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는 감정은 무엇일까?

 

방금 '황경신'이 쓴 <초콜릿 도서관>이란 책을 덮었다. 그녀의 글에 천사들의 회의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인간의 감정에서 질투를 제거할 것인가'라는 안건을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다수결이 아니라 모두의 동의를 구해야만 해결되는 천사들의 해법. 참으로 평화적이기에 지난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다수결이란 폭력을 제쳐두고 모두의 합의라는, 도달할 수 없는 해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만 해도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 천사적인(?) 방법이지 싶다. 그런데 반전은 인간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인간의 질투를 논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또 한 명의 천사가 인간계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돌아온 천사가 한 명도 없다는...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질투는 나의 힘?

 

질투란 참으로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죽을 용기를 주기도 한다. 절망할 힘과 희망을 가질 기회를 주는 질투를 도대체 뭐라고 정의내려야 할까? 질투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그 수많은 질투의 얼굴을 겪었기 때문이겠지. 난 참 많은 것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했었다. 어렸을 때 기억이 사뭇 흐리긴 하지만, 뭔가를 부단히 부러워하고, 부러워한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나는 성장했던 것 같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새로운 것 없이 뛰놀 때는 딱히 무언가를 부러워할 일도, 창피해 할 일도 없었는데 다른 동네를 보거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러워도 하고, 부끄러워도 하며, 자랑스러워도 하고 창피해도 하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맛본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이질적이고 고급스러운 세계에 대한 감상. 나도 저걸 갖고 싶다거나 저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

 

내가 기억하고 있던 최초의 질투는 엄마 친구 딸에 대한 것이었다. 요즘과 달리 마당 있는 한옥집이 일반적일 때 그 아이는 아파트라는 곳에 살고 있었고, 한 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자던 그때에 그 아이는 자신만의 방에 놓인 침대에서 잠을 잤고, 주말마다 엄마 손 잡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목욕탕에서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때를 밀던 그때 그 아이는 개인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거품 가득한 욕조는 아니었지만 괜히 고급스럽고 여유러워 보이던 곳이었다. 우리 엄마한테도 없던 화장대가 있던 그 아이의 방. 그래서 난 나보다 어린 그 아이 집에 시간이 날 때마다 놀러갔었고, 그 집 근처의 회사에 다니고 있던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왔었다. 그 집을 뒤로 하고 돌아올 때면 꼭 꿈에서 깨어나는 듯 서글프고 허망한 마음이 들곤 해서 나를 부르는 아빠의 전화소리가 원망스럽기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아이를 부러워하던 어린 나의 마음이 아빠에게도 전해졌겠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괜스레 아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분명 나의 부러움은 죄가 아닌데 왠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아빠에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을 과장되게 늘어놓았고, 아빠는 유독 나의 말에 대꾸가 없었다.

출발부터가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당시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고, 원하는 것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주입받던 시절이었다.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렸을 때는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생활했었다. 원하는 것은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주문은 나를 희망차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철이라는 게 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삶은 평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님을 말이다. 찬란한 봄이 오던 그 시간, 차갑던 겨울을 맞이하던 그 시간 나도 모르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이 제주도라면 겨울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서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이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봄을 먼저 맞이한 제주도에게 겨울도 먼저 선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봄을 먼저 맞이한 그곳에 겨울은 더 늦게 다가오곤 했다. 자연에서조차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평등은 모두가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시작한 사람들에게 출발점을 논할 때 쓰는 참으로 졸렬한 단어였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결국 평등을 놓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중시해야 한다는 소리일 테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일까? 

결국 하고픈 말이 없다는 소리일 테지. 평등은 없다. 질투는 힘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는 소리를 하고픈 건데 그래서 결론을 어찌 내야할지. 나에게 질투는?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왜? 좀더 나아지기 위해서.

