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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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마지막 날 라오서의 <찻집>을 읽는다. 120쪽 남짓의 짧은 작품. 어젯밤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잠들어 아침 출근길에 읽는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소시민들 삶은 왜 이다지도 힘겨운가. 영하 10도 가까이의 이 추운 날에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 밥벌이를 위해 나서는 이들의 모습이 <찻집>의 인간군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 그래도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은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껏 말할 자유가 있지 않은가? 허나 라오서의 <찻집>속 유태찻집에는 찻집 곳곳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나랏일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그것도 한두 해도 아니다 거의 50년 가까이 이 글귀는 찻집에서 떨어져 나갈 줄 모른다.

<찻집>은 1890년대 말부터 거의 50여 년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청나라 끝 무렵, 무술정변 시기부터 중화민국 초기와 항일 전쟁 승리 이후 중요한 세 역사 시기를 배경으로 중국의 격변하는 역사 흐름과 그로 말미암아 피폐해지는 민중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첫 시작 부분에는 등장인물들이 거의 4쪽 가까이에 소개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을 극이 진행되는 동안 잊거나 헷갈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태찻집’ 주인이자 <찻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왕이발’을 비롯해 찻집 단골 송대인, 상대인, 아편쟁이 ‘당철취’, 중매쟁이 ‘유마’, 건달두목, 찻집 건물주 ‘진중의’, 환관 우두머리 ‘방태감’, 아편쟁이 ‘당철취’의 아들 ‘소철취’, 중매쟁이 ‘유마’의 아들 ‘소유마’ 등등 캐릭터가 생생하고 인물마다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 금세 극에 몰입할 수 있다.  

제국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 나라에서는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개혁을 실시하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북경의 소시민들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간다. 찻집에 모여 차를 마시면서 별것도 아닌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패싸움을 하기도 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부는 딸을 팔려고 찻집을 기웃거리고, 환관인 방 태감은 가난한 농부의 딸을 사서 아내로 삼으려 하고, 그 중간에서 중매쟁이 ‘유마’는 잔뜩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 2막과 3막의 배경도 여전히 찻집이다. 세월도 흐르고 찻집을 오가는 인간군상도 조금씩 달라지지만 격변하는 세상에 비해 그 찻집을 찾아오는 이들의 삶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아질 줄 모른다. 특히 세월이 흐를수록 유태찻집은 나날이 형편이 나빠지기만 한다.

왕이발은 자기 찻집을 시대에 맞게 ‘개량’하면 좀 더 나아지리라 생각하며 애를 쓰지만 그것은 그저 그의 소망일이다. 군벌 전쟁 속에서 찻집은 점점 기울어 가고 찻집을 찾아오는 이들은 예전에 비해 도덕적으로도 타락해 인신매매를 일삼거나 탈영병 둘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는 수작도 거리낌 없이 의논한다. 그런 와중에 3막에 이르러서는 국민당 세력과 결탁한 외세(미군) 세력까지 들어오면서 세상은 점점 자본주의의 모순까지 뒤엉켜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찻집을 찾는 소시민들의 삶은 더욱 가열차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런 중에도 이 찻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나랏일은 이야기하지 맙시다’란 구절이니, 정치색이 서로 달라 나랏일을 이야기하다 싸움이라도 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섣불리 나랏일을 입에 담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목숨을 잃는 이들이 50년 내내, 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계속 있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바, 그 한마디가 중국 사회의 경직성을 이 한마디로 알 수 있다.


왕이발 : 난 평생 어린 백성으로 살았어요. 누구든 보면 예를 올리고, 절하고, 읍하고, 그저 애들이나 잘 커서, 얼지 않고 굶지 않고, 병 안 나고 살기를 바랐죠! 그런데, 일본 놈들이 있을 땐 둘째 녀석이 도망 다니느라, 마누라가 그렇게 아들 생각으로 애를 태우다 갔고! 어렵사리 일본 놈들이 물러가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웬걸요? (쓸쓸히 웃는다.) 허허, 허허, 허허!
진중의 : 일본 놈들이 있을 땐 무슨 합작이니 하면서 내 공장을 먹어 치우더니, 우리 정부가 들어서자, 공장은 어느새 반동의 재산이 되었더군, 창고 속에 있던 그 많던 물건 다 없어졌지!
왕이발 : 개량, 난 그래도 늘 개량하느라 애썼어요. 남에게 처지지는 않으려고요. 차만 팔아 안 되겠기에 하숙도 쳐보고 하숙이 없어지자 평서도 시켜 보고, (<찻집>, 111쪽)


잘 먹고 잘 살려는 욕심이 있기에 어느 정도 장삿속도 있지만 그렇다고 자기보다 형편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냉정하고 외면하지도 못하는 왕이발은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하고 선량한 인물이다. 그와 말이 잘 통하는 찻집 단골 송대인, 상대인도 비슷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그들이 젊은 시절부터 거의 일흔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환관이면서도 크게 위세를 부리는 방태감이나 아편쟁이 당철취와 그의 아들, 중매쟁이와 그의 아들 등 도덕적으로 타락하거나 그런 세력에 빌붙어 자기 몫을 챙기는 자들은 자자손손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독자는 인생의 모순과 비애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아편쟁이의 아들인 소철취가 ‘도교’ 사제로 교주에 오를 꿈을 꾸며 큰소리를 떵떵 치는 모습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마냥 우울하고 암담한 것은 아니다.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이지만 나름 그 삶을 웃어넘기려 애쓰고, 그러다 보니 극은 희비극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대 위에 올라 서민들의 사랑을 받은 게 아닐까.   

