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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의 요새 - 성폭력, 책임, 화해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박선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여성주의책같이읽기 9월의 책.
MBTI 중 S 성향이라 그런가, 페미니즘을 생각할 때도 제도적 장치로 보장받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인간의 선함을 별로 믿지 않기에 제도가 생기면 의식도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도가 생기려면 많은 사람의 의식이 깨어있어야 하기에 제도가 먼저 생기는 일은 없을거라 절망적이라고.
이 책은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칸트를 얘기했던가? 나도 원리원칙주의자라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그러면 뭘하나 현실이 아닌데. 마사 누스바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매우 정제된 언어로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더러운 말은 굳이 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세상을 먼저 떠난 딸에게 바친다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도 있고 원래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다. 마사 누스바움 자신도 '나는 다르고 싶은' 교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모두를 위해 존재하고 모두에게 공정한, 어떤 서사보다도 위에 있어서(있어야만 해서) 편견이나 편애로부터 면역력을 가진 체제를 만들겠다는 더 큰 목표를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관념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이 작업이 고결한 도덕관념을 구체화하는 일이라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14쪽)
나도 그런 도덕관념이 구체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근시일내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실은 영원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하길 바란다.
이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에도 그런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닌, 모두를 화해시키고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결과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14쪽)
그렇지만 이 문장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모든 여성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페미니즘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나는 그러고 싶지만. 사실 모두는 아니다, 모두를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이렇게 더러움을 참고 난 더럽지 않으려고 공부하고 애쓰고 있는데 기왕이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면 좋겠다. 그것도 안되면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성폭력의 피해자이든 아니든, 가부장제의 억압을 받든 아니든, 왜 여성은 항상 바르고 아름다운 결과를 추구해야 하나? 왜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행동해야 하나?
타이틀 세븐이 일찍이 통과되고 개정되어 타이틀 나인까지 만들어진 미국에서도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차별금지법도 통과되지 않은 한국에서 아직 모두의 화해는 당연히 이르다.
누스바움은 8장 스포츠 업계에 관한 부분에서 '이 업계 전체를 좀먹는 성적 부패와 학계의 부패는 고칠 수도 없다.' 라고 했다. 문제를 고칠 수도 없고 구조화되어 있어서라고. '꾸준히 노력하면 만들어 낼 수 있는 동등한 존중과 배려의 문화' 라는게 가능한 곳도 있지만 아닌 곳도 있다. (사실 미국에서도 안 될 것 같지만)
'교만' 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초반부도 좋았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점잖아서, 적어도 페미니스트들에게만 이 책을 권할 생각이다. 아, 남성에게는 절대 권하지 않을 생각이다. 더 교만해지면 안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