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자키 쿄코의 [pink]를 읽고 나서 산 책이다. 한 권이라 [헬터 스켈터]와 함께 일본어 공부도 할 겸 굳이 원서로 구입했는데 이제는 안 보는 사람의 집에 놓고 오는 바람에 번역판으로 재구입했다. 원서가 절판되기도 했거니와 2주 넘게 기다려서 받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책은 다시 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알아서 버려 달라고 했지만 절판이 되고 보니 당장 보지 않아도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말 못했다. 우쒸, 뭐 굳이 원서로 볼 필요가 있다고. 그 사람의 성격으로 봤을 때 관계가 끊어지면서 당장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겨우’ 책 한 권 달라고 연락하면 내가 너무 미련 뚝뚝에 구질구질 해보이잖아.

하지만 오카자키 쿄코의 작품을 보고 너무 감동했으므로... 몇 장 읽지 않은 [리버스 에지]를 읽어보지 않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국어로 읽기를 잘했다. 속도가 10배는 빠르므로. (부끄럽다)

[pink]의 띠지에 “만화를 문학의 반열에 올려놨다”는 평이 있었는데, 이건 과언이 아니다. 그림이 있는 문학이다. 한때 만화를 미친듯이 읽은 사람으로서 만화를 얕잡아 보는 것도 싫긴 하지만 좋은 만화는 그저그런 문학보다는 늘 좋다. [리버스 에지] 또한 문학이다. 읽을수록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나 장면을 계속 곱씹어 보게 된다.

줄거리는 아래. 의도치 않은 스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책을 먼저 읽어보세요~

뭔가 넉넉하지 않은 동네(공단 아파트인 듯)에서 엄마와 둘이 사는 고등학생 하루나. 하루나에게는 불량한 남자친구인 간논자키가 있는데 학교에서 간논자키는 불량한 무리와 함께 심심하면 예쁘장하게 생긴 동급생 남자애 야마다를 괴롭힌다. 이 새끼 호모잖아-! 교장 할버지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

씩씩한 하루나는 적극적으로 이들을 말리면서 공식 연인인 간논자키에게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부아가 난 이들은 야마다를 더 심하게 괴롭히고, 급기야는 야마다를 묶어 캐비닛에 가두고 하교 해버린다. 하루나는 시체 안치소 같은 밤의 교정을 혼자 야마다를 구하기 위해 가고, 이를 계기로 둘은 친해진다. 이미 둘이서 남 모르게 교정의 새끼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는 사이이기도 했고. 야마다는 목숨을 살려줬다 생각한 탓인지 자신이 가진 비밀을 하루나에게만 털어 놓는다. 나 게이맞아,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애는 위장이고.

그렇게 한껏 떨은 야마다는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하루나는 심심하면 양호실에서 잠을 잤고 거기서 모델활동을 하는 고즈에를 본다. 예쁘고 마른 고즈에의 비밀은 ‘먹토’다. 고즈에는 구석진 자리에서 몰래 많은 것을 꾸역꾸역 먹고 다 토한다. 공기처럼 숨어 있던 고즈에는 간논자키가 하루나에게 억지부리는 것을 다 듣게 된다. 작년 가을, 간논자키와 함께간 여행에서 하루나는 첫경험을 했고 생각보다 이상함을 느꼈으며 이제는 간논자키가 싫어졌다. 하지만 간논자키는 더 소유욕을 느꼈는지 하루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하루나가 감싸는 야마다를 더이상 가만히 놔둘 수 없다. 야마다는 눈이 돌아버린 간논자키에게 심각한 린치를 당했고 그로 인해 둘은 학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된다. 또 하루나는 야마다를 구해준 것이다.

그래서 야마다는 비밀을 모두 하루나에게 털어 놓는다. 내 보물 보여줄까? 저녁에 잠깐 나와. 같이 풀숲으로 뒤덮힌 강변의 공터로 가자. 하필 따로 만나는 장면을 학교 아이들에게 들킨다. 그 날 저녁, 하루나는 백골의 시신을 보게 된다. 신원미상. 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알 리가 없지. 야마다는 시체를 보면서 위안을 받는다. 얻어터지고 울면서 절망했을 때 찾았던 시체는 평소 살았는지 죽었는지 헷갈리는 야마다에게 용기를 준다. 그리고 이 시체를 아는 사람이 또 한명 있다고 했다. 바로 고즈에. 고즈에도 시체를 보러 가끔씩 온다고 했다.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게 된 세 사람. 그렇다고 해도 일상은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학교 애들이 이상한 괴소문을 듣고 공터를 뒤집으러 몰려오기 전까진. 금괴가 묻어 있다나 뭐라나. 학교 아이들이 공터로 몰려와서 땅을 헤집으려 하자 이들 셋은 시체를 깊숙히 묻기로 한다. 이제 모든 걸 공유한 이들은 시체를 보며 느꼈던 첫 감상을 이야기한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하는 고즈에는 처음에 ‘꼴좋다’고 느꼈다고 한다. 사람들이 왠갖 멋진 척 다 하는데 어차피 니들도 도망칠 곳은 없어, 꼴좋다고. 한살 어리면서도, 먹은 것을 다 토하면서도 가정을 부양하는 고즈에의 감상은 이렇게 냉소적이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그들. 이제 주변인들이 문제다. 하루나의 친구, 인기쟁이 루미는 실은 간논자키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 엔조이라 생각해서인지 원래도 개차반인 간논자키는 루미에게는 조금도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간논자키의 집 안에서 불었던 폭풍을 알고 있는 사람도 루미고 간논자키의 비밀스런 사업, 형한테 있는 열등감, 그리고 하루나에게는 좀 더 조심하는 것 까지 알고 있는 것도 루미다. 공식적인 연인은 아니지만 뒤에서 할 거는 다 하고 있는 그들은 공터에서 싸움이 나고, 간논자키는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혹시 자기의 아이를 가졌을 수도 있는 루미의 목을 조른다.

