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독서본능>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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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던가. 한창 막힘없이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말이 곧 글이었다. 일기쓰기만으로도 상장을 주던 시절 나는 일기쓰기에도 신명을 내곤 했었다. 그러나 문맥을 알고 문법을 배울수록, 언어지식이 쌓일수록 연필을 들고 무엇인가를 끄적거리는 게 두려워졌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쓰는 일인데 쓸 자신이 없어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독서가 시작된 내력 즈음이 되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yes24와 인터파크과 그 외 몇몇 인터넷 서점을 전전하다가 추가할인되는 카드 때문에 , 결국 경제적 이득 때문에 알라딘에 정착한 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서재를 만들며 서평을 끄적거리곤 했다. 창피한 글을 쓰며 이곳저곳 본의 아니게 돌아다니다 발견하곤 했던 아이디 '파란 여우'. '파란 여우'의 서평을 보며 '아! 글이란 저 정도의 박학다식함을 베이스로 깔아 놓고 현란한 문장력을 토핑으로 시사비판까지 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서평의 고수들. 무협지처럼 어떤 세계에 입문하게 되면 늘 만나게 되는 고수들. 난 알라딘에서 서평의 고수들을 만난 셈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프로그램에 비할 바가 아닌 엄청난 책의 고수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었던 셈이다.  

 그런 그녀가(그인지 그녀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 책을 통해 그녀임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5년 동안의 독서기록장을 들고 나타났다. 단편단편 끊어진 조각들이 모여 500페이지에 달하는 한 권의 책이 되다니, 서평만으로도 책을 완성할 수 있다니 그저 놀랍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조각조각의 끊어짐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장대한 흐름으로 여겨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저 정도 분량의 책인 만큼 중복되는 생각들 또한 있기 마련일 텐데 그러한 겹침이 과히 지루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또한 놀랍다. 책을 읽을 때 옆에 두던 나의 메모지는 그녀로 인해 글씨로 가득찼다. 그녀가 소개해 준 책 중 입맛이 당기는 책들을 나 또한 읽고 싶어 얼른 제목을 옮겨적었기 때문이다. 무릇, 그녀도 말했듯이 책 속에 등장하는 책들을 만나는 기쁨이야 말로 해서 무엇하겠는가. 한국 문학에서 시작한 그녀의 글은 고전과 환경, 인물과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그야말로 방대하다. 만화와 아동편이 좀 소홀히 다루어지긴 했으나 서평의 깊이로 보건대 그녀 생각의 범위는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필자는 마르케스 문학의 자양분에 대해 얘기하던 그녀가 "능력만 갖추어진다면 자신 또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마르케스의 뻥에 대해, 김훈의 칼에 대해, 도스도예프스키에 대해 말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라고 자기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부디 어서 빨리 그녀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부디 그 자리에서 활발한 이야기가 나누어졌으면 더욱 좋겠다. 그리고 더불어 부디 말석에 나 역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에 추임새 정도는 넣을 수 있도록 나의 독서 행보도 좀더 부지런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초대를 받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릇 책과의 만남은 때가 있기 마련인데 서평에 대한 책을 지금 만난 것도 나에겐 시의 적절한 만남이었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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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아이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빨간머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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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엄마가 김치를 담가주시며 양념에 버무린 김칫속 하나를 입에 쏘옥 넣어주셨다. 그 시원하면서도 알맞게 짜고 매운 맛은 먹는 내내 입 안에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더이상 김치를 사먹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에 젖어 감탄사를 연발할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마신는 게 아이라 니 입에 익숙한 기라. 어릴 쩍부텀 묵다 보이 그게 입맛이 된 기라. 알겐나? 마시낀 뭐 그리 마시껜노.(맛있는 게 아니라 네 입에 익숙한 걸 게다. 어릴 때부터 먹다 보니 그게 네 입맛이 된 게지. 맛있긴 뭐 그렇게 별나게 맛있겠냐.)”

그땐 그냥 겸손한 말씀이시려니 듣고 넘겼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인 듯 하다. 어릴 적부터 가족과 옹기종기 모여 먹던 맛이라 입이 길들여지기도 했을 게다. 그러니 내가 느끼는 맛있는 감각과 나의 친구들이 느끼는 맛있는 감각이 다른 것이겠다. 그래서 여기서도 ‘음식은 기억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p240 요시모토 씨의 요리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음식이라는 건 역시 추억이며 깊은 사유라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누구나 절대로 타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고유의 음식에 대한 기억이라는 걸 갖고 있다. 그건 재현이 가능할 것 같아도 결코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음식의 미묘한 맛에서 떠올려지는 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인간관계이다.  
   

