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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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래를 멋있게 부르지는 못했지만, 계란 후라이를 예쁘게 뒤집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마음이 따듯해서 괜찮은 사람이 되는 일. 그것은 마음의 일이라서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말을 지지하고, 몸짓에 응답하면 끝나는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가갔다.

 

자주 혼자가 되었다. 혼자서는 미운 것이 참 많았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미웠다. 너의 말을 지지하는 내 말을 지지하지 않는 네가 미웠다. 너는 벽이었다. 벽은 몸짓이 없었다. 무엇에 응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빈 방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었다. 미움으로 돌아오는 미움을 받아내는 것은 메아리의 일이었다. 미워하다 혼자서 잘도 지쳤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다. 노래도 이제 웬만큼 하고, 계란 후라이도 척척 뒤집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은, 마음이 따듯할 줄 몰라서 괜찮지 못한 사람으로 사는 일. 그것은 마음의 일도, 말의 일도, 몸짓의 일도 모두 될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쉬운 일은 웃는 일이었다. 미움은 시간의 긴 꼬리를 따라가고 이제 내 방에 작작하게 웃음만 남았으니, 다시 너를 만나 너에게 따뜻한 사람이 될 일이 생긴다면, 웃겠다. 자주 웃겠다. 마음도, 말도, 몸짓도 아니라 낙낙한 웃음을 주겠다. 그것은 네게 한껏 나누어 주어도 그대로 내게 남아있는 모닥불 같은 것이겠으니, 잘하면 우리 그것만으로도 따듯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든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김태정,「물푸레나무」,『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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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쇼 님의 문장이 시가 되어 갑는군요..

syo 2017-08-24 10:55   좋아요 0 | URL
저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쇼코 2017-08-2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문단을 좀 오래 읽었어요. 저에게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거든요. 마지막에 ‘지쳤다‘는 술어까지 제가 그 사람을 떠올리며 자주 느꼈던 감정이라 읽는 순간 가슴이 덜커덩거리네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이해받길 원하는 것도 이기심일텐데 그걸 놓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오늘 글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또 막!! 더워졌어요ㅜㅠ 건강 조심 하셔요^^

syo 2017-08-24 12:24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똥이지만, 저 시집은 너무너무 좋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추천합니다.

쇼코님도 더위 조심하시구요^^
 

 

1

 

유유는 정말 미쳤다. 악마다. 버어어어얼써 저격당해 숨이 끊어진 내 취향의 시체 위에다 여전히 갈겨대고 있다! 그만,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출판사야, 제발 그만하라고, 당신네들 책 보다가 조상님 영접......은 과장이지만, 과장 아니라 유유의 정말 모든 책이 다 나 보라고 나오는 것 같다. 내 취향을 분석하기 위해 유유에서 공작원이 파견된 것이 틀림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쌍안경을 들고 내가 일기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듣기로 유유는 1인 출판사라던데, 그렇다면 전직원이 다 나를 감시하는데 투입된 셈이다. 책 출판 같은 소소한 일은 인공지능이 하고 있는 게 틀림없겠지.  

 

 

 

2

 

 

이 책들이 없었다면 내 글은 얼마나 더 끔찍했을까. 쌍안경으로 글을 쓰고 있는 syo의 모니터를 지켜보던 유유는 들끓는 울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더러운 이 세상에 저런 머저리 같은 문장으로 똥물까지 타도록 놔 둘 수는 없지. 유유는 한 손으로는 쌍안경을 들고 여전히 내 동태를 살피는 한편, 나머지 한 손으로 인공지능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세돌을 이겨먹은 인공지능 집안의 좀 모자라지만 구김살 없이 자란 막내놈쯤 되는 유유의 인공지능은 즉시 명령을 캐치하여 작가를 섭외하고, 디자이너를 섭외하고, 교열보고, 편집봐서 책을 출판한다. 책이 나올 때쯤 되면 제 아무리 자아성찰에 재능이 없는 syo로서도 더 이상 자신의 문장을 눈뜨고 볼 수 없게 되었기에, 알라딘을 뒤진다. 그리고 유유의 책을 찾아낸다. 일은 십중팔구 이렇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3

 

 

 

이 책들이 없었으면 나는 얼마나 더 무식했을까. 어느 날 카페에서 여자친구와 syo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syo야, 너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음......아무래도 유물은 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박물관에 전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세상에, syo야, 니가 달고 있는 그 머리통은 너의 사적인 유물일 뿐이니? 대화를 도청하고 있던 유유는 syo의 묵시록적인 무식함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저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만도 못한 뇌하수체를 가진 놈이 이 사회를 활보하도록 풀어 놓을 수는 없지. 유유는 인공지능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명령을 캐치한 인공지능이, 판권을 확보하고, 번역하고, 감수를 받고, 이 책들을 출판했을 무렵, syo는 실연의 슬픔을 딛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알라딘을 뒤지고, 이 책들을 발견해 읽는다. 그리고 외친다. 이 나쁜 기집애, 니가 그렇게 잘났냐, 그래봤자 너나 나나 똑같은 자연선택의 산물일 뿐이야, 이 남근선망의 결과물아!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헛소리는 허공에 산산히 부서지고, 굵은 눈물이 또르르 syo의 볼을 타고 흐른다. 이번만큼은 유유가 조금 더 선제적이었어야 했다.