몰라몰라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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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많은 복잡한 것들은 결국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소설책은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착한 소녀가 계모를 만나 힘들어 하다가 나중에 복을 받은 이야기(신데렐라, 콩쥐팥쥐),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몸을 바친 효녀 이야기(심청전), 우연히 만난 남녀가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일찍 성에 눈 뜬 덕분에 모진 시련을 이겨 사랑을 이룬 이야기(춘향전), 이복형과 아버지 애첩의 간악함을 떨치고 가출하여 자수성가하는 이야기(홍길동전). 이런 식으로 간명하게 정리되는 이야기라야 길고 복잡하게 이어질 수도, 식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내가 하고픈 얘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이 너무나 당연하여 궁금증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닳고 닳아버린 내 생각의 덩어리들. 뇌는 분명 골골이 파여 있지 않고 그 골골이 메워지면서 민무늬의 덩어리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만난 하나. 이 우연한 만남이 나에게 궁금증을 가지게 할 줄이야 내가 어찌 알았던가! 딸내미가 동네 언니를 통해 우연히 알아온(역시 생활의 지혜는 학교가 아닌 동네 언니 오빠들이 알려주는 것이란 만고불변의 진리) ‘나만의 실험실이라는 제목의 앱. 동네 언니가 설치했다면서 지 아빠에게 설치해 주길 원했으나 ios체제에선 없고 안드로이드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만 해 준 그 앱. 그리하여 나랑 같이 사는, 안드로이드를 *무시하며 아이폰을 받들어 마지않는 XY 염색체는 나에게 아이폰으로 갈아타지 않을 것을 - 자기는 진작에 나에게 갤럭시를 버리고 갈아탄 주제에 은근히 아이가 있는 집은 아이폰도 있고 갤럭시도 하나 있어야 할까봐라는 말도 안 되는 대사를 날리며 은근히 종용하며 그 이름도 절절한 나만의 실험실을 내 폰에 깔았다. 물론 한 붓 그리기처럼 애들 놀잇감이겠거니 생각하고 애가 놀도록 내버려 뒀다가 내가 더 빠져버린 앱, 김중혁이 개발할 듯도 싶은 앱.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는.

 

   늘 그렇듯이 이야기는 이렇게 느닷없이 엉뚱한 방향에서 시작된다. 일단, 이 앱은 구매자(?)에게 ///공기라는 기본 요소를 주고 만들어야 할 첫 번째 레시피를 지루한 과제인 양, 심심하고 무뚝뚝한 모습으로 툭 던져준다. ‘교육용 앱이군이라고 생각하게끔 말이다. 그렇게 심상한 모습으로 드러난 첫 번째 레시피에는 , 구름, 대기, , 모래, 바다, 바람, 벽돌, , 사막, 수증기, 식물, 안개, 압력, 에너지, 오아시스, 지진, 진흙, 태풍, 화약, 황사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과젤 완성하면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다. 보충, 심화 학습으로 단정 짓기도 뭣하고, 단계별 학습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뭐라 한 마디로 단언할 수 없는 묘한 과정과 단계들. 일단 을 섞으면 완성되고, ‘을 두개 섞으면 바다가 된다. ‘구름수증기+공기가 만나야 하는데 수증기는 또 +이 만나야 한다. 결국 여기서 제시한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본 요소만 가지고 이리 저리 엮고 끊고, 이러쿵 저러쿵하여 지지고 볶아야 한다는 소리다. 네 가지 기본 요소로 모든 걸 완성하라니 이건 천지창조가 따로 없지 않은가! ‘나만의 실험실이라는 말만 믿고 어설픈 과학적 지식에 소견을 보태어 마구 조합하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들이 꽤 있다. 기본 요소들을 우연히 조합하여 만들기도 하고 어설픈 지식으로 만들어 지기도 하는 레시피들. ‘모래+압력유리가 되고, ‘유리+유리안경이 된다. ‘안경모래를 만나 모래 시계가 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식물+구름이 만나 목화가 되는 것은 상상력과 과학 언저리의 어디쯤이라고 해야 할밖에. 이 어이없고도 우스운 짓거리에 감탄하다 못해 감명까지 받아 여기에 빠져버린 딸내미와 나는 2단계 레시피에서 우주목화를 만들지 못해 헤매이고 있었다. 생활에 찌들고 권모술수에 닳고 닳은 어멈은 어린 생명체 몰래 몰래, 물어보면 무엇이든 알려주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필적할 만한 네이*’를 검색하여 앱 사용자들이 공개한 레시피를 훔쳐본 후 을 제조하였으나 컨닝이 늘 그렇듯이 쉬운 만큼 개운하진 않았고, 또한 스포일러를 영접한 후 보는 영화처럼 온몸을 떨게 할 짜릿함도 선사해 주지 않았다. 측은하게 날 보면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거래 엄마. 엄마 네이* 봤지?’라고 말하는 저것이 정녕 8살이던가! 그래서 이젠 어린 것 앞에서 웬만하면 답을 보지는 않기로 나름의 결심을 한다. 보더라도 어린 것이 전혀 눈치 챌 수 없도록, 나이에 걸맞고, 나의 영민함에 걸맞게 보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바쁘게, 퇴근하자마자 씻지도 않고 아이에겐 늘 외출했다 오면 씻어라, 메르스가 요전에 있었던 일이다. 무슨 병이 널 쫓을지 모른다, 넌 나의 모든 것이다 등등의 모든 잔소리를 하면서 정작 나는 하지 않는 것, 그게 모름지기 부모인 것이지- 앉아 8년된 미확인 생명체랑 레시피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린 것은 자기가 하는 앱이니까 폰을 자신에게 달라고 외치고, 나는 내 폰에 깔았으니까 내가 해야 한다며 항변하면서, 제각각의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대며 싸우는 이 광경. 유교적 예의범절에 눌려 가부장적 억압을 탈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하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본인의 노모는 혀를 쯧쯧 차며 어린 것이랑 에미가 뭣하는 거여라는 표정으로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으나 그건 분명 노모가 나에게 이리 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눈빛이 분명하렸다. 그러나 효심 가득한 나는 노모에게 괜찮다는, 이해한다는 눈빛과 제스추어를 보여 주었고, 그것에 감동한 노모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쯧쯧이란 두 음절의 감탄사를 뱉으며 돌아섰다.

