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년 가까이 책 신세를 지고 있는 도서관은 아이들이 보는 책을 뺀 모든 책들이 하나의 자료실에 들어가는 작은 규모의 시립도서관이지만, 서가에만 서면 나는 여전히 막막하다. 이제 책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디쯤 꽂혀 있을 거라고 짐작할만큼 눈에 익고 발에 익은 이 책 방 한 칸이, 나는 아직도 넓다. 읽을 수 없는 모든 책은 읽을 수 없고, 읽을 수 있는 책의 대부분은 읽을 수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머리가 했지 마음이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늘 욕심내고,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작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미미한가, 나는 얼마나 사소한 인간인가, 하다보면 또 늘 헛헛해진다.

 

아름다운 것들이 책 속에 무수히 숨어 우리와의 접촉을 기다리고 있다. 탐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알 기회가 없을 것이다. 책으로 뒤덮인 그 두 개의 벽 앞에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경탄하고 있었다. 이 모든 책 하나하나를 만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나는 평생 나 자신이 얼마나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스치고 지나가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_양자오,《자본론을 읽다》 27~28쪽

 

하버드 대학의 수백만 장서를 마주하고도 의연한 자세로 탐구욕을 불태우는 저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 권 단위의 책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요런 인간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만 권을 읽기 어렵듯이, 저 사람도 백만 권을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가 됐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는 날까지도 아놔, 그 책 사 놓고 결국 읽지도 못하고 죽네, 아놔, 그 작가 신간 다음 주에 배송되는데, 굿즈도 같이 오는데, 그거 받을라고 억지로 금액 맞췄건만 보지도 못하고 가네, 하는 식의 생각에서 말끔하게 해방되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독서를 운명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끝은 하나 같이 똥이다. 독서는 똥으로 향하는 험난한 길인 셈이다! 빅 똥! 물론 백만 권을 읽고 싼 똥이 만 권을 읽고 싼 똥보다 백 배 진하고 무거울 수는 있겠지만. 

 

 

 

2

 

아무 것도 아닌 글이라도 매일 뭔가를 쓰는 일은 칭찬할 만하고, 의외로 누구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매일 쓴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닌 글이 아무 것인 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제발 아무 거라도 되어 달라는 식으로 써내는 하루하루가 쌓여 어느 날부터 정말 어마어마한 글을 만들 수 있게 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기왕 써 놓은 글들이 뿅 하고 아무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글 쓰는 사람도 똥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꽃을 쌀 수도 있지만, 그 순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똥을 쌀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먹을 갈고 붓을 들던 시절이나 원고지에 만년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쓰던 시절이면 모를까, 인터넷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과거에 싸놓은 똥들을 소거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철 모르던 시절 싸 놓은 똥 때문에, 그 똥의 진짜 의미는 그 똥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싼 똥은 냄새가 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벌써 언급했지만 그 똥은 픽션이었습니다, 같은 똥을 지금도 싸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내 상태는 불행은 아니다. 하지만 행복도 아니다. 내 상태는 무관심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지친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관심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 상태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마 글을 쓸 능력이 없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무능함을, 이 무능함의 이유는 알지 못하면서, 난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리고 이런 질문이 아직은 내가 말을 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매일 적어도 한 줄은, 마치 사람들이 이제 혜성을 향해 망원경을 겨냥하듯이, 나를 겨냥해야만 할 것이다.    

_ 프란츠 카프카,《카프카의 일기》 

 

카프카는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싸놓은 똥을 치우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매일 한 줄, 힘겹게 자신을 겨냥하며 써냈던 모든 글들이 그에게는 그래봐야 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똥에서 향기를 맡은 친구란 작자가 카프카의 똥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마침내 그 똥은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어쨌든 카프카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똥이었고, 그 덕에 똥 판별기의 기준이 치솟아, 세상에 존재하는 글의 대부분은 똥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글 쓰는 자들의 대부분은 똥머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차피 사람이란 먹으면 결국 쌀 수 밖에 없는 동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 똥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똥칠하지 않도록 내 똥을 잘 관리하는 일이 되겠다. 좋은 것 먹고, 바르게 싸고, 뒷처리 잘 하고.

 

 

 

3

 

도서관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추태 중 하나는 열람실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나가는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좌석이 열람실 입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람실 입구에서 3~5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 지점이라면, 보통은 "여보세요? 예, 예예." 까지를 열람실 안에서 해결하는 셈이다. 세 걸음만 더 걸으면 밖인데, 왜들 저러는 걸까?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저러는 사람들은 내 통계상 90%이상의 빈도로 외모 나이 50대 이상의 남성이다.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 여기가 대구인 것과는 관련이 없을까?

 

어릴 적, 예절을 숭상하는 우리 집에서 예절 위에 있는 것은 딱 하나 뿐이었다. 가장. 예절 위에 가장. 가정 안에서 예절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가정 밖에서도 자기가 에티켓 위에 존재하는 줄 안다. 계속 까똑까똑 소리가 나는데도 끝까지 진동으로 바꾸지 않고 있는 아저씨에게 내가 제발 좀 진동으로 바꾸라고 지적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그들은 에티켓 같은 사소한 것보다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뭔가를 지적하는 비윤리도덕적 패륜에 과도하게 민감한 감수성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디서 어린놈이, 하는 말을 들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나라고 다른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내 옆자리에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타인이 앉지 못하게 하는 못된 놈이다. 이 도서관에서 좌석이 부족할 만큼 사람이 붐비는 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꼭 내 옆에 앉고 싶을수도 있는데 그럴 가능성을 원천봉쇄 하는 셈이다. 감히 두 자리를 맡다니!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탐욕의 증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가 여기 앉을건데 짐을 치워달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며 묵묵히 나는 책을 읽는다. 이게 뭐 큰일이라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래저래 결국 타자와 사는 것은 똥이다, 그야말로 비이이익똥이다! 우리는 결코 서로의 에티켓을 교환하고 납득하여 아름다운 대동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건 다 저놈의 돼먹다 만 자식이 지는 도저히 용서가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르면서 누구라도 기꺼이 용서할만큼 사소한 나의 잘못을 침소봉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내가 맞고 쟤는 틀리는 식으로 다르다. 혹은 내가 맞고, 우리 편은 조금 덜 맞고, 쟤는 틀렸고, 쟤 옆의 놈은 조금 덜 틀리는 식으로 다르다. 그래서 이놈의 세상이 똥인 것이다. 아 저것들을 언제 한 번 싹 다 치워야 되는데,    

