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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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가 선택한 일련의 독서 목록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간혹 생기는 여유 시간에 들고 다니는 책자들이 왜 이리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읽고 난 책을 쑤셔박아두지 않고 나의 감동을 직장 동료에게 나눠주는 중입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로 집어든 책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참고로 처음이 '헌법의 풍경(김두식)'-검찰 성접대 파문이 불거진 지금 마침맞게 이 책을 읽게 되었지 뭡니까-이고 두 번째가 '인문 고전 강의(강유원)-전 제 책장이 불에 타버린다면 이 책을 꼭 챙겨서 나갈 겁니다-', 세 번째가 '이런 사랑(이언 매큐언)', 이제 '지금 이 순간의 역사(한홍구)-서두부터 사람의 심금을 울리려 한답니다-'를 집어들었습니다. 새로 접하는 책들의 매력이 좀 덜해야 이전에 읽었던 책 내용을 반추해 보기도 하고, 서평도 쓰고 할 터인데 잡아드는 족족의 책이 다 마음에 드니 이를 어째야 할른지.. 일상의 고통에서 헤매다가도 책을 들고 보면 모든 게 잊혀지고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보니 책과의 사랑을 멈추기엔 늦은 게 확실해 보입니다. 

 이언 매큐언이란 이름은 화장실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장소가 좀 그렇지요? 그래도 집중이 가장 잘 되는 장소란 것은 모두들 동감하실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책자를 발견했습니다. 작가들이 추천하는 책이 소개된 간략한 책자였는데 그 속에서 조경란과 신경숙이 '체실 비치에서(이언 매큐언)'란 책을 추천했더군요. 두 명의 작가가 공통적으로 추천할 만한 책은 도대체 어떤 책일까 싶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게 기억이 납니다. 여튼 그 책을 읽고 한 순간에 대한 묘사가 저리도 처절할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1초나 2초 정도에 해당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을 너무나 상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했더랬죠.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순간의 일에 대해 읽었던 기억 때문인지 이 책 역시 그런 것일 거라 미리 짐작도 해 보면서요.  그런데 그런 저의 짐작이 일부는 맞고 일부분은 틀리기도 한 책이 바로 이 책 '이런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우린 이 책을 쓴 이가 '이언 매큐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화악 빨아들일 듯 진행되는 섬세한 이야기의 파편들. 시작 부분을 읽다 보면 우리들은 어느 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피크닉 장소에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관객으로서 아니 등장인물 중 관찰자로서 그 모습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달콤한 사랑이 충만할 것 같은 피크닉 장소에서 우연히 바라본 애드벌룬 추락사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애드벌룬 추락사고를 목격하다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주인공들의 삶에 우리 모두 연루되어 버리지요. 이 부분을 읽고서야 '아 그래서 책 앞표지가 저런 모습이었군.'이라고 무릎을 치며 삽화가에게 찬사도 보내게 됩니다. 때로는 추락하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구조자에서 비겁한 소시민으로 함께 전락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한 순간도 그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버리지요. 이게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애드벌룬은 사건의 중심에서 놓여나고 그로 파생된 순간의 마주침들이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곤 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간의 눈마주침이나 순간의 선택이 다른 사건의 시작점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잠시 '이게 뭐야?'라는 황당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건의 추이를 보면서 인간은 정말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일어나는 일들의 진실성 여부보다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믿어주고 들어주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정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p254) 존재들이거든요. 