 

 

 

4

 

   

그리고 이 책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더 지루한 놈이 되고 말았을까. 실연의 밤을 눈물과 지식으로 수놓으며 새로운 인연을 기다렸으나 syo의 곁자리에는 끝내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고, 아, 내가 무식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syo는 이미 어떤 코미디에도 웃지를 못하는 메마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syo의 비루한 모습을 역시 쌍안경으로 지켜보던 유유의 가슴 속에 어찌 타는 듯한 연민과 동정심이 샘솟지 않았으랴. 그래, 너는 심장이 없어, 너는 심장이 없어, 너는 아프다고 말하면 더 아플 것 같고, 슬프다고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웃지, 그냥 웃지...... 하여간 인도적인 차원에서라도 저 못난 자식에게 웃음이라도 되찾아 주어야겠군. 유유는 인공지능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명령을 캐치한 인공지능은 15세기부터 시작해 출판된 모든 고전을 훑어내려가며 syo가 웃지 않고는 배겨 낼 도리가 없는 걸작들을 찾아내고, 번역하고, 양념을 치고, 출판한다. 그 무렵 syo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었기 때문에, 이유없이 구글에 트림, 똥, 방귀 따위를 때려 넣으며 소일하고 있었는데, 떡하니 검색된 책과, 그 근처에 있는 책들을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메말랐던 마음에 촉촉히 개그의 단비가 내림을 느낀다.....

 

 

 

5

 

이런 짓은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만 둔다. 읽은 책들은 더 많다. 지금도 유유는 쌍안경을 통해 내가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람 하나 만든 거지, 하면서. 동의한다. 유유, 당신은 분명 이 글을 보고 있다. 당신은 좀 더 보람을 느껴도 좋겠다. 이제 syo는 물가에 내 놔도 걱정이 덜 되는 인간이 되었고, 당신은 더 이상 다음에 출판할 책을 결정하기 위해 내가 어떤 머저리 같은 짓을 할지 지켜볼 필요가 없다. 내키는대로 만드시라. 이제 당신이 무슨 책을 만들어도, 나는 읽을 것이다. 이미 방귀도 읽은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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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22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 글 실력 늘어가는 것 좀 보소!!!!!

syo 2017-08-22 21:38   좋아요 0 | URL
아시다시피 제 스타일이 뭘까 찾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는 중입니다.

다락방님은 즐거운 글을 선호하시니까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ㅎㅎㅎ

다락방 2020-10-06 08:19   좋아요 0 | URL
나 유유 검색하다가 이 글 보면서 이 글 참 재미나네, 댓글 달라고 했더니 여기 이미 내가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10-06 13: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시절 내가 좀 잘 썼다?

책읽는나무 2017-08-22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김영하 작가님을 제친 유유책이라굽쇼???
음.....그래도 어쨌거나 좋아요 한 개는 지금 눌렀어요.
이제 몇 개 남은거죠??

syo 2017-08-22 22:23   좋아요 0 | URL
ㅎㅎㅎ음, 백만 개요??

졔졔 2017-08-2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만화보는 것처럼 킄킄ㅋ대면서 읽었어요ㅋ 재밌는 글이에요! 유유 출판사는 독특한 시그니처(?) 디자인을 갖고 있네요?! 책 디자인을 많이 보는편이라^^;

syo 2017-08-23 06:25   좋아요 0 | URL
엄청 품격있는 디자인은 아니어도 어떤지 모아보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오거서 2017-08-23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유유 책을 볼 때면 syo 님이 바로 떠오를 것 같아요. ^^;

syo 2017-08-23 08:12   좋아요 0 | URL
앗, 바람직하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혀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책들 보는데 syo같은 게 떠오르면 뒷맛이 찝찝할 거예요^^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금정연 / 어크로스

 

