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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봉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일단 펭귄 클래식의 뛰어난 표지 디자인으로 읽는 기쁨도 배가 된다. 이런 세련되면서도 고풍스러운 디자인이라.. 가히 클래식은 클래식이다. [보바리 부인]은 이런 허영심을 갖고 읽기에 적절했다.


150년 보다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뉴스에 나온다면 욕을 줄줄이 얻어먹을 이 사건을 요약하자면 "의사 부인의 간통과 독극물 자살, 그 후 남은 빚 때문에 실의에 빠져 죽게된 의사"의 이야기다. 당시 시골 개원의의 부인이 여러 남자들과 정사를 벌이다 독약을 먹고 죽은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쓴 소설이 [보바리 부인]이라고 한다. 어쩐지.. 신문 기사 보듯이 생생하더라니. 


얼마전 간통죄가 폐지 되었다. 이제 이슬람권과 대만에만 존재한다는 이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기사에는 우려의 목소리를 한 댓글이 엄청나게 달린다. (워킹맘이었던 우리 엄마도 이제 가정주부들은 어떻게 위자료를 받는 거냐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왜 여자를 위한 대출 광고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기사에도 '누리꾼'들은 변함없이 격한 반응을 보인다.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여자 잘못 '들이면' 개고생이란 게 저런거다.. 라느니 언제들어도 뻔한 댓글은 일종의 '좋아요' 수를 많이 받는다. 사실 그보다는 어음이 더 큰 문제인데... 결혼과 생활, 권태란.. 인생이란 도무지 쉽지 않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보바리즘'이라는 말까지 낳은 이 소설의 주인공 보바리 부인, 엠마는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머리도 어느 정도 좋고 외모도 예쁘게 타고난 그녀는 별 탈없이 의사인 보바리와 결혼을 한다. 문제는 드라마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꿈꾸는 드라마는 그녀의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힘들만큼 거창하다는 것. 교육은 독이 될 수가 없다고 알려져있지만 어설픈 교육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엠마는 수녀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꽤 똑똑하게 교리 공부도 했다. 종교에 심취하는 것이 자신을 구워해주리라 생각하며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런 자신에 모습에도 잠시 빠지기도 했으나 이내 염증을 느끼고 아버지가 있는 시골로 돌아온다. 수녀원이 있던 곳은 시골보다는 번화한 곳이어서 곧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낀 엠마는 잠시 결혼이, 가사일이 이 지루함에서 자신을 꺼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변함없는 한적한 시골 생활이 이어질 뿐이었다. 안목이 높아서 예쁘게 꾸몄던 집안은 엠마의 정신이 실망하고 무기력해지자 어수선해지고 만다. 부인을 너무도 사랑하는 보바리는 이런 변화를 눈치채긴 하지만 신경증인 엠마를 배려할 뿐이다. 엠마의 머리속은 이 둔하고 촌스러운 남자에게 이미 정이 떨어졌고 죽을 날만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부잣집의 파티에 참석한 엠마는 모든 고급스러운 음식, 인테리어 용품, 옷감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춤에도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달콤한 하룻밤은 그렇게 끝나고 여전히 변화없는 시골 생활만 지속된다. 권태에 빠졌다가 갑자기 신경질만 내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그곳보다 번화한 곳인 용빌에 있던 의사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보바리 부부는 용빌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용빌은 그 전보다야 편의 시설이 많지만 화려한 파리에 비하면 한적한 곳이다. 촌스러운 사람들에 의사인 남편에 붙어서 커리어를 더 좋게 만드려는 욕심쟁이 약제사에.. 용빌이 그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엠마의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뀌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마후 출산을 하게 되었지만 출산조차도 드라마 없는 인생을 바꿔주지 못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세들어 사는 하얗고 잘생긴 레옹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정숙한 부인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서로 애만 태운다. 법 공부를 하고 있던 레옹은 그대로 파리로 가버린다.  


