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천둥의 시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피와 천둥의 시대 -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
햄프턴 시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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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뭔가 모를 뿌듯함이 밀려든다.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 낸 뿌듯함이랄까? 처음엔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더니 읽고 나니 읽을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저런 대작을 그냥 지나쳤을 거라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처음 들추었을 때에는 내용에 대한 궁금함과 기대로 살짝 두근거리기도 했는데 막상 페이지를 넘길수록 무수히 등장하는 따옴표와 주석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초반에는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살짝 실망도 하고, 게다가 내용 자체가 지루하기도 해서 책을 덮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에서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따옴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기에 바빴다. 그러다 속단은 금물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불필요한 주석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꾸준히 읽어나갔다. 100페이지가 넘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이야기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고 조금 더 책 속으로 몸을 들이밀게 되었다.  

 햄튼 사이즈가 쓴 이 책은 '키츠 카튼'이라는 미국 서부 시대 영웅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그와 얽힌 북아메리카의 영토전쟁, 그 속에서 사라져간 인디언들의 비참한 역사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미국의 광활한 영토 확장을 위해 초인적인 힘과 기지를 발휘한 인물을 미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건조하고 담담하게 써 내려간 한 편의 서사시라고나 할까? 그런데 담담한 필치와 과장없는 말투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욱 '키츠 카튼'을 멋진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키츠 카튼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이야기 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나바호'족이 등장한다. 다양한 인디언 무리 속에 단연 압권이라 할 만큼 웅장하고 거대하고 신비롭게 등장하는 나바호. 그들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다. 네 개의 산봉우리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하는 나바호에게 미국의 영토 장 정책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미국의 발전을 방해하는 걸림돌인 양 여겨지고, 야만인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역사들은 백인과 서구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였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일깨워 주는 책이었다. 미국이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부족들, 인디언들은 그들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꾸며 살아간다. 특히 나바호족에 대한 묘사를 봤을 때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듯 하다.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여성들의 삶과 4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부여까지, 그들의 삶을 미개하다고만 할 수 없는 모습을 저자는 곳곳에서 서술하고 있다.  

   
 

p181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나바호 여성들은 아메리칸 인디언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권력을 가졌다. 나바호 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 몇몇은 여성이다. 자비심 많은 가모장 '변하는 여인'이나 현명하고 나이 많은 은둔자이며 사람들에게 베 짜는 법을 가르친 '거미 여인' 등. 나바호들은 모계사회이며 외가 거주제로 산다. 어머니들을 따라 혈통이 이어지며 결혼하면 남편이 처가에 와서 산다. 여자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가정 경제를 꾸렸다. 아이들에게도 재산이 있었고(아이 몫의 가축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결정을 내릴 때 아이들의 의견도 들었다. 노예(습격 때 잡아온 여자와 아이들)도 순수 나바호와 똑같은 권리를 가진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세계 어디보다 너그럽고 관대한 사회라고 자랑하는 이주민들의 나라 미국사회에 비추어 봐도 하나도 하등할 것 없는 사회라는 것을 이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오히려 평등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무수한 전쟁을 통해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강제이주시키면서 미국의 영광만을 위해 인디언들을 장기판의 말인 양 취급했던 군장성들, 즉 미국의 태도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보스케레돈도로 강제이주 당한 채 핍박받고 가난에 시달리던 메스칼레로 추장 카데테가 존 크레모니 대위와 나눈 대화는 현재의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p598 우리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당신들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일합니다. 어른이 되면 큰 집도 짓고 큰 마을도 세우고 그런 큰일을 하지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이루고 난 다음에 그대로 남겨두고 죽습니다. 우리는 그런 걸 노예살이라고 봅니다. 옹알이를 할 대부터 죽을 때까지 노예 신세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멕시코인들이나 다른 이들이 우리를 대신해 일하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을 것요. 고작해야 당신네들처럼 되는 법밖에는 배우지 못할 테니.   
   

