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많은 독서인들의 입에서 탄성 혹은 탄식을 자아내며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노벨 문학상의 월계관을 썼다. 민음사만 노났다. 모르긴 몰라도, 고은보다 이시구로 쪽이 더 짭짤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만인보가 날개돋힌 듯 팔려 창비가 춤을 췄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팔린다고 다 읽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syo는 읽어야했다. 응구기를 밀어내고, 무라카미를 자빠트리고, 고은을 한 해 더 귀찮게 하고, 쿤데라로 하여금 불로초라도 찾아다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 이시구로를,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일단 "가즈오"와 "이시구로"중 뭐가 성인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중요한 문제였다. 표지에는 "가즈오 이시구로"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만약 "가즈오"가 성이라면, 그건 출판사에서 이 사람을 태생에 맞춰 일본인으로, 작품을 일본계로 봤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가 성이다. 반면, "이시구로"가 성이라면 이건 또 작가와 작품을 영미계열로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매거릿 애트우드는 성이 애트우드다. 좀 대중적인 다나카랄지, 사토랄지 그랬다면 보자마자 눈치를 챘을 텐데. 가즈오와 이시구로라니.....
정답은 이시구로다. 그러니까, 글로벌 기준에서 보면 우리가 무라카미를 하루키, 하루키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거나 있지도 않은 친분을 과시하려고 주접떠는 걸로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이시구로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가즈오라고 부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길게 쓰고 있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기본적으로 이시구로는 영국 작가다. 그리고 읽어보면 알겠지만, 철저하게 서구 스타일이다. 심지어 영국도 아니고 독일이나 프랑스 느낌에 가깝다. 사실 syo가 온 세상 모든 소설을 읽어본 것이 아니라 이건 일본, 저건 영국, 요건 프랑스 하며 딱딱 발라놓을 능력도 의사도 없지만, 작가 이름과 사진을 가리면 일본 태생의 작가가 썼음을 알 수 없을 거라는 이시구로의 말에는 100% 동의한다. 무라카미만 해도 일본문단에서 이건 영미문학 짝퉁이라는 비난을 배부르게 먹으며 쑥쑥 자랐는데, 솔직히 syo의 허술한 눈으로 볼 때 무라카미랑 대 놓으면 이시구로쪽이 훨씬 일본색이 덜하다. 제인 오스틴과 카프카, 프루스트를 냄비에 넣고 요리조리 지지고 볶고 끓이고 하면 이시구로가 나온다는 레시피는, 전문 셰프가 아니라 그냥 한끼 뚝딱할 메뉴로 이시구로를 골라본 syo같은 무지렁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분석이다. 그래서 더더욱, 다들 아니라고 하고, 본인도 아니라고 하고, syo같은 무지렁이 눈에도 아닌 것 같은 이시구로의 작품 속 "일본성"을 기를 쓰고 찾아내, 일본적인 것을 말하고, 일본 문화의 영역과 어떻게든 연관지으려는 사람들의 희한한 분류중독을 syo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일본인들이야 그럴 수 있고 그러고 싶겠지만, 우리까지 왜 굳이? "제인 오스틴(영국)+프루스트(프랑스)+카프카(독일) = 이시구로(일본)" 이라는 공식은 괄호들만 싹 빼면 정말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괄호를 다는 순간 여러모로 똥이 된다. 소설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언어가 미치는 영향은 나머지 다른 요소들이 미치는 영향의 총합과 비등비등할텐데, 일본어를 하지도 못하는 영국 소설가에게 그가 일본 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핏속에 흐르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짐작하다니..... 일본어는 못하지만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향을 받았으니 일본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아사히 신문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문화로라도 세계를 정복하고 싶은 욕심이 커지면 저런 널을 다 뛰게 되는구나 싶을 정도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하여간, 2주 좀 넘게 들여 국내에 들어온 이시구로의 책 8종 9권을 읽었다. 굳이 출간순으로 한번 읽어 보았다. 어떻게 최대한 스토리를 언급하지 않고 책 이야기를 해야하나 고민입니다.
< 창백한 언덕 풍경(1982) >
재미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걸 한 번 짐작해보는 것이 곧바로 이 소설의 매력, 이 작가의 필력과 닿아있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말한다. 독자는 인물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공간에 능동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 그러니까 이시구로가 보여주는 것은 정말로 멀리 떨어진 어떤 언덕의 창백한 풍경 같다. 텅 비어 있는 황량한 언덕 꼭대기로 하나의 사건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는데, 채 의미를 다 알려주지도 않고 얼른 사라진다. 이내 언덕은 다시 정적에 잠긴다. 잠시 후에, 맥락에 크게 의존하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나 인물이 언덕 위에 나타나 어떤 몸짓을 남기더니 다시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언덕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도록 위치 잡힌 우리는 처음 나타난 것과 그 후에 나타난 것 사이에 있을 무언가를 꿰어 맞히는데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이 책을 읽은 당일 기록해놨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기억의 숨바꼭질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작을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특징은 책의 것이 아니라 작가의 것이었다.