일기만 쓰다 질려 슬금슬금 서평의 영토를 넘보던 꼬꼬마 시절, 내 서평이 가야할 길을 탐색하기 위해 명망 높은 서평가들의 책을 뒤지곤 했다. 많이들 권하던 정희진 스타일은 멋있고 욕심도 났지만 어쩐지 냉엄해서 포기. 아무도 권하지 않던 장정일 스타일은 식음을 전폐하고 독서에만 매달리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아, 이래서 아무도 안 권했구나 하며 포기. 비슷한 이유로 이현우 스타일 포기. 포기. 포기. 포기. 그렇게 포기로 배추 말고 책을 세는 것도 지쳐서 그만 포기하려는 찰나 운명처럼 금정연이 걸렸다.『서서비행』이 연이은 대출로 서가에 꽂힐 틈이 없었던 탓이니, 우리의 만남이 늦은 이유는 전적으로 금정연의 책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사실 매우 좋았다. 내가 금정연의 글에서 발견한 매력 포인트는 빈정거림과 투덜댐의 통속적인 앙상블이었는데, 나 또한 또래집단 내에서 빈정거림으로는 아주 명망이 드높은 재야의 빈정거리니스트였으므로 아, 바로 이거다 싶었던 것이다. 물론 금정연의 글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기조는 "자조"지만, 그거야 뭐 나 자신을 빈정거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리하여 나는 금정연 이미테이션, 금정연의 하위호환 기종, 양산형 금정연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다. 배'칠'수와 '너'훈아가 그 이름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당당히 활동하듯, 언젠간 나도 당당한 금정'역'이 되어 사해에 명성을 떨치리라 이를 악물었다. 악물었으나 이는 한 달도 안 되서 느슨해졌다. 아무리 서평이랍시고 각 잡고 써도 끝내 일기나 자소서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지금 이 글도『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의 서평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구러 오늘날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어디까지 온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나른하달지, 나태하달지, 어쩐지 슬그머니 늘어지는 매너리즘의 냄새가 나는데, 그건 나도 그래. 항상 매너리즘에 푹 빠져 있지(겨우 이 정도가 현재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빈정거림x자조 컬래버레이션의 최대치인 걸 보니 아, 아직 갈 길이 구만리임을 알겠다.....). 어쨌든, 여전히 금정연은 나한테 참 탐나는 글을 쓰는 서평가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 금정역의 꿈을 완전히 버리진 못한 것도 같다.  

   

 

 

 

 

어서오세요, 오늘의 동네서점 / 땡스북스 + 퍼니플랜 / 알마

 

내 기억 속 최초의 동네서점에서, 아버지가 3권짜리 만화 한국사 책을 사 주셨던 것 같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사줬겠지만 그걸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히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혁명과 경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막대한 분량으로 실려 있었을 테니까. 그런 시절이었다. 그 책을 다 읽었을 무렵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동향 사람일 뿐인 당신에게 뭐 하나 챙겨준 것 없다는 이유로, 아주 냉정하고 잔혹한 놈, 차갑고 인정이 메마른 시대라고 노태우와 그 집권기를 평가했다. 그리고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다고 여겨지는 노인에게 투표했는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었다던 그 노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노인은 아마 생애 최초로 실패한 것 같고, 그래봐야 시련의 경험을 1회 추가하는 데 그쳤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또 대통령에게 콩고물을 받아먹는 데 실패한 셈이었다. 시련이었다. 실패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하여튼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나 마나, 나는 좋았다. 동네에 서점이 있는 것은 큰 축복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동네에 서점이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느낄 줄 아는 깨친 꼬맹이었다는 게 더 큰 축복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역시 서점이 만들어 준 축복이었다. 책은 너무도 구하기 어렵고, 어린 아이 용돈으로는 침도 함부로 흘리면 안 될 물건이었으므로, 그저 책을 만져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막 행복하고 그랬다. 당시는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시절은 끝났다. 우리는 이제 어떤 책이건, 어디의 책이건 너무도 쉽고 간편하게 구할 수 있다. 얻기 쉬운 것은 얻지 않기도 쉬워진다. 언제나 얻을 수 있으므로. 얻기 쉬운 것은 버리기도 쉬워진다. 언제나 다시 얻을 수 있으므로. 얻지 않거나 버리는 데 부담이 없으면 이내 소중하지 않게 된다. 지금 당신의 등 뒤에 있는 책꽂이를 보세요. 사놓기만 하고 읽지도 않은 책이 무수히 많진 않습니까. 그러고도 당신의 장바구니는 여전히 새 책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인정하자. 우리에게 이제 책은 소중하지 않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주변은 다 낡고 허물어져가는 공중 목욕탕이고, 다리엔 차꼬가 채워져 있고, 눈 앞에 있는 낡은 모니터 안에서 광대뼈에 회오리 모양을 한 인형이 음산한 목소리로 "너는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되어도 양심에 찔려서 차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따져 볼 도리가 없을만큼, 우리에게 이제 책은 소중하지 않다. 그러므로 책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공간인 서점 또한 더 이상 소중하지 않다.