다시 드라마를 놓친 엠마 앞에 나타난 사람은 로돌프라는 돈이 많은 남자. 이미 여자를 '아는' 로돌프는 엠마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했지만 현재 애인도 귀찮게 굴기도 하고 이미 다른 남자의 성을 딴 마담 보바리를 처음부터 '쉽게' 만날 생각이었다. 레옹과의 플라토닉 러브와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이미 망신창이가 되어 있던 엠마는 자신의 패션 센스를 알아주고 지겨운 시골 생활에 같이 염증을 느낀다며 공감해 주는 로돌프에게 홀딱 넘어가고 만다. 승마를 핑계로 남편을 꼬드겨 당당히 로돌프의 집에 드나들며 애정 생활을 즐긴다. 로돌프와의 연애는 재미있었다. 엠마는 로돌프가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있는 남자라고 확신하고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지만 이미 엠마가 지겨워진 로돌프는 "사랑하니까 당신을 떠나요"같은 개드립을 들어놓은 편지를 보낸다. 다락에서 편지를 읽던 엠마는 순간적으로 거의 죽을 뻔 한다. 힘이 빠진 엠마는 그날 밤 마차로 자기 집 앞을 순식간에 도망가는 로돌프의 얼굴을 보고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다. 실연에 사경을 헤매던 엠마는 깨어나서도 반 미치광이처럼 정신을 놓고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누군가의 권유로 영국 오페라를 보러 가게 되는데 거기서 레옹을 만난다. 엠마는 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레옹도 파리 생활을 하면서 여자와 노닥거리며 경험을 쌓았고 이미 엠마는 부인으로서의 정숙을 버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둘은 사랑하게 된다. 엠마는 다시 활력을 찾고 남편에게 돈을 받아 레옹이 있는 곳에 피아노 강습을 배우러 다닌다. 물론 피아노 강습을 받지 않고 레옹과 애정행각을 벌인다. 둘은 사랑하지만 또 금방 그만큼 미워하게도 된다. 하지만 애정행각을 멈출 수 없다. 엠마는 지루한 생활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언제나 무리하게 돈을 써대는데다 레옹은 남자를 갑자기 잘 홀리는(?) 엠마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이런 돈은 다 엠마의 남편 샤를르에게서, 그리고 방물장수 뢰뢰가 써준 어음에서 나온다. 신용카드가 소비를 팍팍 늘이는 것 처럼 어음은 엠마의 소비를 무절제하게 만들었다. 


뢰뢰는 로돌프에서 레옹까지 엠마의 불륜 행각을 알고 있었지만 돈이 되자 소문을 퍼트리거나 하지도 않고 묵인한다. 그러다 갑자기 엠마에게 변제를 하라고 독촉하기 시작한다. 엠마는 여기에 갑자기 놀래고 환자들에게도 남편 몰래 진찰료를 청구하거나 아버지의 토지를 팔거나 한다. 물론 이런 것은 다 뢰뢰의 지시였다. 그리고 또 어느날 갑자기 등기를 보내와서 어마어마한 돈을 갚으라고 요구한다. 차압이 되고 연인인 레옹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고 옛연인인 로돌프에게도 부탁을 하지만 레옹과 로돌프가 도움을 줄 의지가 없다는 걸 느끼자 엠마는 약국에서 그녀를 흠모하고 있는 소년에게 부탁해서 비소를 얻는다.   

 


요약이라면 '여자의 불륜과 비극적인 결말' 이라고 엄청나게 간단하게도 요약할 수 있지만 '사실주의' 문학의 선두에 선 대표작으로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오히려 조연에 가깝다. 계산에 빠르고 언제나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돈에는 무서운 방물장수 뢰뢰, 제대로 된 면허는 없지만 정보에 빠르며 과학을 믿는 출세지향적인 약제사 오메(약제사가 마을 신부와 언제나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장면도 볼 만하다). 또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잘생긴 마초와 결혼했던 샤를르의 어머니가 샤를르를 사랑하는 방식이나 교양을 모르는 샤를르의 아버지의 교육방식이 충돌하는 장면도 주목할 만하다.


엠마는 처음에는 시골생활에서 벗어나려고 남편 보바리를 택했고 권태로운 시골 생활의 돌파구를 애인 로돌프로 찾으려 했으며 로돌프에게 버림 받은 처지를 레옹에게 보상받으려 했다. 만족을 모르고 드라마를 쫓아 다니다 비극적인 죽음을 택하고 주변 사람을 모두 비극적이게 만들어 버린 엠마를 욕만하고 끝내기엔 찝찝한 느낌이 든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하면 행복해진다고, 내면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생각만큼 쉬우면 세상은 이렇게 불행한 사람으로 넘치지는 않을 것이다. 주변에도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부리는 사람이 가끔 한심해 보일 때도 있지만 나도 한 때는 소비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엠마처럼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서 도피성 선택을 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엠마에게 동정도 비난도 하기 힘들었다.


