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뿐하게 건너뛰려 했었지만, 또 나에겐 쓰라는 사람도 없었지만 잠자냥님 글을 보니 써두고 싶어졌다. 아직은 속이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인터넷에 접속이 되고 있고 바쁘지 않기도 하다. 나중에 내가 이런 생각 했었구나- 하고 다시 보고 싶어서 쓴다.

올해는 세어보니 만화책 두 권, 그림책 두 권 포함해서 65권을 완독했다. 최근 몇 년 중에 권수로는 최저 권수를 찍은 듯한데… 올해는 좀 바쁘기도 했고 수학 문제도 풀어야했고 -.- 필사하는 데도 시간을 많이 썼다. 


기억에 남는 책들은 이렇다. 



1. 여성주의 관련 책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가부장제 하에서 현실을 조금 개선해보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을 공유한 책. 한국에서 40년 이상 살아온지라 가족 간 서열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일이 좀 무리라고 느껴지는 지점이 있어 나의 관성적인 태도를 반성하게 됐고, 기존 제도 안에서 뭔가를 바꾼다는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간접체험하게 됐다. 


<난민과 여성혐오>

난민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 없이 정치적 올바름에 안주해 왔음을 깨닫게 해준 책. 작가의 어조가 좀 불편하긴 했지만.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1년 전 읽고 1년만에 다시 읽었더니 희진샘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훨씬 잘 보여서 조금 놀랐다. 나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지난 2년간 들어온 팟캐스트의 효과로 익숙해졌기 때문인듯. 희진샘의 안식년동안 나는 나대로 읽으며 내 생각을 만들어가고 싶다. 


<생명의 여자들에게>

여성주의책같이읽기 11월 책을 아직까지 읽고 있다. 인생의 진리가 많이 담겨있는 것 같은데 일본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에 흔한 ‘비유’ 가 너무 많아서 그걸 보다가 지친다. 꼭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2. 작가들의 발견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보다 나는 이 책이 더 좋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좀더 사회적 맥락에서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권여선


한국 소설, 한국 작가에 관심이 적었던 나라.. 책모임으로 새로 알게 되었다. <각각의 계절>을 읽었고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작가. 



3. 그래픽 노블


<바늘땀>, <펀 홈: 가족 희비극>, <나, 버지니아 울프> 세 권을 읽었다. <바늘땀>과 <펀 홈>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화자가 어린이인가 성인인가가 다르고 <바늘땀>보다 <펀 홈>이 좀더 대사가 많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편이다. 그래도 글로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을 그림으로 채워준다는 점에서 이 그래픽 노블들이 다 좋았고, 특히 <나, 버지니아 울프>에서 친족 성폭력을 나타낸 부분, 거울을 울프가 왜 피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좋았다. 앨리슨 벡델의 책들을 좀더 읽어보고 싶다. 



4. 고전(?)


세 권이 묶이는 카테고리가 좀 이상한데, 나름 고전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책들인 것 같아서 그냥 뭉뚱그려 쓴다. <이기적 유전자> <오만과 편견> 그리고 <자기만의 방>. 최근에 개체변이가 유전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이기적 유전자>는 조금 빨리 읽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이 뒤처져 있지만 그동안 다른 곳들에 이 책의 내용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이제라도 읽기를 잘했다 싶었다. 참고도서로 나쁘지 않다. <오만과 편견>은 다시 읽어도 참 재기발랄하고 재미도 있어서 고전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틴 소설 중 <에마>를 올해 다시 읽을 생각인데, 오스틴이 가장 아꼈던 캐릭터와 소설이라고 해서 기대중이다. <자기만의 방>은 읽고 필사하며 또 천천히 읽었는데 그래도 곱씹어 볼 만한 부분들이 많다, 물론 시대나 작가의 한계라는 것도 있지만. 뒤에 붙어있는 희진샘의 해설도 좋았다. (그렇지만 희진샘 해설이 붙어있는 책의 번역은 솔직히 별로다)



5. 특히 기억에 남는 두 권 


한 권만 고르면 좋겠지만 두 권을 골라 봤다. 