 

 

4

그림자 속으로 그림자가

파고들며 킥킥거렸다

서로의 품속에서 따스해지는 곳

덩굴들이 뒤얽히고

물고기들 함께 뛰노는 곳

가자 그곳으로

까만 밤과 하얀 별

새카맣게 빛나는 곳-

 

첫째날 밤

별들이 서로 다른 피의 정액이 되어 밤하늘이 태어났다

 

둘째날 밤의 꿈

세계는 별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엮은 꽃다발이었고,

 

셋째날 꿈속에선

차가운 바람이 은하수 위로 불자

성좌의 동물들이 첨벙첨벙 뒤섞였다

곰, 전갈, 날갯짓 치는 백조들

 

천하루날 밤, 꿈들의 막이 터져

밤하늘들이 뒤섞였다

소란스레 폭죽 터지고

물살이 별들을 쓸어갔다

어둠과 빛이 뒤섞인

그늘진 아이

쪽으로, 양도 고양이도 아닌 동물 하나 걸어와

조용히 살을 섞었다

 

혀와 혀가 만나는 곳

 

5

두송이 꽃이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곳

 

_박희수,「밤하늘」부분

 

나는 누군가는 선하게, 누군가는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랜덤설을 주창하지만, 인간의 본성과는 별개로 시인이 그리는 저런 아름다운 나라가 도래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한다는 말은, 사람들마다 "차이"에 포함시키는 것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공염불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벌써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한다. 다만 누군가에게 동성애는 차이가 아니라 치료해야 할 정신병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피부색은 차이가 아니라 내재된 인간성이며, 다른 아무개는 성차는 차이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특성이라 생각할 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가 똥일 수 있고, 나와의 관계가 똥일 수 있고, 나 때문에 사는게 똥일 수 있는 이런 똥밭 같은 위험한 이승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굴러야 하는 걸까? 저 사람 정말 똥 같군,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웃으며, 선생님 죄송하오나 전화는 나가서 받아 주시면 어떨까요, 하고 부탁하며, 상대방 또한 이 자식은 정말 똥 같군, 하지 않고 웃으며, 아이쿠, 제가 그만 정신이 없었군요. 추후에는 주의하겠습니다, 대답하는 꽃 같은 세상이 정말로 올 수 있을까? 어쨌든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 만나고 섞이는 밤이 하루 이틀을 세다 결국 천 하나의 밤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두 송이 꽃이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어려운 길이다.   

 

 

 

4

 

이렇게 시종일관 드러운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되게 센치한 상태여서 난 오늘 내가 시라도 한 편 쓰려나 보다 했는데, 세상에, 똥이라니. 

 

그렇지만 뭐 크게 더러운 일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는다. 이런 책도 버젓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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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7-20 06:06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저는 변비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갰습니다.....ㅠ

다락방 2017-07-2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이 글은 똥 파티네요.
인생도 똥 글도 똥 너도 똥 나도 똥 우리 모두 똥똥똥똥똥....
이 글을 어제 자기 전에 읽었다면 똥 꿈꾸고 좋은 하루가 되었을텐데, 어제 뻗어 자버리는 바람에 이 글을 놓치고 오늘 아침에야 읽네요...똥꿈 꾸면 좋다는데....돈 들어오는 꿈이라는데...
똥...

똥에 의한 의식의 흐름...



그럼 이만 안녕히...

syo 2017-07-20 08:18   좋아요 0 | URL
으윽 오늘 아침은 새 마음 새 뜻으로 으쌰으쌰 시작했었는데, 왜 제가 어제 싼 똥을 오늘 제게 던지셔요 다락방님......ㅠ

cyrus 2017-07-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 파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본 책들 중에서 가장 더러운 내용입니다. 책에 코를 파는 방법이 그림으로 나와 있습니다. ^^

syo 2017-07-20 13:25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cyrus님, 코파기는 많은 경우 실제로 즐겁습니다.....

단발머리 2017-07-2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책을 산처럼 쌓아 타인이 앉지 못하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너무 마음에 와닿네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서요 ㅠㅠ
누군가는 꼭 내 옆에 앉고 싶을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어요. ㅎㅎㅎㅎㅎ

syo 2017-07-20 13:26   좋아요 0 | URL
빈자리가 많지만 굳이 내 옆에 앉고 싶었을 분들께(그런 분들이 분명히 있을거라 믿고)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집시다. ㅎㅎㅎㅎ
 

1

 

전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못쓸 인간이라, 요즘 가장 사고 싶은 녀석은 새 옷으로 갈아입은 10권짜리 카프카 전집이다. 다 갖추려면 살림살이에 비바람이 몰아치겠지만, 책장에는 광명들겠다. 많은 알라디너들이 그렇듯, 사실 사 놓고 다 읽지도 않는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저께 도착했지만 아직 띠지를 두른 채 정수리에 먼지만 조금씩 쌓아나가고 있다.

