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없어진 출판사의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중고책 시장의 매력이기도 하다.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케잌을 굽는 여자]라는 책이 줄거리가 잠깐 소개되었는데 너무 읽어보고 싶어서 막 찾다가 국내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좌절한 책인데 우연히 기적적으로 한 분이 중고책으로 팔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즉각 구매를 했다. 알고보니 1993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온 책이었다.
지금에 보면 좀 웃기긴한데 큰 케이크 위에 실로 데코레이션을 한 표지디자인은 꽤 신경을 쓴 느낌이다. '그것은' '원한다'와 같은 너무 솔직한 번역이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페이지가 하나 바뀌는 등의 엄청난 인쇄 실수는 있었지만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출판사에 항의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요즘 번역가라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을,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원어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 책을 다 읽는데 방해를 했지만 내가 읽어보고 싶었던 그 장면이 거의 끝에 나와서 오랜만에 꾸역꾸역 다 읽었다.
[케잌을 굽는 여자]의 원제는 [The edible woman]이다.
원서 표지를 보니 개인적으로 3번째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분명히 줄거리만 보면 굉장히 도발적인 이야기 같았는데 막상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1960년에 이런 얘기가 나오다니 하면서 놀라긴 하는데... 솔직히 요즘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캐나다 사정은 어떤지야 모르겠지만 지금 여자들도 직장을 갖는 것은 일반적이긴 해도 결혼이나 출산 등으로 일선에서 멀어지는 일도 많고, 사실 일자리를 갖는 것도 가계의 수입이 너무 적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당시와 비교에서 크게 진일보 했다고 볼 수 있을지 여러모로 씁쓸한 책이었다. 아무튼 여성들에게 가하는 사회적인 억업에 대한 목소리를 캐나다에서 최초로 냈다고 하는데서(뭐 근데 세계적으로도 꽤 빠른 것이 아닐지.) 매우 훌륭하고 용감한 작품이라 하겠다.
너무 잘된 번역을 읽어도 그렇고 이상한 번역을 읽어도 그렇고 원서를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책 중에서는 원서 자체가 만연체로 쓰는 경우가 많더라. 가독성 떨어지는 [케잌 굽는 여자]를 읽고보니 딱히 원서를 확인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일단 내용 자체가 그닥 재미는... 없다.
대학을 졸업해서 시장조사회사에서 일하는 마리안은 잘생기고 미래가 창창해보이는 피터와 약혼한 상태다. 별 일이 없으면 그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회사 동료와 상사는 곧 마리안이 그만둘 것을 예상하고 미묘한 질투와 개운하지 않은 축하를 보낸다. 반면 마리안과 같이 사는 애인슬리는 야한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아래층의 보수적인 주인집 여자와 자꾸 트러블을 일으킨다. 심지어 딱히 남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애인슬리는 마리안의 결혼 계획도 못마땅하게 여긴다. 애인슬리는 매우 트인 인물로 결혼 제도를 부정하지만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를 생각을 하고 계획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지금 생각에도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인물. 요즘도 전문직 여자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감행한다.
"오, 설명하기도 지겨운 일이야. 왜 그런 속물적인 말을 사용하니? 출산은 합법적인 거야. 그렇지 않니? 넌 고상한 체하는데, 마리안, 그런 게 이 사회를 망치는 태도라구."(p.66)
"하지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기 애들에게 물려줄 형질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아마 맹목적으로 결혼에 뛰어들지는 않을 거야. 인종은 퇴하하고 있고 그건 모두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저능한 유전자를 물려주기 때문이야. 그리고 의학은 과거의 방식처럼 유전인자들을 있는 그대로 선택하려고는 하지 않지."(p.67-68)
마리안은 회사생활과 애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런 감정으로 노이로제에 걸린 마리안은 점점 몸에서 음식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조사차로 여러 집을 방문하던 마리안은 던컨이라는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마른 영문학 대학원생 던컨을 만난다. 던컨은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부류인데 이 결혼이 잘못됐다고 여기는 마리안은 그에게 이상하게 빠져들고 만다. 아마 그가 던진 이런 말 때문이 아닐까.
"이봐요, 왜 이같은 하찮은 일을 하죠? 살찐 너저분한 부인네들이나 그런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요."
"오," 나는 고위직-아마 더 고급인- 인 시리제 나의 업무를 설명함으로써 내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는 없이 최대한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죠. 요즘 학사 학위쯤으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p.85)
인용할 말 중에 우성학적인 시선이나 직업의 귀천을 구분해 놓은 것이나 요즘 시선으로는 뜨악할만한 내용도 있지만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처럼 결혼에 몸을 던지려는 처지나 자유분방한 친구 옆에 살면서 뭔가 울컥하는 상황이라면 도덕적인 기준을 넘어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얘기들이다.