새 시체가 나왔다고 흥분한 고즈에는 하루나에게 루미가 죽었다고 말하고 그들은 시체유기를 하러 공터에 간다. 하지만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혼란스러운 간논자키는 불안한 마음과 야마다와 특별한 사이였다는 질투와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을 육체관계로 해소하고자 한다. 불안과 떨림이 섞인 혼란스러운 섹스는 그 밤 몇 번이고 계속된다. 그리고 그 밤, 하루나의 방은 누군가에 의해 불타고, 남의 방에 불을 지른 그 아이는 스스로도 불태운다. 그리고 또 그 시각, 살아 걸어간 시체 루미는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 나쁜 히키코모리 언니의 역린을 건드리고 울분에 쌓여 있던 언니는 커터칼을 든다.

“참극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참극은 천천히 서서히 준비된다. 진행된다. 시시한 일상, 지루한 매일 가운데. 그것은- 그러다 그것은 풍선이 펑 터지듯 일어난다. 펑 터지듯.(p.196)”

이들에게는 여러 곳에서 참극이 펑펑 터지는 밤이었다. 간논자키와 하루나에게는 속 안에서 무언가가 끊긴 느낌이었을 것이고, 루미에게는 어쨌든 아이를 잃고 본인이 소중한 사람 취급을 못 받았던 것을 확인했던 밤일 것이고, 야마다의 위장 애인은 살인미수와 살인(자살)이 같이 자행된 밤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간논자키니까. 나한텐 간논자키가 가장 소중해. 미안해. 지금까지 말을 못해서. 응? 응?

거짓말이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거짓말을 해왔지만 이건 심하다. 가장 심하다.(p. 204)”

참극이 터져버린 밤 이후, 하루나의 방은 불타고 모녀는 공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루미는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곧 학년이 바뀐다. 고즈에는 연예계 활동으로 학교를 그만둘 것이고 하루나는 전학을 갈 것이고, 야마다의 짝사랑 선배는 학교를 졸업한다. 참극이 일어난 이후, 간논자키는 어쩐지 어른스러워졌다.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이사를 도와준다. 그리고 야마다는 이별 선물로 음악 CD를 선물하면서 이 둘은 마지막으로 같이 다리를 걷는다.

“...야마다는 까맣게 타지 않으면 사람을 좋아할 수 없어?
그렇진 않아. 나는 살아있는 와카쿠사가 좋아. 정말이야. 와카쿠사가 떠나서 정말 슬퍼.

눈물이 뚝뚝 강으로 떨어졌다. 고개를 숙였다. 야마다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소리를 죽였다. 야마다에게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새끼고양이가 죽었을 때, 큰소리를 내며 토할 듯이 울었더랬다. 그때는 너무 슬펐지만 기분은 시원했다. 지금은 괴롭다. 가슴이 그저 먹먹하다.(p.233-234)”

자의식 과잉일 수밖에 없는 10대 시절은 홀로 격정적이여서 이런 식의 드라마를 꿈꾸곤 했다. 하지만 저런 참극없이도 조금 마음줬던 사람하고 헤어지기만 해도 흔들리는 유리멘탈 소유자라서 하루나처럼 저렇게 씩씩하게 눈물을 삼킬 수도 없고 외부의 풍파에도 우정을 지킬 수도 없을 것 같다.

오카자키 쿄코의 주인공들은 겉보기엔 여리지만 속은 단단한, 어떤 불행이 와도 자신만은 꼭 지키는 캐릭터라 비극적인 결말 와중에도 늘 어떤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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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1-02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예요. 잘 지내셨나요.
뽈쥐님 새해복많이받으세요.^^

뽈쥐의 독서일기 2021-01-02 16:56   좋아요 1 | URL
어머.. 이렇게 오랜만에 왔는데..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서니데이 님도 올해 더 알차게 보내셔요~*^^*

scott 2021-01-02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뽈쥐님 2021년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로 가득채우시길 바랍니다.^.^

뽈쥐의 독서일기 2021-01-02 16:57   좋아요 2 | URL
앗 정말 넘나.. 반갑네요. 이제 다시 독서일기를 써볼까 하는데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스콧님도 올 한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보다 좋은 날 보내시길...*^^*

scott 2021-01-02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뽈쥐님 얼마나 돌아오시길 기다렸는데 깜찍한 사진에 재능 많으신 뽈쥐님 아프신데 없죠 반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