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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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읽으면서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다 읽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물론 이 책을 방치해두는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게 또 나의 주의를 끌고 마음을 쓰게 만들었다.



뭔가 바쁘게 한 것 같은데 남는 게 없다고 느낀다면

하루에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식사하는 시간보다 많다고 느낀다면

SNS를 보며 물건을 사고, 물건을 담고, 귀여운 것과 사소한 정보를 많이 얻다가 문득 허무함을 느낀다면

뭔가 새로운 게 없나 하며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면

그럼에도 항상 정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면 

.

.

.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읽기를 권한다. 



미투데이, 트위터,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사용해보았다. 

트위터는 처음부터 시간 순서대로 볼 수 없음이 매우 불편했었고, 

페이스북에는 처음엔 시간 순서대로 보이던 피드들이 알 수 없는 순서로 재편되는 것을 (내가 사용하는 동안에도) 느끼면서,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인스타그램도 비슷해지면서 불편함을 느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주로 책 정보를 얻고 있었는데, 이제 나에게는 북플이 있어서 (물론 상당히 편향된 정보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지인과 관심있는 업체가 섞여있던 그리고 가끔 내가 살아있다는 표시나 하던 메인 계정에는 지인들만 남기고 서브계정을 만들어서 책 관련 계정만 새로 모아뒀다. 이렇게만 해도 두 개를 분리할 수 있어서 훨씬 나을 것 같다. 



북플은 물론 나의 집중력을 좀 갉아먹기는 하는데, 책은 나의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하고 알라딘에서 책을 더 사게 만드는 것 외에 크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굳이 끊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인스타그램도 지우지 않았으니 뭐)


사실 나의 집중력을 좀더 아껴서 다른 곳에 쓰려거든 서재에 글을 덜 쓰거나, 대충 쓰는 게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그래서 많이들 떠나신건지... 나는 떠나지 않고 그냥 덜 쓰고 대충 쓰기로 하겠다. 

 


중간에 언급했던 정치, 비만, 특히 마지막에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부분은 조금 뜬금없기는 했는데... 작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일 수도 있고.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삐딱하게 '난 이대로도 괜찮은데? 즐겁게 살면 되지 내가 왜 집중해야 하는데?' 이런 소리 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전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모두가 바뀌고 노력해야 한다고 어필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진정 삐딱한 사람은 그런 걸로 어필 안된다. 그리고 내친 김에 더 말하자면 그런 얘길 쓰려면 조금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야 하는 것 아닌지.. 작가의 길게 쓰기 실력이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다 :)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진짜 문제를 파악해 공상과 구분하고, 해결책을 떠올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긴 시간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한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온전히 기능하는 사회를 만들 능력을 잃게 된다. 집중력의 위기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동시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쉽게 이끌리고, 그러한 해결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26쪽)


앞부분에 있던 이 내용과 잘 엮어서 에필로그에서 다시 썼으면 좋았을텐데.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진짜 문제를 파악해 공상과 구분하고, 해결책을 떠올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긴 시간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한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온전히 기능하는 사회를 만들 능력을 잃게 된다. 집중력의 위기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동시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쉽게 이끌리고, 그러한 해결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 P26

"보통 우리는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우리가 행복할 때는 약간 어려운 일을 할 때거든요. 핸드폰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늘 중요한 것보다는 쉬운 것을 제안하는 물건을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된 거예요. ... 나 자신에게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 P54

찰스는 소비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수면은 커다란 문제"라고 말했다. "잠든 사람은 돈을 쓰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아요. 아무 상품도 생산하지 않고요." - P118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종이 위의 단어를 향해 관심을 바깥으로 돌립니다. 동시에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내면을 향해 엄청난 주의를 쏟습니다." ... 독서는 "바깥을 향한 관심과 내면을 향한 관심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한다. - P135

트리스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우리의 주의력을 최대한 많이 빼앗으려는 의도로 우리가 가진 핸드폰과 그 핸드폰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을 설계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P200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분노하는 데 쓰면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 악랄한 행동일지라도 (어쩌면 악랄한 행동일수록 더욱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에 보상하고 자비에 벌을 주는 알고리즘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오늘날 (비난은 더 하고 이해는 덜 하는) 이러한 태도는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모두의 반응이 되었다. - P204