 

결국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만들고, 나중엔 음식과 함께 추억을 먹는 것이다. 그렇기에 덜 익어 퉁퉁 불어터진 봉지라면의 서걱거림도 군대에서는 맛있었고, 기숙사에서 해 먹었던 커피포트 속의 설익은 밥도 나름 맛있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맛있는 음식을 접해보는 기회는 늘어나게 마련인데 그래도 궁극의 순간에 떠올리는 음식은 진귀한 음식이 아니라 익숙한 음식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 역시 맛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억에 기인한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럼 이 책에 등장하는 기억 속의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책은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한 여러 음식의 레시피를 참고로 하여 다양한 음식을 맛보며 그 당시 음식을 즐겼던 인물의 심정과 상황을 추리해 보는 것을 숙제로 삼고 있다. 나름 흥미롭고도 호사스러운 과제이긴 하나 딱히 익숙한 음식이 아니라 흥미가 가진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 산채 요리만 실감날 뿐 캐비어라든가 마리 앙투와네트의 과자는 그냥 눈요깃거리일 뿐이었다. 분명 공복에 이 책을 읽고 있었다면 입맛이 당기기도 했을 터인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음식에는 좀체 식욕이 일지 않았다. 사진에 광택이 없어서인지 별로 먹음직스럽지 않은 음식에 대한 묘사에 솔직히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이보다는 고향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질긴 끈은 위에 잇닿아 있다던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 이야기가 더욱 그리워질 뿐이었다. 그나마 ‘라블레의 아이들’을 읽으며 처음으로 입맛이 살짝 돌던 음식은 양갱에 대한 묘사였다. 좀체 단 것을 즐기지 않은 나인데도 육감적인 묘사에 나도 모르게 혹한 것 같다.

   
  p100 양갱의 색상의 깊이와 미묘함은 서양식 형광등 아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한 개의 달착지근한 덩어리가 되어 혀끝에서 녹는 것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칠기의 표면의 아름다움은 ‘겹겹의 어둠이 퇴적된 빛깔로 주위를 에워싼 암흑 속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음식을 담는 국그릇은 도기가 아니라 반드시 칠기여야만 한다.
 
   

 

이 즈음에 와서는 역시 요리 얘기가 아니라 글솜씨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눈에 보일 듯 음식을 묘사하면서 입안에 사르르 녹게 만드는 것은 정작 레시피에 충실했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음식을 눈 앞에서 맛볼 수 있을 듯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수록 맛에 대한 탐닉이 줄어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관계로 내가 만드는 음식에 흥미를 잃고 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기 시작하면 지쳐버리곤 한다. 갈수록 편리해지는 시대에서 레토르트 음식에 길들여지기는 싫고, 그렇다고 직접 만들기도 싫고-하긴 만들 수도 없긴 하다-이기적이게도 예전 엄마가 손수 만들어주시던 슬로푸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다. 그런데 그 음식을 직접 만들기는 싫으니 어쩌면 좋을까? 먹고는 싶으나 만들기 싫은 나에게 육감적으로 식욕을 당겨줄 음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직접 만들어 먹든 사서 먹든, 먹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정도로 맛깔나는 음식 이야기가 그리운 겨울밤이다.