 

책이 흔해져 그 소중함을 잃었고, 그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책에게 소중함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 현실에 마침내 그들이 떨치고 일어나 우리에게 왔다.『어서 오세요, 오늘의 동네서점』은 책의 소중함을, 서점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기 위하여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분투하고, 그 분투 속에서 소소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판매용 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읽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서점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3)

 

저희는 소심한 책방이 '숨어있기 좋은 방, 전망 좋은 방, 자기만의 방'이 되길 바라고 있어요. (58)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 파는 공간이 아니라, 세상의 온도를 높이는 곳이라 생각해요. (81)

 

이미 너무 구하기 쉬운 책의 소중함을 되찾기 위해서, 책과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을 탈환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그들과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나저나 세상에, 명색이 서평인데 정작 책 이야기는 인용 빼면 꼴랑 6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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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8-2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장정일, 이현우... 저도 포기 포기... ㅋ
금정연, 첨 듣는 작가에 저도 귀가 솔깃... ㅎ

syo 2017-08-21 20:55   좋아요 1 | URL
참 재미있는 서평을 쓰는 서평가인 동시에, 웃기면서도 난해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북다이제스터 2017-08-21 20:56   좋아요 0 | URL
좋은 책과 작가 소개 감사합니다. ^^

다락방 2017-08-2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친 꼬맹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08-22 06:47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기조입니다 ㅎㅎ

독서괭 2017-08-22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오오 찔립니다ㅋㅋ 일기같은 syo님의 글을 읽으며 금정연씨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으니 성공적인 서평이네요^^

syo 2017-08-22 06: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
저도 책꽂이에서 노려보고 있는 책들 때문에 양심에 불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날 또 책을 대출해 오곤 하지요...

책읽는나무 2017-08-22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절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었습니다.
전 이런 글 좋아서....‘좋아요‘ 열 번 누르고 싶네요^^

syo 2017-08-22 08: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ㅎㅎㅎ. 나머지 아홉 개의 좋아요는 비축해놓으셨다가 나중에 제 별로 안 좋은 글을 만났을 때 옛다 하나씩 툭툭 던져주세요.

쇼코 2017-08-22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은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계속 미루기만 했어요. syo님 글 읽고 바로 질렀어요. ㅎㅎㅎ 독서괭님 말씀대로 역시 책을 읽게 만드셨으니 성공적인 서평이라 생각해요.^^

그나저나 하나 둘씩 사라지던 동네 서점을 떠올려보면 참 안타까워요. 저도 고등학생 때 자주 가던 책방이 있었는데 그때 좋은 추억이 많거든요. 책을 사러 가는 것보다 구경하러 많이 갔어요. 친절한 주인아주머니랑 친해서 눈치 안보고 구경할 수 있었는데... 얼마전에 다시 가 보니 사라졌더라고요. 따흐흡ㅠㅠ 두번째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

syo 2017-08-22 11:35   좋아요 0 | URL
항상 좋게 봐주시니까요 쇼코님은^^

요즘 작은 동네 책방에 관한 책들을 조금씩 읽게 되는데 어쩐지 뭉클하기도 하고 좋더라구요. 어차피 책 한 권 살거면 인터넷으로 사는 것보다 직접 작은 서점에 가서 사면, 똑같은 책이라도 어쩐지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17-08-2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칠수, 너훈아...에서 흠흠.. 하다가 금정역에서 빵!터졌어요. 금정역 ㅋㅋㅋㅋㅋㅋ
저는 어떤 글보다도 서평이 글쓴이에 대한 궁금증, 다른 말로 하면 글쓴이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장르라 생각합니다. 그냥 쭈욱 책얘기만 할 거면 줄거리요약을 읽고 말겠죠.
syo님의 매력은 금정역을 넘어 syo역에 다다를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syo 2017-08-22 11:38   좋아요 0 | URL
와 ㅎㅎㅎ 단발머리님이 제 회심의 ˝1-4호선 환승개그˝를 알아주셨군요.
아, 보람차다.
칭찬 감사하고 개그 코드 맞아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블랙겟타 2017-08-2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오세요, 오늘의 동네서점> 이 마침 책꽂이에 꽃혀있었는데 ‘지금 당신의 등 뒤에 있는 책꽂이를 보세요.‘ 응? 뒤에 책꽂이가 진짜 있는데 ‘사놓기만 하고 읽지도 않은 책이 무수히 많진 않습니까.‘ 여기서 뜨끔! ‘그러고도 당신의 장바구니는 여전히 새 책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한번 더 뜨끔!! 했었네요 ㅜㅜ

syo 2017-08-22 15:1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반드시 누군가는 걸려들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러니까요!!! ㅎㅎㅎ

