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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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래를 멋있게 부르지는 못했지만, 계란 후라이를 예쁘게 뒤집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마음이 따듯해서 괜찮은 사람이 되는 일. 그것은 마음의 일이라서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말을 지지하고, 몸짓에 응답하면 끝나는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가갔다.

 

자주 혼자가 되었다. 혼자서는 미운 것이 참 많았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미웠다. 너의 말을 지지하는 내 말을 지지하지 않는 네가 미웠다. 너는 벽이었다. 벽은 몸짓이 없었다. 무엇에 응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빈 방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었다. 미움으로 돌아오는 미움을 받아내는 것은 메아리의 일이었다. 미워하다 혼자서 잘도 지쳤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다. 노래도 이제 웬만큼 하고, 계란 후라이도 척척 뒤집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은, 마음이 따듯할 줄 몰라서 괜찮지 못한 사람으로 사는 일. 그것은 마음의 일도, 말의 일도, 몸짓의 일도 모두 될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쉬운 일은 웃는 일이었다. 미움은 시간의 긴 꼬리를 따라가고 이제 내 방에 작작하게 웃음만 남았으니, 다시 너를 만나 너에게 따뜻한 사람이 될 일이 생긴다면, 웃겠다. 자주 웃겠다. 마음도, 말도, 몸짓도 아니라 낙낙한 웃음을 주겠다. 그것은 네게 한껏 나누어 주어도 그대로 내게 남아있는 모닥불 같은 것이겠으니, 잘하면 우리 그것만으로도 따듯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든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김태정,「물푸레나무」,『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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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쇼 님의 문장이 시가 되어 갑는군요..

syo 2017-08-24 10:55   좋아요 0 | URL
저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쇼코 2017-08-2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문단을 좀 오래 읽었어요. 저에게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거든요. 마지막에 ‘지쳤다‘는 술어까지 제가 그 사람을 떠올리며 자주 느꼈던 감정이라 읽는 순간 가슴이 덜커덩거리네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이해받길 원하는 것도 이기심일텐데 그걸 놓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오늘 글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또 막!! 더워졌어요ㅜㅠ 건강 조심 하셔요^^

syo 2017-08-24 12:24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똥이지만, 저 시집은 너무너무 좋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추천합니다.

쇼코님도 더위 조심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