 

노는 건 아니고, 읽기는 뭔가 계속 읽고 있다. 도서관에서 하루에도 몇 권씩 빌려다 읽는다. 그런데, 음, 스택Stack이라는 것이 있고 힙Heap이라는 것이 있는데, 스택은 접시 위에 접시 쌓는 방식이라 맨 마지막에 들어간 접시를 가장 먼저 꺼내야 하고, 힙은 먼저 들어간 놈을 먼저 꺼낸다. 힙 방식으로 책을 읽으면 참 좋을텐데, 이런 스택, 어찌된 일인지 맨날 스택, 스택이다. 제일 먼저 빌린 책은 반납날이 빚쟁이 구두소리마냥 하루하루 가까워지는데, 타는 똥줄 부여잡고 오늘 빌린 책을 먼저 읽는 그런 변태. 과거를 잊은 남자. 좋다고 빌릴 떈 언제고, 새 책이 꼬신다고 그걸 그냥 홀라당 넘어가서 헌 책을 내동댕이치는 지조없는 남자.

 

 

2

 

도서관을 이리저리 거닐며 살피다 보면 숨어있는 재야의 고수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영어 사전을 펴 놓고 중국어 공부 하는 사십 대 남성은 눈빛이 차분하지 못한 걸 보니 아직 내면의 끓는 불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군. 속세에 미련이 많이 남은 게지.

 

논어 베끼시던 할아버지는 내게 이면지 한 장만 달래서 이면지를 드렸는데, 이면지의 이면을 확인하시더니 내가 드린 이면지가 명실상부 진짜 이면지라는 사실에 꽤 실망하는 눈치셨다. 아니, 이면지를 달라셔서 이면지를 드렸는데, 이면지를 달라니까 왜 이면지를 주냐는 표정이면..... 

 

며칠 전부터 내 왼쪽에 앉는 아저씨는 무슨 건설 관련 법규를 외우고 있는데, 에어컨이 가동 되는데도 등 뒤의 창문을 반 정도 열어둔다. 한 번은 내가 닫았는데, 뭐야 이 근본없는 상놈은-하는 표정으로 날 스윽 쳐다보더니 다시 창문을 여는 것이다. 이 구역의 온도 지배자는 나여. 그러나 그런 그도 팔뚝이 허벅지만하고 온 몸에 털이 부숭부숭 난 밀리터리 나시남이 나타나 창문을 닫을 때는 건설 법규책에서 눈조차 떼지 않는 미친 집중력을 발휘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빠른 합격을 기원한다.  

 

지난 주 데이비드 흄을 읽고 있던 반 대머리 아저씨는 어제부터 헤겔의 정신현상학 1권을 읽고 있다. 마주보고 앉아 있는 내게 자기가 뭘 읽는지 보여주려는 심산인지, 자꾸 책을 들었다 놨다 한다. 훗, 이쪽을 호락호락하게 보았군. 나 또한 들뢰즈를 들었다 놨다 하며 반격을 시도한다. 변증법을 생성하는 쓸데없는 만남이 이어지고. 화장실 가다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저씨는 걸출한 녀석이군, 하는 표정으로 은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나 또한 당신도 비범함이 보통이 넘는군요, 하는 미소로 답하며 유유히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읽은 책 170701-170715

 

인문 일반 3권

 

 

 

1.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 내가 뭘 하는 사람이든, 일단 두루두루 넓게 알면 책 쓰기에 좋다! 저자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솔직히 이 책 꾸려내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2. 사피엔스의 미래

 : 따라가기만 해도 벅찬 말들의 향연. 우리는 누구나 축구를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챔피언스 리그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귀찮고 땀흘리기도 싫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름다움의 문제다. 알랭 드 보통 같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알랭 드 보통처럼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3.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 공허와 공동이 원인이라는 진단도, 그 빈 공간을 관계의 언대와 사랑으로 채우자는 처방도 새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다. 나같은 소인은 그저 오늘 하루도 소소한 것들을 눈치채며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 4권

 

 

4. 들뢰즈 유동의 철학

 : 검색해보니,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어로 쓰인 어떤 들뢰즈 책(들뢰즈가 쓰지 않은 것들도 포함)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분위기가 감지되어서 읽었는데, 이해하지 못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빡치기 시작했다. 

 

5.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글로 쓰인 책을 한번 들어 보았다. 이 책은 저자의 주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옳은지 그른지는 나는 잘 모르겠고, 다만 그 주관의 사용법이 난폭하다. 학계 돌아가는 바는 1도 알지 못하지만, 날카롭게 갈아놓은 이빨을 번뜩이며 먼저 출발한 자들을 노리는 후발 유망주같은 느낌이랄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탠스는 아니다. 이렇게 딴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은 여전히 들뢰즈와는 의미있는 사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6. 질 들뢰즈

 : 그래도 한 세권쯤 읽으니까 더 나아졌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렇지만 나아진 거라는 확신이 든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괜찮았는데, 그것이 앞의 두 권을 통해 삽질하다 단련된 덕인지 아니면 책이 객관적으로 괜찮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원서를 구했고 추후 재독할 생각이 있다.

 

7. 나꼼수로 철학하기

 : 들뢰즈와 나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일까, 들뢰즈와는 완전 다른 스타일의 철학책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이 책을 골랐다. 그러나 아직도 가끔 눈을 감으면 들뢰즈가 생각나고, 멍하니 혼자 콜라잔을 기울이는 밤이면, 책장에 꽂혀있는 다른 들뢰즈 책을 괜히 뺐다 꽂았다 하며, 자니?...... 이 책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어서 들뢰즈가 더 그리웠던 걸까? 끼워맞추느라 고생했겠다는 느낌. 그리고 하려고 들면 어떻게든 끼워맞춰지는 신통방통함.

 

 

 수학 / 과학 / 기술 3권

 

 

 

8. 한권으로 충분한 양자론

 : 이 책을 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아는 사람에게만 이 한권으로 충분하다.

 

9. 과학철학

 : 과학이 어렵나, 과학 철학이 어렵나...... 과학은 그나마 재미있는 구석이라도 있지만 과학 철학은 어느 부분에서 신나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이 그렇듯 유익하기는 하다.