공쟝쟝 2019-12-30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댓글 갚으러 왓어요.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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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라도 장성에 갔다 오늘 돌아왔다. 장성에서는 고깃집에서 고기 먹고, 치킨 집에서 치킨 먹고, 집에서 밥 먹고, 까페에서 커피 먹었다.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서울에서 다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구에서 온 나도 대구에서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별 것 없었다. 정말 별 것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움이 된다. 인간은 가끔 이래저래 큰 일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별 것 아닌 일로도 충분히 충만해지는 별 것 아닌 존재일 뿐이다. 장성에서 나는 내가 이토록 별 것 아닌 존재라는 사실이 고마웠다. 숙소를 둘러싼 밤이 고즈넉해 고마웠다. 서로 울음이 다른 풀벌레들이 각기 제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알았는데, 고마웠다. 열심히 살았거나 조금 꾀를 부렸거나, 어쨌든 우리는 하나같이 세상에 치이다 지쳐 퀭한 얼굴로 모여 앉았는데, 그저 고마웠다. 서울에서 오거나 대구에서 오거나, 각자가 끌고 온 그림자들의 색이 같았다. 고마웠다. 별 것 아닌 존재로 사는 일이, 별 것 아닌 눈으로 본 것들과 별 것 아닌 귀로 들은 것들을 가지고 모여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별 것 아닌 시간들이. 

 

억지로 별 것처럼 보이려 하지 말자. 별 것을 만들려 하지 말자. 이 밤을 특별한 밤이라 이름 붙이지 말자. 우리는 밤새 이야기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이 새벽 빗줄기 사이로 번져 조용히 사라지고, 우리는 그 이야기들의 뒷꽁무니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장성이었다.

 

 

 

170811-170820  26권

         

 

읽기 / 쓰기  6권

 

 

 

 

1. 고양이의 서재

: 애서로 이름 날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성장과정을 거쳐 여기에 왔노라. 전반적으로 잘난 척 하느 느낌이지만 실제 이 정도면 잘난 것도 맞다. 그나저나 표지는 무진장 귀엽다. 편집자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2.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는 김대식을 참 좋아하지만 그의 책을 접하면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성기게 편집을 하나. 이 엄청난 빈 공간은 무엇인가. 이 그림들이 반드시 필요한가. 과연 양장까지 해야 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이 읽은 건 알겠지만 쓸 때는 어쩐지 쉽게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함량. 함량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김대식이 "전문성을 갖춘 이지성"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3. 안톤 체호프처럼 글쓰기

: 더 좋은 글쓰기 책이 많다. 체호프의 글 또한 더 좋은 글이 많다.

 

4. 단단한 공부

: 좀 옛스럽긴 해도 변하지 않는 고갱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5.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제목은 '사람'을 읽다 인데 자꾸 '사랑'을 읽다라고 쓰게 된다. 고쳐 쓰다가도 아무렴 어때 싶다. 별로 틀린 말도 아닌데. 퍽 사랑스러운 사람이 쓴 사랑스러운 책이다.

 

6. 쓰기의 말들

: 지금은 어떤 말이 쓰기의 말이 될 수 있다. 많이 쓸 것이다. 그러고나면 어떤 말도 쓰기의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10권

 

 

 

 

7. 아름다운 그런데

: 언어의 마술사라는 말이 칭찬 같은지? 마술사의 마술은 관객에게 신비롭고 그 비밀을 알 수 없는 소통 불가능의 순간에만 마술일 뿐, 우리가 알아채는 순간 그 빛을 잃는다. 시인은 친숙한 언어를 뒤틀어 일종의 증강현실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마술 자체를 통과해 그 뒤에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의미"를 기어이 겨냥하여 다시금 소통의 문법에 맞추고 번형을 시도하는 순간, 이 아름다운 언어의 마술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저 말장난이 남는다.

 

8. 넛셸

: 웃으며 보자고 들면 웃긴다. 솔직히 웃길려고 쓴 거 아닌거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남자 캐릭터들 병맛 코드 작렬이고, 그것은 이언 매큐언의 고상하고 지적인 문체와 만나 '쓸데없이 고퀄'의 미학을 선보인다. 이 책은 햄릿을 들고 와 시대와 화자의 나이만 조정한 것이 아니라 장르도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꾼 것 같다.

 

9. 채링크로스 84번지

: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이 역시 책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10. 시의 문장들

: 슬프면 슬픈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그대로 다 어여쁜 이 문장들을 지으며 시인들 얼마나 기쁘고 또 슬프고 했을까. 이제 더는 시인을 외롭게 하지 말자.

 

11. 베누스 푸디카

: 아픈 몸을 통과하면 무엇이 태어난다. 통과한 아픈 몸을 되짚다 보면 무엇의 입이 열린다. 통과한 아픈 몸이 다시 아프면 무엇의 열린 입에서 시가 나온다. 무엇은 시인이 된다.