여기서 제가 이 소설의 내용을 더욱 진행시키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지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책을 읽고 '이런 사랑'도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되겠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규격화된 사랑보다는 비규격화된 사랑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자행된 무수한 폭력을 목격하면서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기도 했구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하고 있는 사랑과, 받고 있는 사랑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정의로 내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화두. 인류의 영원한 주제였고, 또한 영원한 주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답이 없다는 점일 테지요. 도대체 '사랑'은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하네요. 그래서 임병수가 이렇게 노래했던 가 봅니다.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너에게만은 쓰고 싶지 않지만은 달리 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때는 유치하게 들렸던 이 말이 왜 이렇게 사무치는지. 많은 사랑 중에서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읽고 싶다면 이 책도 괜찮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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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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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4월. 성큼 다가온 봄기운을 느껴야 할 시간인데 이제야 봄이 슬슬 다가오는가 싶은 기분이 든다. 미친 개나리라는 욕설을 감내하며 2월에 꽃을 피우던 개나리(따지고 보면 미친 건 개나리가 아니고 날씨였고, 날씨가 미친 것은 결국 인간들이 미친 때문이겠지?)들도 3월이 다 되어서야 피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를 이상기온 때문이라며 투덜댔고, 또 어떤 이는 지구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증거라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일이 인간들이 벌여온 일에 대한 죗값이라며 반성했다. 여튼 4월 하순이 되어 드디어 솜옷을 살짝 벗어두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어느 새 벚꽃은 지기 시작했고 개나리 역시 노란꽃보다는 연두잎이 더 무성하게 보이고 있다. 봄처녀는 아니건만 어딘가로 떠나고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요즘 손에 잡히는 책이 모두 여행기이다. 기억에도 까마득한 체코 여행을 떠올려 보려고 집어들었던 '윤미나'의 '굴라쉬 브런치'도 가슴을 마구 요동치게 만들더니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 또한 술렁이는 가슴에 여행가고픈 욕구를 충동질하고 있다. 가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보니 더욱 가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고나 할까? '빌 브라이슨'은 여행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p383  나는 흐르는 물을(호텔 화장실에서 샤워하려다 녹물)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그러게 말이다. 편안하고 일상적인 이 모든 안락함을 뒤로 하고 우리는 왜 굳이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답답한 지구를 벗어나고 싶으나 그게 잘 안되니까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도 벚어나려고 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은 모두 지금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닌가라던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지루하고 흥미 없어 보이는 일상이 지닌 커다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우린 간혹 어리석게도 먼길을 돌아오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면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꼭 필요한 요소 같아 보이기도 한다. 간혹 어리석음으로 인해 얻는 여행의 기억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떠날 수 있을까라는 망설임, 떠나기 전의 설렘, 떠난 후의 아련함,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감정들이다. 브라이슨 덕분에 2000년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과거의 유럽을 대신 돌아볼 수 있었다. '나를 부르는 숲'에서 받은 감동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 역시 그의 유쾌한 글에 담김 기발한 생각과 행동 덕분에 웃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숲'에 대한 감동이 너무나 컸던 관계로 이번에는 별 하나 반 정도는 빼고프다. 그나 별이 1/2이 없는 관계로 하나 반올림 하여 별 4개 준다. 왜냐구? 빌 브라이슨의 글맛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필요가 있으니까. 원서로 읽을 능력이 된다면 얼마나 더 유쾌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다. 망할 영어실력 같으니라구...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얄밉게 나온 봄햇살을 바라보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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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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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과의 만남이 또 지금에 연이 닿았다. 한가득 쌓아둔 책 속에서 끄집어 낸 책이 이번에는 이 책이다. 그리하여 책 표지가 찢겨 있었다는 사실도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발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이제 책의 외피에도 조금은 무던해진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창 베스트 셀러의 반령에 올라있을 때는 무슨 고집인지 도통 손이 안 가더니 이제야 읽을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 덕분에 개정판을 살 수 있었다면 다행인 것일까? 여튼 간간히 접해 오던 고미숙의 입담은 참으로 말맛을 말맛답게 느껴지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이 저자의 구어체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어려운 말을 유쾌하게 비틀어 버리는 그녀의 화법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리하여 '임꺽정' 이야기 후로 그녀의 다른 저서들도 들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하 '열하일기'로 부르겠다)'이라는 책에는 다소 어려운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나름 부록을 통해 용어를 풀이해 주긴 하였으나 '봉상스'의 의미가 외국어 욕설을 입에 담았을 때처럼 몸에 와닿지가 않는다. 다만, 나름 국문학과를 졸업했다고 하면서도 읽어본 적 없는 '열하일기'를 그녀 덕분에 다 느즈막히 훑어보기라도 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길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 주류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살아갔던 연암의 유쾌하고도 고독한 모습이 참으로 부럽기 그지없다. 얼마만큼의 내공이 쌓여야 다른 이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인지 나에겐 그 경지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연암의 표현을 빌자면 한낱 먼지 벌레에 불과한 나의 삶을 나역시 머리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으니 진정 머리와 가슴의 거리는 무한하다 하겠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 쯤일까? '산장과 심연은 하나다'라고 말한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 산 입구에는 와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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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48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2. 진격의 두별! -다산과 연암 가족관계 파헤쳐 보기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3-06-18 12:13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완전정복 가이드 1탄] 다산과 연암, 그들의 가족관계 18세기 조선에 나타난 두 거성, 다산과 연암. 이 두 개의 별을 둘러싼 또다른 크고 작은 별들과의 관계를 파헤쳐 봅니다. 오늘은 가족관계편입니다! 다산의 가족관계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산. 다산의 아버님은 장가를 세 번 드셨습니다(당시 상황으로는 뭐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인에게서는 약현을 낳았고, 두번째 부인인 다산..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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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간이 나오면 읽고 싶어 못 견디는 성질을 가진 독자입니다. 그래서 늘 책 읽는 속도가 책을 구입하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곤 합니다. 구입한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 다음 책을 사자고 마음먹어 보지만 그 결심은 번번히 실패하곤 맙니다. 왜냐 하면 신간을 사는 족족 지난 번에 놓치고 간 옛날 책 역시 구입하기 때문이지요. 가득가득 쌓여있는 책을 보면 한숨이 나오기보다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한 동안 이 버릇은 고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읽고 싶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마구마구 담다 우연히 발견한 책입니다. 책값이 만만치 않은 저에게 반값 세일이라는 매력적인 광고문구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죠. 물론 가격만 보고 살 수는 없기에 리뷰 역시 참고했습니다. 꽤나 많은 이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기에 그 열기에 동참하고자 저 역시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저의 평가는 솔직히 추천한 님들이 받은 감동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첫 부분은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분위기로 저를 사로잡았으나 기대가 컸던 탓인지 잊지 못할 목록에 넣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독자로 살아가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취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영 꽝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서평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결론은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더라면 더욱 재미있었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소립니다. 게다가 가슴 뭉클한 등장 인물들의 대화는 한동안 쉬이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이 이야기는 책을 통해 성장하는 ‘다니엘’이라는 한 소년의 성장기입니다. 책의 저자와 주인공의 삶이 묘하게 겹치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환타지 소설 같기도 한 몽환적인 느낌과 추리소설 같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첫 장면은 ‘다니엘’의 아버지 ‘샘페레’가 자신의 아들을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흥미롭고도 매력적인 장소에 데려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샘페레는 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권p14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있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사고 있지. 가게에서 우리는 책들을 사고 팔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주인 없는 책을 읽고 있는 나로서는 책이, 서점이, 도서관이 가진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구절이었습니다.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한 요즘의 책들이, 모두 인정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나라에는 경험과 지혜가 가득한 노인이 한 분 돌아가시는 것은 도서관이 하나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과 책의 의미가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지는 요즘, 우리가 되새겨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에서 고른 책 한 권이 결국 다니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람과의 만남이든 책과의 만남이든 다른 세계가 만난다는 사실은 정말 굉장한 일인 모양입니다.