 

10. 통계적으로 생각하기

 : 이런 귀여운 책이라면 얇고 가벼워도 통과. 나는 얇고 가벼운 책이 지녀야 할 미덕이 귀여움이라고 생각하는 미친 귀염성애자며, 믿는다. 언젠가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정치 / 사회 / 문화 5권

 

 

 

11. 소설에서 만난 사회학

 : 살짝 집요하지만 억지는 부리지 않고 꿋꿋이, 그리고 흥미롭게 사회학, 사회학 연구방법, 사회학자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준다.

 

12. 모던 러브

 : 나 같은 사랑머저리가 또 있을까 싶을 때 읽어보면, 세상 아직 살아볼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13. 서민적 정치

 : 뭐 이렇게 빨리 넘어가. 펼치자 덮는 느낌.

 

14. 촘스키, 점령하라 시위를 말하다

 : 우리는 정말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는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여기서 이러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15. 허기사회

 : 분석도 있고 대안에 대한 설계도도 있지만, 대안을 구동할 동력원은 미궁 속에.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은 결코 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애니팡이 퇴행이라니...... 그것만은 동의할 수가 없다...... 그 귀여운 것들을 어떻게.

 

 

인권 / 젠더 / 노동 3권

 

 

 

16. 낯선 시선

 : 가지고 싶은 눈, 가지고 싶은 손.

 

17.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그 놈이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이 시작되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죽여도 죽지 않는 자. 페미니즘은 그 놈의 목을 벨 칼을 가지러 떠난다. 가는 길에 들러야 할 곳이 많다.

 

18.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 읽는 데 필요하다기보다는 쓰는 데 필요할 것 같은 책. 같은 시리즈의 다른 역사책들이 절판임에 비해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무얼 시사하는 걸까? 중요함? 안 팔림? 마지막 부분의 논쟁 파트는 주옥 같다.

 

 

문학 5권

 

 

 

 

19. 무엇보다 소설을

: 세상엔 읽을 책 이야기가 많고, 읽은 책 이야기도 많다. 내가 살아 어느 쪽에 얼만큼 보탤 수 있을까?

 

20. 세상의 모든 아침

: 음악을, 언어를, 아니 음악을, 아니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언어를...... 난 과연 무엇을 만난 것일까?

 

21.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 작은 것이 큰 것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개인사가 거대담론을 위해 복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비록 그렇게 읽히기 쉽더라도.

 

22. 방귀의 예술

: 웃기게 더러운 것은 더럽게 웃긴다. 18세기풍 병맛. 병맛의 시조새.

 

23. 우정, 나의 종교

: 늙어도 낡지 않는 언어가 있다. 고루해도 고고한 언어가 있다. 인물을 휘감아 도는 이야기를 위한 언어가 한 편에 있다면, 이야기를 휘감은 인물을 위한 언어도 있다. 그 언어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손에 있다.

 

 

예술 5권

 

 

 

 

24.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 알고 있는 범위와 그보다 한발쯤 더 나간 범위 안에서는 매우 유익했다. 대체로 그 범위 바깥이었지만. 밑줄을 많이 그었고, 더 미루지 말고 들뢰즈를 공부해 볼 마음을 품었다. 들뢰즈와의 썸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25. 현대미술 강의

: 내가 읽을 수 있는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초과하는 범위 내에서 최고의 책이다. 재독은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므로, 구매할 뜻을 품었다.

 

26. 역사는 디자인된다

: (디자인의) 역사를 디자인화하는 방식이 참신하지만, 도식화 과정에서 잘려나간 것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 결과 몇몇 도식들은 이해가 어려워 그저 도식을 위한 도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27. 이 그림 정말 잘 그린 걸까?

: 가볍기 하지만, 최소한 머리 아프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득점포인트.

 

28.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

: 산책하기 좋은 책으로 좋은 산책 마쳤으니 앞으로는 산책보다 최소한 여행이랄지, 탐구랄지 하는 책들을 많이 읽어 보겠다.

 

 

그 외 주마간산식 독서 7권

 

 

 

29. 사회주의 ABC

30.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31. 플루언트 포에버

32. 닐스 보어

33. 생각을 여는 그림

34. 단어의 배신

35.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

 

 

총평

 

들뢰즈는 제일 쉽다 쉽다 하는 걸로 4권 읽었지만, 그것도 진짜 지난한 일이었다. 하루에 많이 읽어야 50쪽 밖에 못 읽는데, 80쪽씩 잊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엉엉. 정신 좀 차려야지.

 

페미니즘 관련 책을 좀 더 많이 읽을 작정이었는데, 어쩌다보니 3권밖에는 읽지 못했다.아 진짜 정신 좀 차려야지.

 

예상보다 미술책을 많이 읽었는데, 아무래도 그림이 있어 휙휙 넘어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진짜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이제 빌리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책을 좀 읽고 싶다. 며칠째 먼지만 쌓고 있는 <기사단장 죽이기>와 그 옆에서 니들 마음 나도 다 안다는 듯이 검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호모 데우스>와, 난 이미 100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며 그들을 위로하는 카프카의 책들과...... 아 진짜 제발 부탁이니까 정신 좀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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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5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7-15 10:21   좋아요 3 | URL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시는 모든 분들을 리스펙트합니다! 입력 안되는 느낌 저도 아니까요......ㅠㅠㅠ

다락방 2017-07-15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분 진짜 많이 읽으셨네요. 우아- 짱이에요!!!

syo 2017-07-15 16:39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아닙니다....짱 같은거 저는 아닙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7-15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로는 한때, 왕년의 시이소오 님을 능가할 수는 없겠군요.그나저나 저도 그분의 빠른 합격을 기원합니다. 그 미친 집중력을 전 이해할 수 있습니다.. ㅁㄴ 문장력이 나날이 늘어나는 쇼 님..

syo 2017-07-15 16:41   좋아요 0 | URL
전설로 내려오는 시이소오님의 그 어마어마한 업적에 비벼볼 생각도 없습니다.... 그 분이 책을 읽지 못하게 되자 대한민국 성인 평균 독서량이 떨어졌다는 소문입니다.