 

12. 바깥은 여름

: 김애란은 단편의 문법을 지킨다. 벽지를 새로 바르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는 일이고, 성과 '이응'까지밖에 쓰지 못한 이름은 그 이름의 주인이 생을 채워 살다가지 못했음을 바로 상기시킨다. 벽지를 내려놓을 수도, 혼자서는 붙일 수도 없는 자세는 잊고 나아갈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를 그대로 비춘다. 그러나 전통적인 문법을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면서도 김애란은 독자를 흔든다. 그게 김애란이다. 그게 김애란이 하는 일이고, 김애란이라서 하는 일이다.

 

13. 그때 그곳에서

: 뜨거움을 말해도 서늘한 문장. 그러나 누가 뭐래도 소설에서 더 빛을 발하는 설터.

 

14. 기사단장 죽이기 2

: 하루키는 죽지 않았다. 다만 조금 늙었을 뿐이다.

 

15. 온

: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토로하지 않는다. 아무리 차게 식었더라도 희망을 아직 채 다 버리지 못했을 때, 시인은 부러 시 쓰는 손을 냉정하게 해 본다.

 

16.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 장석주보다 한참 늦게 태어나 세월에 따라 그의 글이 변해가는 과정을 수월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을 노래하던 그는 '봄가을을 예순 번이나 겪어보니' 이제는 아예 내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곳을 이야기한다. 언젠가 나도 도착해야만 하는 곳이다.

 

 

철학 / 인문 일반 6권

 

 

17.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 중언부언은 있지만, 그래도 읽힌다(그나마).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중언부언도 약간의 변용을 가미한 반복학습(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하이데거 이 양반......)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나쁠 게 없다. 뭐지 이 짠내나는 평은......

 

18. 역경에 맞서는 법

: 제목 번역부터가 틀렸다. 책은 역경에 맞서려기보다는 역경을 슬기롭게 다루라고 가르친다. 결국 정신승리로 귀착되는 부분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책이 전하는 지혜는 자체 유용해보인다. 누구라도 한 두 군데씩은 맞아, 겪어보니 이렇더라니까, 하며 끄덕이게 되는 구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9. 열린 인문학 강의

: "랠프 바튼 패리"라는 자는 누구인가. 이 책은 꼭지마다 다른 교수의 강의를 담고 있는데, 언어가 유창하고 비유가 생기있고 전개가 부드럽다 싶어 강의자를 확인하면 십중팔구 저 사람이다. 나온지 100년도 더 된 책인데도 어제 쓴 글처럼 읽히는 강의는 오직 저 사람에게만 나오고 있다.

 

20.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몇 번째 읽는 책이지만 참 좋다. 우치다 타츠루처럼 다정하고 믿음직하게 개념을 풀어헤쳐주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21. 안녕 돈키호테

: 이런 책 좋다. 더 크게, 더 폭넓게, 한 1000페이지짜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열라 비싸서 살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좋지만, 제발 박웅현만 끼면 반드시 집어넣는 그 "창의력"이라는 말은 좀 참아줬으면 좋겠다. 이 책의 주제는 창의력이 아니라 "도전과 끈기"에 가깝다.

 

22. 하이데거의《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읽기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내말이. 이 책은 그러니까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란 또 무엇인가》인 셈인데, 내 역량이 어찌나 형편 없는지, 내겐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란 또 무엇인가》란 당최 무엇인가》가 필요할 지경이다.

 

 

정치 / 사회 3권

 

 

23.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 짧고 빠르게 달려가지만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 복잡한 정치 이론이 들어있지는 않아도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정치'가 어떤 모양인지 한 번쯤 돌아보게 해준다.

 

24. 단단한 사회 공부

: 사회공부라고 해서 사회학 같은 걸까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많이 아는 영감님의 팟캐스트를 듣는 느낌이다. 나쁘지 않았다.

 

25. 청년에게 고함

: 인터넷에 무수히 돌아다니는 성격 테스트(혹은 심리 테스트)문항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연단에 올라있는 당신의 눈에는 무수히 많은 대중들이 당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당신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침을 꿀꺽 삼키고 준비해 온 선동문서를 꺼냅니다. 그 문서는 다음 중 어느 것일까요?

1. 공산당 선언 - 마르크스

2. 독일 국민에게 고함 - 피히테

3. 항소이유서 - 유시민

4. 청년에게 고함 - 크로포트킨

엄청난 고민 끝에 나는 4번을 고르겠지.....

 

 

미분류 1권

 

 

26. 시사in 517

 

 

 

2

 

어쩐지 문학에만 자꾸 손이 가는 요즘이다. 한동안 이런 방향성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

 

읽기 / 쓰기 분야는 꾸준히 읽으려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분야다.