어떠한 국가든 이러한 거짓 정보에 오래 노출되면 분노와 비현실 속에서 길을 잃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곧 거리와 하늘이 실제로 더 위험해진다는 뜻이며, 이로써 우리는 과도한 각성 상태가 되고, 이 상태는 우리의 집중력을 더욱더 망가뜨린다. - P217

"자제력을 키우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화면 반대쪽에는 우리의 자제력을 꺾으려고 노력하는 천여 명의 엔지니어들이 있습니다." - P240

정치적 비관주의는 사람들이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해결책에 매달리게 만든다. - P259

페미니즘 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 거대해서 절대 바꿀 수 없어 보이는 세력에 맞설 수 있음을, 실제로 그렇게 할 때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 P262

평상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반드시 안전하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집중하려면 시야에서 곰이나 사자, 또는 현대의 위험물을 찾는 머릿속 부위의 전원을 끄고 하나의 안전한 주제로 빠져들 수 있어야 한다. - P276

기본소득은 수급자들에게 마침내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듯 보인다. 현재 이 세상에서 그러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스트레스를 줄이는 요인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깊이 집중하는 능력도 개선한다. 핀란드는 (안정의 토대를 제공할 만큼 충분하지만, 근로 의욕을 꺾을 만큼 많지는 않은) 보편적 기본소득이 과각성의 원인 중 하나를 해소함으로써 사람들의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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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7-25 1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수하님 다 읽으셨군요!
저는 전세계적 문제 해결을 위해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신선하더라고요.
우리 북플 빼고 다 끊읍시당~ㅋㅋ

건수하 2023-07-25 20:13   좋아요 1 | URL
당위성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과 저자가 생각하는 현재 사회문제를 합친 것 같은데 좀 설득력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뭐 끊고 사고 하는 것보다 내가 주도해야겠다 라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

미미 2023-07-25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하님 안 떠나신다니 너무 좋다요!ㅋㅋㅋ
트위터 잠시 할때 무서운 사진 찾아보고 그랬었는데...
오늘보니 상징 바뀌었더군요. 뭔가 인간미 없어진느낌!
떠나신 분들도 부디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건수하 2023-07-25 21:09   좋아요 1 | URL
제가 그렇게 행동력 있는 편이 아니라서 ㅎㅎㅎ
트위터는 저는 진짜 잠깐 하다 말았어요 리트윗 된 거 보는게 넘 정신사나워서… 상징이 바뀌었다는 게 새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안부가 궁금하고.. 그렇긴 한데 그 마음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

미미 2023-07-25 20:45   좋아요 1 | URL
네. 파란새 모양에서 알파벳 X로요.
사이버틱해요 ㅎㅎ

건수하 2023-07-25 21:15   좋아요 0 | URL
아 머스크가 인수하더니 뭔가 많이 바뀌네요 ^^

페넬로페 2023-07-25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수하님께서 적어주신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에 다 해당되네요. 그래서 이 책 읽었어요 ㅎㅎ
북플만 봐도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같이 쌓여요 ㅠㅠ
떠나지 않고, 대충 쓰기!
실천할께요^^
자주 쓰지는 않아 그건 괜찮고요~~

건수하 2023-07-26 09:07   좋아요 1 | URL
다들 읽어보면 좋겠는데 또 막 권하긴 좀 두껍고.. 그쵸?
떠나지 않고 대충 쓰기는 그냥 제가 하겠다는 건데... 페넬로페님도 떠날 생각이 없다하시니 반가워요.

사실 저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SNS가 아니라 카카오톡 단톡방이에요. 외국 사람들은 메신저 단체채팅 같은 건 잘 안하는지.. 책에 그 얘기는 없어서 좀 아쉬웠어요.