노예살이라. 현재에 충실하기보다 더 나은(물질적으로 풍족한) 미래를 위해 달리기만 하는 문명인들의 문제점을 꼬집은 말이 아닐 수 없다. 고작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살고 싶지 않다라니.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일침인가. 물론 이 말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더 많겠지만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옷을 입는다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살아가는 그들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겉치레에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미개하다거나 불쌍하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오만임에 틀림없다. 이 이야기는 나라와 나라,민족과 민족에 국한되는 이야기이기보다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 사람의 시선이 볼 수 있는 모습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 책은 독단적인 미국의 행위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과 부족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 책 앞부분에 쓰인 무수한 찬사가 과장이나 거짓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감상을 느끼려면 적어도 100페이지는 넘겨야 한다는 것을 다른 독자들에게 조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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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0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인디언의 역사야 슬프긴 하지만,어찌보며 부족단위로 서로 반목만 하던 그네들의 잘못도 크다고 할수 있지요.
sokdagi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sokdagi 2010-01-04 15:4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ew 다기능/다용도 수납공간 [에이포인트]/멀티박스/모니터선반/모니터받침대/키보드수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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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도 않고 하나 사 봤는데 넘 좋아요. 제 것만 샀다고 남편이 뭐라고 하네요. 그래서 하나 더 주문하려구요. 책상이 좀 깔끔해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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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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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0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 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내가 이 소설에서 기억하는 문장은 이 정도이다. 상처받은 자의 감정을 저리도 적나라하게 표현한 문장. 이런 문장은 겪어보지 않은 자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물론 저 감정을 경험한 자만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자들이 더욱 오롯이 이 묘사를 가슴으로 음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을 읽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온다 리쿠'의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묘사되어 있던 '애정과 증오'의 차이점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다. 애정이 따스한 햇살이라면 증오는 이글이글 타는 숯이라고 했던가?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숯불이 시시각각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고 그녀는 말했더었다. 여튼 다시 이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 이야기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심리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름답게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읽히는 여러 가지 감정의 군상들은 결코 청소년 문제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학교라고 해도 아이들만 있는 곳이 아닐진대 사람사는 일이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난 이 글을 읽으며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읽기는 좀 지루했다는 뜻이고 살짝 실망했다는 뜻도 포함하는 바이다. 작가의 전작 '완득이' 역시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건과 그에 따른 교훈이 적절한 양념으로 버무러져 있기에 읽기가 심심치 않았다. 소외된 자들의 삶과 그들이 생을 마주하는 방식이 참신했고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아한 거짓말'이라는 매력적인 제목과 생생한 청소년의 이야기를 그릴 줄 아는 작가의 이름을 선뜻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책은 어째 날것이라는 생각만 들 뿐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청소년 문학보다는 동화에 가깝다는 느낌? 소외당하고 상처받았던 기억이 얼마나 가슴 절절했기에 지금 쓴 책에서조차 그 아픈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나 싶어 안타깝긴 하다. 그러나 좀더 다듬어진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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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여자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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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은 소감은 ‘아! 이런 책도 있을 수 있구나.’였다. 이런 아이템으로 책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참신하기만 하다. ‘깐깐한 독서본능(윤미화)’과 같은 서평에 대한 글부터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네들에 대한 단상까지, 2000년은 그야말로 책들의 전성시대인 듯싶다. 고종석이 뽑은 여자들의 면면을 보면서 나는 그의 박학다식함이 부러웠다. 자신의 무신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조차 모르겠다고 끝맺은 마지막 부분까지 이 책은 어디 하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기색 없이 달려가고 있고, 덕분에 나 역시 그의 글을 편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이 글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그가 요네하라 마리에 대해 내린 평가와 거의 유사하여 여기에 인용한다.

