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의 한 꼭지였다. 여자가 군대에 대해 많이 알아서 군필자들이나 쓰며 낄낄거리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데 웃음 포인트를 둔 모양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너, 보직이 뭐였어? 남자가 대답했다. 당번병.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와, 꿀 빨았네. 


와, 그 꿀은 정말 빨만했다. syo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베스트 10을 꼽으면, 3~4개는 군대에서 겪은 일일 것이다.


syo는 친구들이 예비군도 꺾여드는 나이, 스물 일곱에 입대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공을 차던 어린 날의 친구는 syo가 병장을 달았을 때 대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나이였다. 그럼에도 부대에는 syo보다 한 살 많은 선임이 있었다. 이소룡을 닮은 그 사람은 서른 먹고 집으로 돌아 갔지만, 군대에 있는 내내 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건강했다. 무려 한 살이나 어린 syo는 평생을 책상물림으로 살다 보니 과체중 저체력으로 항시 비실거렸고, 그 탓에 최고 연장자도 아니면서 영감 컨셉을 강요 받으며 부대생활을 했다. 


그건 너무 좋았다. 야, 영감님 허리 나가신다, 니들이 들어드려. 야, 나이 많은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냐, 화장실 청소는 니들이 해. 지금 생각하면 선임들도 좀 안 된 것이, 두세 살 많으면 어떻게 눈 딱 감고 막 해볼 수도 있었겠으나, 제대하면 이제 2학년에 복학할 애들한테 대학까지 마치고 온 노인은 그래도 함부로 하기가 어려웠던 거라, 뭐 시키려다가도 막상 syo의 주름진 얼굴을 마주하면 그저 입맛을 다실 뿐, 결국은 자기 손으로 하고 마는 자율형 선진 부대문화가 자동으로 정착되었다. 그들도 설마 주민번호 앞자리가 8로 시작하는 인간이랑 먹고 자고 뒹굴 일이 인생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착한 자식들, 내가 수학 과학 가르쳐서 대학 보낸 애들이 꼭 니들 나이였단다. 이렇듯 가만히 있어도 한껏 스위트한 군 생활이었는데, 갑자기 바뀐 보직은 마치 초콜릿에 꿀을 발라 준 양상이었다. 아 달다 달아.


당번병이라는 보직은,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공관병과 유사하다. 공관병은 보통 별을 단 군인들의 집에 상주하며 할 일 못할 일을 도맡아 하는 아이들인데, 당번병은 지휘관들이 근무하는 곳 바로 옆 방에서 하루종일 이런 저런 시중을 들다가 지휘관이 퇴근하면 내무반으로 돌아가는 아이라고 보면 된다. 전화 연결부터, 서류를 넣고 빼는 일, 그리고 지휘관의 그날 기분을 살펴 전파함으로써 그날 하루 부대 전체의 분위기를 일정한 방향으로 조성하는 역할도 했지만, 무엇보다 많이 했던 일은 커피 만들기였다. 1년 남짓 당번병 생활을 하며, 1만 잔에 달하는 믹스 커피를 제조하였다. 4천 잔부터는 믹스 커피의 종류에 미혹되지 않았고, 5천 잔부터는 카페인과 설탕의 이치를 알았으며, 6천 잔에는 귀가 뚫려 물 붓는 소리만으로도 맛을 짐작할 수 있었고, 7천 잔에는 마음 먹은 대로 타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 여름 훈련때는 남들 탄알집 넣는 자리에 커피 스틱 50개를 넣고 훈련장을 누볐고, 남들 총들고 적군의 위치를 수색할 때, syo는 페트병을 들고 얼음의 위치를 수색하였다. 기거이 기가 막힌 냉커피를 대령하여 시찰 나온 사단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그 덕에 4박 5일 휴가를 떠나는 일도 있었다. 이런 게 syo의 군대 무용담인데.....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로 흘러왔을까. 역시 남자들 군대 이야기란 노답이다. 꼴랑 저것도 군대생활이라고 아주 신나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느냐, 사실은 그 이유조차 시덥잖은데,