단발머리 2017-07-1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의 정신현상학 읽으시는 반 대머리 아저씨와 syo님의 들뢰즈 대결에 한참 웃고 갑니다. 많이 읽으셨네요~~~
진심 부럽습니다.*^^*

syo 2017-07-15 18: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ㅎㅎㅎㅎ 단발머리님처럼 양질의 리뷰를 남기지 못하고 바람처럼 흩어지는 가벼운 독서일 뿐입니다.

cyrus 2017-07-15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 도서관에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이분들은 책을 안 읽고, 혼잣말을 해요.

syo 2017-07-15 21:20   좋아요 0 | URL
맨날 다니다보면 재미난 분들 많이 발견합니다. 게다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지요.

서니데이 2017-07-1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권이나 되네요. 이렇게 읽으려면 일단 부지런해야겠네요.
syo님 좋은밤되세요.^^

syo 2017-07-16 08:02   좋아요 1 | URL
어제 읽고 단 댓글이 소멸되었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님^^

AgalmA 2017-07-19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너무 웃겨요ㅋㅋ 누구보고 감놔라 대추놔라 할 처지는 못 되지만 저도 들뢰즈에 관심이 많은 자로서 들뢰즈 어법, 그의 저서 관계도와 추이를 쉽게 설명한 책으로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추천합니다. 번역도 깔끔하거든요.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읽고 책이 참 맘에 들어서 아예 사버렸지요.
들뢰즈도 어려운데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의 철학>을 밑줄 수두룩 그으며 읽었던 예전엔 무슨 정신이었나 싶답니다ㅎ;;

syo 2017-07-19 07:01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말씀하신 책을 그저께 도서관에서 빌려온 차였는데, 이것 참 진작 좀 AgalmA님께 조언을 구할 걸 그랬지요.

maroonear112 2017-08-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리터리 나시남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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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9/11은 그 질량이 너무도 거대해 일단 문학에 등장하면 다른 모든 서사를 빨아들인다. 설령 작가가 최대한 무감각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루려 애써 본들, 독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모든 부정적 감정이 그곳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쳐 나오고, 모든 긍정적 감정이 그곳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 막대한 요동의 출처는 사실 책이 아니라 기억이다. 작품 속에 있는 모든 9/11들은 작품 속에 있지 않다. 작품을 읽는 이들의 기억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지만, 9/11이 독자의, 관객의, 시청자의 가슴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불에 덴 듯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가까스로 헤치고 나온(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 영향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감정의 두터운 중력을 우리는 4/16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처음 내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들은 하나같이 9/11을 중심에 놓고 저희들끼리 북적거렸다. 9/11을 기점으로 주인공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나.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재정렬되나. 9/11은 주인공에게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손에 쥐어주었나. 그 모든 것을 주인공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사랑은 도대체 왜 이렇게 주제의 축에서 겉도나.

 

 

2

 

그러나 이 소설이 정치적인 것에만 관심을 할애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작가는 정치만을 다루는 게 부담이었던지, 사랑의 이야기를 그 속에 풀어놓음으로써 의미와 구도의 균형추를 맞추러 햐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장점은 정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낸 작가의 빼어난 수완에 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찬게즈와 에리카의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사랑이지만, 국적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남녀 사이의 사랑이며 그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을 넘어 뭔가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_166p 옮긴이의 말 中

 

저 대목을 읽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최소한 내겐' 더 크고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랑을 알레고리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상실과 그 뒤를 따르는 나의 상실을 가리기 위해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림막으로 쓰는 무모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랑이 겉도는 것이 아니라 9/11이, 거대한 담론이 사랑의 주변을 맴도는 당돌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게 시점을 전환하는 순간, 모든 서사들이 오차없이 맞물려 돌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거대 담론을 해독하는 것을 뼈대로 삼고 사랑 같은 사적인 감정들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얕은 구역질이 났다.

 

왜? 왜 그래야 하나. 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은 "더 크고 넓은 것"을 위한 알레고리여야만 하나. 왜 항상 작은 것은 큰 것을 위해 복무해야 하나. 그리고 개인적인 것은 왜 항상 더 작은 것인가.

 

어떤 억압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왜 우리는 더 "중요한" 혹은 더 "시급한" 뭔가를 위하여 탁현민의 "작은" 허물을 눈감아야 하나. 그 "더 크고 넓은 것"은 누가 정하나. 그것을 정하는 방식이 공정하다면, 왜 항상 눈감아도 좋을 허물들의 종류는 정해져 있나. 왜 전에 참아야 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그리고 다음에도 참아야만 하나.

 

더 큰 관점에 집중하는 방식은 종종 폭력적으로 소수의 팔다리를 자르고 해석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경향을 띤다. 그러므로 더욱, 이 책은 순수하게 사랑 이야기라고 하자. 당신의 눈에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작가가 직접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선언하더라도, 나는 그렇다고 우기고 싶다. 그리고 독자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예술은 분기(分岐)하고 차이를 생성한다던데.