-엄마가 주던 시원한 동치미 국에 고구마라도 한 입 베어물고 싶은 청명한 겨울밤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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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사라지는 숲이야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종이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 - 종이, 자연 친화적일까? 세계를 누비며 밝혀 낸 우리가 알아야 할 종이의 비밀!
맨디 하기스 지음, 이경아 외 옮김 / 상상의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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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인간은 자신의 코앞에 닥친 일에만 급급할 뿐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기만 하다. 물론 여기에는 나부터가 포함되어 있다. 일전에 읽은 책에서는 식탁에 오른 참치 통조림의 참치가 어디에서 잡혀 우리의 식탁에까지 오른 것인지 그 연원을 거슬러가고 있었다. 무심히 먹고 있는 참치와 크래커, 그리고 무수한 많은 사무용품들이 세계를 돌고 돌아 나에게로 온 것이란 사실을 그 책을 통해 알게 된 후 사물을 절대 단편적으로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훈련이 부족한가 보다. 종이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조차 없으니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막연히 아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의 간극은 크기만 하다. 물론 간접체험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엄청난  간접 체험을 하게 된 셈이다. 이번에 내가 느낀 놀라움과 죄책감은 나뿐 아닌 다른 이들도 모두 느껴주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그리고 내가 이 기억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에 별표 다섯 개를 보낸다. 한 권의 책이 가진 힘이 크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부디 이 책의 힘은 좀더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우리 주변에는 종이가 넘쳐난다.  그러나 종이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 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물을 아껴써야 한다는 이야기 뒤에 물부족 국가에 사는 우리에 대한 걱정과 물의 낭비에 대한 경고를 담겨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종이를 아껴써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돈을 아껴써야 한다는 말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계기로 처음으로 나무와 종이를, 숲과 종이를 연관지을 수 있었다. 아침에 달콤한 원두 커피 한 잔을 내려 먹기 위해 썼던 여과지와 화장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썼던 화장지, 걸레 빨기 귀찮음을 밀쳐두고자 사용한 물티슈 한 장과 잘못 출력했던 A4용지들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나의 소비 때문에 베어진 나무는 모두 몇 그루였을까? 이 책은 종이로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숲에 대한 이야기를 그야말로 처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국가별로 하루에 소비하는 종이의 양이나 한 사람이 평생 쓰는 종이의 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엄청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마 킬로그램이나 그램이라는 단위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실감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 자료로 제시된 종이의 종류와 그 양을 보았을 땐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왔다. 한 장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컵의 물이,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욕조 한가득의 물이 든다고 한다. 무지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나름대로 종이를 아껴써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종이를 아낌으로 인해 물을 아끼고 전기를 아끼고 나무를 살리고 숲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유한 킴벌리 크리넥스 선전에 나오는 근사한 숲을 보며 '아 저런 환경이 우리에게 화장지를 주는구나'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저 환경을 해치라고 저 화장지를 사는구나'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4월 5일 식목일에 나무 심으러 가서 불을 내고 돌아오는 사람을 욕하긴 해 봤지만 종이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 역시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열대지구의 원시림이 베어지고 지구의 허파가 사라지는 것에 막연히 걱정하기만 했지 시베리아의 아한대림이 사라지는 것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나무농장이 숲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단일 수종으로 이루어진 나무가 생태계에 저렇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공부하며 살아왔고, 학교는 우리에게 저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무엇을 가르쳤단 말일까?  그토록 책을 사랑한다 부르짖던 내가 종이에 대해서는 어쩜 이렇게 무심할 수 있었던지 모르겠다. 이 얼마나 단순한 뇌구조인지...이제껏 종이에게 아니 나무와 숲에게 못 할 짓 한 것이 많아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필자와 별 다를 바 없이 우울한 심정으로 글을 읽던 내게 호주의 원주민 출신 '니콜 라이크로프트'의 말은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게 정말 기분이 좋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나 역시 기분 좋게 했다. 출판사를 상대로 재생용지를 쓰게 하여 점차적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고 숲을 살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를 짜릿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생용지로 출판된 해리포터가 살린 숲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전율이 일기까지 했다. 멀리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이렇게 흥분되는데 직접 그 일을 실천하고 그것으로 바뀌어지는 세상을 보는 그녀들의 기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할까. 힘없이 보이는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나아가다 보면 큰 물결이 되는 것을 또 한 번 목격한 셈이다. 한 권의 책만큼 한 사람의 힘도 크리라 믿는다.  