지금에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기법이지만, 이 책이 쓰인 35년 전에도 그랬을까. 더 재미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은 결국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겠다. 작가가 고깃덩어리를 던져주면 독자는 살을 실컷 즐기고 나서 뼈대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시구로는 뼈를 던진다. 그래서 독자는 그 뼈에 붙어있었을 살들의 맛과 냄새를 상상하는 기회만 가지게 된다. 부디 그것만으로도 배부를 수 있는 독자들이 많기를. 날아오는 뼈에 얻어맞지 않고 무사히 기억을 재구성하시기를.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1986) >
화가는 비루하다. 마지막까지 반성을 모른다. 스스로 옳았음을 굳건히 믿고 있으나, 다음 세대가 부인하고 조롱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손자나 어르고 달래며 초라한 권위를 공모하는 뒷방 늙은이일 뿐이다. 무서운 장면에는 눈을 다 가리고 귀를 다 막은 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겨우 버티더니,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이모들은 여자라서 절대 이 영화를 볼 수 없을 거라며 거들먹거리는 꼬맹이 손자와, 그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 행동은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믿음 자체가 나빴다면 세상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묻는다.
'부유하는'이 수식하는 대상이 어디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미가 있겠다. 작품 내에서 처음 "부유"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부유하는 세상을 그리는 예술과 그 세상을 무겁게 고정시키는 예술 사이의 대립을 드러내기 위해 그 말이 쓰이지만, 사실 그것은 이 책이 다루는 여러 주제들 중에서는 그다지 핵심적인 요소라고 보기가 어렵다. syo는 그것보다, 세상이 정말로 부유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 한때 '이것'이었던 우리는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켰을 뿐인데도 세상이 부유하는 바람에 어느덧 '저것'이 되어있곤 한다. 물론 모든 흐름을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 아닌 것은 아니다. 윤리나 정의의 문제에서, 운 좋게도 우리에게 혜안이 있다면, 해야할 일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눈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이 와도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부유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화가다. 붓을 들어 어떤 그림을 그릴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린 그림이 세상에 피를 뿌렸다면, 우리가 그 붓을 꺾든 그렇지 않든, 세상이 우리를 꺾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잊지 말자고, 식민지 조선도, 베트남도, 광주도,
< 남아 있는 나날(1989) >
이시구로의 첫 세 작품, 하나같이 수상의 영광을 안은 이 세 작품은 사실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이나 서술자들은 모두 어리석고, 무지에서였건 의지에서였건 자신이 과거에 악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큰 뜻과 품위를 말하면서 어리석음을 가린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그들을 가르친다. 그들의 삶은 귀퉁이부터 조금씩 깨져나가고, 이내 현재와 이빨이 맞지 않아 겉돈다. 모든 중대한 사건들은 이미 일어났으며, 그들은 회상할 뿐이다. 이제는 그 무엇도 바꾸기에 늦었다. 그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뿐.
세 권을 이어서 읽으면, 의식의 흐름을 연주하는 이시구로의 기량이 점차 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짚는 서술자들의 미덥지 못한 기억 속에서 변형되었거나 왜곡되었을거라고 의심되는 사실의 파편들만이 독자들에게 던져지는데, 이런 기법은 과거의 영상을 비출 스크린을 현재의 자리에 어색하지 않게 설치할 줄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 이 책에 오면, 분명 엉뚱한 소리로 시작했는데, 홀려서 듣다 보면 어느덧 뼈대가 되는 기억 속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는 이시구로의 능란함이 아주 작두를 탄다.
