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책에 관심이 많아서 신간을 훑어보고 궁금한 책은 보관함과 장바구니에 담아두지만 그럼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 있다. 어쩐지 완벽하게 나와는 관련 없을 것 같은 그런 책들. 예컨대 올해 초에 읽은 <성스러운 동물성애자>가 그러했고, 며칠 전 읽은 <에이스>가 그러했다. ‘동물성애자’라고?! 어질어질하구만, 그런데 정희진 쌤은 왜 추천한 걸까? 아무리 정희진 쌤 추천이라고 해도 이건 넘겨야겠다. ‘무성애(asexuality)’라고?!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구만...... 평소 LGBTQ 관련 책은 관심 있게 보는 편인데도 ‘무성애’를 다룬 <에이스>는 보관함에 담아두고 언제 읽을지, 과연 읽을지 기약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유성애자라고 생각하는 내가 무성애자의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하고 흥미를 느끼겠느냐 싶었던 것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한다고 일찍이 카프카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할까?”라는 질문과 함께. 물론 나는 책이 언제나 도끼 역할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책을 발견하면 큰 기쁨을 느낀다. <성스러운 동물성애자>가 그랬듯이 <에이스>도 나에게는 도끼였다. 편견으로 얼어붙은 내 안의 바다를 와장창 깨뜨려준 도끼. <에이스>는 최근에 미미 님이 이 책 3부를 읽다 보면 은오와 잠자냥이 생각난다고 하셔서(이렇게 낚으면 진짜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급박하게 전자책으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전자책은 종이책에 비해 집중력이 떨어지는데도 이 책은 꽤 몰입해서 읽었다). 땡투를 미미에게 해야 할까 애초에 이 책을 알게 해준 은오에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주머니 가벼운 학생에게... (그래봤자 160원)
그러고 보면 <성스러운 동물성애자>도 <에이스>도 이 어린 학생을 통해 알게 되고 읽게 되었다. 와장창 도끼를 두 번이나 선사해준 셈이니 고맙기 짝이 없다. 내 주변에서는 이 또래 중 이렇게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그 스펙트럼도 넓은 편) 이 친구가 읽는 책은 좀 관심 있게 지켜보는 편이다(책 읽는 것에 비해 귀차니즘을 극복하지 못해 리뷰는커녕 100자평도 별점도 안 남기는 경우가 많음). 은오보다 조금 어린 내 조카는 어릴 때는 그렇게 많이 읽더니 이젠 질려버렸는지 책을 잘 읽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릴 때 다독가가 좋을까 커서 다독가가 더 좋을까? 아무튼 요 녀석한테 <동물성애자>하고 <에이스>를 선물해주면 어떤 얼굴로 나를 쳐다볼지도 좀 궁금하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고 그 편견을 좀처럼 깨지 않으려고 한다. 그 편견이 유일한 정의(定義)이자, 정의(正義)라고 믿고는 자기 의견만이 참이고 옳음이라고 생각해서 도무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상태를 늙음이고 꼰대라고 생각한다. 그런 꼰대는 되지 말자고 마음먹었기에 은오의 책장 목록을 지켜보고는 하는데, 그런데도 내 꼰대력이 나도 모르게 발동/상승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처음에 은오가 자신을 ‘에이스’라고 규정한 것을 보고 좀 웃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조금 했기 때문이다. ‘엥!? 이제 겨우 20대에 무성애자라고? 에이.... 아직 제대로 안 해봐서 그렇지, 에이, 나이 들어봐라, 에이. 진짜 좋은 사람 만나봐라.... 서른 넘고 사십에도 무성애자라고 하면 인정!’ (아........부끄러우니까 좀 웃겠습니다.......ㅠㅠ) 그렇다 이런 개꼰대 같은 생각을 조금이나마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혼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어린 처자들을 봐도 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니까 마흔 넘고 쉰 넘고 그래도 그러면 인정. 그런 심정이랄까. 20대에는 뭔들 선언을 못 하겠니 싶은 심정(와 개꼰 잠자냥 ㅋㅋㅋ). 아니, 그냥 자신을 뭐라고 규정하는 일 자체가 좀 우스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니까 뭐랄까 트위터에 자신을 페미니스트이자 비혼주의자이자, 비건이자 우울증환자이자 ADHD이자 INTJ라고 소개하고 있는 꼴을 보면 오그라들어서 내가 쥐구멍이라도 숨어버리고 싶은 그런 감정과 비슷하달까. 선언보다 조용한 행동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또는 과시하려고) 붙이는 액세서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꼰대 마인드로 이 책을 펼쳐들었다가 여러 번 도끼로 쳐 맞았다. 