결국 도피처로 삼아 보려고 하던 던컨은 복선대로 믿을만한 인간은 아니었고..(내 기준으론 가부장적인 피터보다 얘가 완전 개쓰레기) 싸구려 모텔에서 보낸 비루한 밤을 마지막으로 마리안은 아랫집 여자와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욕실청소를 빼먹고 전화로 피터를 집으로 초대한다. 마리안은 갑자기 케이크를 만들 재료를 구입하러 슈퍼에 간다. 그리고 분주하게 케이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있는 사람, 여자의 모양으로 성형을 하기 시작한다. 알록달록하게 아이싱을 마친 마리안의 케이크는 마리안을 보고 있었고 피터가 들어왔다.
"나를 당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난 당신에게 줄 대체품을 만들었어요.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것으로요. 이것이 당신이 내내 정말로 원했던 것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포크를 드리죠."(p.400)
마침내 마리안은 음식을 떠먹을 수 있었고 피터는 당황해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온 애인슬리도 그런 기괴한 장면을 보고 아래층 여자같은 표정을 짓는다. 진짜 애아빠 대신 같이 양육해줄 남자를 찾은 애인슬리가 떠난 자리를 청소하며 던컨을 부른다. 같이 케이크를 먹기 위해서.
"아마 피터가 나를 파멸시키려 했는지도 모르죠. 아니면 내가 그를 파멸시키던가요. 또는 우리 둘 다 서로를 파멸시키려 했는지도 모르죠. 그게 어쨌다는 말이죠? 무슨 문제가 돼요? 당신은 이제 당신의 실체를 되찾은 거예요. 먹혀지는 자에서 먹는 자가 된 거죠." (p.410)
물론 내 기준 나쁜 남자인 던컨은 남은 초콜릿까지 긁어먹고 맛있다고 말한다.
소설 중간중간에 나오는 대학나온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논평과 여자의 돌발 행동에 관해 참지 못하는 남자들의 인식같은 것처럼 요즘에 와서는 어느 정도 개선된 내용도 있어서 조금 의아한 부분도 있지만 당시에는 꽤 도발적인 시선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앞의 편집부에서 서문에 쓴 내용 중에는 던컨을 꽤 옹호하는 것 같은 시선이 있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같은 대학원생 친구들보다는 현학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 깨인 남자로 나오긴 하지만 던컨은 그냥 그런 말로 여자를 자신의 유희에 이용하기도 하는, 전형적인 말 잘하는 이기적인 놈인데...? 너무 내 기준인가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책임감없는 피터보다 더 쓰레기인 것 같다.
93년 당시에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낸 출판사답게 편집부의 생각도 깨어있긴 하지만 2000년도에 오니 또 시선이 달라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들은 수동적이고 '진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은 딱히 나아지지도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여자의 형상을 한 케이크를 구워서 먹인다'는 줄거리를 보고 에로틱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약간의 실망(?)도 있었지만 사실 누구보다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먹으면서 거식증을 고치는 마리안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케이크였을 것이다. 앞뒤가 안 보이는 답답한 상황에 어쨌든 살아갈 수 있는 잠깐의 따뜻함을 주는 음식의 존재는 소중하니까. 특히 여자의 모양으로 만들어 직접 입으로 밀어넣는 자학같은 행위가 어느 순간에는 필요하니까. 자학을 하면서 땅을 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풀려본 사람이 있다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어떤 사람에게는 자학이라기보다는 여자 모양 케이크를 먹으면서 자신을 채운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국내판 [The edible woman]. 영드 스킨스에서도 인용이 된 모양인데 여기서 다시 번역이 된다면 잘 팔릴지는 미지수.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거의 초창기 작품이라 그런지 좀 전위적인(?) 느낌이 난다. 번역의 탓일 수도 있지만 다시 매끄럽게 번역된다면 나는 다시 읽어볼 의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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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리뷰라도 좀 찾아보려고 책 검색을 했는데 이 출판사인 '새와 물고기'의 당시 사장이었던 사람이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2010년 뉴웨이브 문학상을 탄 [굿바이,욘더](김장환)라는데 당시엔 국내에서 나오기 어려운 작품을 내서 나름 마니아가 있었던 출판사였다고 한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지금은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조용히 저술활동을 하는 중이라는데 관심있는 분야면 읽어봐도 좋을 듯. 리뷰를 보니 평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