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블레의 아이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빨간머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엄마가 김치를 담가주시며 양념에 버무린 김칫속 하나를 입에 쏘옥 넣어주셨다. 그 시원하면서도 알맞게 짜고 매운 맛은 먹는 내내 입 안에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더이상 김치를 사먹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에 젖어 감탄사를 연발할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마신는 게 아이라 니 입에 익숙한 기라. 어릴 쩍부텀 묵다 보이 그게 입맛이 된 기라. 알겐나? 마시낀 뭐 그리 마시껜노.(맛있는 게 아니라 네 입에 익숙한 걸 게다. 어릴 때부터 먹다 보니 그게 네 입맛이 된 게지. 맛있긴 뭐 그렇게 별나게 맛있겠냐.)”

그땐 그냥 겸손한 말씀이시려니 듣고 넘겼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인 듯 하다. 어릴 적부터 가족과 옹기종기 모여 먹던 맛이라 입이 길들여지기도 했을 게다. 그러니 내가 느끼는 맛있는 감각과 나의 친구들이 느끼는 맛있는 감각이 다른 것이겠다. 그래서 여기서도 ‘음식은 기억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p240 요시모토 씨의 요리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음식이라는 건 역시 추억이며 깊은 사유라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누구나 절대로 타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고유의 음식에 대한 기억이라는 걸 갖고 있다. 그건 재현이 가능할 것 같아도 결코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음식의 미묘한 맛에서 떠올려지는 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인간관계이다.  
   

 

결국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만들고, 나중엔 음식과 함께 추억을 먹는 것이다. 그렇기에 덜 익어 퉁퉁 불어터진 봉지라면의 서걱거림도 군대에서는 맛있었고, 기숙사에서 해 먹었던 커피포트 속의 설익은 밥도 나름 맛있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맛있는 음식을 접해보는 기회는 늘어나게 마련인데 그래도 궁극의 순간에 떠올리는 음식은 진귀한 음식이 아니라 익숙한 음식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 역시 맛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억에 기인한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럼 이 책에 등장하는 기억 속의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책은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한 여러 음식의 레시피를 참고로 하여 다양한 음식을 맛보며 그 당시 음식을 즐겼던 인물의 심정과 상황을 추리해 보는 것을 숙제로 삼고 있다. 나름 흥미롭고도 호사스러운 과제이긴 하나 딱히 익숙한 음식이 아니라 흥미가 가진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 산채 요리만 실감날 뿐 캐비어라든가 마리 앙투와네트의 과자는 그냥 눈요깃거리일 뿐이었다. 분명 공복에 이 책을 읽고 있었다면 입맛이 당기기도 했을 터인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음식에는 좀체 식욕이 일지 않았다. 사진에 광택이 없어서인지 별로 먹음직스럽지 않은 음식에 대한 묘사에 솔직히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이보다는 고향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질긴 끈은 위에 잇닿아 있다던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 이야기가 더욱 그리워질 뿐이었다. 그나마 ‘라블레의 아이들’을 읽으며 처음으로 입맛이 살짝 돌던 음식은 양갱에 대한 묘사였다. 좀체 단 것을 즐기지 않은 나인데도 육감적인 묘사에 나도 모르게 혹한 것 같다.

   
  p100 양갱의 색상의 깊이와 미묘함은 서양식 형광등 아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한 개의 달착지근한 덩어리가 되어 혀끝에서 녹는 것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칠기의 표면의 아름다움은 ‘겹겹의 어둠이 퇴적된 빛깔로 주위를 에워싼 암흑 속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음식을 담는 국그릇은 도기가 아니라 반드시 칠기여야만 한다.
 
   

 

이 즈음에 와서는 역시 요리 얘기가 아니라 글솜씨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눈에 보일 듯 음식을 묘사하면서 입안에 사르르 녹게 만드는 것은 정작 레시피에 충실했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음식을 눈 앞에서 맛볼 수 있을 듯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수록 맛에 대한 탐닉이 줄어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관계로 내가 만드는 음식에 흥미를 잃고 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기 시작하면 지쳐버리곤 한다. 갈수록 편리해지는 시대에서 레토르트 음식에 길들여지기는 싫고, 그렇다고 직접 만들기도 싫고-하긴 만들 수도 없긴 하다-이기적이게도 예전 엄마가 손수 만들어주시던 슬로푸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다. 그런데 그 음식을 직접 만들기는 싫으니 어쩌면 좋을까? 먹고는 싶으나 만들기 싫은 나에게 육감적으로 식욕을 당겨줄 음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직접 만들어 먹든 사서 먹든, 먹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정도로 맛깔나는 음식 이야기가 그리운 겨울밤이다.

-엄마가 주던 시원한 동치미 국에 고구마라도 한 입 베어물고 싶은 청명한 겨울밤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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