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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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에게 학교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그곳에서 생활하는 학생과 교사들은 그 속에 있는 사람 나름으로, 그곳을 졸업한 사람은 또 그들 나름으로, 또한 그 속에 있는 사람과 엮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학부모들과 교직원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다른 제각각의 모습으로 학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던 과거세대를 제외하고 학교라는 곳을 거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다시피 할 것입니다.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무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그곳을 한 번은 거쳐가기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정치적 사안과 달리 교육 문제나 학교 문제가 화젯거리로 오를라치면 저마다 전문가가 되어 핏대를 세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거쳐간 곳인 만큼 그곳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들이 나름 다양한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들 학교만큼 세대가 다양할까요? 10대부터 20대, 30대까지, 하물며 60대까지 모두들 사각형의 상자 속에서 추억을 만들고, 기억을 만들고, 상처를 입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여섯 번째 사요코’라는 소설에서 ‘온다 리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실은 하나의 그릇이 되어 매년 사람들을 담았다가 쏟아내기를 반복한다고 말이지요. 늘 봐 왔던 똑같은 교실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어우러져 생활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결국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나토 가나에’는 학교에 대한 아주 흥미진진하고도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는 셈이네요. 
  

  여고생들의 추억이 서린 아련한 학교의 모습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얽힌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서글픈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은 읽는 내내 저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일본의 남다른 엽기적인 행적이라 치부하기엔 시절이 너무 흉흉한 요즈음이 더욱 실감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 속에 마음까지 더 스산해졌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에는 그닥 많은 인물이 등장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한 교사의 담담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초입인데도 불구하고 엄연히 사건의 경위와 범인까지 알려주는 1장의 내용은 사람을 섬뜩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그런데 책을 덮어버리게 하기보단 눈앞으로 책을 더 끌어당기게 만드는 것이 작가의 힘일 테지요. 특별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현란함이 있다기보다는 자분자분 이끌어가는 글의 전개가 사람의 손을 더욱 끈끈하게 잡아당긴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듯 싶습니다. 가해자들의 고백과 가해자 부모들의 고백들. 이젠 더이상 누가 누구의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도 모를 상황들까지 머리 속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렇기에 스포일러처럼 소설의 내용을 다 일러바친다고 해도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스릴감은 여전할 듯 하네요. 그게 작가의, 번역자의 역량이었겠지만요. 

  이번 소설을 읽고 ‘한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단순히 한 명의 범인이 정해져 있다면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는 범인이 아니니까, 나는 선한 편에 있으니까’라고 위안까지 얻을 수 있는데 범인을 양성한 사회를 고발할 즈음에는 도대체 저는 어디로 숨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죽어 마땅한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한 것은 결국 우리의 무관심이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더욱 실감하곤 합니다. 내 가족의 안전과 부귀를 위해 울타리를 튼튼히 할 수록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적개심은 더욱 커져만 갈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할 때가 지금인 것만 같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더욱 겉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제가 무엇부터 해야 할른지 모르겠네요. ‘슈야’와 ‘시모무라’들이 한 걸음 더 내딛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본다’라는 웃지 못할 속담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통하는, 서로 배려할 줄 아는 세상을 우리 모두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우리의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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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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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요즈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인 저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창은 바로 책이랍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들려주는 사람과 유익한 이야깃거리를 들려주는 사람들, 엉뚱한 이야깃거릴 들려주는 사람들, 모두모두 저에게는 세상과 통하는 창인 셈입니다. 그 중에서 황광우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미있고도 심오하면서도 유익하기 그지 없습니다. 철학콘서트를 읽었을 때 그 감동을 뭐라 표현해야 할른지요. 신기하게도 주위 사람들 중에는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어려운 이야기는 더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꾸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할수록 우린 그들을 뜬금없이 바라보는데 그 시선을 사람들은 존경이라는 말로 고착시켜 버린 모양입니다. 그런 면에서 황광우씨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쉬운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저렇게 거창한 사상들이 이렇게 쉽다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때 우리들의 시선은 하찮음일까요? 이게 바로 진정한 존경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쉬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요. 그런 의미에서 그가 훑어준 사상사는 읽기 참 좋았습니다.  철학이란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를 통해서 철학이 곧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보수적이라서 한 번 지어놓은 사유의 집을 부수고 새로운 사유의 집을 짓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이라고 한 그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런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라고 그는 말했지요.그래서 저 역시 그런 두려움을 견디어 보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런 저에게 황광우씨는 이번엔 사상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상 역시 철학자들의 생각인 만큼 겹치는 이야기도 있을 법 한데 어째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종플루에다 세종시 건설까지, 성폭행과 어린이 폭행까지 세상이 뒤숭숭한 요즈음 그의 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백성들이 가장 존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 이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운다. 좋은 제물을 준비하여 때를 어기지 않고 제사를 올렸는데도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사직도 갈아 치운다.(p155) 