책읽는나무 2023-07-26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 님도 인스타를 하셨다니?@.@
전 인스타, 트위터, 블러그는 오래전에 끊었네요. 그러고보니 북플 하나만 하고 있었어요. 근데 왜 집중력이? ^^;;;
(아...투비까지 두 개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서재에 대충 글을 쓰고, 덜 쓰며 떠나지 않기!ㅋㅋㅋ
그거 저도 하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뭐든 글 하나 쓰고 나면 기운이 좀 딸리긴 합니다^^;;;

건수하 2023-07-26 09:11   좋아요 1 | URL
인스타.. 비공개이고 거의 구경용이긴 했는데,
지인들 한 명씩 추가되다보니 결국엔 엄청 많아지더라구요. 그래서 구경용 계정을 분리했더니 홀가분하네요.

서재에 글 잘 쓰는 분들이 많다보니 저도 잘 써보고 싶지만 무리하지 않으려고요. 투비도 그런 의미에서 구경만.. ^^


거리의화가 2023-07-26 1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이스북은 탈퇴했고 트위터는 정신사나워서(뉴스 확인용) 요즘은 거의 안 보게 됩니다. 인스타는 계정은 있으나 정말 보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어요. 이것도 사용 시간은 길지 않네요.
북플 사용 시간이 가장 길긴 하지만 대부분은 독서 기록에만 할애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이웃분들의 글 확인은 PC로 하는 것이 편하더라구요. 하지만 주말에는 거의 책 읽기에 집중하는지라 주중에 서재에 들어오는 빈도가 훨씬 높습니다.
저는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 더군다나 알라딘 서재의 리뷰나 페이퍼만큼 양질의 글이 있을까 싶네요.

건수하 2023-07-26 13:15   좋아요 2 | URL
북플에서 가끔 댓글다는 재미에 빠질 때가 좀 있지만 ^^; 대체로 북플은 무해한 것 같아요.

화가님 말씀대로 양질의, 또 제 관심사의 글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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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미국) 페미니즘의
흐름을 훑어본다. 두고두고 참고하게 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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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제 대한민국 스토리DNA 4
강경애 지음 / 새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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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수 한국 근대 여성 단편소설을 읽었고, 6월에는 지난 기수에 읽었던 소설 <소금>의 작가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읽었다. 위 표지에 보면 (아마 띠지일듯 - 나는 전자책으로 읽었지만)



인간 문제는 '몸'의 문제, '돈'의 문제, '사랑'의 문제다



라고 쓰여있다.



이 소설은 1934년 8월 1일부터 12월 22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검열 때문인지 중간에 갑자기 중략된 부분이 있다), 강경애 소설의 특색인 극한적 빈궁 문제에 대한 관심의 표명과 여성적 감각의 인도주의가 잘 나타나는 대표작이라고 한다.




카프 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에스페란토어 표기라고) 라는 단체를 중고등학교 때 들어봤던 것 같다. 이 단체는 1925년에 결성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인데, 이때쯤 (아직 해방은 멀었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 해방된 조선은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KAPF에 속한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를 바랬을 것 같다. 강경애도 그런 작가 중 하나였다.