하나는 류츠신의 삼체 1권과 2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2권. 연말에 읽어서 더 기억에 잘 남아있기도 하겠지만 중국 sf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음에도 서양 sf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서양 sf와는 다른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1권은 중국의 역사, 특히 문화대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고 2권은 플롯과 스토리가 탄탄한 독립적인 소설로 봐도 무리가 없다. 2025년 시작해서 3권도 이미 읽었는데, 3권은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고 또 뛰어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논리와 근거가 (현대 물리학이나 우주에 대한 지식이 많지는 않은 내가 보기에는) 탄탄하여 요즘 흔치 않은 하드 sf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리즈임에도 각 권의 특징이 달라 이런 점에서도 완성도가 높다고 느꼈다. 


마지막 한 권은 정아은 작가의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이다. 이 책은 한국현대사에 대한 지식을 정리해줬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전두환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배경, 그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 등을 자세히 기술하며 그가 했던 일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데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어서, 그 사람의 내면을 내가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이해해야 하나, 역사속의 한 인간이 아닌 괴물로 생각하고 싶다- 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그가 권력을 잃은 후 어떤 처분을 받았는가의 과정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2024년 12월에 일어난 일들을 보니 영화 <서울의 봄>을 본 것처럼 이 책을 읽은 것도 나에게 한 번의 예행연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삼 고마웠다. 


애정하는 작가님이 새 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사고사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떠나오기 직전 접했다. 충격적인 일이었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언젠가 출간될 유고작을 응원하면서 기다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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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1-03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국은 윤 씨 체포 불발로 속터지기 일보직전인데..... 인터넷 속터지기 일보직전에도 이런 페이퍼 쓴 건수하 님 짝짝짝!!! 박수.

건수하 2025-01-03 16:28   좋아요 2 | URL
제가 페이퍼 마지막에 체포 영장 관련 얘기를 썼더니 글이 계속 안 올라가길래 한 다섯 번 시도했다가 혹시 이것 때문에? 하고 그 내용 뺐더니 바로 등록됐는데, 이게 우연일까요...?

잠자냥 2025-01-03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으로 묶은 카테고리의 책들 넘 웃긴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그나저나 삼체가 그런 내용이었군요... 으음.

건수하 2025-01-03 16:32   좋아요 0 | URL
삼체의 내용은 거의 안 썼는데요.. 어쨌든 그런 내용입니다. 분량이 워낙 방대하여 쉽게 못 권하겠지만, 모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

잠자냥 2025-01-03 16: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삼체가 그런 책이었군요, 라고 고치려다 그냥 둔 건데 ㅋㅋㅋㅋㅋㅋㅋㅋ

희선 2025-01-04 0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이 느린 곳에서 이런 글을 쓰셨군요 글 쓰는 건 괜찮았겠지만, 글이 올라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겠네요 2024년이 가고 2025년이 왔군요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저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뭔가 새로 시작할지도...

수하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건수하 2025-01-04 10:31   좋아요 1 | URL
글이 날아갈까봐 다른 곳에서 쓰고 붙였습니다 ^^ 2025년은 조금 더 희망찼으면 좋겠네요.
희선님도 새해엔 더 건강하시고 좋은 일 많으시길 바래요!

새파랑 2025-01-04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체>가 좋으셨군요. 왠지 중국작품은 손이 잘 안가던데 읽어보고 싶습니다~!! 2025년에는 24년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많이 읽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건수하 2025-01-04 20:10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오랫만입니다 ^^ 네, 삼체 기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
새파랑님도 25년에 좋은 작품 많이 읽으시고 더 자주 뵈었으면 좋겠어요!