“p99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책이 상을 받을 만한 걸작들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의 글을 재미있게만 읽었다라는 점에서 나의 감상과 상통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재미만 있고 나머지는 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혁명과 사랑의 불꽃으로 소개된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그의 친구인 ‘황인숙’과 ‘강금실’(정말 부러운 사실이다. 시인과 전직 법무부 장관과 친구라니)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자들에 대한 단상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의 글에 소개된 ‘최진실’을 읽으며 명박산성에 망연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에 실린 ‘체 게바라’ 이야기에서 상업성에 덧칠되어버린 빛 바랜 혁명의 의미도 되새겨 보았다. 현해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김우진’과 ‘윤심덕’의 행동에 담긴 나름의 의미라든지 자유연애라 이름 붙여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여러 분야의 인물로 인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분명 의미있었다. 그러나 ‘고종석의 남자들’이 아니라 ‘고종석의 여자들’이라 이름 붙여진 제목과 그리된 배경을 생각하면 서글프기만 하다. 세상의 반은 남자이고, 세상의 반은 여자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역사에서 길이 남을, 또는 생각해 볼 인물로 여자를 골라야 하는 현실(‘한국의 책쟁이들’이란 책의 인터뷰어들도 대부분 남자였던 것이 갑자기 생각난다)이 서글프다.

남존여비 사상을 가진 나의 어머니는 요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들이나 설거지를 하는 남자들을 보시면 늘 불쌍하다고 말씀하신다. 예전에는 부엌 출입조차 하지 않았던 그들이 굳건하던 가부장적 지위를 잃고 있는 현실이 꽤나 안타까우신 모양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동안 그들이 누린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 아닌지. 물론 내가 바라는 세상이 ‘고종석의 남자들’이란 책이 나오는 세상은 아니다. 부디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이 단순한 생물학적 기호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이런 내 말에 고까우신 불들에게 ‘이갈리아의 딸들(저자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이란 책을 권한다. man에서 woman이 파생된 것이 아니라 wom(소설 속 여성 명사)에서 woman(소설 속 남성 명사)이 파생된 것이라는 도입부는 여성들에겐 통쾌함을 남성들에겐 섬뜩함을 주는 소설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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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딸콤플렉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착한 딸 콤플렉스 - 착해서 고달픈 딸들을 위한 위로의 심리학
하인즈 피터 로어 지음, 장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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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하여 외래어 표기법상 ‘컴플렉스’가 아니라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더욱 정확히 알게 되었다. naver 사전에는 ‘콤플렉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현실적인 행동이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 융은 언어 연상 시험을 통하여 특정 단어에 대한 피검자의 반응 시간 지연, 연상 불능, 부자연스러운 연상 내용 따위가 이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열등감’, ‘욕구 불만’, ‘강박 관념’으로 순화
사전을 통해 알아본 ‘콤플렉스’는 그 개념을 더욱 피상적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동안 매체를 통하여 알게 된 콤플렉스가 한 둘이 아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슈퍼우먼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 등등. 이름 지워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무수한 콤플렉스들이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조금씩은 존재할 열등감들이 이름을 얻자마자 마구마구 부풀려지게 되었다.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할 때만 하더라도 ‘아 콤플렉스 때문에 그때 내가 그랬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이제는 조금 심드렁해졌다.