<인간문제>는 일제강점기 농촌 (강경애의 고향인 장연)과 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쳐먹을 논이 없어 남의 집 일을 하는 첫째 (이름이 아닌 것 같지만 이름이 맞다), 구걸을 하여 먹을 것을 가져오는 이 서방, 매춘을 하는 첫째의 어머니가 한 집에 산다. 첫째는 지주 덕호가 춘궁기 질이 낮은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좋은 곡식을 이자까지 쳐서 빼앗아감에 분개하여 대들었다가 덕호가 면장이 된 뒤로는 일을 얻기가 어려워져 절도 등으로 연명하다가 도시로 떠난다. 덕호의 집 일을 봐주는 마름 민수는 돈을 받으러 갔다가 만난 한 가족의 곤궁한 모습에 (자기 돈이 아닌 덕호의) 돈을 조금 쥐어주고 오는데, 그 일로 덕호는 화가 나서 산판을 민수에게 던지고, 민수는 앓아누웠다가 허망하게 죽게 된다. 민수의 딸 선비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어렵게 살아가다가 어머니마저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지주 덕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첫째는 어릴 적부터 선비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떠나기 전 선비 어머니의 병에 좋다는 나무 뿌리를 캐어다 준다. 선비는 첫째가 갖다준 나무 뿌리는 다락에 밀어두고 덕호가 주고 간 돈은 잘 챙겼는데, 후에 이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덕호는 아들을 얻기 위해 그동안 첩을 여럿 두었고 그 중에는 선비의 친구 간난이도 있었다. 덕호의 하나뿐인 딸 옥점이는 경성에서 공부를 하다가 방학 때 스승의 아들인 신철과 함께 돌아온다. 모두가 신철과 옥점이 결혼을 할 거라 생각하지만, 신철은 옥점은 잠깐 함께 놀 여자로 생각하며 선비에게 반해서 선비를 경성으로 데려갈 방법을 궁리한다. 덕호는 마수를 선비에게까지 뻗치기 시작하고, 선비는 처음엔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유린당했지만 덕호의 부인이 눈치를 채자 경성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는 간난의 소식을 물어 경성으로 도망친다. 신철은 옥점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가출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지속하고자 하나 일하지 않고 생계를 이어가기는 힘들고, 인천으로 가서 막노동을 해보았으나 쉽지 않아 좌절하고 노동자들에게 전하는 쪽지를 만드는데 전념하게 된다. 노동 현장에서 만났던 신철에게 첫째는 사회주의 이론을 배우고 본인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경성으로 도망친 선비는 간난과 만나 인천의 방적 공장으로 가게 되는데, 간난은 알고보니 신철과 아는 사이였고, 공장 내의 여공들에게 공장의 부조리함과 실제 현실을 알리는 쪽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신철은 하던 일이 발각되어 감옥에 가서 고문을 받고, 간난도 그 소식에 공장에서 도망친다. 신철은 나약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전향하여 돈많은 여자와 결혼한다.선비는 공장에 혼자 남아 있다가 결핵에 걸려 죽고, 첫째는 뒤늦게 선비를 찾아가나 주검이 된 선비를 보게 된다. 그러면서 외친다.



(줄거리 요약 반쯤 하다가 이걸 왜 시작했나 후회... 뒷 부분은 대충 마무리 ㅠㅠ)




이 인간 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천만 년을 두고 싸워 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 나갈 인간이 누굴까?





여성 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강경애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소설을 썼지만,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여성 문제보다는 노동자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다뤘던 것 같아 좀 아쉽기는 하다. 그래도 당시 남성 작가들 혹은 다른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 주로 이상화된 여성 (희생하는 어머니나 여동생, 부인) 이나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주로 등장했다면 여기에선 스스로 행동하는 여성, 또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 그리고 실제 민중의 삶이 묘사되어 있는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이기영의 <고향>과 비교해보면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고, 줄거리만 인터넷에서 대충 봤지만)




<고향> 에서는 동경에서 유학하고 온 남성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농촌에서, 여성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인간문제>에서는 지식인인 신철은 모범이 되는 존재라기보다는 나약한 인간이고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면서 부잣집 딸내미랑 몇 달을 노닥거리는 등) 보다는 첫째나 간난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차이가 있다. 심훈의 <상록수>도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고 하는데, <상록수>도 <인간문제>에 비하면 고루해 보인다. 뒤늦게라도 강경애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참 뿌듯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런 작품이 소개되면 좋겠는데, 이북에서 주로 활동한 작가라 어떨지 모르겠지만...




첫째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인간 문제는 당연히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누군가가 풀어 나가고 있겠지만. 잘 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뒤표지에



이 세상에 돈만큼 무서운 것이 없어.

기억해, 결국 우리를 구원할 사람은 우리 자신뿐이야.




라고 쓰여있는데, 책 본문에 저런 문장은 없었다. 어디서 가져온 문장일까...


어쨌든 그때도 지금도 돈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전향한 신철이에 대해 첫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신철이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그로 하여금 전향을 하게 한 게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과거와 같이, 그리고 눈앞에 나타나는 현재와 같이 아무러한 여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신철이는 길이 많다. 신철이와 나와 다른 것이란 여기 있었구나!