 

조금씩 읽는 페이스가 늦춰지고 있다. 2017년 8월에는 100권을 읽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8월 중순에는 뭐가 터진건지 과분한 칭찬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좋다. 누군들 안 그럴까. 더 쓰고 덜 읽자. 균형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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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21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많이 읽었네요. 저는 지금 [넛셀] 읽는 중인데, 남자들 진짜 병맛이다.. 생각하면서 읽고 있어요. 그런데 쇼님의 이 페이퍼에도 그렇게 등장하네요. 주말에 넛셀 다 읽을라고 했는데 놀다가 자느라고 못읽었어요. (시무룩)

일단 올려진 책들을 보고 [바깥은 여름]에 대해 쇼님의 평가가 어떨지 궁금했어요. 저는 김애란을, 그 뭐지, [두근두근 내인생] 읽고 ‘그만읽자!‘ 생각한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도 궁금했거든요. 쇼님은 전체적으로 좋게(?)평가한 게 맞지요? 저는 뭐랄까, ‘울려야지‘ 작정하고 쓴 글의 느낌을 김애란으로부터 받아서, 제가 안좋아하는 류라서 그만뒀거든요.

아 시사인... 제가 구몬도 밀리고 시사인도 밀렸습니다...하아- Orz

syo 2017-08-21 08:35   좋아요 0 | URL
김애란은 아무래도 단편인 것 같아요. 저는 책 읽으면서는 안 울었는데, 그게 김애란이 울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울릴 역량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어요. 좋게 생각한 건 맞아요. 읽기에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 시사인은 장충기 문자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내가 개새끼들과 한 하늘을 이고 잘도 살고 있었구나 느낄 수 있지요. 사실 그 느낌 자체는 뭐 그리 경험하기 힘든 일은 아니군요.

쇼코 2017-08-2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도 전라도에 계셨군요. 저도 그날 전주 한옥마을서 하룻밤 신세지고 왔거든요. 아침에 비가 와서 처마 밑에 앉아 빗소리 들으며 책 좀 읽어 볼라다가 모기한테 4방 뜯겼지 뭡니까. ㅎㅎㅎ 암튼 뜬금없이 반갑네요^^

쇼님 다독하시는 거 보면서 자극 받곤 하는데 산만한 제 속도로는 역시 무리 더라고요. 그냥 개미처럼 천천히 읽기로 했어요. 그래도 다독하시는 쇼님 덕분에 읽고 싶은 다음책이 많아져서 지금책 읽는 속도가 쪼끔씩 빨라지고 있어요. ㅎㅎㅎ

syo 2017-08-22 11:44   좋아요 0 | URL
하하, 둘 다 전라도에서 맛있는 전라도 음식을 먹고 있었겠네요!! 저는 맛있는 전라도 치킨을..... 전라도 BHC.....

저같은 다독은 권하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백수라서 가능한 일이거든요. 저도 뭔가 일을 하게 되면 삼일에 한 권도 벅차겠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알라딘 서재질밖에 없으니 것참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ㅎㅎㅎㅎㅎ

쇼코 2017-08-22 11:58   좋아요 1 | URL
전주 가시면 ‘소문난집‘ 콩나물국밥 꼭 드세요. 택시기사분이 추천해서 갔는데 인터넷맛집 소개난 곳보다 훨씬 맛나요. 국물김치도 정말 맛났고요. 새벽 4시부터 오전 11시까지 영업해서 전날 술한잔하고 해장하기 딱 좋더라고요^^ 저는 다음엔 전라도 치킨을... BHC를... ㅎㅎㅎ
 

 

1

 

 

이런 꿈을 꾸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조석이었다. 잠에서 깨어 생각해보건대, 그 얼굴과 가장 닮은 사람은 서태지이지만, 꿈 속에서 그는 분명 웹툰 작가 조석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그 서태지가 조석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을 뿐인데 그 서태지는 본인 입으로, 네 맞습니다. 조석입니다, 라고 시인했다. 안녕하세요, 조석씨. 나는 일곱 권의 책을 반납했다. 스무 권의 책을 빌리고 일곱 권을 반납했으니 열세 권이 남았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카운터에서 한 발 물러서서 몇 권이 남았는가를 어플로 알아보고 있었다. 몇 권을 더 빌릴 수 있는지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멍청하게도, 스무 권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 스무 권을 빌렸다가 일곱 권을 반납했으니 내 손에는 열세 권이 남았고, 스무 권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 열세 권을 빌렸으니 일곱 권을 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려했던 것 같다. 엄마가 너한테 사과 스무 개를 줬어. 근데 너가 사과 일곱 개를 먹었어.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너는 사과를 몇 개 먹었니? 어쨌거나 그때 갑자기 조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syo씨의 글에는 리듬이 있어요. 네? 그러니까 이런 리듬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네? 그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우와, 정말요? 네, 제가 만화로 그리고 싶습니다. 만화로요? 네,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로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네? 그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우와, 정말요? 네, 아무래도 syo씨의 글에는 리듬이 있으니까요.

