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바스 - 이 땅의 손님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요제프 로트 지음, 남기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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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갱생은 가능할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획기적으로 변모할 수 있을까? 내가 인간에 대해 기대치가 별로 높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인간의 갱생 가능성을 그리 믿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비롯해 사람은 타락하기 쉽다. 아주 악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자잘한 타락, 그러니까 인간은 대개 몸이 편한 것과 눈앞의 이득을 먼저 좇는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보다는 일단 먹고 누워서 뒹굴거리기 좋아하는 게 대다수 인간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나쁜 버릇이나 습관, 자기를 비롯해 때로는 타인에게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중독 등등이 누구에게나 한 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나쁜 습관을 끊고 자력으로 갱생한다!? 그러기는 참 쉽지 않다. 하물며 나쁜 인간이 악한 짓을 하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한다..... 이것은 거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나 영화를 그렇게 보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로서의 문학, 판타지로서의 영화. 거기서 얻는 카타르시스....

요제프 로트의 <타라바스-이 땅의 손님>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타락한 인물은 ‘타라바스’이다. 타라바스는 러시아 변방 갈리치아(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을 다니다 중퇴한 청년이다. 혁명 모임에 가입해 총독 저격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풀려나온 그는 아버지가 러시아 황제와 인연이 있는 덕분에 장교 계급을 쉽게 달지만 엄격한 아버지는 아들이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것이 끝내 못마땅하여 타라바스를 미국으로 쫓아내버린다. 여기까지의 그는 그 또래의 미숙하고 치기 어린 남자로만 보인다. 집안 부유하고 부모 잘 만나서 고생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 미국으로 쫓겨났다지만 몇 년 자숙하면 부모가 다시 러시아로 불러들여 장교 신분으로 호의호식하고 살겠지 싶은 그런 남자.

그런데 이놈 참 웃긴 게 성질이 지랄 맞은 것인지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흥청망청 사는 게 너무 잘 맞는 것인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뉴욕에서 ‘카타리나’라는 여자 친구도 사귀면서 그럭저럭 방탕하게 잘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미숙하고 원초적 욕망만 머릿속에 꽉 찬 인간이 질투에 눈이 멀어 사고를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카타리나를 딱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본인은 사랑한다고 착각) 자기 소유물로 생각해 카타리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일 것이라 의심하던 남자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행사하고 마는 것이다. 겁을 집어먹고 사건 현장을 냉큼 달아나버린 타라바스. 이 양심불량 인간이 과연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갈까? 그럴 리가. 그는 죄 값을 치를 기회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급기야 러시아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러시아로 귀국(실은 줄행랑)해버린다.

성인 남자 둘이 싸웠으면 싸운 것이지 뭐 그렇게 겁에 질려 달아난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타라바스가 겁에 질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으니, 이 싸움이 있기 전, 뉴욕의 한 유원지에서 집시 여인이 그의 미래를 예언했는데, 몹시 불길하게 나온 것이다. 집시 여인은 타라바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군요! 손금을 보니 당신은 살인자이자 성인이에요! 이 세상에 당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당신은 죄를 지을 것이며 그에 대해 참회를 할 겁니다. 그걸 전부 이승에서 겪게 될 거예요.” 아아, 살인자이자 성인이 될 운명이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


그런데 여기서 잠깐, 보통의 상식적인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집시 여인이 단돈 2달러에 뭐라고 떠들어댄 말을 크게 믿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기분이 나쁘기는 하겠지만 뭐래~ 하고 애써 떨쳐버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타라바스는 안타깝게도 그 미숙한 정신으로 미신은 또 얼마나 잘 믿는 인간인지!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도 신을 믿기보다는 미신을 더 믿는다. 그러므로 그날 이후 이 집시 여인의 예언, 점쟁이의 허무맹랑한 말은 타라바스를 사로잡고 그는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급기야 이런 폭행 사건이 일어났고, 자신한테 두들겨 맞은 남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일어날 줄 모르니, 이 어리석은 남자는 상대가 틀림없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는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다(그래서 그 남자는 진짜 죽었을까? 그건 안 알랴줌).

