트 입문서를 더도 말고 딱 두 권 읽는 순간, 이 책은 더 이상 효용이 없다.


15. 프로이트

: 얕다. 분량을 할애하는 방식이 의아하다. 이 책으로는 안 된다.


16.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 김석 선생님의 글은 참 희한한 게, 알아 듣겠는데 모르겠다. 라캉이 그랬다는 건 알겠는데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이 지식은 날아가는 것이다. 이 선생님 정말 아는 거 많아 보였는데,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나서야 감탄할 수 있는 책이려나?


17. 라캉 읽기

: 라캉 개론서 역시 참 희한한 게, 같은 개념을 다루는데도 책마다 내용이 다른 것 같다!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관점의 차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는 좀 더 다르달까. 그런 고로, 한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들끼리 상호보완적 독서망을 구성한다. 신기한 것들일세.




철학 / 읽기 : 4권



18. 현대철학의 광장

: 700페이지나 되는 책이다. 전체를 읽지 못했다. 그저 지금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중인 철학자들의 챕터만 읽다보니 절반 정도 보고 반납한 셈이 됐다. 내가 읽은 한에서는 설명이 쉽고 이해가 편했다. 조광제 선생님 다른 책은 어려웠었는데...... 언제고 다시 만날 책이다.


19.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 업과 무관하게 독서하는 사람 치고는 꽤 많은 책을 읽어왔고 또 읽고 있지만, 어려운 책들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왔다! 주변 사람들이 하도 책을 안 읽어가지고 이거로도 충분히 잘난 척, 깨친 척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짓도 이제 슬슬 질렸나 봐. 어려운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다니. 역시, 책 많이 읽으면 사람이 되긴 되나 봐. 이제와서 사람이 되다니....


20. 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삶을 바꾼다"는 거창한 제목을 감당할만 한 읽기책을 만들 수 있는 사람 몇 안 된다. 이 사람은 된다.


2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읽다 보니 그렇지가 않은데다, 설령 헛소리라 한들 이 정도로 찰지게 구성하면 받아들여줄 만도 한 거 아닌가 싶다. 음, 그러니까, 나를 위해 읽고, 나를 위해서라면 읽지 않고도 말하고, 필요하다면 내용까지도 새로 구성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을, 거꾸로 책이 나에게 읽는 노동을 명령하도록 두지 말라는 뜻 같기도 하다.




정치 / 경제 / 사회 : 3권



22. 30분 경제학

: 쉽게 읽으면 쉽게 날아가는 법이다. 이제 두꺼운 이론서를 겁내지 말자.


23.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

: 본격 애들 책.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나 애들 책. 읽을 만하나 애들 책.


24. 여혐, 여자가 뭘 어쨌다고

: 이 책을 읽게 해주신 멘토님의 말씀에, 여자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라 좀 아쉬운 데가 있다고 하셨다. 내 눈에도 일견 그랬다. 그러나 이 당연함은 그저 당연함만으로 끝나지는 않고, 아마 당연함과 그렇지 않음 사이에 서서 양쪽에 한 발씩을 올린 채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인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인물 : 4권



25. 내가 사랑한 여자

: 읽을 책 목록을 대폭 늘리는 데 사람 이야기 만한 것이 없다. 일이 점점 커진다. 아아.....


26. 마키아벨리

: 훌륭하다. 이 시리즈의 책을 읽다가 감동하는 일이 생길 줄이야.....


27.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사상

: 몇년 전 읽었을 때는 왜 몰랐을까. 마르크스도 마르크스지만 이사야 벌린이라는 이 걸출한 사상사가의 고품격 하이크라스 글빨을.


28. 별★종의 기원

: 표지부터 이미 비범하다. 살짝 풀린 오른쪽 눈. 난 그동안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마어마하게 훌륭하고 고귀하고 존경스럽고 멋있고 잘 생긴 사람이었다.




기타 : 3권



29. ENGLISH IS NOT EASY

30. 영어 리딩 무작정 따라하기

31. 시사인 524



.......


후일담을 적고 싶은데, 왠지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얼마나 피곤한가 하면, "김동리와 박목월의 서재를 재현한 곳 사진을 찍었는데 피곤해서 못 올리겠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써 놓고 보니 "박동리와 김목월의 서재를....."로 되어 있었다. 


연휴 첫 날인데,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올해 6월부터 본격 독서를 시작했는데, 한 권도 읽지 못한 날은 처음이다. 연휴는 이제 아홉날 남았고, 읽을 책은 스물두 권이다. 앞이 노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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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7-09-3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아요!!

syo 2017-10-01 07: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밤에 쓴 거라 아침에 보니까 손발이 좀 오그라드네요
....

psyche 2017-09-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윗 분에 공감. 글이 좋아요!!! 불국사 부분은 마치 소설의 한장면 같네요.

syo 2017-10-01 07:15   좋아요 0 | URL
시늉을 해 본 거죠. 과한 칭찬이세요~^^

다락방 2017-10-01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분들 말씀에 저도 공감요. 불국사 이야기 편은 시 같아요.
아 맞다. 저는 어제 광화문 갔다가 김이듬의 새 시집을 샀어요. 후훗

syo 2017-10-01 08:00   좋아요 0 | URL
읽고 페이퍼 써 주세요! 불국사글 같은 짝퉁 말고 진짜 시를요 ㅎㅎㅎ

이하라 2017-10-0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연휴네요 불국사의 초록과 함께이진 못하지만 저도 나름 초록 속에서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syo님도 즐거운 추석연휴 되세요^^

syo 2017-10-01 09:24   좋아요 0 | URL
초록의 추석 좋네요! 이하라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수이 2017-10-0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좋습니다. 아침부터 훈훈해졌어요, 덕분에.

syo 2017-10-01 10:12   좋아요 0 | URL
말씀 덕분에 저도 훈훈하게 하루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sprenown 2017-10-0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 오셨군요..눈건강을 위해 책 너무 많이 읽지 마시고, 추석연휴 잘 보내세요.. 좋은 글로 다시 뵙겠습니다.

syo 2017-10-01 12:53   좋아요 0 | URL
sprenown님도,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독서괭 2017-10-01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부럽습니다~ 광막한 초록 한 근이라니, 맛있는 표현이네요. 빨강과 초록이라... 돼지두루치기 쌈싸먹고 싶....
정말로 <마르크스 평전>부터 펼쳐 드셨나요? 그래서 아직 한 권도 못 끝내신 건가요? 그 산만 넘어가면 내리막길일 겁니다. 힘내세욧~~!! ^^

syo 2017-10-01 22:38   좋아요 0 | URL
오늘 두어 권 더 봤어요 ㅎㅎㅎㅎ 그래도 아직 산이야.....ㅠㅠ

서니데이 2017-10-01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에 스물두권 읽으시려면, syo님 휴일 아닐 것 같은데요. ^^;
추석연휴 오늘이 둘째날인데 30분 남았어요.
syo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좋은밤되세요.

syo 2017-10-02 07:37   좋아요 1 | URL
하루가 지나갔네요 ㅎㅎㅎ 서니데이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2017-10-03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05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