 

   여튼 뭐가 나올지 모르는 3단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누르다가 결국 우린 바다에너지를 결합해 생명을 만들어 냈다. ‘생명이라니. 정말 세상을 창조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짜릿함을 8년 된 생명체와 40년 된 생명체가 함께 느끼다니. 신께서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늘생명을 넣었더니 가 되고 를 만나니 이 되고 을 만나 달걀 후라이가 되더라니.. 이건 무슨 생명창조의 신화가 배를 채운 듯 포만감을 느끼게 하더니다. 그리하여 탄력받은 우리는 생명을 불어 넣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인간을 모아 사랑까지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랑인간을 첨가하였더니 아기까지 탄생했다는... 이 오묘한 탄생의 신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호한 사람 두 개로 아기를 만들다니 이건 요즘 새로 등장한 호모와 레즈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관대하고도 자유로운 성에 대한 담론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아이에게 따로 성()에 대해 설명할 필요조차 없더라는. 놀라운 발견의 연속이여.

 

   그런데 우연히 사랑바람을 불어넣었더니 결별, 이혼이라는 완성품이 나왔다. 이건 뭐지? 이렇게 단순한 것을. 그냥 바람바람이 아니구나. 그래서 바람바람이라 하는구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구나라는 선승의 문답을 듣고 웃고 말았더니 바람이 바람이고, 바람이 바람이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이 내 등짝을 죽비로 내려치는 순간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싶더란 거지.‘ 이건 뭐....

 

  그리하여 나에겐 슬슬 감이 오는 레시피란 제기발랄한 제목의 두 번째 레시피를 지나 이제야 좀 할 만한 레시피라는 제목의 세 번째 레시피 속에 있는 천사만 완성하면 네 번째로 달려간다. 그대들도 하고 싶지 않은가? 그대만의 실험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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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나한테 묻는다.

넌 꼭 내가 내리는 소리만 들은면 그러더라.”

내가 뭘?”

뭔가 없던 일도 생각하고 그러잖아.”

없던 일?”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꼭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눈물짓고, 웃고 그러잖아.”

니가 일어난 일인지 일어나지 않은 일인지 어떻게 알아?”
알지 난 다 봤잖아.”

넌 본 게 다 기억이 나?”
그럼. 네가 소리지르는 것도, 울부짓는 것도 영상과 함께 뇌리에 남아있다고.”

비한테 무슨 뇌리 같은 게 있겠냐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긴다면야... 여튼 난 그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타닥타닥 내리던 니 소리를 들으면 묘한 생각이 나. 옛날옛날 집에서 혼자 자고 있는데 말이야 어쩌다가 잠이 깼단 말이야. 완전히 정신이 깨어난 건 아니지만, 잠자는 것도 아니고 몽롱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그런데 한 밤중이라고 하기에는 좀 심한 여명 비스무리한 것이 비쳐들고 있었지. 물론 눈은 감고 있었는데도 그게 느껴지더라구. 그런데 갑자기 타다닥타다닥그런 소리가 들리는 거 있지?"

 

쥐가 달리는 소리 같은 거 아니고?

 

그때 내가 살던 곳이 그나마 지은 지 별로 안 된 새 건물이었거든?