 

 

3

 

증거는 많다. 찬게즈가 고향으로 눈을 돌리고 미국의 어두움을 느끼는 순간들은 에리카와의 사랑이 허물어져 가는 궤적에 그림자처럼 접붙어 있다. 미국시민, 상류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쌓아나가며 뉴욕을 누비던 찬게즈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파키스탄인으로 돌아가는 시점은 쌍둥이 빌딩이 넘어지던 날이 아니다. 사랑하는 에리카와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인식한 순간이다. 찬게즈의 감정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지점 역시 9/11이나, 고국에 펼쳐지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소식을 접한 때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에리카의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죽은 크리스의 그림자에 무릎 꿇고, 나를 크리스라고 생각해보라는 비참한 부탁에야 겨우 열리는 에리카의 몸을 안고 난 이후다. 9/11이 지나고 나서도 그 슬픈 밤이 오기 전까지는, 찬게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옮긴이는 9/11을 보며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는 서술을 통해 전사로서의 찬게즈를 읽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모든 사건이 이미 끝난 후 파키스탄에 돌아와 과거를 전하고 있는 현재의 찬게즈 입에서 나온 것이다. 찬게즈는 사랑을 한 뼘 더 잃어갈 때마다 한 뼘 더 미국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에리카를 마침내 잃었을 때, 그때서야 찬게즈는 미국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지금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과정의 일관성과 대의를 주장하고 싶어한다. 에리카와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졌다면, 그래도 찬게즈가 미국을 버렸을까? 그래서 나는 찬게즈가 전사라고(혹은 처음부터 전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랑의 전장에서 전사한 패배자일 뿐이다. 한 번쯤은 그 전장에서 전사해 본 경험이 있을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4

 

그녀는 메모장을 연필과 함께 나한테 주며 말했어요. "당신네 글씨가 어떻게 생겼죠?" "우르두어는 아랍어와 비슷해요. 그런데 글자 수가 더 많죠." "나한테 보여 줘요." 그래서 나는 보여 줬죠. 그녀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아름답네요. 무슨 뜻이에요?" "이건 당신 이름이에요. 밑에 것은 내 이름이고요."

_29p

그때,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옆구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더군요. 문득 그녀도 한때 그 자리에 멍이 들었었다는 게 떠오르더군요. 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내 살갗에 손을 대어 봤어요. 결국 없어지겠지만 그 멍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_151 152p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초조해요?" "초조하다기보다는 불안해요. 내가 꼭 조개 같아요. 날카로운 작은 조각을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더 편안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천천히 그 조각을 진주로 만들었어요. 이제, 그것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나오면, 뒤에 틈이 남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이 있던 자리에 틈이 남겠죠. 그래서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붙들고 있고 싶어요."

 _ 49p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는, 어떤 이에게 거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알레고리 역할을 하며 균형을 잡아주는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거대 담론이 사랑에 복무하는 역전적 방식으로 읽힐 여지 또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알레고리 장치의 스위치를 끄고 읽었을 때 독자의 가슴에 더 맑게 울리는 순수한 사랑의 문장들이 곳곳에 별자리처럼 박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라면 누구든 손에 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읽어도 뜻깊겠으나, 한 번 정도는 사랑의 좁은 자리에 앉아 큰 것과 넓은 것을 돌려세우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조용히, 사적으로, 비밀스럽게 거니는 방식도 권하고 싶다. 최소한 이 책에서만큼은, 그 방식이 결코 손해 나는 독법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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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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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야기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지금부터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별 것도 아닌 내 표현력이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별 이야기나 되는 것처럼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음 커피 한 잔 가져다 놓고 쓴다.

 

 

1.

 

          사회주의는 실패한 이론일까?

 

          소련 망한거 봐라, 사회주의 그거 똥이다- 라는 공격을, 그거 진짜 사회주의 아니다, 스탈린 지 맘대로 한거지. 맑스는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 으로 받는다. 사회주의에 뭘 넣고 뭘 빼며,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짝퉁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아직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들은 '현실'사회주의는 소련의 패망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는 정도의 워딩으로 합의점을 찍고 또 다른 전장에서 으르렁거리기로 한다. 과연 사회주의의 범주는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자들? 그것도 아니면, 맑스가 불지옥에서 돌아와 울타리를 쳐줘야 하나?

 

          맑스/베른슈타인/스탈린/트로츠키가 주장하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이므로,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내부 모순된 이론으로 봐야 할까? 통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주의의 카테고리를 조금 더 세분화해 변증법적 유물론/사회민주주의/스탈린주의/트로츠키주의의 경합으로 해석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2.

 

          읽은 페미니즘 책 수가 늘어날수록 할 수 없는 행동이 늘어난다. 부끄러움이 늘어난다. 내가 싸질러 놓은 과거에서 풍기는 썩은내가 현재까지 침투해, 거울 속에서 머저리를 발견하고 인상 찌푸리는 빈도가 늘어난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이 모든 변화가, 특정한 사상을 0만큼 알고 있다가 10, 20만큼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매번 조금씩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페미니즘은 책에서도 오고 밖에서도 온다. 높은 곳에도 있고 낮은 곳에도 있다. 거시에서도 피고 미시에서도 핀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성 소수자들은 물론 일정 수의 남성들 또한) 언어나 시선, 물리력, 사회압력에서 오는 젠더 폭력의 사례를 머릿속으로 구체화할 때,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한 장면에서 상황을 빌려와 주인공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 지난 주 밤에 겪었던 일, 지난 해 입사 원서를 넣으러 다니던 일들을 다이렉트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의 자리에서 페미니즘이 온다. 그래서, syo가 페미니스트라고 치고, 정희진의 모든 책, 모든 글에 100% 동의한다 해도 syo의 페미니즘은 정희진의 페미니즘과 닮았을지언정 같지는 않다. 나는 정희진을 읽을 수 있을 뿐, 정희진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사상을 지니고 syo의 바깥과 마주하며 만들어지는 페미니즘은 오롯이 syo의 것이 된다. 

 

          얼마나 많은 페미니즘들이 경합해 왔으며, 지금도 때로는 어깨를 겯고, 때로는 어깨를 부딪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다양성의 별자리를 헤고 있다보면 까무룩해질 때가 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가 단순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지는 스펙트럼.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없애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나쁜가, 어디부터 적인가, 어디까지가 동지인가, 칼인가, 아니면 펜인가, 도대체 끝판 대장은 누구인가. 이 모든 문제에서 사상과 삶이 뒤엉키며 각자가 품는 답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왜, 누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끊어내고 추상적으로 묶어내, 하나의 사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걸까?