얼마전 들었던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 6월호에서 페미니즘 공부가 가장 필요한 여성은 중산층 여성이 아니고 이화여대 여성학과 학생도 아니며 나이많은 여성, 그리고 성매매 여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매애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셨다. 가부장제에 속해서 살고 있는, 기혼여성이자 어머니인 나는 왜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 공부로 뭔가 바꿀 의지를 갖고 있나 (꼭 뭘 바꾸려는 의지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 같진 않지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자매애'에 희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좀 좌절하게 하는 발언이었으나.. 그 분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말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더라.



중산층 여성으로서 내가 왜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나는 그래서 뭘 하려고 하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구원하려고 하는가 (이럴 때 삐딱하게 꼭 구원을 해야하나? 라는 생각도 하지만) 를 생각해보게 해준 소설 <인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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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09 16:5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줄거리 요약하다가 급 후회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골드문트 님은 이렇게 하더라고요. “안 알랴줌” 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7-09 18:46   좋아요 1 | URL
아하! 좋은 팁이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3-07-09 22: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매애는 가능하지 않다!
저도 좀 듣고서....쩜쩜쩜
저는 자매가 없어서 올케들이랑 자매 맺어볼까? 싶었는데...ㅋㅋ
그리고 5월호였는지? 6월호였는지? 좀 헷갈리는데요. 여성들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하셨잖아요. 무조건적인 연대는 안된다! 듣고도 쩜쩜쩜이었네요.
여적 생각해왔던 의식을 확 깨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셔서 계속 쩜쩜쩜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건수하 2023-07-10 09:21   좋아요 2 | URL
오늘 7월호 부분을 들었는데.. 납득할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페미니스트라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희진샘은 여성들이랑 많이 일을 하셔서 환상이란 게 적은 듯도 하더군요. 필리스 체슬러도 그런 말 했었고...

남성이 자원을 독점하고 있고, 여성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연대라는 건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남성들도 결정적일 때는 자기 이해에 따라 행동할 거라서. 여성이 그런건 구조적 문제다 라고 생각하면 뭐 괜찮았습니다.

그치만 누군가 팟캐스트에 댓글로 달았다고 하듯 ‘그것 마저 없으면 어떻게 사냐‘ 는 생각이 좀 들긴 하지요 ^^
나무님 얼른 들어보세요, 7월호 들으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 :)

단발머리 2023-07-09 2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강경애라는 이름만 알았는데 <인간문제>가 강경애님 작품이군요. 찾아서 꼭 읽어봐야지 싶어요. 우리나라 여성주의의 선봉에 섰던 분들의 글은 많이 안 읽어봐서 항상 숙제처럼 남아있습니다. 수하님은 힘드셨겠지만 저는 줄거리 요약 야무지게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두 문단.... 저도 항상 고민되는 지점이라서요. 그러게........ 우리는 왜 읽는 건가요? 공은 다시 수하님에게....

건수하 2023-07-10 09:24   좋아요 2 | URL
사실은 뭘 하려고 읽는다기보단 읽지 않을 수 없어서 읽는다는 게 가장 정확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지식욕이 있는 사람이고, 책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고... 그렇기에 다른 걸 하기보다 책을 읽게 된 거지만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책을 이렇게 열심히 읽어서, 그걸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생각하면 꼭 써먹어야 하나? 나의 심적 안정으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결실이나 영향력이 있으면 더 보람찰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저도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으로.


난티나무 2023-07-10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내용이었군요. 담아만 놓고 사지도 읽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수하님 덕분에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되었어요~ 👍

건수하 2023-07-10 09:25   좋아요 0 | URL
난티님 엄청 진지한 내용이지만... 나름 지루하지 않고 재미?도 있습니다. 단편 <소금> 도 정말 강렬했어요.
 

읽고있는 책이 대체 몇 개인가 🙄
지인이 1장만 살펴봐달라고 해서 듣기 시작.

아래 밑줄처럼 은근히 웃기는 구석이 있다.



다윈이 열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였음에도 사람들은 그가 육욕보다는 이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테스토스테론과 같은 성호르몬은 모두 콜레스테롤에서 만들어진다. 이 스테로이드는 효소의 작용으로 프로게스테론으로 변환된다. 프로게스테론은 흔히 임신과 연관되는 호르몬이며 안드로겐의 전구물질이다. 또 안드로겐은 에스트로겐의 전구물질이다. 결론적으로 이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은 서로 쌍방향으로 변환될 수 있고 남성과 여성에 모두 존재한다.