고향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곧 전쟁터로 떠날 것이라며 의기양양해한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이때 한 번의 갱생 기회가 주어졌음을 인지할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속죄하는 심정으로 조국을 위해 싸우겠노라... 최소한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라도 보여야 마땅할 것인데 이놈은 집에 와서도 오랜만에 만난(그래서 그 사이 부쩍 성장한), 사촌 여동생 마리아를 보고 침을 질질 흘릴 뿐이다. 집에서 차려준 음식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는 마리아를 또 어떻게 해볼까 온통 그 생각뿐이다.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뉴욕 물 먹고 온 사촌 오빠가 멋있어 보였는지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다가 결국 일은 터지고 만다. 숲속에서 그러는 것도 모자라 늦은 밤에 마리아 방에 또 침입했던 타라바스- 그런데 하필이면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는 한 번 더 아들에게 불같은 노여움을 터뜨리며 귀싸대기를 갈기면서 당장 떠나라고 명령한다.

이리하여 집에 오자마자 전쟁터로 떠나는 타라바스- 타라바스의 타락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단순하고 미숙한 판단 때문에, 또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 여자들과 불같은 사랑(?)을 하다가 질투에 눈이 멀어 폭행을 저지르곤 했던 이 남자는 전쟁으로 피의 맛을 보게 되고 권력과 폭력에 본격적으로 자신을 내맡긴다. 전쟁터에서 술에 취했다가 일시적인 흥분 상태에서 살생하면서 흥분으로 몸을 떨고 또 다시 이런저런 여자들의 육체를 탐하고, 냉혈한이 되어 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성은 완전히 파괴된다. 본디 싹수가 좋지 않던 인간이 점쟁이의 예언을 듣고 난 이후로는 운명 탓을 하면서 살인과 잔학한 행위에 더 쉽게 휩쓸린 것이다.
 
점쟁이의 예언대로 이토록 타락한 인간이 ‘성인’으로 거듭나게 될까? 만일 그렇다면 그 기회는 어떻게 찾아오는 것일까? 미신을 잘 믿었던 타라바스는 유대인, 특히 빨간 머리 유대인에 관한 불길한 미신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빨간 머리 유대인이 나타나면서 타라바스의 운명은 더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간다. 이 작품은 1부 ‘고난’과 2부 ‘완성’으로 이루어진다. 고난에서는 타라바스가 타락의 끝까지 가는 장면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2부에서는 집시의 예언처럼 그의 운명이 완성되어가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그렇기에 독자는 타라바스, 이토록 철저하게 망가졌던 인물도 갱생하는가 보구나 짐작할 수 있다.

타라바스가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과정은 조금 급작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톨스토이가 떠오르기도 해서 뜬금없게도 느껴진다. 이렇게 괴로워할 줄 알았던 인간이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의아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미성숙한 인간이었기에 자신에게 내려진 예언, 운명을 믿을 수 있었고 또 그렇기에 비록 살인자로 살았을지라도 자기의 갱생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만약 그에게 집시 여인이 살인자도 성인도 되기는커녕 그저 부유한 재산을 물려받아 평범하게 배 땅땅 두들기면서 살아갈 인생이라고 말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결국 그 운명을 선택하는 것도 인간의 의지는 아닐까.