스물 여덟이면 젊디 젊고 꽃다운 나이였는데, 고작 10km 마라톤에 나갔다가 왼쪽 다리가 어쩐지 아작났다. 당시 거의 두 달 정도 카이저소제 생활을 했고, 그 이후에는 걷거나 잠깐 뛰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5km 이상 뛰거나 군장 메고 15km 정도 행군하면 아팠다. 정확한 위치는 무릎 뒷쪽, 그러니까 오금이라고 부르는 그 부위다. 아, 군대가 내 오금을 강탈해갔어. 나는 무라카미나 김연수처럼 읽고 쓰고 뛰면서 선선하게 살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날씨도 좋은데 오래 동거한 뱃살이나 분가시켜 보겠다고 좀 뛰었더니 여지없다. 계단이나 내리막을 내려갈 때가 난코스다. 뒤지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참 짜증나는 방식으로 아프다. 한 이틀 지나면 통증은 사라지지만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살살 아프다. 그러니까 서른 넘게 쳐먹고 아프다고 징징대는 것이 이 긴긴 글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징징징.




데이비드 흄도 타이즈는 신었지만 달리기는 하지 않았다.

_ 데이먼 영,『지적으로 운동하는 법』



잠자코 있으라고 하면 언제까지고 잠자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조금도 힘들지 않다. 혼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밖에 나가서 뛰고, 고양이와 놀다 보면 금세 일주일이 지나가버린다.

_ 무라카미 하루키,『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_ 김연수,『지지 않는다는 말』



앞으로 일생 동안ㅡ내가 확실히 깨달은 바ㅡ나는 고통, 공허, 위협이 엄습해오는 것에 맞서 기쁨을 쌓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_ 알렉상드르 졸리앵,『인간이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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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10-2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득도, 신기하네요. 이제 책의 득도에 도달하시는 듯합니다 ^^

syo 2017-10-24 20:37   좋아요 0 | URL
오금을 내주고 믹스커피의 도를 얻었으나.....

군 경험 있으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거기서 배운 것들, 익힌 것들은 전역과 동시에 초기화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0-2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syo 2017-10-24 21:1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오금이 아프다니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알라딘계의 재미는 항상 쇼 님이 맡고 계시는군요.. ㅎㅎ

syo 2017-10-24 21:19   좋아요 0 | URL
아직 멀었습니다. 소소합니다.
오금까지 팔아먹었는데도, 겨우 이 정도입니다.

이하라 2017-10-2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7천 잔 째에서 빵 터졌습니다^^

syo 2017-10-24 21:22   좋아요 0 | URL
ㅎㅎㅎ 빵 하나 드렸다니 뿌듯합니다.

sprenown 2017-10-2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끝이 없죠... 난생 처음 특수한 환경에 처했으니.. 마침 읽고 있는 책이 ‘살고 싶다‘! 이 소설도 군대얘긴데 식상하다 싶으면서도 재밌네요!

syo 2017-10-24 21:24   좋아요 0 | URL
다들 군대에서 고생한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한다던데,
전 고생한 게 없습니다. 어쩐지 주구장창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sprenown 2017-10-2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네.. 아무리 편한 보직을 받아도 군대얘기 할땐 힘들었다고, 징징대던데요.ㅎㅎ

syo 2017-10-24 21:27   좋아요 0 | URL
반복합니다. 꿀도 꿀도 아주 핵꿀이었습니다ㅎㅎㅎㅎ

sprenown 2017-10-2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땡보직˝이셨군요.. 엄청난 빽이 있었던거 아니예요? 병역비리 조사 들어갑니다! 아하 공소시효가 만료되서 이식직고 하시는 구만.ㅋㅋ

syo 2017-10-24 21:34   좋아요 0 | URL
하하하, 별 건 아니지만 절 뽑아올린 지휘관한테 들은 사연이 있긴 있습니다. 소재거리 떨어지면 그것도 한 번 팔아먹어 보겠습니다.