 과거 맹자의 사상인데 불구하고 지금 역시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요? 천자는 백성의 마음을 얻은 사람임이 분명한데 요즘은 어찌 된 것이 백성이 천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려고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잘못 마음을 주다 보니 엉뚱한 천자가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닐까요? 모든 국회위원들은 국민을 위해, 국민만을 생각하여 정치를 한다고 하는데 정작 국민들은 나날이 힘들어지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요. 하긴 지금 상황에서는 정작 누가 백성이고 누가 천자인지도 모호할 때가 많기는 합니다. 모두들 국민을 위한 방책이라고 의견을 내놓기는 하는데 그 모양들이 제각각이니 말입니다. 황광우씨가 말하는 '대중이 가담하는 야바위'가 바로 이런 것일까요? 

공원 모퉁이에서 삼삼오오 모여 벌이는 야바위판은 그 사기성을 쉽게 간파할 수 있지만 국가권력이 앞장 서고, 수천만 대중이 가담하는 역사의 야바위는 그 진위를 가려내기가 참으로 힘들다.(p54) 

제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혹 야바위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과 이 세상을 조금 더 신중히 돌아보아야 할 때인 듯 합니다. 이러다가는 노자와 장자의 말처럼 옳고 그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혼돈에 빠질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너와 논쟁을 해서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그른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 삼자를 부른다면 누구에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른데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은데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되겠는가?(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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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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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한 권의 책이란다.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나는 단편 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장편소설보다는 대하소설을 선호하곤 한다. 사람의 다양한 굴곡을 이야기하기에는 단편은 너무 찰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처럼 찰나의 묘사에 매혹되어 한참을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단편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소설을 선택한 것은 오롯이 나의 실수 때문이었다. 당연히 장편이려니 생각한 나의 착각이 이 책을 사게 한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작가 '김연수'에 대한 믿음일 테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난 이전의 내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이 책을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다를 터이니 말이다. 
 
  나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라는 작품으로 작가 '김연수'를 처음 만났다. 그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들고 나는 역 앞 빵집이라는 배경에서 많은 군상을 바라보던 겉늙은 아이의 시선과, 추억은 항상 즐거운 쪽으로 예감은 항상 불길한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라던 그의 문장 정도가 전부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심 나는 다음에는 이 작가를 피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것은 책에 대한 막연한 나의 기대가 깨졌기 때문이리라. 물론 나보고 그와 같은 작품을 쓰라면 나는 한 자도 쓰지 못할 테지만 독자로만 여러 해를 살아온 나만의 안목으로는 그의 글이 나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김연수'를 나의 독서 목록에서 완전히 제명시키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은, 특히 작가들의 어제와 오늘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나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접한 책이 <여행할 권리>라는 책이었다. 너무나 많은 곳을 다니는 그의 삶이 부러웠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써내려간 그의 글이 사무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밤은 노래한다>라는 글과 이상문학 수상집에 실린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글까지. 내가 집어든 김연수의 작품은 그야말로 연타석 홈런이었다. 이제 두근두근해 하면서 그를 기다리게까지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난생 처음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을 예약 구매하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이 책이 누구에게 갈지 알지도 못하고 쓴 사인일 테지만 동그란 ‘ㄴ’ 받침으로 쓴 ‘이천구년’과 단호하게 꺾어진 듯하면서도 여지를 둔 각진 ‘ㄴ’이 들어간 ‘김연수’라는 이름에 혼자 미소까지 지어보았다. 다름 아닌 그의 글씨이기에... 서두가 길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에 대한 나의 감상평은 대만족이다. 각각의 단편들이 장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걸 보면 분명 그러하다. 작품 내내 흐르는 순간적인 사건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들, 남의 고통과 소통하는 순간 그 고통은 이미 이전의 고통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는 그의 말이, 크나 큰 불행 속에 허우거리다 다시 살겠다고 마음 먹는 것은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것이라는 소설 속 인물 ‘해피’의 전혀 해피하지 않은 말들이 내 마음 속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p27

고통을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고통을 피하려고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해피에게는 아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 건,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었다.

p179

나의 삶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또 다른 누군가도 봤으리라고 짐작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인지 깨닫게 됐다.
 