 

 

3.

 

하나의 전체 혹은 '복수의 전체'를 집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집합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것은 모두 인공적으로 닫혀 있다. 집합이란 언제나 여러 부분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전체가 부분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특별한 의미에서 부분을 가지는 데 불과하다. 전체는 분할의 각 단계에서 본성을 바꾸는 일 없이 분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전체는 정말로 분할 불가능한 연속성일 것이다."

_ 질 들뢰즈, <시네마 I>,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45쪽에서 재인용

         집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가야 할 길을 막을 수 있다.

 

         집합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 날카로운 칼이다. 포함의 뒷면은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다. 안과 밖이 작은 연못의 헤게모니를 잡겠다고 피터지게 싸우게 만들고 당신은 유유히 바다로 가라. "divide and conquer"는 모든 제국/자본/기득권자들이 수 천년동안 즐겨 사용함으로써 역사를 통해 그 효용을 증명한 기가 막힌 전략이며 여전히 잘 작동한다. 

 

         집합이 닫혀 있으므로 집합 안의 원소들은 얌전하다. "3 이하 자연수들의 집합" 속의 1, 2, 3은 그저 1, 2, 3으로 존재할 뿐, 서로 연산하고 연산되며 상호작용을 통해 변용될 수 없다. 여성은 또한 노동자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으며, 레즈비언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기에, 어떠한 여성도 단순히 '여성'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여러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용하는 1의 페미니즘은 자연히 2, 3의 페미니즘과 차이가 있다. 페미니즘은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의 연대를 통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거의 페미니즘의 운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합은 원소들간의 연대를 무참히 박탈한다.

 

 

4.

 

          훌륭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많다. 페미니즘의 영토에는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렵고 심오한 사상들이 즐비하지만, 누구도 그 영토의 독재적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사상은 연장이다. 세상을 고치기 위해 그 연장을 손에 든 이는 페미니스트 개인이다. 많은 것들을 연대하여 함께 해결해야 하겠지만,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나의 고유한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물결처럼 '우리'가 되어 흐르는 날 가운데서도, 그 '우리'가 나와 다른 나와 또다른 n개의 나로 이루어진 '나들'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나의 연장통을 채우는 것. 이게 syo가 2017년 7월 5일 현재 지니고 있는 페미니즘이다.

 

          나는 이 책이 페미니스트 '모두'를 하나의 실로 꿰어넣을 수 있는 페미니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벨 훅스의 페미니즘이 내 연장통에 꽤 큼직한 망치와 톱을 넣어줬으므로, 다른 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다양한 연장 하나쯤 쥐어 주리라 상상하며, 이 책에 녹아 있는 그녀의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다는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5.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 더 말하려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말을 말기로 했다. 긴 말 했지만, 긴 말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일기냐 리뷰나 잠깐 고민했지만, 내 리뷰는 원래 일기였다. 그리고 그건 잠깐 고민하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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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0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씨... 뭔가 내가 횡설수설 써놓은 글을 쇼님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같네요. 자존심 상해... 히힛(왜웃지?)

syo 2017-07-06 06:50   좋아요 0 | URL
제가 읽어보니까 다락방님, 제 글에는 그냥 012345가 붙어있을 뿐, 횡설수설은 너나 할것 없이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7-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만가지가 연상되어 곱씹게 되는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이 참 좋은 글이라 생각듭니다. ^^

syo 2017-07-06 06:5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 칭찬은 황송합니다.
사실 저는 북다님의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글이요. 전 그냥 일기장에 쓴 글을 공개하는 수준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군요,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페미니즘을 읽을수록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진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yo 2017-07-06 10:14   좋아요 0 | URL
앗 곰발님 주최 이달의 당선작됐다. 짱이다!!!

cyrus 2017-07-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진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합의되지 못한 상황‘으로 이해합니다. 이를 근거로 내세워서 페미니즘의 학문적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yamoo 2017-07-06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주창하는 단 하나는 인간해방이더군요. 근데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세상은 이분화되는 듯합니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아닌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투쟁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을 한다? 전 이게 다분히 ‘프로파간다‘처럼 보입니다. 가만보면 ‘페미지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매우 공격적으로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인간해방하고는 거리가 먼데....어쨌거나 인간해방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 나가야 할 듯한데....제가 이 분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지라...더이상 언급하는 건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듯합니다.^^;;

저도 쇼님이 생각하시는 부분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리된 글로 보니, 좋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syo 2017-07-06 21:41   좋아요 1 | URL
항상 읽고 정성껏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yamoo님 ㅎㅎㅎ

시작부터 모두가 쓱 납득하고 함께 착착 나아갈 수 있는 사상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래도 없죠 그런 거. 심지어 자유 평등 뭐 이런 당연한 것들조차 얻기까지 진통이 있었으니까요. yamoo님이 우려하시는 부분들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yamoo님처럼 독보적이다 못해 독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가 제겐 없다보니 맨날 일기나 씁니다 ㅎㅎㅎ

쇼코 2017-08-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써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찾아가며 읽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아직 관련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제가 쇼님의 리뷰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공감가는 부분이 퍽 많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는 말씀도, 집합에서 포함의 반대는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씀도, 사상은 연장이라는 말씀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어요.
특히 사상이 연장이 된다는 부분은 저도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젠더 위계의 하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자에게 페미니즘이란 그저 한 발 물러서 관조할 수 있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이 책이 저만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거겠지요.
표현이 서툴러서 제 생각을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서툴지만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리뷰로 좋은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기준으로 책을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분류하곤 한다. 지식을 전하는가/지혜를 전하는가. 지혜를 전한다면, 질문을 던지는가/답을 던지는가.



2.

