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원의 하늘에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이 박혀 있었지만 밤이 더 어두웠으므로 겹겹이 둘러친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자. 그저 저 어둠으로부터 무엇인가 걸어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높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이윽고 말이 되었다. 그 말에 묶인 우리는 낮은 사람이었으므로, 공포탄이 든 총을 메고 밤마다 한없이 어둠을 쏘아보며 시간을 녹여야 했지만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저 어둠이 적을 품고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어둠이 많았다. 우리가 두 시간을 마주보고 서 있으면 어둠도 몸을 뒤척인다는 것을, 때론 완전히 돌아눕기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 가고 조금 더 짙은 어둠이 오는 그 희미한 경계선, 어쩐지 그 시간은 항상 나의 몫이었다. 어둠에 시선을 바치며 하루 하루 줄어드는 날을 아껴 헤던 밤들, 쏘지 않은 총을 둘러메고 새벽을 되밟아 다시 돌아오던 그 길들이 쌓여서 어쩌면 우리의 눈동자도 조금은 더 어두워졌을까.  






가장 밑바닥 후미진 곳에 사는 조개 속에 진주가 숨겨져 있는 법이다. 지금 세상에야 그렇다는 사실을 종종 잊거나 아니면 부정하는 세태로까지 되고 말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검은색이 사실은 가장 밝은 색이듯이, 그리고 검은색 속에야말로 세상의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듯이, 그러나 우리가 다만 검은색으로 보고 있을 따름이듯이, 바로 그 진실을 잊어먹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그 어둠이라는 것을.

_공선옥 김미월,『내가 사랑한 여자』



난 달을 사랑해서 울어요, 그 사람이 말했다. 어렸을 때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단 한 번 봤어요, 하지만 이 궁전에 갇혀 있어 달에 닿을 수가 없어요, 밤중에 풀밭에 드러누워 달빛에 입을 맞추기만 해도 좋을 거예요, 하지만 이 궁전에 갇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이 궁전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_안토니오 타부키,『꿈의 꿈』



이제 사람들은 하나로 융합되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눈이 내면을 향하고, 머릿속에서는 옛날 일들이 펼쳐진다. 그들의 슬픔은 휴식 같고, 잠 같다.

_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 1』



여기는 세상 끝이야. 세상 끝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 세상 끝에 있었다는 것은 멀리 멀리 여행하기를 사랑한다는 뜻이야. 멀리 가보거라.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더 보자꾸나.

_정혜윤,『인생의 일요일들』




2


그 많은 밤을 당신과 함께 깊어졌으므로, 어찌 당신과 나 사이에 이야기가 없겠습니까.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풀어낼 마음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우리는 어리고 어리석었지만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저 수많은 어둠들이, 오늘도 그 땅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어둠들이, 당신과 내가 내려놓고 나온 빈 총을 지금 다시 메고 선 앳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녹이고 있을 우리의 그 어둠들이 모두 다 보았는데요. 그 어둠 속에 묻어놓고 왔다고 생각한 긴 이야기들을 당신과 내가 무엇이라 부르건, 술잔을 마주 든 우리의 눈동자에 이미 그 어둠이 묻었는데요. 이야기가 있는데, 어찌 이야기가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야기와, 이야기에 엉킨 어둠까지, 이제 당신과 나는 당당하게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칼, 네가 너무 이성적이라는 점이 슬프구나. 너는 내 편지를 깊은 사랑의 척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아주 많이 느끼면서도 말은 아주 적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_자크 아탈리,『마르크스 평전』



그들은 달라진 공기 속에 고립되어 흩어져 있던 당신과 나였다. 스스로 또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벽, 우리의 생존이 생존하는 만큼 두터워지는 벽. 우리가 서로를 향해 둘러친 벽. 그 벽에 갇혀 있던 당신과 나였다. 각자의 구속에 길들여져 있던 당신과 내가 다시 광장에 모인 것이었다. 그날 대기는 생동하는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발하고, 즐거워하고, 빛나고, 춤추고, 떠돌고, 잡히지 않는 공기였다.

_김은산 외,『기억극장』



삶의 어떤 부분은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가볍고 우스운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느 날 삶을 텅 비게 하는 것, 쓸모없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 아무것도 없는 오늘을 견뎌야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_전지영,『책, 고양이, 오후』



만약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예정이었던 인생'까지 동시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_가시라기 히로키,『절망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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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0-1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스스로가 <마르크스 평전> 인용문에 꽂히는 사람일거라 예상했는데ㅎㅎㅎㅎㅎ
실상은 <절망독서>인용문에 눈이 번쩍하네요. @@

첫 문단 넘 좋아요.

그 말에 묶인 우리는 낮은 사람이었으므로..

이 문장이 일면 슬프면서도 근사해요.

syo 2017-10-09 00:10   좋아요 0 | URL
보초 서기 참 싫었어요. 같이 서던 사람들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겨우겨우 버텼던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다 추억이지만요 ㅎㅎ

독서괭 2017-10-0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아주 많이 느끼면서도 말은 아주 적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 전 이 문장이 좋네요.
철원의 하늘, 이 글은 참 먹먹합니다. 새삼 분단의 현실과 거기서 파생되는 각종 비극들을 가슴 아프게 되새기게 하네요..

syo 2017-10-09 21:55   좋아요 0 | URL
직접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들이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먼지처럼 흩어지네요.

연휴가 완전 끝났네요. 독서괭님 좋은 한 주 되시기를.

다락방 2017-10-1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예정이었던 인생‘까지 동시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문장 너무 좋아요, 쇼님.


잘 지냈어요?

syo 2017-10-10 11:55   좋아요 0 | URL
저야 항상 연휴니까요!! 다락방님은 즐거운 여행 다녀오셨어요?? ㅎㅎㅎ

사진 많이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