   

작가는 말한다. 나만의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받는 위로에 대해.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부여잡고 있는 마지막 위안이 아닐까 싶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제 정신이 아닌 한 여인이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죽은 아이를 부여잡고 울던 여인을 안타까이 지켜보던 이웃들은 그녀에게 근방에 이름난 성인(聖人)이 있다고 하니 거기 가서 도움을 청해 보라고 뀌띔해 준다. 이름난 성인이 말했다. 사람이 한 명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오면 방법을 알려주겠노라고. 그러자 이 여인은 모든 집을 돌아다니며 혹 누군가 죽은 사람이 있느냐고, 없다면 겨자씨를 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겨자씨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없다. 발 아프게 돌아다니며 그녀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다는 사실,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 역시 그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크게 깨우쳐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던가.-<티베트의 즐거운 지혜>에서 읽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라 적어 본다.- 이렇듯 고통이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망각한다. 나만의 고통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삶을 두렵게 만드는지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소통이 부재하는 현재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행복의 나라로 가자는 터무니 없는 선동이나 환타지가 아니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일 것이다. 그 통로에서 더러는 주저앉기도 하고 엉엉 울어보기도 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내가 이전에 느낀 그런 고통은 아닐 것이다. 

또 작가는 말한다.




   
 
p316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그래 이게 핵심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전제 조건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단언하기 전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즉,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만 우리도 비로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수줍게 고개를 들면서 말해봐야 한다. 나는 너를 잘 모른다고. 그렇기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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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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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처럼 바쁜 나날들이 없다 싶다. 집안 일과 회사일에 치여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도 읽고 싶은 책을 밀쳐둔 마음이란. 늘 그렇듯이 책을 사대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르질 못한다. 바쁜 순간순간을 보내면서도 자투리 시간을 내어 이번 달에 읽은 책이 벌써 십여 권. 세상엔 공짜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처절하게 드는 날들이다. 예전에 한 권씩 하던 알라딘 서평단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4기 알라딘을 신청했더니 덜커덕 되어버렸다. 소설을 주로 읽는 듯 싶어 이참에 인문서적을 읽어야지 싶어 '인문/사회' 부분을 신청했는데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일주일이 멀다 하고 두 권씩 배송 되어 오는 책들이 책상에 쌓이고 쌓이고 쌓였다. 거기다 독서모임까지 참여한 덕분에 과히 나의 책상은 책들의 천국이다. 직장동료들은 내가 책을 읽을 때마다 여유로워 보인다고 말을 하며 한가하다는 듯 나를 흘끔거리고 있으나 5분 10분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나의 독서는 그야 말로 처절하기만 하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과 읽는 책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위태위태하게 나아가는 나날들. 그래도 행복하기는 하다.^^ 여튼 서평 쓸 서적을 읽는 틈틈이 꽤 오랜 묵혀 둔 책을 끄집어 들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뜬금없이 왜 이 책을 그 많은 무더기 속에서 집어들었나 싶다가도 읽을 때가 된 것이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도 말하지 않던가!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이라고 말하는 일들도 곰곰 생각해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뜻밖의 일과 자주 마주치는 것은 그 일의 앞뒤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p40)

  두 돌도 채 안 된 어린 것을 재워두고 딱딱한 서평 서적 속에서 잠시라도 놓여나보자는 생각에서 집어든 책이 바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였다. 신경숙의 물 흐르듯 흐르는 문장력은 독서에 속도를 붙여줌은 물론 감동까지 주니 내 맘을 쉬어가는 독서로는 그만이다 싶었다. 역시나 나의 추측이 맞았다. 어제 밤에 집어든 책이 결국 지금에야 내 손에서 놓여났으니 말이다. 한창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고 있던 책을 밀쳐둔 것은 유행에 편승하여 책을 읽고 싶지 않은 나의 모난 성격 때문이었지 싶다. 여튼 책을 읽는 내내 맘이 뭉클하고 아팠다. 신기하게도 엄마들의 모습은 니네 엄마 우리 엄마 없이 똑같다 싶었기 때문이다. 신경숙은 객관화된 시선을 통해 자신의 엄마를 찾아간다. 가족 누구도 몰랐던 엄마의 모습을 딸의 입장에서 추억하고, 남편의 입장에서 돌이켜 보며, 아들의 입장에서 반성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엄마는 엄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박소녀'라는 인생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도 늦게 깨닫는가 말이다. 