세상을 바꾸자 했으나 세상을 바꿀 수 없었고 사회를 바꾸자 했으나 사회를 바꿀 수 없었으며 가족을 바꾸자 했으나 가족을 바꿀 수 없던 사람이 마지막 숨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바뀌면 가족이 바뀌고 가족이 바뀌면 사회가 바뀌며 사회가 바뀌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지금 나의 생각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거창하고 근사한 방법으로 세상 모든 나무를 살릴 수는 없겠지만 나무를 위해, 숲을 위해 책에서 소개해 준 방법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직장에서 컵은 이미 사용하고 있으니 가방 안에 텀블러 하나를 넣어둬야겠다. 그리고 분리수거할 때에는 종이에 붙은 테이프나 이물질이 섞이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보지 않는 카달로그부터 끊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다. 이렇게 실천하다 보면 적어도 나로 인해 살릴 수 있는 나무가 있을 테고, 내 주변까지 동참한다면 작은 숲 하나는 너끈히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근사한 일이다. 지금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당신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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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 - 쇼펜하우어의 재발견
랄프 비너 지음, 최흥주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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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라니. 어쩜 요즘은 이렇게 제목도 잘 짓는지 모를 일이다. 길어서 지루해 보일 듯한 제목인데도 확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꺼려하는 철학이야기를 이렇게 구미 당기게 묘사할 수는 없으리라 싶다. 거기다 쇼펜하우어의 장난스러운 사진까지 매력을 보태는데 한 몫하고 있다. 요즘 나오는 철학서는 저마다 너무나 깊이있고 재미있고 거기다 쉽기까지 한지라 이 책에도 그런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책 서문에 번역하는 이에게 일침을 가한 아들의 소개를 보더라도 이 책에는 뭔가 재미있는 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라... 이 책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한다. "캬!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이번엔 철학서인거야?" 철학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그조차도 쇼펜하우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염세주의자'인 모양이다. 물론 그가 내뱉은 '캬~'라는 감탄사에 포함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여튼 지독히도 자신을 사랑한 쇼펜하우어는 여러 방면에서 독설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好, 不好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의견을 그 정도까지 뚜렷이 제시할 수 있을 만큼 다방면에 박학다식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에게 상처입은 이들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대단한 그의 모습이 나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삼키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두루뭉술한 기치 속에 나의 생각을 삼킨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겠는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정말 비극적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쇼펜하우어가 근사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p57  전체적이고 일반적으로 개관하여 단지 가장 중요한 특징들만을 놓고 보면 모든 개인의 삶은 항상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희극적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일상의 분망과 고통, 순간순간의 끊임없는 당혹, 한 주간의 희망과 걱정, 항상 장난칠 기회만을 노리는 우연으로 인해 매시간 일어나는 사고 등은 전부 희극적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다. 인생은 비극이란 그의 결론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지금 이순간만큼은 무릎을 치며 듣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쇼펜하우어의 말과 행동에 대한 한두 문장의 설명이 덧붙여진 채 진행되고 있는데 각각의 부분이 명쾌하기 그지없다. 망설임 없는 자의 언변은 자신감을 내비치기 마련이니 말이다. 모든 결론과 진리를 아는 것은 자신뿐이란 자만에 가득찬 그의 모습이 또 다른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의 그런 매력을 알아가는 중간중간 나의 가슴을 탁탁 막히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이건 원서의 잘못인지 번역의 잘못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탓만 하는 나의 독해력의 잘못인지 알 수가 없다. 

   
 

p62 그는 금전적인 이해관계를 폐지하라고 항상 요구했다.  

문학과 철학을 통해서는 돈을 벌 수 없도록 함으로써 그것들 자체를 중요시하는 사람들, 즉 그것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만이 그것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것들을 위해 매우 좋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길고 긴 한 문장 안에 그것이 자그마치 네 번이나 등장한다. 여기서 모든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문학과 철학'이다. 이 정도로 겹쳐진 그것들의 범람 속에서 서술어는 도대체 어느 주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이다. 이리하여 책을 읽는 내내 쇼펜하우어의 잔혹하리만큼 독한 촌철살인에 감탄하기보다 겹쳐지고 안긴 수많은 문장의 해독에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모든 문장이 그런 것도 아닌데 실컷 달리다가 한 번씩 걸리는 문장들은 나의 독서의욕을 저하시키기에 충분했다. 책을 읽긴 했는데 내용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글자를 읽은 듯한 이 기분. 문장을 적당히 자르고 이어서 읽기 쉽게 번역을 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이 글을 찬찬히 읽어봐야 하는데 선뜻 손이 갈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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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에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서울, 북촌에서 - 골목길에서 만난 삶, 사람
김유경 지음, 하지권 사진 / 민음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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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굽이굽이 들어간 곳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내 또래들에게조차 이렇게 아련한 기억이라면 요즘 세대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기억일 것이다. 굽이굽이 돌아 가던 미로같던 골목길은 숨바꼭질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집집마다 끼니 때가 되면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곳도 골목이었고, 친구 불러 손잡고 학교 가던 곳도 골목이었다. 그런 골목이 언제 이렇게 넓은 도로로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숨바꼭질하던 아이는 사라지고 이제는 잘 갖추어진 기성품과 같은 알록달록한 놀이터에서 너무나 세련된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아이들만 보인다. 된장 냄새 풍겨 오던 골목길의 정겨운 풍경 역시 사라지고 없다. 때가 되면 놀이터 앞에 멈춰 서는 자가용만이 바뀐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이 순식간에 고요해진 느낌만 무성한 어스름녘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사이 생소하다는 느낌도 없이 이런 풍광에 젖어들었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쫙쫙 뻗어있는 도로며 넓어진 대로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이젠 아이들과 손잡고 숨바꼭질을 하기보다는 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 더욱 많아져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 있을 때는 구질구질하다고 여겨졌던 좁디좁은 골목길이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나에게도 세월의 더께가 앉고 있는 모양이라고 나름 생각해 본다.