자식의 손을 잡고 책을 골라주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부모, 어떤가요? 정말 책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요? 너도나도 ‘부자 아빠 되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너도나도 ‘부자 아빠 찾기’에 혈안이 된 이 시대에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샘페레처럼 ‘좋은 부모 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은 혹시 좋은 부모의 모습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이들을 위해 철학자처럼 심오한 사상을 가지고 있고, 사회학자처럼 냉철한 생각을 가진 ‘페르민’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1권p298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덧붙여 대한민국 1%가 되기 위해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에게 자본주의의 맹점을 콕 찝어준 부분은 명쾌하다 못해 가슴이 아리게까지 만듭니다.

   
 

1권 p319

“그래, 때때로 이런 명문 학교들은 정원사나 구두닦이의 아이들에게 한두 개의 장학금을 제공한단다. 단지 자기들의 훌륭한 정신과 기독교적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야.” 페르민이 말했다. “가난한 이들이 자기들을 해코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부자들을 본받고 싶도록 만드는 거지. 그것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독인데…….”

 
   

 

이렇게도 현명한 남자 ‘페르민’은 주인공 ‘다니엘’에게 여자를 대하는 방법 또한 너무나도 명쾌(?)하게 들려줍니다.

   
 

1권 p214

여자 엉덩이에 손을 대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여자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얼뜨기들이 있지. 초보들이야. 여자의 마음은 속임수를 쓰는 남자의 버릇없는 정신에 도전하는 섬세한 미로지. 만일 네가 진정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 여자처럼 생각해야 돼.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얻는 게 우선이지. 나머지 것들, 즉 사람으로 하여금 감각과 미덕을 잃게 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장은 보너스로 오는 거야.

 
   

 

이는 비단 남자들이 여자들을 사냥할 때만 적용되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만은 적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저 구절을 꼭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자식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식들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고, 부모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부모처럼, 친구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친구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은 외면한 채,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방만 소유하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살이 아무리 복잡해졌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갈등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부대껴 일어나는 것이고 보면은 저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진리를 실천할 수만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제 사회에 나와 조직 생활에 하면서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상을 가지고 꿈을 꾸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 뼈져리게 느끼는 요즈음 이상하게도 원망의 화살을 사회가 아닌 자신에게 쏟아 붓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자기를 할퀴는 일이 얼마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무익한 일인지 알면서도 곧잘 자책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페르민이 다니엘에게 들려준 이 말이 꼭 나를 위한 말같이 들렸습니다.