그렇다면 초창기에 내가 심리학서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나도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사주풀이에 집착하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토정비결을 보기도 하고, 오늘의 운세라든지, 이달의 운세를 꼭꼭 챙겨보곤 했으니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느 누가 궁금해 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사주풀이는 나에게 무서우면서도 신기한 세계였고 사주풀이를 해 주던 점쟁이들을 향하는 내 시선은 존경 그 자체였다. 나도 모르는 나를 어쩜 그리 단정적이고도 명확하고 똑 부러지게 풀어준 것인지(물론 신기함과 존경 이면에는 두려움도 있다. 그렇기에 난 오늘의 운세를 오늘이 다 지난 다음에, 이달의 운세를 이달이 다 지난 다음에, 올해의 운세를 올해를 다 보낸 즈음에 읽곤 한다.)... 그러던 차에 ‘프로이드’나 ‘융’이라는 이름과 함께 심리학자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과학적 근거들을 들고 점쟁이들 앞에,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점쟁이들에게 보내던 존경의 시선이 어느 새 사람의 무의식에 잠재된 것을 끄집어 내 주는 심리학자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증빙서류들이 신뢰감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의 이론서와 그들이 치료한 환자들의 사례를 보며 ‘맞아, 맞아. 그렇구나! 나의 열등감은 그런 데 원인이 있었구나.’라며 수긍하고 또 그 사실에 침울해 하기도 하면서 나의 증상 하나하나를 심리학 용어에 끼워맞춰 보며 감탄하곤 했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나에게 존재했던 그런 열등감들이 심리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을 이끌어내 준 심리학자들의 힘인지 아니면 그 증상에 붙여진 이름(언어)의 힘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여튼 이번에 이 책에서 접한 열등감은 ‘착한 딸 콤플렉스’이다. 늘 그렇듯이 딸이기만 했던 때에는 나의 입장만 생각할 수 있었는데 누구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엄마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묘하기만 하다. 이 책에 적힌 사례를 보며 엄마만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또한 엄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거위 치는 소녀’라는 동화의 내용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동화(童話)’는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주곤 하는데 이 책 역시 동화에 바탕을 두고 ‘거위 치는 소녀’에 감추어진 착한 딸 콤플렉스를 세세히 분석하고 있다. 모성애라는 이름의 폭력에 힘입어 독립심 없이 자라난 딸들이 가진 ‘의존성 인격 장애’가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학 서적을 읽지 않고서도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무한한 사랑이 필요하며 그러한 무한한 사랑에는 절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까지가 적절하고도 이상적인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모두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니 그 기준이 더욱 모호해진다. 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해 주는 부모는 의존성 인격 장애를 방치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고 아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또 다른 콤플렉스를 얻게 된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일까? 이쯤 되면 나의 심사는 조금 꼬여 버리고 이 책의 저자는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자신은 어떻게 자랐는지 삐딱한 측면에서 궁금해진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도 아빠의 사랑이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모두가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형제 자매 간의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같은 조건의 부모 밑에 자라난 형제들도 첫째와 둘째가 다르고 셋째가 다르지 않은가. 명확한 지침조차 마련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불행한 콤플렉스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 그 해답은 도대체 보이질 않는다. 저자가 알려준 ‘알파 릴랙싱’ 정도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경우를 두고 ‘아는 게 병이다’라고 한 것일까? 물론 상황을 모르고 우울해 하기보다는 정확한 병명을 알고 대처하는 것이 나름 좋은 점도 있긴 하다(알고 대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내가 이렇게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 역시 나의 유년기에 감추어진 인격 장애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나의 모든 것을 뜯어고쳐 완벽한 조건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살아간다는 것은 고민의 연속이고, 실수의 연속이며, 다양한 콤플렉스의 만찬을 즐기는 일이다. 이러한 고민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던가! 콤플렉스가 없다면 좋겠지만 우린 저마다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아간다. 외모 콤플렉스는 성형의 힘을 빌리기라도 하지만 성격적 콤플렉스는 어디를 도려낸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콤플렉스를 나의 동반자로 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싶다.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다른 부분을 보완하기도 하고, 나의 열등감을 위로도 해 주면서 살아가야 할 때인 듯 싶다. 싫다고 버리고 꺼리다 보면 언젠가 나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콤플렉스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길 수 있는 방안(없앨 수 있는 방안이 아님)도 생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콤플렉스는 나의 힘이다. 부디 나의 딸은 콤플렉스가 없길 바라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왜냐 하면 콤플렉스를 힘으로 알고 살아가는 내가 그 아이의 어뭉이기 때문이다. 서점가에서는 요즘 부쩍 심리학이 서른에게 말을 걸고, 유년기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지금의 고민도 벅찬데 무엇하러 예전까지 들추어 내고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네 인생살이가 힘든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제 심리학이 걸어오는 말에는 그만 대답하자. 오히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주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게 더 필요하다. 콤플렉스라고 굳이 이름붙이기 전에 자신을 보듬어주고, 보듬어준 자신의 마음을 잘 토닥여서 자신의 가족들을 한 번 더 꼬옥 안아줄 필요가 있다. 추운 겨울날 적어도 마음만은 포근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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