나는 이제 무성애가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적 지향’이라는 것을, ‘성적 끌림’과 ‘성적 충동’은 다르다는 것을, 로맨틱한 감정이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나는 좀 보기와는 달리 로맨틱해서 다들 로맨틱한 감정은 타고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성애자들이 로맨틱한 감정 자체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 책의 분류들을 통해 보자면 나는 유성애자라기보다는 반(半)성애자(Demisexual)에 가깝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일 자체가 또 하나의 위계나 차별, 주의(ISM)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이 또한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예컨대 이 책에 따르면 반성애자(Demisexual)란 누군가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가 생긴 이후에만 성적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그러니까 원나잇이라든가, 어떤 술집에 딱 들어가서 처음 보는 누군가와 ‘하고 싶다’를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회색무성애자의 부분집합으로 간주되어 조롱당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무성애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 존중하는 사람들조차 반성애자는 ‘정상’인이 심오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맥박만 뛰는 대상이면 뭘 봐도 하고 싶어 하는 섹스에 미친 인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쓰는 독선적인 용어라고 폄하한다고 한다(아니거든!) “사람들 앞에서 내가 반성애자라고 말하고 의미를 설명하면 이 말이 특별하다는 기분을 느끼려고 쓰는 또 다른 이름표라 생각하거나, 아니면 여러 명과 자는 사람을 내가 경멸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컬럼비아 대학 재학생 저시 산의 말이다. 반성애자 무시가 만연하다 보니 산은 이 단어를 완전히 버리고 그냥 “다른 사람한테 끌림을 느끼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요.”라고 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알라딘 eBook. <에이스> 중에서). 또한 이런 식의 구분은 개별 정체성이 강조되어 성적 행동에 관해 계속해서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더욱이 현대 사회는 분명 섹슈얼리티가 있고 오늘날 서구에서 섹슈얼리티는 정체성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하는지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의 일부이자 내 진실의 일부로서 작동하지만 이것만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이 책은 분명히 지적한다.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 그러니까 동양인이라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무성애자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인종 차별적 요소를 꿰뚫어 본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이 중산층 백인 여성의 전유물과 비슷했듯이 오늘날 자기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선언하는 일도 젊은(20대) 백인 여성, 그것도 고학력 중산층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진실’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다. 인간이 무언가를 선언할 때 그것이 진실에 가깝게 받아들여지는 것조차도 서구 백인 남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동양계 젊은 여성이 무성애자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일은 종종 그 의도를 오해받거나 또 다른 성적대상화를 불러오지만,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이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선언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말은 이 초성애화된 세계에서 흑인 여성과 히스패닉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그 얼마나 공고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장애인이 무성애자로 선언하기도 어렵지만 애초에 장애인은 성적 욕구가 없는 존재이거나, 성적 욕구가 없어 마땅한 존재라고 치부하는 이 세계의 기묘함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성해방이 가져온 폐해랄까, 페미니즘이 불러온 성해방의 분위기도 무성애자들에게는 폭력적이었음을 지적한 장도 흥미롭게 읽힌다. 섹스를 즐기는 것은 자기 해방을 마쳤다는 증거이며, 이런 해방의 비전이 페미니즘 연단을 지배했을 때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정치 신념을 지지한다는 표지가 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억압’은 ‘해방’의 반대말로 문화적으로 리버럴한 집단에서는 성적으로 보수적인 여자를 대개 성적으로 억압된 여자로 간주하고, 성적으로 억압된 여자를 자유 이전 시대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적으로 억압된 여자는 동정의 대상이자 진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된다. 섹스를 하지 않는 여자를 묘사하는 데 쓰는 단어(비성관계, 금욕, 순수, 순결)는 저자 자신조차 경멸하는 것으로 도덕주의적인 느낌이 나는 것에 비해 섹스하는 여자를 묘사하는 데 쓰는 단어(자유, 역능, 대담)는 긍정적이다. 그래서 저자조차 “억압된 여자, 해방된 여자라는 전형과 매끈한 클리셰”를 받아들이고자 애를 썼다고 고백한다. 대중문화가 이런 분위기를 널리 유포하기 시작했고, 섹스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여자가 그렇지 않은 여자보다 더 페미니스트답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초성애화된 지구에서는 이런 식으로 성이 상품화되고 페미니즘조차 상품과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개인 브랜드를 팔기 위한 유행어가 되어버린다.