독서괭 2025-01-04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정하는 작가님이 사망하셨어요? ㅜㅜ
건수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5년도 잘 부탁드려요~~❤️❤️❤️

건수하 2025-01-04 20:12   좋아요 1 | URL
네, 그 작가님이 40대이신데... 충격이었어요. ㅠㅠ

독서괭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자주 뵈어요 ^^

단발머리 2025-01-09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건수하님 방에서 만나니 꼭 한 번은 찾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삼체 말고도 기다리는 비슷한 친구들 (어스시, 듄, 파운데이션....) 많이 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

정아은 작가 소식은 너무 안타까웠어요. 얼마 전에도 이 책이랑 같이 기사화 되었더라구요. 그 책도 읽고 싶은데, 우리들에게는 전두환 실사판이 있어서 .... 어휴 참.... 얼른 나라가 제자리 찾아야할텐데요.
멀리 계셔도 식사 잘 챙기시고요, 건수하님~~

건수하 2025-01-12 09:41   좋아요 1 | URL
<삼체>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 그 기억은 벌써 희미해져가고... ^^

느린 인터넷으로 매일 검색해보는데, 영장 나온 사람 체포하는 일이 그리 힘든 일인줄 몰랐네요...
저도 답답한데 다들 얼마나 답답하실지. 추운 날씨에 사람들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 나왔음 좋겠어요.

밥은 너무 잘 먹고 있어 걱정입니다.. 단발머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관찰자 2025-02-0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삼체>에 빠져서는 진짜 우주로 신호를 보내고, 증강현실로 게임 속으로 들어갈 판.... 이었다가 겨우 빠져 나왔어요.ㅋㅋ 혹시 넷플릭스 <삼체>도 보셨나요? 주인공이 갑자기 서양인으로 바뀌고 내용도 많이 틀어져서 좀 의아스럽긴 했지만, 책과 영상은 또 다르니까 색다른 재미는 있었어요. (그치만 책과는 확실히 달라요.ㅡ.ㅡ;;)

건수하 2025-02-09 12:39   좋아요 0 | URL
관찰자님 안녕하세요. 증강현실 게임은 있으면 저도 해보고 싶지만... ^^
책을 다 읽고 드라마도 봤어요. 그 방대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잘 구성해두어 놀랐습니다 ^^ 시즌2도 나오면 보고 싶네요.
 

영어권 국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어로 제목을 써 보았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데 가족은 멀리 있고, 음식점과 상점은 다 닫아 그리 해피하지만은 않지만…. (다행히 맥도날드는 열었다)


짐을 싸고 남는 자리에 책을 더 넣었다. 야금야금 모아온 전자책들도 다운로드했다.

곧 인터넷이 되지 않는 비문명의 세계로 건너가므로 연말결산은 가볍게 건너뛸 예정이다.


아, 알라딘 선물을 잘 받았는데 사진 찍는 걸 깜박하고 주변에 분배를 해 버렸다.


즐거운 연말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알라딘 그리고 그보다도 서재 이웃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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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4-12-25 06: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수하님 잘 다녀오세요. 먼 곳에서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오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건수하 2024-12-25 21:46   좋아요 1 | URL
네 책도 많이(?) 읽어서 돌아갈게요! 😊

거리의화가 2024-12-25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 먼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시는군요.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다녀오시기를요! 새해에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건수하 2024-12-25 21:47   좋아요 0 | URL
네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가겠습니다 ☺️

독서괭 2024-12-25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전에 말씀하셨던 장기출장 가셨군요? 그런데 어디길래 인터넷이 안 된다니…😨 북플엔 종종 들어오실 수 있기를 빕니다. 건수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수하 2024-12-25 21:48   좋아요 1 | URL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느려서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랄까…. 저번에 보니 북플은 접속 아예 안되고 컴퓨터로 오래 기다리면 서재 홈페이지는 뜨더라고요 하지만 로그인하려면 하세월… 😅
 


올해가 37일 남았다고 하고 나에겐 조금 덜 남은 느낌이다.

이상하게 연말이 되면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10월 책을 오래 붙잡고 있진 않아서 요번 달은 빨리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입술엔 물집이 생겼고 주말엔 계속 외출을 했다.

그리하여 아직 11월의 여성주의책같이읽기 책을 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읽은 책은 거의 없으니 산 책만 정리를 해보자. 

(이후엔 안 사겠다는 강한 의지 표명)











6권 중 한 권은 아이 책이고, 두 권은 선물했다. 

이 중 두 권은 조금 읽었다. 

11월에 완독한 책은 지금까지 3권이다 (하나는 9월부터 읽던 SOW, 하나는 10월부터 읽던 <세계 끝의 버섯> ...).