  대학 입학 3일 전. 덜커덕 정말로 덜커덕 아빠의 죽음을 접했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우리 자신의 부모들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집을 떠나 서울로 대학을 온 덕분에 아빠의 죽음을 더더욱 실감하지 못하고 그곳에 두 분 모두 있겠다 생각하며 대학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아빠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공허했고 허탈했다. 그럴수록 엄마에게 잘 해야지 다짐하곤 했는데 나 역시 전화 수화기만 붙들면 엄마에게 큰소리가 나가고 투정이 나가기 십상이었다. 소설 읽는 내내 나는 주인공에게 굳이 나의 감정을 이입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나는 그냥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밥상머리에서 숟가락을 세게 내려 놓으며 대들던 기억들, 대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화난 표를 냈던 기억들. 어쩜 하나같이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기억들 뿐인 것인지. 나는 어떻게 해야 엄마가 서운하고 속상할 지 어디서 배우고나 온 것처럼 엄마 속을 뒤집었던 것이다. 그러한 일들을 알고도 하고 모르고도 했으니 나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게다가 어디를 가나 나의 인물을 자랑해대는 엄마의 촌스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내가 보기엔 너무나 평범하고 모자라기까지 한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얼마나 뿌듯해 하는지 난 민망할 따름이다. 그런 내가 서서히 엄마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인 듯 싶다. 힘들게 아가를 낳고 나서 이제 서서히 우리 엄마를 돌아본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제 나도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난 여전히 딸이기만 한 것이다. 친정엄마는 죄인이라더니 키워서 시집 보내놨더니 덜커덕 아가를 낳아 놓고 또 엄마한테 맡겨버린 대책없는 딸. 나는 그런 딸이다. 그래도 그런 철없고 무정한 딸에게 엄마는 말하셨다.  

"내가 니 나 노코 지대로 몬 키아서 미안시러븐데 니 새끼 키아감서 그거 지대로 함 해봐야 되지 싶다.  아 하나 키우는 기 내가 세상에 보답하는 길 아이겠나. 그라고 야 키우는 기 니 다시 키우는 거 아이겠나.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 될낀데... "  

세상에 보답할 것이 있을 정도로 세상 덕을 보고 살아오지 않은 엄마가 내뱉는 이러한 말을 들으며 나는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주고 받는 셈을 철저히 하려는 나를 보며  '우물에 침 뱉아도 돌아와서 먹을 일 있대이. 절대 남한테 함부로 하지 말거래이. 그라고 몇 개 떠 빼앗을라카는 거보단 니가 손해보고 사는 기 훨씬 나은 기라.'라고 말하는 운명론자인 우리 엄마는 나에겐 생불이나 다름 없이 보이곤 한다. 그러한 너그러운 엄마 밑에서 나는 그 많은 세월 동안 무엇을 했던가. 그래서 엄마랑 이것저것 뒤늦게 시도를 해 본다. 모르면 그냥 잊으라고 퉁명스럽게 얘기하는 대신 핸드폰 문자 메시지 보내는 법도 알려드리고 컴퓨터 켜는 것도 알려드려본다. 한 달에 한 두 번 영화도 보러간다. 수도권을 돌고 돌다 지방에 도착한 영사기에서 돌아가던 필름으로 보던 영화는 화질이 그야말로 꽝이었다고 말하는 엄마가 극장 들어가더니 엄청 깜짝 놀라신다. 근 30년 만에 영화를 본다는 우리 엄마. 영화 한 편 관람비가 얼마인지 듣고서는 극장에는 안 가도 된다는 엄마에게 초대권이 왔다며 거짓말을 하고 극장에 다녀왔다. 돈도 들고 사람도 많아 정신없는 극장 같은 곳에 갈 것 없다며 집에서 텔레비전만 봐도 충분하다고 하더니 극장을을 다녀온 날부터 엄마의 얼굴에 웃음기가 헤붓하다. 언니에게도 전화를 해서 영화보고 왔다고 자랑이 대단하시다. 막내 덕에 호강을 한다면서. 그때 엄마가 처음 본 영화가 '아내가 결혼했다'였던가? 남자가 아닌 여자가 다른 남자를 선택할 수도 있는 세상을 보며 '세상이 망했구나'라며 탄식할 줄 알았던 엄마가 좋은 세상이 됐다면서 속이 시원하다고까지 말했을 땐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엄마도 엄마가 아니라 여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엄마가 좋아하실수록 내가 이제껏 이런 사소한 것조차 엄말 위해 한 게 없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플수록 나의 목소리를 왜 이리 투박하고 화난 듯 나오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철없는 딸임에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려줄 때마다 잊어버리는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을 엄마에게 또 한 번 알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 '아이리스'에 나오는 그 예쁜 '김태희'를 보면서도 "자보다 니가 더 이뿌구마."라는 턱없는 소리를 하실 때도 이젠 짜증내지 말고 "엄마가 오죽이나 예쁘게 낳아줬어야지."라고 곰살맞게 대꾸해야겠다. 분명 엄마 눈에는 내가 그리 보이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데 어째 난 나의 딸을 그렇게 볼 자신이 없는 것은 왜일까? 다음 달에는 엄마랑 무슨 영화를 보러 갈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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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군사편
탕민 엮음, 이화진 옮김 / 시그마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 둘 만한 문장들은 표시를 해 뒀다가 공책에 옮겨적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설의 한 구절이기도 했고, 시의 한 행이기도 했다. 경제서적도 예외없이 기억해 둘 만한 문장이다 싶으면 옮겨다 적었다. 어떤 책에는 한 문장이 아니라 글 전체를 옮겨적고 싶은 글이 있어 그나마 추리고 추려서 몇 장으로 골라내기도 했고, 어떤 책은 그냥 잡지처럼 읽어가며 허허 웃긴 했으나 마음을 헤집는 듯한 문장이 전혀 없어 서운해 하기도 했다. 아마 내가 기억하고자 했던 문장은 내 마음 속의 생각을 꼭 찝은 듯이 써 내려간 문장이었거나, 내가 말하고팠으나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이었기에 삼킬 수밖에 없었던 반가운 문장들이었을 테다. 차마 책에 직접 줄을 치거나 메모하지 못하는 소심증 때문에 다른 곳에 옮겨 적어본 것이리라. 그런 발췌 작업을 하는 장소는 참으로 다양했다. 버스 안에서이기도 했고 직장에서이기도 했고, 엎드린 방바닥이기도 했기에 장소에 따라 다른 공간에 적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론 옮겨 적는 동안 팔이 너무나 아파 나중에 해야지 미뤄두고 놓친 구절도 꽤 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저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해야지라고 마음 먹었는데 이제 너무 방대한 양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 모두 찾아 모으기도 버거워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내가 발췌하고픈, 기억하고픈 문장이 몇 개나 있을까?