"남성호르몬이니 여성호르몬이니 하는 것은 없습니다. 흔히들 착각하지만요.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은 호르몬을 갖고 있습니다." 크리스틴 드레아Christine Drea가 스카이프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내게 말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란 성 스테로이드를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는 효소의 상대적인 양과 호르몬 수용기의 분포와 민감성, 그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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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27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6-28 15:43   좋아요 1 | URL
깨알같은 까댐 좋아요 ㅋㅋ

잠자냥 2023-06-28 17:24   좋아요 1 | URL
은까 ㅋㅋㅋ 은근까댐

은오 2023-06-28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당.... 살까..

잠자냥 2023-06-28 11:33   좋아요 2 | URL
동물성애 읽고 이거 읽으면 최재천 저리가라! 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6-28 16:10   좋아요 1 | URL
동물성애 (를 안 읽었지만) 보다 재밌을 듯!

잠자냥 2023-06-28 16:16   좋아요 2 | URL
글쎄요....... *먼산* 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6-28 16:20   좋아요 1 | URL
엇 동물성애가 재미있는건가요 아님 암컷들이 재미없는건가요 ㅎ

잠자냥 2023-06-28 17:23   좋아요 2 | URL
둘 다 재밌습니다. 둘 다 왕도끼 ㅋㅋㅋ

은오 2023-06-29 01:49   좋아요 1 | URL
수하님 쟝님이 사라져서 동물성애 이해모임 옛다 회원 한자리 비는데 들어오시지요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6-29 09:59   좋아요 1 | URL
책을 안 읽었고, 읽자니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06-30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을 것 같던데요.
‘조용한 생활‘ 팟캐스트 이번 달 이 책 다루던데 듣고 있으니 재밌어서 저도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단발머리 2023-07-01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을거에요. 안 읽을 수 없는, 이 궁금함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도발적인(?) 제목 - 미쳐있고 괴상한은 그렇다 치고 '오만하고 똑똑한' 이라는 수식어를 여성에게 붙이는 일이 흔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다. 특히 오만한이라는 수식어 - 의 책은 (미괴오똑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많이 들었고 그 전에도 한국일보인가 한겨레에서 하미나 작가의 칼럼을 봤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생각은 했는데, 이 책은 읽어봐야 할 것 같으면서도 또 손이 가볍게 가지 않아서,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많은 한국 20-30대 여성이 앓고 있는 우울증에 관한 전방위적인 내용과 여러 여성들과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다. 왜 여성에게 우울증이 많은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는데, <완경 선언>에서 완경이 되면 아픈 이유를 호르몬 변화 탓으로만 생각하고 에스트로겐을 맞으면 된다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도 이 경우는 아예 틀린 것은 아닌데), 남성보다 여성에게 우울증이 많은 것 역시 여성 호르몬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딱히 근거도 없으면서, 그냥 남성과 여성이 신체적으로 다른 게 그것 뿐이니까. 그런데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남성의 우울은 여성의 우울과 달리 성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한다고.  남성에게만 사회문화적 요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의학에서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생각하기에 병의 원인을 남성의 몸 바깥에서 찾으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한다. 여성은 정상이 아니니까, 여성의 몸 안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고.




여성의 우울과 관계된 사회문화적 원인에는 뭐가 있을까. 출산과 육아, 외모와 관련된 압박, 성폭력과 가정 폭력 등.. 그건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여자아이는 정서 인식 발달을 저해받으며 자란다고 생각해요. 

'친절하다', '사근사근하다'라는 말처럼 사회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강요받죠.

그러니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일어납니다.





엄마와 딸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함께 미쳐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간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정신질환을 가족 내의 문제로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 또한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를 앓는 여러 여성 환자의 면담을 통해 1896년 <히스테리아의 병인학>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아동기 성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해 히스테리아가 발생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후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들 사이에 히스테리아가 만연했고, 그렇다면 그 가해자는 누구인가? 남성들이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수정된 내용은 '환자들은 아동기에 성적 욕망을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성학대 경험을 상상해 낸다. 그들의 경험은 지어낸 것이다.' 였다고.. 