   
 

2권 p135

“비웃는 게 아냐, 다니엘. 네가 자책하는 걸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누구라도 네가 힘들 거라고 말할 거야. 넌 아무런 잘못도 안 했어. 인생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질책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단다.”

 
   

 

이 말을 듣고 있으니 인생은 자책하지 않아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니 이왕이면 나를 보듬어주고, 주위 사람들 위로해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꿈만 꾸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꿈마저 없다면 삶은 더욱 초라해지고 삭막해질 것임을 이제야 알 듯도 합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작가 훌리안은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작가들이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라면 독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책을 읽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슴에 절절한 명작으로 기억되진 않을지라도 책 곳곳에 나온 대사들만으로도 오래 기억될 작품일 듯 합니다. 등장 인물들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다들 한 번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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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 책과 사람, 그리고 맑고 서늘한 그 사유의 발자취
김풍기 지음 / 푸르메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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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분재와 책장 위에 앉은 매 한 마리, 그리고 차 한 잔과 책장이 놓여진 책 앞표지는 그야말로 고즈넉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느낌입니다.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읽을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뭔가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이 책을 대하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한 눈에 알아보는 것도 내공이라면 내공일까요? 조선 지식인들의 서가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이러한 제목과 표지에 둘러쌓인 그 속절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구입하자마자 열어젖혀 읽지 않고 몇 달 간 묵혀두었습니다. 아직은 내가 이 책을 맞이할 준비가 아니되었던 게지요. 그리하여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 책을 만난 것이 이즈음입니다.  

김풍기 교수의 잔잔한 글은 햇살 비치는 창가가 놓여진 도서관에서 가까운 지인에게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름만으로 들어왔던 <전등신화>와 <기재기이>의 이야기들. 줄거리보다는 그 책들이 전해진 내력과 그 책 속에 담긴 작가들의 이야기가 더욱 와 닿았습니다. 여름만 되면 덮어놓고 오싹한 귀신 이야기를 찾던 나에게 귀신 이야기가 곧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임을 작가는 이리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p34  

귀신은 현실을 멋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물異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존재다. 이것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전혀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귀신을 통해서 인간을 말하려는 것, 죽은 자를 내세워 살아 있는 자를 말하려는 것, 그것이 귀신 이야기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춘향전>을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쓴 한문소설인 <수산 광한루기>에는 '평비'의 매력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댓글'로 대체할 만한 이러한 '평비'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듯합니다. 시간이 있다면 이 평비의 묘미를 함뿍 느끼고 싶을 정도니까요.

더불어, <서유기>를 읽으며 인생길에 대한 단상을 적어놓은 부분에서는 무릎을 치기도 했습니다.

   
 

p81 

~불현듯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생길이 바로 삼장법사가 걸었던 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힘들고 어렵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요괴들을 만나는가. 

내게 고통을 주는 이들이 내 인생길에서 만나는 요괴들이라면,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요괴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재단하고, 상대방을 요괴로 몰아부치는 세상에서 나 자신을 살풋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구절이더군요.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만나는 수많은 요괴 못지 않은 요괴들이 버글거리는 세상이라며 소리높여 불평하곤 했는데 그 많은 요괴 속에 나 또한 속할 수 도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셈입니다.(뜨끔)

그의 말처럼 인생에도 매뉴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순간순간 예고 없이 닥치는 세파를 헤쳐가는 매뉴얼과 어이없이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 댈 경우에 도움이 되는 매뉴얼이 있다면 모두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조금은 가벼워 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덧붙인 말처럼 매뉴얼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공을 쌓아야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을 쌓게 해 준 셈입니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 거리는 책의 소개로 알게 된 이 책과의 만남은 3월 나의 독서기에서 흐뭇한 일입니다.(왠지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라는 책의 분위기가 살풋 느껴지는 책이랄까? 물론 이 책도 아주 좋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매뉴얼은 아니더라도 좋은 책을 접하는 매뉴얼은 만들어 질 수 있지 싶네요. 혹 나의 소개로 인해 이 책이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매뉴얼이 된다면 더없는 영광일 듯합니다.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은 3월에 책을 읽고 느낀 환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 여기에 한 줄 남겨 보고 떠납니다. 다들 좋은 3월 되시길.... 

 오타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기억이 아니 나고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322쪽 둘째 줄'대감을'은 '대감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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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2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
담아갈게요. 화사한 봄날 맞이하시길요.

sokdagi 2010-04-29 16: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댓글이 넘 늦었네요. 화사한 봄날은 사라지고 스산한 봄날이 여름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님도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