닷슈 2017-10-2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밌군요 사실 군에선 다들 서로 힘들다고 난리지만 누가더힘든지 한가지 감별법이있습니다 바로 나랑바꾸자고 한마디만 하면됩니다 일차반응이 굳은얼굴이면 감별끝이죠
이게묘하게 직장보직에서도 통한다는

syo 2017-10-24 21:3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맞습니다.
전 누구와도 바꾸지 않겠노라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sprenown 2017-10-24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훌륭한 감별법이군요! 이러니 군대얘기에 날밤을 까는 거라니까요..편안한 밤 되세요!

독서괭 2017-10-24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syo님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믹스커피 맛이 궁금합니다. 피곤하고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는데 이 글 보고 웃었네요. 감사합니다^^

syo 2017-10-24 21:42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께 피식 웃음이라도 드렸다니 기쁘긴 한데, 어느 분도 syo의 오금을 걱정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아, 불쌍한 오금아.

독서괭 2017-10-24 22:0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징징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셨네요^^;; 서두가 너무 강렬했어요. 이제라도 걱정해드립니다ㅋㅋ
아는 분이 출산 후 육아중인데,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살을 빼라고 했답니다. 무릎이 나으려면 살을 빼야 한다-살을 빼려면 운동을 해야한다-운동을 하면 무릎이 아프다 ... 슬픈 순환...

syo 2017-10-24 22:10   좋아요 0 | URL
세상에 ㅋㅋㅋㅋㅋ 저도 그 생각했거든요. 이거 무거워서 이러나? 그럼 살을 빼야겠네? 그럼 살은 어떻게 빼지? ......

서니데이 2017-10-2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 걸까요. 다리가 아플 때는 내려갈 때가 더 아플 때 있어요.;;
빨리 좋아지시면 좋겠어요.
syo님,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

syo 2017-10-24 22:09   좋아요 1 | URL
안 좋아질려나봅니다. 안 뛰지요 뭐 까짓거ㅠㅜ

서니데이님도 좋은 밤 되시구요^^

2017-10-24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5 0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24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꿀잼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0-25 06:44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부분이 어딜까를 고민해보건대, 이 영광을 좋은 말씀 남겨주신 공자님께 돌려야겠네요.

psyche 2017-10-25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쪽이 아플때 뛰는건 노노노. 걷는걸 추천드려요. 사실 제나이??가 되면 어짜피 무릎아프게 될 거 남들보나 조금 일찍 아프게 되었다 생각하시고... 근데 이게 어쩐지 위로는 딱히 아닌듯?
그건 그렇고 득도한 믹스커피 맛이 무척 궁금하네요. 다 마셔버림으로 겨우 끊은 믹스커피가 갑자기 막 땡겨서.. 한국마트 가야하나.

syo 2017-10-25 06: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psyche님만이 저의 오금을 걱정해주시네요 ㅠㅠ

커피는 특별한 거 없습니다. 그냥 믹스커피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맛을 살렸던 건데 ㅎㅎㅎ
이제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졔졔 2017-10-2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믹스커피의 세계는 넓고도 깊지요. 역시 믹스커피는 막심아닐까요.ㅋㅋㅋ글이 너무 재미져요헤헿

syo 2017-10-25 14:4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무조건 믹스커피는 무조건 이나영 막심 노랭이지요. 잘 아시는군요!!

cyrus 2017-10-2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으로 살면서 한 번도 크게 다친 적이 없었다고 군대 가서 발 골절상을 입었어요. 유격훈련 행군하다가 다쳤어요. 발 골절상인 줄 모르고 유격훈련 다 뛰고, 두 달 동안 다친 발로 구보도 했습니다... ㅎㅎㅎ 지금도 다친 부위의 후유증이 남아 있어요. 오래 걸으면 발등을 쑤시는 듯한 통증이 생겨요.

syo 2017-10-25 17:39   좋아요 0 | URL
우리의 오금과 발등을 위해 소송을 걸까요?? 김관진이 이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