“대장님 송구스럽게도 저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타라바스의 운명을 뒤틀리게 하는 데 한 역할을 하는 유대인 ‘크리스티안폴러’는 타라바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누구도 유대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또 세상의 많은 이들 중에는 타라바스처럼 유대인에 관한 불길한 믿음이나 편견 때문에 그처럼 권력자의 위치에 올랐을 때 유대인을 박해한다. 그 믿음이나 미신이 근거도 실체도 없는 것임은 결코 의심하지 않은 채 자신의 그릇된 믿음과 판단을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선택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어떤 사람은 그 믿음이나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참회하고, 또 어떤 인간은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들)이 애초부터 이런 그릇된 믿음이나 미신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나쁜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좀 더 나았을 텐데, 인간은 나약하여 미신이나 잘못된 믿음에 더 쉽사리 현혹된다. 그래도 어느 순간 갱생의 가능성이 찾아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 또한 인간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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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22 1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의 갱생 믿으면 좀 힘들어지는거같고(그냥 버려!!) 자기 갱생은 그래도 믿고 시도라도 계속 하는편이 낫지않을까.. 날 버릴순없으니
근데 잠자냥님을 사랑할 운명으로 태어난 저는 어떡하죠?! 아무래도 갱생불가......

잠자냥 2023-08-22 13:03   좋아요 1 | URL
그런 운명을 선택하지 마시오. 인생 꼬여~~~

다락방 2023-08-2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겠다. 재미있겠어요. 그렇지만 사촌 여동생한테 침흘리는 거 보니 <혼불> 생각나서 딥빡이 오네요 ㅠㅠ 혼불에서도 사촌 여동생도 사촌 오빠에게 호감이 있긴 했지만 오빠가 강제로 그래가지고 사촌여동생 신세 망가지고 남들도 다 우스운 여자로 보고 ㅠㅠ 아무튼 호감을 품었으면 정정당당하게 떳떳한 관계가 될 수 있어야지 그것도 아니면 아주 그냥 인생 망치기 딱 좋습니다. ‘몰래‘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어딘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타라바스여, 너는 어떻게 되느냐, 어떤 삶을 사느냐.

아주 재미질 것 같고 이것은 똭 리뷰로 읽었을 때 바게트적이지 않으므로 제가 장바구니에 넣겠습니다. 흠흠.

잠자냥 2023-08-22 13:04   좋아요 0 | URL
네, 이건 바게트적이지는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타라바스가 사촌 동생 강제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음 암튼 -_-;;;
이 책 아마 골드문트 님도 곧 리뷰 올리실 거 같아요. 지난번에 저랑 비슷한 시기에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으셨다고 하심요.

건수하 2023-08-22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죽었다에 한 표!

잠자냥님 후기지만 읽다보니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성인의 길은 멀고 험한 것.

잠자냥 2023-08-22 13:3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걍 범인으로 삽시다.

독서괭 2023-08-22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 죽었다에 한 표!!
타라바스는 귀국 후에 더 가관이군요. 막 가는 것 같은데, 2부에서 갱생한다고요?? 호... 설득력있게 잘 썼으니 오별 주셨을텐데, 궁금하네요. 동시에 ‘어차피 판타지‘라는 잠자냥님 말씀이 씁쓸하고.. 그래도 가뭄에 콩나듯 한명씩은 있겠지요. 그런 인간이.. ㅠㅠ

잠자냥 2023-08-22 15:4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다들 똑똑하군요. ㅋㅋㅋ
일단 생각보다 흡인력 있게 쭉쭉 잘 읽히고요. 요제프 로트 이 작가가 저랑 좀 잘 맞는 거 같아요. 읽다 보면 좀 반하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작가 대표작은 <라데츠키 행진곡>인데요, 이제 그 책을 읽으려 합니다.....(대표작을 일단 뒤로 미루는 버릇)

Falstaff 2023-08-22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 로트가 유대인이어서 타라바스의 팔자가 그렇게 되었다...... 아닌가요? 과하게 유대스러운 작품이란 말입죠. ㅎㅎㅎ
제 독후감은 9월 5일에 올라올 겁니다만, 이거 영 기죽어서 흑흑...

잠자냥 2023-08-22 20:14   좋아요 1 | URL
로트가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다 싶기는 하더라고요. 유대인이 아닌 작가가 이런 작품 썼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바람돌이 2023-08-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갱생가능성을 딱히 높히 치지 않는 저는 왠지 읽으면 엄청 빡칠듯한 느낌인데요. ㅎㅎ

잠자냥 2023-08-22 20: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그럼 다른 책을 읽읍시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더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