syo는 첫 세 권 중 이 책에 가장 엄지를 높이 치켜들고 싶은데, 이시구로가 만든 캐릭터 안에 최초로 유머가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뼈집사'인 주인공은 눈치를 남김없이 팔아치워 그걸로 체면을 잔뜩 사들인 것 같은 인물인데, 여자 마음은 1도 모르는 상등신으로서, 지는 또 그게 다 품위라고 생각하는 구타 유발자다. 책을 읽는 내내 syo는 그의 명치를 노리곤 했는데, 저런 멍청함이 또 웃음 포인트로 작용할 때면 슬며시 주먹을 풀었다. 그렇게 syo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과정에서, 그의 멍청함이 그의 로맨스를 망치고 후회의 어두운 구석으로 그를 인도할 뿐 아니라, 거대한 악을 눈감는 일로 몰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이시구로는 능구렁이처럼 잘도 꿰어 보여준다. 공과 사가 각기 표면에 붙었다 이면에 붙었다 하는데, 심지어 그 표면과 이면 사이의 경계도 한껏 출렁인다. 한나 아렌트가 생전에 읽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시구로의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지녀야 할 아주 당연한 시선 하나를 재확인할 수 있다. 서술자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서술자의 입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술자가 하지 않은 말, 하지 못한 말, 어떤 말을 하거나 하지 않기 위해 대는 핑계 속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이 모든 방식들을 동원해 캐낸 메시지도, 결국 마지막에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필터를 거쳐 하나의 생각이 된다는 것.
<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 >
장담할 수 있다. 가장 안 팔리고, 가장 안 읽히는 책일 것이다. 일단 1000페이에 달하는 두께 때문에 시도를 덜 하시는 것 같은데, 열어보면 더 깜짝들 놀라실 듯.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므로, 이 책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수 없겠다. 다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모든 책을 다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한번 그에게 도전할 일이 생긴다면, 이 책을 제일 먼저 손에 들 것 같다. 카프카 좀 읽고 와서. 아 왜 이시구로를 평할 때 카프카가 자꾸 나오나 했더니.
그러고 검색해보니, 거의 전문가의 냄새가 나는 어마어마한 리뷰가 이미 있다. 아이고, 죽었다 깨나도 저렇게는 못 쓰것다.....
< 우리가 고아였을 때(2000) >
이시구로의 책 안팎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탐정의 자리를 맡아야만 한다면, 그건 바로 syo와 여러분, 우리 독자들입니다.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탐정이지만 한번도 추리하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 문제를 던지기만 한다. 이시구로의 작품은 항상, 앞으로 나가는 듯 뒤로 흘러간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서사의 방향이 전후로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겪어야 하는 큼직한 사건들을 이미 겪은 상태고, 미래는 그저 그 사건의 가해자들을 평하하고 피해자들을 어르는 데 사용된다.
서술자가 제시하는 과거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시구로 소설의 큰 매력이다. 이시구로는 기억의 속성 혹은 속살을 냉정하게 노출한다. 흔들리고, 합성되고, 디테일이 깎여나가고, 아픔을 줄이거나 키우기 위해 변주되고. 서사의 무게추가 과거에 쏠려 있으므로, 결국은 소설 전체가 흔들리고, 합성되고, 변주되는 셈이다. 그러면 읽는 방법이 다양해진다. 해석이 열린다. 합의되는 스토리가 있을 것도 같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요? 하며 이의를 제기해 온다면, 결코 합의된 바를 종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기억의 소설.
인간이 저지른 거악을, 그에 휘말린 개인의 여정을 통해 슬며시 에둘러 보여주는 그의 솜씨는 오롯이 문장에서 시작된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힘을 다 뺀 것 같지만 오히려 힘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진폭이 낮고 파장이 긴 문장. 일단 한 번 책을 덮었다 다시 들춰보면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굵은 문장.
< 나를 보내지 마(2005) >
이시구로는 천생 순문학작가다. 탐정이 나와도 추리소설이 아니고, 과학 소설이나 판타지의 품을 빌려와도 SF가 아니다. 왜냐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하기를, 이건 정말 좋은 작품이면서 재미도 있어- 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 최곤줄 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재미는 없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정말 위대하다. 인간은, 재미없게 읽은 작품을 인정하기가 쉬운 동물이 아니므로. 특별히 이 책이 재미가 없다는 말이냐고 물으신다면 긍정과 부정의 가운데쯤 syo는 서겠다.『데미안』,『호밀밭의 파수꾼』,『젊은 예술가의 초상』,『마의 산』. 이것들이 syo가 좋은 책이라고 인정한 것들 중, 이 책『나를 보내지 마』 와 필적할만큼 재미가 없었던 작품들이다.
더 많은 이름들을 나열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저 네 개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 것은, syo가 이 책을 일종의 성장소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미세한 마음의 요동을 캐치하고, 얼핏 보면 이해 못하기가 십상인 행동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능력은 재능이다. 나는 이시구로가 뽐냈다고 본다. 여전히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배열이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과정에서, 정말 갑자기 툭 이질적인 단어들이 튀어나오면서 독자들을 당황시킨다. 내가 뭘 놓쳤나? 서술자는 아침 먹었으면 점심 먹어야 되는 수준의 당연함이 우리 사이에 깔려있음을 전제하고 기증, 근원자, 복제품 같은 단어들을 내뱉는다. 3라운드 내내 잽만 날리다가 갑자기 니킥이 날아온다. 뭐지? 얘가 잽 말고 다른 것도 할줄 알았어? 잠깐, 니킥? 나 지금 복싱 경기중이었는데?!!!