난 이 책을 읽는 동안 한 문장도 가슴에 새겨두질 못했다. 글이 재미가 없었다거나 문장이 형편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글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군사편)’이란 책 제목 그대로 이 글에는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들에 얽힌 미스터리가 진열되어 있다. 우리가 궁금해 하며 영화에서나 보았던 스파이들의 일생을 조목조목 파헤쳐 주기도 했고-실제 007주인공의 모델이라던가, 이름만 무성한 마타하리의 실체-,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면면을 살펴봐 주기도 했다. 게다가 진시황릉의 거대함과 칭기스칸의 광대한 역사를 짚어내기도 했다. 처음 책장을 들춰보았을 땐 ‘아~ 이거 재미있겠는 걸?’이란 생각이었다. 술술 흐르듯이 읽히는 쉬운 문장 덕분에 ‘군사편’이란 이 책에 대한 부담 역시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흥미로운 역사를 다양하게 다루어 준 덕분에 초반을 읽어갈 즈음에는 이 책의 시리즈들-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전쟁편),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영웅편)-도 찾아서 읽어야지.’라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나의 흥미는 시들해졌다. 첫인상만 믿고 반해버린 사람에 대한 실망이라고나 할까? 흥미진진할 수 있는 사건들과 군사무기들이 다양하게 제시된 것은 나의 상식에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나 전체적으로 뭔가 미진한 느낌을 들게 했다. 과거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이상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역할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글의 저자도 그러한 사료를 통해 사건을 파헤치고 나름 분석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우리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꼭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와 같은 류의 문장으로 끝맺곤 했다. 결말을 단정적으로 맺지 않는 만큼 우리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말이 반복될수록 나의 흥미는 그에 반비례했다.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면서 마지막 부분은 공란으로 남겨둔 듯한 느낌? “너 이거 궁금하지? 내가 알려줄까?”라고 말을 걸며 호기심을 한껏 부풀리더니 정작 대답을 하다가는 “내가 생각하기는 그렇다고.”라고 말해 버리는 얄미움. 그게 반복되다 보니 이야기 전체에 대해 심드렁해진 기분이다.

난 책을 읽고 난 후 책에 대한 등급을 세 가지 정도로 나누고 있다. 읽지 않으면 후회할 책, 읽으면 좋은 책, 뭐 그냥저냥인 책. 그런데 이 책은 그냥저냥인 책과 읽으면 좋은 책 사이에서 어디 두는 게 좋을지 나를 고민스럽게 한다. 그래도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을 마련해 준 셈이니 ‘읽으면 좋은 책’ 정도가 적당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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