 

넌 새 건물에는 쥐가 안 산다고 생각하나 보지? 안 그렇거든?

 

여튼 말 자르지 말고. 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많다 보니 쥐와 관련된 소리는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그 소리는 쥐와 같은 끔찍한 동물의 소리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소리였다고. 그렇다고 밖에 비가 내리는 것 같지는 않았어.

 

그건 또 어떻게 확신하누?

 

집 앞에 팔차선 도로가 있었는데 비가 오면 그 도로와 차 바퀴의 마찰 소리가 평소와 달리 들리니까.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그러 건 다 구분이 간 모양이네.

 

여튼 그런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길레 몸을 일으키고 둘러봤지. 그런데 도통 그런 소리가 들릴 때가 없더란 말이지. 혼자 살던 오피스텔이라고 그래봤자 한 눈에 다 들어오는 공간이라서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긴 했지만. 그래서 다시 잠자리에 눕는데 타다닥소리가 또 들린단 말이지. 잠을 완전히 깨기는 싫어서 불은 켜지 않고, 정신을 온전히 차리고 싶지는 않은 마음 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냥 잤잖아.

 

그럼 그 소리는 뭐래.

 

그때는 그냥 잠결인가, 꿈인가 보다 합리화 시키고 잊어버렸거든. 근데 얼마 뒤에 대낮에 그 소리를 다시 목격했잖아.

 

목격하다니.

 

들었다고 하기엔 아쉬운 면이 있거든. 책상위를 문득 바라보고 있는 찰나에 컴퓨터 모니터 옆에 있던 숯이 눈에 들어오더라구. 그런데 그 숯이 타다닥 하고 소릴 내는 거야. 습기를 빨아준다고 해서 집에 가져다 둔 거였는데 있는 듯 없는 듯 먼지만 쌓여가는 게 불쌍해서 어딘가 보고 들은 바 대로 물뿜기로 물을 조금씩 뿌려주다가 잊고 있었지 뭐야. 고것이 자기 건조하다고 물 달라고 외치고 있더라구. 타다닥 타타탁. 이 좁은 공간에서 빨아들일 물기도 없이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게야. 옷장 속에 하마는 물을 주구장창 먹어대는데 요건 왜 물이 없다고 타닥타닥거리는지. 여튼 눈으로 보는 것보다 소리로 기억되는 일상들이 있는데 비도 그런 것 같아. 물론 냄새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물이 도로 바닥에 닿는 소리도, 차 바퀴에 깔려 굴러가는 소리도 난 좋더라. 깔리는 입장에서 어떨지 몰라도. 그래서 난 니가 차암 좋다구.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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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비가 옵니다,

사람들은 봄비라고 하는데 마음은 스산하기만 하고 날은 춥기만 합니다.

비를 정의하는 것이 계절만은 아닐 텐데 지금은 모두들 봄비라고 합니다.

봄이 스르륵 가는 중이나 봄이 한창일 때면

소낙비, 는개비, 보슬비, 가랑비 등등으로 불릴 이름이 지금은 봄비 하나로 통일 됩니다.

아마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을 마구 말하고 싶은 마음에 봄비, 봄눈, 봄바람, 봄처녀, 봄나물, 봄기운이라고 마구 봄을 붙이나 봅니다. 그러고 나니 여름도 그런 이름에 들어가나 궁금해 집니다.

여름비. 글쎄요. 이건 어째 좀 이상해 보입니다. 여름은 그냥 장맛비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여름은 어디에 붙어야 하나요. 여름 이불, 여름 옷, 여름 방학, 여름...

어째 봄보다 사람들이 홀대하는 기운이 두드러진다 싶습니다.

내친 김에 가을도 한 번 봅시다.

가을비, 가을바람. 가을걷이, 가을 달, 가을하늘, 가을... 제 언어의 한계인지 사람들의 상식이 요 정도인지도 궁금해지려 하네요.

그렇다면 그 춥고 스산한 겨울은?

겨울바람, 겨울산, 겨울외투, 겨울나무, 겨울비,

더 이상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봄기운에 서린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날입니다.

여름이 오면 겨울을 그리고, 겨울이 오면 더운 여름을 그리는데 화끈한 겨울이나 여름과 달리 봄은 늘 사람들이 그리워 하고 보듬고 싶어하는 첫사랑 같은 존재인 모양입니다.

오는 듯 싶게 가버리고, 오겠지 기대하다 놓쳐버리고 마는.

