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해 160권의 책을 읽었다. 상반기에 좋았던 책은 따로
페이퍼를 올렸기에(참조), 하반기에 다른 책들보다 좀 더 좋았던 책들을 올려본다. 7월부터 12월 사이 하반기에 읽은 책 목록 가운데
추리다 보니, 상반기(1~6월)에 읽은 책들에 비해 중량감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올 상반기에 좋았던 책을 많이
만났구나.
소설
1.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뒤라스 작품을 그래도 이것저것 챙겨 읽었는데 이 작품을 읽기 까지는 100%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없었다. 그 띄엄띄엄 쓴 듯한 문체도 내 취향은 아니었고. 그런데 이 뒤라스의 초기작이 내 마음을 확 붙잡을 줄이야. <연인>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연인>보다는 사회비판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조제프와 그 여인의 이야기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서 선명해진다.
2. V.S 나이폴, <자유 국가에서>
이 책 다 읽은 무렵, 바빠서 리뷰를 안 남겼는데, 다시 읽고 리뷰를 남기고 싶은 작품. 나이폴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네요? 최근에 재출간 된 <세계 속의 길>도 올해 꼭 읽어야지.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돌지만 어느 곳 하나 마음 편하게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자 영원한 방랑자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3. 앨런 홀링허스트, <스파숄트 어페어>
내가 좋아하는 문체가 아닌데도 자꾸 읽게 되는 앨런 홀링허스트- 이 사람 문체 증말 신기하다. 허영&허세 잔뜩 낀 문장인데도 또 묘한 매력이 있어서 자꾸 읽게 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책이 왕창 두꺼운데 솔솔 읽힌다? 이 작품도 600쪽이 넘는데 단 이틀 동안 내리 읽을 정도로 흡인력 있다. 서로 관련 없을 듯한 이야기를 툭툭 던져서 하나로 모아 직조하는 솜씨나 걸신들린 듯 탐욕스럽게 쫓아가게 되는 아름다운 문장 등은 앨런 홀링허스트의 큰 장점이 아닐까. 덧붙여, 앨런 홀링허스트는 부디 <수영장 도서관>으로 시작하지 마시라능.
4.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예전에 영화로 유명했을 때는 오히려 거리 두고 안 읽던 작품. 이제야 읽고 감탄 또 감탄했다. <시핑 뉴스>보다 훨씬 좋았다. ‘영원한 서부’ 와이오밍 자연에서 살아가는 외롭고 거칠고 미쳤거나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들의 인생을 관조적이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담고 있다. 애니 프루의 모든 단편을 읽어보고 싶다.
5.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
깊은 밤 어두운 방에서 스탠드 불 하나 켜고 소주 마시면서 읽으면 딱 참맛이 느껴질 그러 작품이다.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마음속엔 나 이렇게 평범하게 죽지 않아! 오기도 욕망도 있고, 한때 남다른 꿈도 품어봤을, 그런 소소한 삶을 꾸려나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소설.
6. 서머싯 몸, <케이크와 맥주>
서머싯 몸의 작품은 일단 재미있다. 이 작품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런데다가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지’ 캐릭터가 신선(?)하다. 순간적인 쾌락과 사랑에 온몸을 던지는 로지 그녀와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불나방처럼 성공과 명성을 좇는 작가들의 모습이 묘하게 닮았으니,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랴. 위트와 재치, 풍자, 애수까지 골고루 느껴지는 서머싯 몸의 필력.
7.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경계선>
장르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 작품집에는 반했다. 북유럽 신화 속 존재인 트롤을 인간 중심의 현대사회로 가져와 젠더, 인종,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뜨리는 이야기로 만든 <경계선>은 짧지만 정말 강렬하다. 그 밖에 다른 수록작들도 모두 하나 같이 우리 머릿속의 편견과 경계선을 지워버린다.
8. 엔도 슈사쿠, <사무라이>
세속적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종교를 만나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의 갈등을 겪는 과정을 작품으로 담아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엔도 슈사쿠. 올해 읽은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브라이턴 록>, <사랑의 종말>)도 그와 비슷한 세계관을 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엔도 슈사쿠 쪽이 조금 더 좋다. 좀 더 차분하고 진솔하게 다가온달까.