 

이런 대화가 한없이 이어지다가 점차 가늘고 희미해더니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꿈을 꾼 거지? 그러니까 어제 이백오십만 년만에 맥주 두 잔 먹고, 4킬로미터를 걸어걸어 집으로 왔고, 두 시까지『쓰기의 말들』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요즘 쓴 리뷰나 페이퍼들이 갑자기 칭찬을 받아서 꽤 기분이 좋았나보다. 열심히 쓰라는 꿈인가 봐. 칭찬은 syo를 춤추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춤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당최 저놈의 좌삼삼 우삼사가 뭔지를 모르겠다...... 좌삼삼 우삼사가 내 "쓰기의 말"이 되고 싶어서 얼른 꿈에 나온 걸까?

 

 

힘들면, 도망가고 싶다. 쓰는 삶에서, 쓰는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하염없이 걷지만, 일시적인 기분 전환일 뿐 마음이 홀가분하지도 걸음이 자유롭지도 않다. 글 쓰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쓰는 것. 몸의 감각이 쓰기 모드로 활성화되고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밑 원고가 다져진다. 모터가 돌아가고 원고가 불어나 있으면 그 불어난 힘이 글의 소용돌이로 나를 데려간다.

_ 은유,《쓰기의 말들》

 

 

2

 

빵 굽는 사람은 빵을 굽고, 집을 짓는 사람은 집을 짓는다. 빵 굽는 사람은 빵으로 말하고, 집을 짓는 사람은 집으로 말한다. 나는 날마다 짐승처럼 엎드려 여덟 시간씩 글을 쓴다.

_장석주,《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불굴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작가들. 오늘 책이 나왔다고 하니 지금쯤 다음다음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겠다 싶은 책 머신들. 강준만, 우석훈, 박홍순 그리고 장석주. 엎드려 여덟 시간의 글을 쓰는 문장의 짐승남은 멋이 있다. 가끔씩 저런 삶을 꿈꾸기도 한다. 평생을 치열하게 읽기와 쓰기에 매달려 살아온 것이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 되고 널리 존경받을 이유가 되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겠다.  

 

 

3

 

그리하여, 지식과 재능을 가진 당신이 그 위에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당신과 동료는 자신의 지식과 재능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무하려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고 함이 아니라 투쟁의 동료가 되기 위함입니다. 지배하려고가 아니라 미래를 정복하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당신 자신을 고취시키고자 함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중의 갈망을 이해하고 정확히 표현하려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들이 청년의 모든 도약과 함께 삶 속에서 녹아내리도록 부단히 활동하기 위함입니다. 그때라야, 비로소 당신은 하나의 완전한 삶, 이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_P. A. 크로포트킨,《청년에게 고함》

 

또한, 책상에서만 글 쓰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우되 싸움 안에서 내가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 쓰되 쓴 것을 바로 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채우고 그 이웃은 또 다른 이웃을 채우며 빙빙 돌아와 마침내 내게 오도록 하는 사람 되면 좋겠다.

 

으, 오글오글,

 

도와주세요. 중2병이 낫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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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8-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2병도 이만한 문장으로 표현되면 작품입니다. 꿈 내용 너무 재밌네요. 서태지 얼굴을 한 조석은 뭔가요. 좌삼삼 우삼사는 또..ㅋㅋㅋㅋ 앞으로도 많이 춤추세요!^^

syo 2017-08-19 11:25   좋아요 0 | URL
뭘까요 저 좌삼삼 우삼사는...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으니까 꿈에 나온걸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ㅋㅋㅋㅋ
좋은 주말 되세요, 독서괭님.

시이소오 2017-08-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syo님 글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는것 같아요. 다락방님 리뷰글도 넘 좋던데. 계속 좌삼삼우삼사해주시길^^

syo 2017-08-20 13:46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이 생업에 종사하시느라 덜 읽고 덜 쓰시는 까닭에 제 못난 글들이 이웃분들 눈에 띄는 것이겠지요. 그립습니다.....

AgalmA 2017-08-2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얼굴이 좌삼삼 우삼사로 상상되려고 해요ㅋㅋ 그게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물으시면 꿈에서 보여 드릴 수 있다고... 줄행랑))) ㅎㅎ

syo 2017-08-21 11:09   좋아요 1 | URL
거울을 봤더니 정말 제 얼굴이 좌삼삼 우삼사로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는 AgalmA님 꿈으로 확인하실 수 있겠으나, 힌트를 드리자면 꿈에서 만나보라고 추천할 만한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좌삼삼 우삼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