어쨌든 12월까지 책은 더 사지 않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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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더 까먹기 전에 적어보려고 적는다. 


일단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랐던 건 이거다. 숲의 천이 succession 에 관한 것. 



    (이미지 출처: 산림청 홈페이지)



이런거 고등학교 때 배웠나? 여튼 오래 전에 배웠는데. 내가 배웠을 때는 이렇게 가로 방향의 그림이 아니었고 세로 방향으로 달라지는 그림이었는데 요즘엔 거의 이런 그림만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개념을 배울 때, 실제로 가르치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음수림이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라고 생각했다. 위키 백과에 '천이'를 찾아보면 
천이 (생물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지막 단계인 음수림 (극상 군락)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극상 군락이란 식물의 종류가 더 이상 교체되지 않는 안정된 군락을 말하는 것으로, 이 때에는 물질 생산·축적·고사(말라죽음)의 순환이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화살표도 있겠다, 이렇게 이렇게 가다보면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가 된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개념 자체가 그런건지 내가 그렇게 이해한 건지 모르지만 이 그림에는 시간에 따른 선형성이 표현되어 있고 나는 시간에 따라 역사는 진보할 거라는 생각을 내재화하고 있어서 이 음수림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정적, 평형 상태라는 말은 보수적인 것 같지만 진보가 거듭되다보면 언젠가는 다 좋아지고 완성되어 안정적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막연한 낙관주의와 잘 부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송이버섯에게는, 소나무에게는 이 음수림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소나무는 아마 양수림 상태에서 가장 잘 자랄 것 같고 송이버섯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개체 어떤 집단에게는 불안정한 것이 더 좋고 그래서 송이버섯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보의 방향성을 거슬러 그 불안정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주변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지 미국에는 존재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공유지 (땅이 좁은 한국에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에서 버섯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들에게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경제활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고향과 관계하여 숲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다른 경제활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 감수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지구의 한 편 일본에서 송이버섯이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는 듯한 삶의 방식도 자본주의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버섯의 수요가 전세계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러면 자본주의와 관련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이 집단의 규모는 마냥 커질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의 표현대로 작은 패치로만 존재할 수 있다. 찾으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저 어디 존재할 뿐 수가 적기에 모두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그렇기에 지속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학생일 때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없어서, 나는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안 낳고 적게 벌어 적게 쓰고 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하고싶은 일과 돈을 좀 절충할 수 있게 되어서 아이도 낳고 책도 좀 사면서 적당히 살고 있다. 코로나가 한참 창궐하던 2020-2021년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둘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어쨌든 돈은 계속 벌어와야 한다고 해서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은 대리운전, 서점주인 (자본이 부족한데), 아니면 서점 알바..? (알바를 쓸 수 있는 서점이 얼마나 될런지) 좀 무리하면 학원강사..?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공계서적 번역을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영어나 국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공계서적은 수요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내 상상력의 한계는 딱 그 정도였고 실행력도 없었다. 주류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즘 책을 계속 읽고 있지만 지금도 딱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들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자영업자의 수가 그렇게 많은 모양이다. 


이 책의 역자 노고운은 역자 해설에서 번역은 주변자본주의적이라고 했다. 정희진의 공부 매거진 10월호에는 학원강사 출신 번역자가 나왔고, 11월호에는 대학교수 출신 동네 사회학자가 나왔다. 이분들이 어떻게 생계를 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다면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희진샘도, 서점이나 온갖 돈이 되지 않는 것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주변자본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까지 쓰고 역자에 대해 찾아봤는데 역자는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의 현직 교수다. 책 어딘가에 저자가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의 한 학생에게 고맙다고 한 각주가 있었던 것 같은데 노고운 교수가 저자와 친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번역하는 것은 노고운 교수의 이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송이버섯을 따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모두가 꼭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살지는 않아도 된다. 쉽게 찾을 수도 없고 그렇게 사는게 쉽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면서 얻는 것이 있을 거다. 그건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다. 찾거나 선택하기 전에 생각의 방식이 달라져야겠고 그게 가장 어렵지만 말이다. 