9. 왕샤오보, <혁명 시대의 연애>
중국 소설인데, 중국 소설답지(?) 않아서 조금 뜻밖이었던 작품.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인상 깊어지는 신기한 작품. 중국 작품에서는 문화대혁명 시대를 논할 때 내편 VS 니편,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게 나눠진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니편도, 내편도 모호한 세상, 그 안에서 개인의 실존 문제를 질문한다. 중국 문학에서 이처럼 개인의 실존 문제에 천착한 작품도 드물지 않나 싶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꽤 현대적 작품으로 느껴진다.
10. 라오서, <찻집>
위에 쓴 왕샤오보 <혁명 시대의 연애>와는 아주 상반되는 작품이랄까. 우리가 중국 작품에서 기대하게 되는, 또는 예상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좀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평범한 내용과 평범한 삶이 때로는 가장 진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라오서의 <찻집>이 그렇다.
비소설
1. 캐럴라인 냅, <욕구들>
2021년 한해 알라딘에서는 캐럴라인 냅의 글이 꽤 사랑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냅의 작품을 여럿 읽어봤지만 딱히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가 이 작품에서는 아하, 오호라, 했던 기억이 난다. 거식증을 앓은 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여성들에게 당신의 욕망은 정당하다고 해방을 선사하는 과정은 눈부시고 명민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내게 국민 서평 대상을 안겨준 효자 책이라능.
2.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이 책이 큰 사랑을 받을 때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보관함에 담아두곤 나중에 한번 읽어보지 뭐~ 했다는. 어떤 이에게는 너무 쉽고 평범하고 나이브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누구나 어린이와 어린 시절을 글로 쓸 수는 있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면서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온전하게 존중하면서 그리기는 쉽지 않다. 어린이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해주는 책.
3. 서현숙, <소년을 읽다>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감동과 깨달음이 클 때, 그 책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소년을 읽다>가 그랬다. 이 책의 소재도, 내용도 왠지 뻔해보이지만, 그 뻔함이 왜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오던지. 이 책은 무엇보다 ‘책의 힘’을, ‘사람의 힘’을 세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4, 남보라, 박주희, 전혼잎, <중간착취의 지옥도>
한때 이런 종류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터라 그래도 남보다는 조금 더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참혹한 노동의 세계가 존재할 줄이야. ‘중간착취’라는 용어로 온갖 착취를 당하고 있는 파견용역 노동자의 지옥 같은 삶을 한국일보 기자들이 폭로하고 있다.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또 다른 노동자들의 착취를 ‘능력주의’로 환원해 그 차별과 착취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5, 존 오코넬, <데이비드 보위의 삶을 바꾼 100권의 책>
순전히 데이비드 보위 팬이라서 즐겁게 읽었다. 보위의 독서 목록을 보면 실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책을 읽었기에 그런 음악과 예술이 가능했구나 싶어지기도 하고, 와 이런 책까지 읽었어? 놀라게 되는 목록도 있다. 보위가 직접 쓴 글들이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는.
상/하반기 모두 합해서 2021년의 책 딱 열 권만 꼽았다!
1.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1~3>
전율전율전율전율전율, 오, 신이시여 어찌하여 자우메 카브레를 이제야 알게 하셨나이까?!
2,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올해의 거짓말쟁이& 올해의 안타까운 소녀 그들의 숨막히는 숨바꼭질
3.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시간은 밤>
올해의 러시아 여성 작가
4. 아글라야 페터라니,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올해의 발견. 작가는 왜 그토록 일찍 세상을 떠났는가.
5. 미시마 유키오, <봄눈>
영원한 애증의 대상 미시마 유키오. 그의 붓에는 문장의 신이 붙어 있는 게 틀림없구나.
6.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올해의 재발견 마르그리트 뒤라스, 올해의 멋진 언니상을 조제프의 연인에게.
7. V.S. 나이폴, <자유 국가에서>
올해의 재발견22222 나이폴
8. 앨런 홀링허스트, <스파숄트 어페어>
새로운 애증의 대상 앨런 홀링허스트
9.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올해의 단편 대가 애니 프루.
10. 나딘 고디머, <거짓의 날들>
올해의 ‘나는 소망한다 재출간’
2021년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말이 필요 없는 현대의 고전. 이 세상의 어떤 작가는 이런 작품을 쓰는구나! 읽으면서 좌절했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고 읽고 나서 감동했고, 10년 주기로 한 번씩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와와, 감탄하고, 전율했던 적이 얼마만이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