            지혜와 지식의 경계는 대체로 자의적이거나 모호하며, 어떤 책은 질문과 답이 모두 있거나, 질문도 답도 없거나, 질문 같은 답, 답 같은 질문이 있거나 하므로, 저런 분류가 나이브하고 종종 폭력적이라는 것은 인정. 그럼에도 저런 분류방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세상에는 책이 너무도 많고, 읽을 시간은 너무도 모자라고, 대놓고 답을 던지는 책은 너무도 별로고(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거를 책을 고르는 데는 너무도 충분한 '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3.

            이 책은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는 척, 풀이방법만을 알려준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척, 자신이 세상을 다르게 '본 법'만을 자랑한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읽었어요. 어때요. 몰랐죠? 멋지죠? 심지어 그것은 박웅현의 '풀이'일 뿐, '정답'도, 심지어 '해답'도 되지 못한다. 


            박웅현이 이철수 화백의 판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두부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있다.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유전자 변형이 유해하지 무해한지, 그런 걱정, 주부님의 몫이 아닙니다." 사전에 따르면 주부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이고 안주인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다. 저 문구는,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역할을 특정 성에 한정시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남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구도를 아무런 고찰없이 진술한다. 더 중립적인 단어(이를테면 고객님)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주 타겟인 '주부님'들에게 가족의 건강을 고려하는 헌신, 유전자 변형의 유해성을 따져보는 지성 같은 훌륭한 가치들을 부여하여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 책에 별 두개를 매기기 위해, 젠더의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없다. 실제로 저건 지엽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떡하니 책 뒷편에 써 놓은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 라는 선전 문구를 보며, 문학적/예술적 감수성 말고도 인권/젠더/인종 감수성도 생각해 봐야 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가 박웅현에게 도끼로 작용했겠지만, 그 도끼가 그의 모든 얼음을 깰 수 있는 만능 도끼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물론 완전히 무용한 책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깨뜨렸다고(혹은 깨뜨릴 도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쭙고 싶다.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발견한 새로움들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혹시 김훈의 책을 읽으며 박웅현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를 갖게 되셨나요. 더 나은 사람이 되셨나요. 만약 그러시다면, 그것이 진짜 이 책 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책이 제공하는 얄팍한 지적 포만감은 어떤 이들을 더 깊고 더 넓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만큼, 또 다른 어떤 이들을 그 자리에서 배 두드리며 늘어지게 한 잠 자도록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더 나아갈 이들은 배가 부르든 고프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이 책 위에 텐트를 치고 당당히 머문다. 나, 이런 좋은 책도 읽는 사람이야. 비슷한 책들을 서가에 계속 꽂아 넣으며 지적/감성적 죄책감을 자가치유한다.  



5.

            5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도 참 좋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읽어보며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을 다시 읽을 때 상실하고,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흠결을 다시 읽을 때 발견하며, 처음 읽고 꽂아 놓았던 서가에 두 번째 읽고는 다시 꽂지 않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그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기꺼이 이 책을 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저자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 

            주부라는 단어가 못마땅한 것이 내 과민반응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 스스로를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는 어떤 멘토께 저 문장이 문제가 있을까요- 하고 여쭈었는데,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특별히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단점으로 젠더 편향 문제를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그다지 문제되는 부분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아예 말하지 말까 하다가 그냥 한번 찌끄려 본다. 


            만약 저 광고 멘트를 쓴 사람이 마트에서 두부 시식코너를 맡았다고 해 보자. 여성이 카트를 끌고 다가왔을 때, "주부님(보통 고객님이라고 부르겠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라고 그/그녀가 말했다고 하자. 카트를 끌고 온 여성이 맛있게 먹고 돌아갔는데, 저쪽에서 카트를 끈 아저씨 한 사람이 두부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그때 시식코너의 그/그녀는 그 아저씨에게도 "주부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할까? 


           " ......경제활동의 단위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결혼한 여성이 여전히 가사노동과 양육의 일차적 책임자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갖는 돌봄노동의 책임은 반대로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원인이 되기도한다. 여성은 가족 내 주부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노동시장에서는 이차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성차별적 관념과 관행 때문이다." _<젠더와 사회> 308쪽, 허민숙과 신경아의 글


            여류 작가라는 말이 멸칭이듯, 남자 주부라는 말도 멸칭으로 작용하는 사회다. 여류 작가에서는 '여류'가, 남자 주부에서는 '주부'가 멸칭적 요소라는 것을 보면, 두 용어는 완전히 동일한 사태를 지칭한다. 직업의 위계와 젠더의 위계가 버무려져 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앞의 것은 멸칭적 요소를 제거하면 바로 쓸 수 있지만, 뒤의 용어는 멸칭적 요소를 제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주부를 대체할 새로운 용어, 용어 자체에 성별이 포함되지 않는 중립적 용어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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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28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번과 5번이 인상깊습니다. 저 역시 박웅현의 책을 서점에서 훑어보고 얄팍한 지식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그가 나름 이름 석자를 알린 계기가 광고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건데요...자본의 충실한 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잘난척은 참 오지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인문학계에서 전문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인문 운운하며 책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오지게 공감합니다요!

syo 2017-06-28 21:35   좋아요 1 | URL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고=창의성 이라는 등식을 시도때도 없이 들이밀더라구요. 그 등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목적은 자본을 보필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창의성을 휘두르는 거면서 창의성이라는 단어의 긍정적 아우라만 뒤집어쓰려는 모습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책만 놓고 보자면 결국은 박웅현이나 이지성이나 같은 목표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독자들에게 책을 읽히리라-일지, 독자들에게 책을 팔리라-일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읽고 좋은 이아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바.. 이렇게 거침없이, 쉼표없이 스트레이트 잽을 시원하게 날리시니 읽는 맛이 납니다..

syo 2017-06-29 06:53   좋아요 0 | URL
더욱 용맹정진하여, 훅에 어퍼컷도 익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