방심하지 마시길. 아니다, 방심하시길. 얼결에 맞은 발차기가 아프고, 아파야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 녹턴(2009) >
분명히 들었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안개가 잔뜩 낀 어느 날, 이시구로가 런던 어느 운치 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노트북으로 신작을 끄적대는 중이었을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따라 글이 쭉쭉 뽑히는 것이 더욱 그를 신명나게 했을 것이다. 의식의 흐름과 기억을 다루는 대가, 이시구로. 이미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기량이 또 한번 문턱을 넘어서 크게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미친듯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때였을 것이다. 등 뒤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를 파고든 것은. 야, 이시구로는 글은 참 잘쓰는데, 재미가 없어, 웃길 줄을 모르지. 이시구로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 pardon? 야, 솔직히 톡 까놓고, 이시구로 책 읽으면서 웃은 적 있냐? 이시구로는 거의 기도하는 심정이다. 있다고 대답해, 어서, 제발, 내가 썼지만 <남아있는 나날>은 웃기잖아, 우리 가족은 그 책 너무 웃기다고, 나한테 소설가 그만두고 코미디언 하라고 그랬는데! 그러나 이시구로의 바람은 바람처럼 허망하게 흩날려간다. 야, 소설이 꼭 웃기고 재밌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시구로는 재미는 없지만, 엄청나게 좋은 소설을 쓴다구. 이시구로의 귀에는 한 구절만 들렸다. 재미는 없지만. 이시구로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리고 백스페이스를 연타해, 지금까지 나온 그의 작품 중 가장 심오했을 신작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새로운 글을 쓴다. 제목, <크루너>
syo가 웃자고 한 이야기인 것처럼, 이시구로도 웃자고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빵 터지지는 않더라도 썩소도 웃음이고, 웃픈 것 역시 슬프긴 하지만 웃을 일이므로, 웃자고 쓴 책을 읽고는 일단 웃어야 하겠다. 뒷일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독자의 웃음을 가지고 이시구로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내 영역 밖인 듯하다. 사실 그런 분석이 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다만 웃음이 물러가는 자리에 피어날 감정들, 아마 독자들마다 다른 감정이 될텐데, 여하간 웃음의 꼬리를 붙잡고 왔다가 재빨리 사라질 수 있는 그 짧은 느낌들을 부여잡으면, 좀 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책이다.
< 파묻힌 거인(2015) >
노래는 공기 반 소리 반이라고, 아무리 들어도 잘 하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어떤 남자는 항상 외치고 다닌다. 이전까지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기억이란 기법 반 주제 반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 와서는 기억이 주제를 왕창 장악했다! 그러나 이시구로의 작품이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시종일관 같다. "덮어도 되느냐" 언제나 그렇듯 덮는 자와 까는 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덮는 자는 지거나 최소한 초라해진다. 전작을 다 읽어보니 더 선명하다. 이시구로는 덮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가 까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독자가 나서서 까기를 종용한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소설을 불어넣어 독자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간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시구로의 태도가 미적지근하게 다가오거나, 덮으려는 자를 변호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빡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처럼 이시구로에게 빡치나, syo처럼 이시구로를 믿으나, 결국 결과는 같다. 우리는 덮기를 원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냥은.
아, 깜빡할 뻔 했다. 장르는 SF판타지다. 그러나 이건, 깜빡할 뻔도 할 만큼 의미 없는 정보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1. 이시구로의 책을 읽을 때는, 항상 "기억"이라는 단어를 명심해야 한다. 기억해야 하는가/기억이란 믿을 수 있는가/기억이 미래를 만드는가/우리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2. 이시구로의 문장은 평평하고 재미가 없다. 의도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syo에게 이시구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전체로 아름답고, 낱개의 문장은 그렇지 않았다. 9권의 책, 모르긴 몰라도 4000페이지는 될 문장들을 읽으며 syo는 그 중 겨우 몇 개에만 줄을 긋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3. 전작을 읽기를 고려하신다면, 읽는 순서를 제시하고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남아있는 나날 -> 우리가 고아였을 때/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창백한 언덕 풍경 -> 파묻힌 거인 -> 나를 보내지 마 -> 녹턴 ->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