“섹스는 정치적이다. 쾌락을 즐길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 무엇이 관습을 위반한다고 여겨지는지, 그리고 섹스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건 정치적이다. 섹스와 페미니즘과 해방의 의미는 빈곤 여성과 유색인 여성, 장애 여성, 신앙이 있는 여성에게 모두 다르다.”는 구절은 그렇기에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또한 사회는 성을 팔기 위해 계속해서 이성애 로맨스 중심의 가치를 강화한다. 섹스가 뭔지, 섹스를 어떻게 하는지, 섹스는 얼마나 해야 하는지, 섹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좋은 성생활이 무엇인지 주구장창 가르치는(세뇌시키는) 것이다. 그것 없이 작동하지 않는/못하는 자본주의 상품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알라딘에서조차 로맨스 빠진 책보다는 로맨스가 한 스푼이라도 들어간 책들이 더 잘 팔린다.
어제는 러닝 타임 328분의 일본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는 30대 후반 네 여성의 삶이 그려진다. 저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데, 그중 한 여성이 친구에게 부부 관계를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면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우울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래전 본 프랑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증거로 “우리 사이에 섹스 안 한 지 한 달이 넘었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한 달인지 두 달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난 좀 이게 충격이었다. 아니 한 달이? 왜? 역시 프랑스놈이라 그런가 싶었다. 어제 본 일본 영화에서는 1년 가까이 안 했다 뭐 그랬던 것 같다. 여기서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섹스는 허구한 날 주구장창 하는 커플이 있는데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아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사이라면, 그들은 사랑하는 것일까? 그와 달리 늘 서로의 머릿속/마음속을 알듯이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나누지만 섹스는 거의 하지 않는 커플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게다가 저 두 영화에서 보듯이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즉 얼마나 자주 하느냐의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일본인은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해서 사랑의 여부를 고민하는데 프랑스인은 그 기준이 한 달에 한 번이다. 이 얼마나 기묘한가.
초성애화된 지구, 강제적 이성애는 사람들 대다수가 이성애자라는 믿음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이성애가 기본값이자 유일한 선택지라는 생각을 강화한다. 또 정상인은 모두 성적으로 활발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있으며 당신은 아픈 것이고 우울증이며 사회가 승인한 섹스를 원치 않는 건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었다고, 섹슈얼리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필수불가결한 경험을 놓치고 있다고 다그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인간 모두에게 억압이고 폭력이다. “지도는 땅이 아니다.” 저자는 폴란드 철학자 알프레드 코르집스키의 격언을 인용한다. 지도는 실재하는 세상을 단순화해 재현한 것이며, 실제 땅은 언제나 화면에 표시된 것들보다 풍성하다. 그러나 지도와 단순화는 여전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모형은 틀리지만 그래도 일부는 유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재현에는 한계가 있으나 훌륭한 재현이라면 시선의 폭을 넓혀준다. <에이스>는 내 인식의 지도를 한결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