 역자는 모두가 이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삶의 방식을 기후 위기 시대에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류세 Anthropocene 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언급한다. 책이 출간되던 시점에는 국제지질학연합 IUGS에서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자료를 수집했지만, 올해 투표를 통해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인류세는 오존홀을 발견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처음 제안한 개념이고, 인류가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는 맞다. 오존홀도 그렇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렇게 빨리 증가한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지질시대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한 내 생각은.. 지질시대는 보통 대륙의 이동이나 생물의 대량 멸종, 큰 기후변화를 기준으로 지정하는 것인데 아직 인류가 그만큼의 영향을 미쳤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인류 입장에서는 중요하고 심각한 변화지만 지구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 시대는 좀 작은 단위이기는 하지만 이미 16000년 전 기준으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를 나눴고, 그 기준은 지구의 많은 면적을 빙하가 덮고 있다가 물러난, 나름 지질학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플라이스토세에 인류는 이미 존재했지만 홀로세 이후 신석기가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경작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홀로세 역시 인류에게 의미가 있는 지질시대이다. 현재의 기후 위기 관련해 굳이 어떤 시기를 지정해야 한다면, 제이슨 무어 (나는 이 사람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가 주장한 대로 산업혁명 이후를 자본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렇게 지정한다 해도 지질시대라고 보기는 어렵고. 

인류가 그렇게 쉽게 멸종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처럼 우점하진 않아도 소수가 살아남을 것이다. 혹시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지구에는 곰팡이나 식물 등 많은 생물들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처음 기후 우울을 앓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놀랐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 분들이 우울을 경험하는지 알아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류는 멸종한다 해도 지구는 어떻게든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낫지 않을까? 나는 기후 관련 일을 하고 있고 무력함을 자주 느끼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나아졌다. 18세기 이후를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로 굳이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 위기를 구해야 한다고,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능력이나 흔적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IUGS가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하지 않은 이유는 좀더 실용적인 것이다. 원문을 찾아보긴 귀찮아 검색을 해보니 인류세는 공식적인 지질학 시대가 될까? 이런 기사가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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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1-12 2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부분 좋네요.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지구에는 곰팡이나 식물 등 많은 생물들이 다른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요.
저도 이 책에서 묘한 희망의 기운을 느꼈거든요.
올려주신 사진이 좋아서 한참 들여다 보았어요. 평형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 소나무, 그리고 송이버섯 ㅎㅎㅎ

건수하 2024-11-12 13:22   좋아요 1 | URL
인류를 포기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죠. 막연한 희망도 생기고...
근데 그러면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까요...? 결국 지식욕 자기만족인가...

- 2024-11-12 19:51   좋아요 1 | URL
할 수 있으니가 하는 거 아닐까요? … 할 수 없거나 할 줄 모르거나 할 기력이 없는 사람이 더 많다고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

건수하 2024-11-12 20:57   좋아요 1 | URL
인류를 포기하는데 인문학 공부 굳이… 포기가 안 돼서 그런가봅니다 ^^ 물론 여유와 기력도 있어서 그렇겠죠 ㅎㅎ

청아 2024-11-12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 이 글 너무 좋네요! 이따가 PC로 재독예정! 저도 대리운전 생각해 본적 있는데 운전 실력은 둘째치고 택시 기사들,대리 기사님들 얻어맞는 뉴스가 자주보여 두렵기도 했어요. 그냥. 지금 하는거나 잘 하기로ㅎㅎ통념에서 벗어난다는 게 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시각을 가지기 위한 노력은 늘 필요하구나 새삼 느낍니다.

건수하 2024-11-12 13:25   좋아요 1 | URL
그쵸, 대리운전은 술취한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위험하겠더라고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싶지만 노력한다고 되는건지... 요즘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힘든 것 같아요. 노력하면 다른 시각을 접했을 때 부정하지 않는 정도는 가능한 것 같은데..