프로이트에 대해 잘 모르긴 하는데 그 잘 모르는 와중에도 무의식 상태의 성적 욕망으로 많은 걸 설명하는 건 알고 이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들어봤다. 그때도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무의식이라고 해도 난 아버지를 상대로 그런 욕망 없는 것 같은데? 상상도 안하는데? 이제야 그게 왜 이해가 잘 안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우울증'은 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또 한국으로 제약회사에 의해 (항우울제를 팔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우울증에 대한 진단기준을 도입해서 한국에서 적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주로 백인 기준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보통 분노가 동반되는데 미국의 경우 그렇지 않아서 큰 차이가 있고, 그래서 '우울증' 이라는 병명만으로는 한국 여성의 감정과 증상, 사회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또 같은 진단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미국과 한국에서의 기준 점수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진단이 어려운데, 그래도 진단을 받으면 고통을 인정받을 수 있어서 해방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고통을 계속해서 호소하는데도 반응하지 않는 사회에서 오래 홀로 버티던 사람에게 누군가의 '알아줌'은, 

그것이 설령 신자유주의 시대 감정 관리의 결과이며 다국적 제약 회사의 자본주의적 책략이라 할 지라도 소중한 것이다. 증상만 나아진다면, 고통만 경감된다면 무엇이든 못 할까?





이 책을 읽고 알게된 가장 충격적인 것 중 하나는, 우울증 치료제로 쓰이는 약들이 어떤 기작을 통해 정신에 작용하는지를 모르면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증상에 맞춰 약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약이 개발된 후 우연히 특정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되면 치료에 쓰인다고. (약에 대해 잘 모르는데, 정신이 아닌 신체적 증상의 치료약도 이럴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고..)




우리가 먹는 정신과 약 대다수는 그 작용기전(약이 신체에서 작용하는 방식)이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약의 역사는 너무도 많은 우연과 실수, 뜻밖의 발견과 직감, 그리고 제약회사의 마케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 중 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많은지를 연구하면서 항우울제 임상 시험은 대다수의 여성을 대상으로 시행되었고, 그 결과 우울증의 질병 규정 자체가 여성을 기준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즉, 우울증은 여성에게 흔한 질병이 아니라, 여성의 증상을 기준으로 정해진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우울증 진단 기준으로는 남성의 우울증을 짚어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여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진단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 중 여성 비율이 높다는 건 당연한 말 아닌가. 뭐가 원인이고 뭐가 결과인 건가?




이삼십대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큰 세대, 그래서 추락하기도 쉬운 세대' 라고 한다. 이건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똑같은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었는데 갑자기 여성은 결혼하고 출산하고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부딪히는 것은 비슷할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사회 변화가 급격하다보니 세대간 갈등도 커졌고, 정치인들이 청년 남성들을 달랜다고 성별 갈등을 조장하고, 디지털 성범죄도 만연하고.. 하다 보니 더 좌절이 큰 것 같다. 또 지금의 이삼십 대 여성들은 어린시절 IMF 외환 위기를 겪었고, 사회에서 '고개숙인 가장' 을 이야기할 때 가정 안에 만연했던 폭력에 노출되었던 사람이 지금 이삼십 대 인거다. (실제로 가장 폭력 발생 건수가 외환 위기 후 훨씬 높아졌다고) 또 코로나 시기에 젊은 여성들의 자살율이 특히 높았다. 그건 우울만이 아니라 가난, 또 젊은 여성이 가난할 때 성매매로 내모는 사회구조도 큰 영향이 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데, 검색 결과에 다 성매매 아르바이트만 나오는 거야.

토킹바, 룸, 조건 만남 이런 것들.

이십 대 초반 여자 계정으로 포털에 로그인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그런 것만 뜨는 거야.

이때 진짜 압도적인 충격과 함께 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가난한 여자들을 어디로 내모는지 느껴지더라고.

...

여자인 이상 어떤 스펙이 있든, 어떤 신념을 가졌든 '가난하면 성매매를 해야 한다'

이게 세상이 어린 여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 같았어.