출근길에 바라본 살픗한 앙상한 가지가 보송보송한 느낌이 든 이유는

가지 사이사이에 맺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꽃망울 때문일 텐데

가지 자체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듯 보여서

한꺼풀 봄이불이라도 두른 듯 괜히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봄 때문일 테지요.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는 봄기운이 나에게도 스르륵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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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은 회식에 왜 안 왔대? L보고 그러지 말라고 그래."

 

오늘 나의 단상은 모두 저 말에서 시작되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의 지인에게 전하라고 했단다.

나보고 '그러지 말라'고.

여기서 말하는 '그러지'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어쨌다는 것일까.

 

올해 들어 나에게 주어진 회식은 내 기억에 총 다섯 번 정도가 있었다. 두 번은 참석을 했고, 한 번은 시절이 하 수상하여 전체 취소가 되었고, 또 한 번은 업무에 지쳐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그리고 오늘이었다. 오늘은 선약이 있는 데다가 가기도 싫어서 패스. 회식은 회식일 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참석해야 하는 것이며, 내가 더 편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언제든지 빠져도 된다는 게 회식에 대한 내 생각이다. 그분이 정말 날 걱정했다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나도 그 자리가 즐거웠다면 기꺼이 갔을 것이다. 내 돈 내고 내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별로 친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하하호호 하며 먹을 기분이, 오늘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내가 왜?

 

그런데 저런 말까지 듣고 나니 갑자기 속이 상하고 우울한데 이러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마땅찮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상황에 밀리고 사람에 깔리고 여기저기 투닥거리며 부딪히다 보니 어느 새 나는 모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찍히다 보니 전방위적으로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어 윗사람부터 저~어 아랫사람까지. 이 사람의 눈초리도 곱지 않고, 저 사람의 눈초리도 찜찜하고. 그래도 굳건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꾸 속이 상하고 맘이 아프고 울컥울컥 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 듯도 하다. '그냥 둥글게 둥글게 살지'라는 뭇사람들의 말없는 질책들.

 

그래서 속이 상하고 서운하다.

 

그러다가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왜 내가 속이 상하고 서운한지 알고 싶기도 했고, 그걸 알아야 내 감정을 추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더니 억울함이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데 너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평가에 나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라는.

그런데 이러한 속상함의 원인은 결국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난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닌데 내가 나를 괜찮은 인간이라고 오해하다 보니 그들이 나를 잘못 평가한 것이라고 속단해 버렸다.

 

결론?

난 좋은 사람도 착한 사람도 아닌 그냥 그런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속상해 하지도 말고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슬프기도 하고, 속상함이나 서운함이 씻은 듯 사라지지 않고 지저분한 흔적을 남겨 아린 마음도 있겠지만 뭐 그런들 어떤가. 난 원래 이런 사람인 것을. 그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 쿵덕쿵 쿵덕쿵 방아를 찧듯이 짓찧어지더라도 나는 나 생긴 대로 살아가야겠다. 그들에게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들 뭐하겠는가. 의미없다~.

 

그러고 보니 난 그 동안 착한 사람을 연기하며 살아가려 했나 보다. 그런데 이젠 좀 지쳤다. 이만큼 했으면 됐다-이건 전적으로 나의 생각이다, 타인들은 전혀 다른 평가를 할 것이니까. 뭐 어쨌든. 그들의 칭찬은 버리자. 모범생이라는 소리에 너무 젖어 있어서 당연히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과거도 버리자. 나를 좋아하는 열 명을 보지 않고,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 집착하던 어리석음도 이제 버리자. 그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따른 것일 테니 말이다. 그들이 필요할 때에는 내가 아무리 독하고 나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나에게 손을 내밀 것이고,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는 내가 아무리 순하고 착하고 이타적인 인간일지라고 나를 가차없이 버릴 테니까.

 

나를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원래 그랬음을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만-그들이야 이런 나에게 관심도 없을 터이고 한동안 그들에게도 씹을 거리가 필요할 테니까- 나에게는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 번 알려주자.

둥글게 둥글게 노래는 끝이 났다.

 

아홉 살은 이런 나이인가 보다.

다리를 넘어가는 중이다. 이 다리를 건너고 불혹이 되면 부록처럼 또 다른 걱정거리가 붙을 테니 오늘의 속상함은 접어두기로 하자.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개운해 진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이석원'이라는 사람이 서른 여덟에 쓴 글인 노란색 표지의 "보통의 존재"라는 책 때문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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