필자도 이런 마음에서 작업을 시작했던 것일까? ‘서울 북촌에서’란 글을 통해 필자는 서울 골목 구석구석을 훑어내고 있다. 기억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던 골목과 기와집, 궁궐터와 역사적인 사건을 장소를 통해 더듬어가는 그의 작업은 참으로 지난해 보인다. ‘5년의 저술, 20년의 취재, 그리고 600년의 이야기’란 책 선전 문구가 딱 알맞다 싶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한옥 동네의 정겨움이 어떻게 훼손되고 지켜졌는지, 그곳을 면면히 지켜가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이제는 마트라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쌀집과 떡집, 목욕탕이 이 책에서는 정다웁게 옛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간혹 차라도 마시러 갈 때 본 삼청동이 마냥 내 눈에는 이국적인 듯하면서도 전통적인 곳으로 느껴져 좋기만 했는데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그게 다가 아닌 듯하다. 그 모습은 서둘러 사라진 전통 속에 어설프게 생겨난 신식문물이 혼재되어 있는 불완전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전통에 대한 감식력이 없는 나는 그것을 그냥 훑어본 것에 그쳤던 것이다. 전통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개발만 외치다 시멘트 더미에 묻혀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야 조금 실감한다. 깨끗함을 가장하여 들어선 큼지막한 건물 뒤로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의숨결들이 사장되었던가! 그때 나는 도대체 무엇에 감탄하고 있었던가! 안타까움을 하소연해도 모자랄 판에 겉보기에 번드르르한 그 모습을 좋아했던 철없던 내 모습을 씁쓸하게 돌아본다. 대학 동기들과 적은 값에 술자리를 나누던 피맛골이 현재 저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숭례문이 불탄지 1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하루가 다르게 잊혀지고 있는 것들을 돌아볼 새도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첨단기기 속에서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갈수록 나에겐 여유 시간이 남아야 하건만 어찌 된 것이 갈수록 마음이 바쁘기만 하다. 첨단 장비가 벌어다 준 우리의 시간은 도대체 누가 도둑질해 간 것일까?

버스에서 지나치며 보았던 숭례문을 거쳐 종로에 다다르면 보였던 보신각 종이 좁은 틈새나마 늠름히 서 있는 것이 마냥 좋았었는데 어느 샌가 그곳에 발길이 잘 닿지 않게 되었다. 청계천이 복구되고, 광화문도 새 단장을 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마음은 이리 휑하기만 한 것일까? 전통을 복원한다는 기치가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어찌 본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러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멈춘듯이 서울에 자리잡고 있는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운형궁, 자수궁 등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과거의 발자취를 나는 몇 번이나 더듬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성돌이까지 시작하진 못하겠지만 예전에 돌아보다 관두었던 궁 탐방이나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아야겠다. 수 백 년 전에 우리의 조상이 더듬었던 길을 나 역시 더듬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모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면야 더욱 좋겠지만 잃어버린 것을 부여잡고 울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더 이상 훼손됨이 없도록 두 눈 부릅뜨고 우리의 문화를, 전통을 우리가 지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시멘트가 덕지덕지 엉겨붙은 문화재를 전통이랍시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야기를 읽다보니 괜스레 막걸리 한 사발 생각난다. 오늘 같은 날에는 나 역시 피맛골에 주저 앉아 생선 구이나 빈대떡을 안주 삼아 막걸리라도 한 사발 하면 좋을 듯 하다. 부디 이때 내 눈에 띄는 것이 인사동 ‘별다방’이 아니라 오래 된 ‘돌확’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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