라오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동분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뒤 자살(타살 의혹도 있다)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라오서가 만일 좀 더 오래 살아서, 아니 문화대혁명 시기 이후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망명해 이 작품을 4막으로 늘려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다루었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한결 더 비극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그때도 물론 유태찻집 곳곳에는 이 문장이 붙어있을 것이다. “나랏일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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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31 16: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출판한 민음사세계문학 희곡이군요~! 리뷰를 보니 ‘나랏일은 이야기 하지 맙시다‘ 라는 문장이 무섭게 느껴지네요. 그러고 보니 표지도 좀 우울하고ㅎㅎ

하루만에 읽고 리뷰 뚝딱 쓰시다니 왠지 저녁 술(?) 약속 때문인거 같은 느낌 ^^

잠자냥 2022-01-01 01:58   좋아요 3 | URL
핫! ㅋㅋㅋ 맞습니다. 지금까지 술 마시다가 이제야 이 댓글 봅니다! ㅎㅎ

Falstaff 2021-12-31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흠. 이름이 많이 나긴 했지만 사실 라오서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별 다섯이라. 이거 점점 솔깃해집니다.

잠자냥 2022-01-01 01:59   좋아요 0 | URL
ㅎㅎ 폴스타프 님은 별 넷 예상해봅니다.

독서괭 2022-01-01 08:31   좋아요 0 | URL
엉?? 폴님 이름 바꾸셨어요? 아예 골드문트로?? ㅋㅋㅋ

Falstaff 2022-01-01 10:2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벌써 몇 달 전에 제 집 문패에 2022년 부터 골드문트로 개명을 하겠노라 광고를 했었는데, 안 보신 모양입니다. 사실 골드문트가 늙으면 폴스타프처럼 될 거 같지 않으셔요? 그래 저도 아무 거리낌 없이 더 젊은 시절의 이름을 찾기로 한 겁니다.
물론 잠자냥 님을 비롯한 서재친구분들의 성원도 있었습지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1-01 11: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해 아침부터 큰 웃음 준 그대 골드문트여, 복 많이 받게나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1-01 21:24   좋아요 0 | URL
아니, 골드문트 님! 이 되셨군요! 반갑습니다!

coolcat329 2021-12-3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작가 마지막이 ㅠㅠ 라오서 이름만 들어봤는데 이런 슬픈 사연이 있는줄 몰랐어요.

잠자냥 2022-01-01 02:00   좋아요 1 | URL
휴… 작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면 참…. 광기의 시대는 무섭습니다.

coolcat329 2022-01-01 14:57   좋아요 1 | URL
위화 <형제>인가...작가의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와요.
유럽이 400년 동안 겪은 변화를 중국은 40년 동안 겪었다는... 끔찍합니다ㅠㅠ

독서괭 2021-12-31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랏일은 이야기하지 말라니.. 우리의 군부독재 시절 분위기가 50년 내내 있었다는 거네요. 어휴 😣

잠자냥 2022-01-01 02:00   좋아요 1 | URL
제가 보기에 중국은 어쩌면 지금도 그런 거 같습니다.

mini74 2022-01-0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글 읽고나면 다 읽고싶어지고 막 다 가지고 싶어지는 ㅎㅎ 자냥님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새해 복 마니 받으세요 ~~

잠자냥 2022-01-01 02:02   좋아요 2 | URL
어이쿠 그런 말씀이야말로 가장 큰 칭찬아닌가요! ㅎㅎ 미니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실 12월 31일 밤 11시 59분 전에 저도 그 올해의 책 페이퍼 쓰려고 했는데 술 취한 바람에 그만 ㅋ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2-01-01 00: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히야. 역시 마지막날까지 긴 리뷰 올려주는 리뷰대왕 잠자냥님. 해피해피뉴이어~~~ 새해에도 남친이랑 냥이들이랑 행복한 삶 꾸려가시고, 플친들에겐 명품 리뷰 계속 쏘아주시와요.^^ 별 다섯이라 또 낚시질하고 갑니당^^

잠자냥 2022-01-01 02:05   좋아요 3 | URL
올해의 책 페이퍼를 쓰느냐 리뷰를 쓰느냐 고민하다가 아직 올해는 끝나지 않았다!! 리뷰를 쓰자 했는데 이제 새해네요! ㅎㅎ 책읽기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책 많이 만나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