- 2024-11-12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은 일찍 하고 싶은 일을 찾으셨군요? ~~ 왜 근데 그만두고 싶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돈… 저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싶습니다!!! ㅋㅋㅋㅋㅋ 제가 이과들이 좋아할 문장을 왓이즈섹스 보면서 찾아서 킵해뒀는데요! 나중애 시간나면 적어볼개요! 귀한 이공계 친구 건조수하님!! ㅋㅋ

건수하 2024-11-12 20:56   좋아요 1 | URL
좀 회의를 느끼기도 했고 가정생활과 병행하기가 어려워서… 육아휴직 후 복직을 안할까 생각해봤었어요. 회의는 여전하지만 이제 애가 많이 커서 다닐만 해요 ^^

이과들이 좋아할 문장 ㅋㅋㅋㅋ 궁금하네요!
 


곧 내려갈 것 같아서 2시간 휴가를 내고 일터 근처의 극장에서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왔다. 

















시그리드 누네즈가 수전 손택과 함께 살았고 회상록을 쓴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내요>도 수전 손택이 모티브가 된 줄은 몰랐다. 


왜 굳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그리려 했을 수도 있지만 

시그리드 누네즈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영화는 좋았고... 

같이 보러 간 사람은 확신한 

틸다 스윈튼의 2역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으며 (그냥 어디서 찾았겠거니 생각했는데)

도라 캐링턴과 리턴 스트래치를 알고 있어서 뿌듯했다. 


이제는 또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

읽지도 못하면서.....



+ <우리가 사는 방식>은 왠지 집에 있었던 것 같아서 집에 가보니 있었다. 알라딘에선 안 샀던데 언제 어디서 샀는지 @_@... 다시 사지 않아서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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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1-0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걸 몰랐따니!! 저는 바로 알았다능 ㅋㅋㅋㅋㅋ 약 가지러 다시 간다고 했을 때 빡치던가요?(책만 읽은 다락방 평) 귀엽던가요?(영화만 본 잠자냥 평)

건수하 2024-11-06 16:22   좋아요 1 | URL
어디서 잘 찾았네 했다는 ㅋㅋㅋㅋ

빡치지도 귀엽지도 않고... 놓고 왔으면 찾으러 가야죠 뭐 그게 목적인데 어쩔..?

페넬로페 2024-11-06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줄리언 무어와 틸다 스윈튼 배우가 둘다 1960년생으로 우리 나이 65세더라고요.
틸다 스윈틴이 예쁘게 나오고
딸 역할 소화도 잘해내어 역시 배우다 생각했어요.
근데 저는 영화 보는 내내 잉그리드가 왜 마사의 죽음을 도와주러 했는지가 궁금했어요~~
수전 손택은 어떤 모티프예요?

건수하 2024-11-06 17:38   좋아요 1 | URL
둘다 좋아하는 배우라 고민없이 보러 갔었어요.

영화에는 이유가 잘 나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소설에는 좀 자세히 나올까요? 저는 그냥 친구가 부탁하는 데 거절하지 못해서 도와준다는 느낌이었는데, 처음에 잉그리드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책을 냈다고 나오거든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생각해본 사람이라서 더 수락했던 걸까 싶기도 했어요.

수전 손택이 생각나는 요소가 여러 개 있었는데 (암투병, 종군 기자, 어릴 때 낳은 아이 등) 결정적으로 맞다고 느낀 건 어느 전쟁이 가장 인상깊었냐고 했을 때 보스니아 전쟁이라고 대답했을 때였어요. 그러고보니 작가의 이름도 시그리드 - 잉그리드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

페넬로페 2024-11-06 17:52   좋아요 1 | URL
네, 그렇군요.
저는 오늘 아침 영화에서 마사가 외웠던 문장이 들어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중 ‘죽은 사람들‘을 다시 읽었어요.
지금 읽고 있는 신곡도 그렇고요.
죽음이라는 단어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네요.
날도 추워지고 맘도 우울해요 ㅎㅎ

건수하 2024-11-06 18:04   좋아요 1 | URL
‘죽은 사람들‘ 이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군요.. 저는 조이스 작품은 읽어보질 못해서, 독립된 소설인 줄 알았어요.

날이 갑자기 추워지니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것 같아요. 오늘은 따뜻한 것들이 당기네요 :)
페넬로페님도 따뜻한 차 한 잔 하시면서 독서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