다시 읽고 쓰면서도 괴로운 내용이 많다.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 내용을 모으고 생각하고 다룬 것도 좋았는데, 이 책이 더 좋았던 건 이 많은 내용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었다.



독자들이 이 글에서 여성을 우울하게 만든 정확한 원인과 이를 폭로하는 증언을 듣기를 바란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보다는 어떤 모순, 혼란, 복잡성, 양가성 등이다.

나는 사람들이 명료해지기보다 함께 흔들리길 바란다. 연루되길 바란다.

선 긋고 피해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선 안에 있던 존재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것은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에 많은 좋은 것들이 그렇듯 더 보람찰 것이다.



누가 어떤 결론을 내려주기를 바라면 안 되고, 각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의 고통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



신기하게도 나의 이야기를 쓸 때 부끄럽기도 하면서 마음이 후련해지는 걸 많이 경험했다. 내 밖으로 꺼내면서, 그걸 말로 글로 표현하면서 인정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도 경험했고.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작가님 인스타를 팔로잉하고 있는데... 책을 더 많이 써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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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6-21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더 우울한 이유에 대한 분석, 사회학적 진단에 관한 책이 더 많이 나와야 할 거 같아요. 더 많이 요구 받는 (사회성, 외모, 체형, 출산, 육아)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수하님 리뷰 읽으면서 총정리 잘 하고 갑니다. 비 오는 수요일에, 좋은 리뷰 감사링!

건수하 2023-06-21 11:03   좋아요 2 | URL
스스로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제목을 썼는데, 단발머리님 댓글을 보니 아 이건 아니구나! 그래도 괜찮다는 건 안되겠다 싶어 제목을 바꿨습니다. 제게 자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트)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 아니 이게 아니군요 ㅎㅎ 이따가 점심 맛있게 드세요!

거리의화가 2023-06-21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분자 조각가들> 책을 읽으면서 약이라는게 생각 이상으로 허술하게 많이 만들어지고 잘못 이용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여성의 감정과 심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저 자신도 어려워요. 우울증보다는 오히려 분노조절 장애가 있나 싶을 때는 있습니다ㅜㅜ 어쨌든 제가 여성인데도 제 감정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관련해서 연구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울증을 판다기보다는 감정 자체에 대한 연구요!

건수하 2023-06-21 13:35   좋아요 1 | URL
화가님 역사책 읽기도 바쁘신데 화학 관련 책도 읽으셨군요! 약이란 게 원래 그런가봅니다... 그래서 임상실험 이런걸 오래 하는 거군요.

분노조절장애가 아니고 분노할 일이 많은 것 아닐까요 ;ㅁ;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회!
(갑자기 <술 권하는 사회> 생각이 나면서...) 감정에 대해서 저도 좀 무딘, 무디려고 노력하는 편이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감정에 관한 책 전 모르지만 있을 거 같기도 합니다 ^^

미미 2023-06-21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발췌문은 특히 좋은데요?!!
이미 연루되었고 흔들리고 있지만ㅎㅎ
저도 그래서 증상이 심할 때만 우울증 약을 먹다가
되도록 걷고 달리려고 노력해요.
우울증약도, 다이어트약도 여성이 가장 큰 수요자고
마케팅 대상이란 사실이 자본주의의 우울한 현실인 듯 합니다.

건수하 2023-06-21 20:41   좋아요 1 | URL
그쵸! 저도 이 많은 내용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 난감한 상태였는데 저 태도가 참 좋더라고요. 여성 우울증만이 아니고 장애, 질병, 노년 등 많은 문제에 저런 태도를 갖고 대한다면...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아무거나 다 정당화하는 현실.. 요즘 읽던 <도둑맞은 집중력>에서도 그 부분 우울했는데요. 인터뷰한 여성들은 약과 상담 외에도 글쓰기, 연대 등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만하고 똑똑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3-06-21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 리뷰 보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건수하 2023-06-21 20:42   좋아요 1 | URL
햇살과함께님 이미 읽으셨군요 ^^ 전 두번째 읽어도 좋더라고요. 이 작가 책 더 읽어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