엠마의 말로와 어리숙한 샤를르의 말로, 그들의 딸에게까지 이어진 불행은 씁쓸해서 슬프기까지 하다. 낙담한 샤를르를 위로해주는 사람보다는 불행한 그를 불편해하거나 거북스러워하는 사람에, 얼마 남지 않은 그의 가제를 훔쳐가는 가정부나. 워낙 외설스러운 소설로 유명했던 까닭에 예전에도 의도치 않게 평론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이래서 유명한 작품은 이미 알고 있는 느낌이 들게 된다니깐)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엠마가 왜 엠마로 적히지 못하고 보바리 부인으로 적혔는가에 대한 글이었다. 내용은 확실히 기억이 안나는데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가 자신의 의지와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모두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 지금에도 엠마는 행복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한편, 그녀의 외도를 적극적으로 돕는 방물장수(?) 뢰뢰씨의 어움 남발은 요즘 예쁘장한 연예인이 기타를 들고 '넌 여자니까~'를 노래 부르는 핑크빛 대출광고를 연상시킨다. 기사를 읽어보니 여자들이 특별히 더 변제 의지나 능력이 좋지도 않은데 광고를 하는 이유는 일종의 금융상품일 뿐이라고 관계자는 답했다는데 사실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지 않나.


사실주의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라 그런지 심리묘사가 아주 훌륭하다. 뒷표지에 적힌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했다던 작가의 세세한 묘사 능력에 감탄했다. 이래서 고전은 고전이라고 하는거지. 하지만 기대하던 외설스런 표현은 없다.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못 느꼈을 수도 있고. 


결혼 전, 그녀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랑에 응당 따라야 할 행복이 오지 않으니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엠마는 책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황홀이니 하는 것들이 정환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p.60)

게다가 그녀는 이제 무엇이건, 누구건 간에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고 때때로 사람들 모두가 옹호하는 것을 비난하고, 타락하거나 부도덕한 것을 옹호하는 등 기묘한 의견을 내놓아 남편을 깜짝 놀라게 했다.(p.104)

그러자 그녀가 읽은 책의 여주인공들이 생각났다. 불륜에 빠진 정열적인 여성들의 무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매와도 같은 그들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이제 그녀 자신이 이 이상적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긴 몽상이 실현된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을 그토록 선망해 왔는데 이제 그녀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녀의 복수심 또한 만족되고 있었다. 그동안 어지간히 고통받지 않았는가? (p. 238)

소문에 의하면 그가 아직 배 수선공이던 시절, 어느 날 밤 그가 비아리츠의 해변에서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어떤 폴란드 귀족 부인이 그에게 홀딱 반해버렸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그 때문에 파산했고 그는 다른 여자를 찾아 그녀를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이 유명한 연애 사건은 그의 예술적 명성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처세술에 능한 이 엉터리 배우는 광고 속에 자신의 육체적 매력과 민감한 영혼에 관한 시적인 문구를 잊지 않고 슬쩍 집어 넣었다.(p.322)

미소 뒤에는 항상 권태의 하품이 감춰져 있고, 기쁨 뒤에는 저주가, 쾌락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으며 최상의 키스라 할지라도 더욱 큰 관능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만 입술 위에 남겨 놓을 뿐이다. (p. 410)

그는 마치 그녀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녀의 취향과 생각에 맞추어 에나멜 장화를 사고, 흰 넥타이를 매고 콧수염에 화장품을 바르고, 그녀처럼 어음에 서명했다. 그녀는 이렇게 무덤 저쪽에서 그를 타락시켰다.(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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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러시아 고전산책 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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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아실... 톨스토이의 책에 별 3개를 주는데 고민이 있었다. 그래도 톨스토이인데! 내가 작은 그릇, 작은 이해력으로 별표를 인색하게 줬다고 비난해도 좋다. 별 두개는 읽는 동안 짜증이 일렁일렁 했던 것과 [안나 카레리나] 에서 보았던 대가가 맞나? 하는 의심으로 별 두개를 뺐다. 오히려 배신감 때문에 더 인색해 졌달까. 니가 결혼 생활을 안 해봐서 그렇지~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톨스토이가 분명 대가이긴 하지만 작품이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면서 후기 작을 대체로 추천하지 않는 걸 알 수 있는데 이유를 들어보면 '도덕기' (라고 쓰고 '꼰대기'라고 읽는다) 로 접어들면서 작품에 교훈이 들어가면서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동감한다. 읽는 동안에 짜증이 일렁일렁 한다. 


미국 유명 코미디언 크리스 락이 쇼에서 말한 멘슨 만델라의 사례를 봐도 결혼 생활은 몹시 고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결혼 생활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가장 이해가 될 것 같았던 사례라 기억한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와서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락


만델라보다 위대한 사람은 많이 없지만 만델라보다 결혼 생활을 더 오래오래 버티는 사람은 많다.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읽게 된 건 예전에 바르셀로나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라고는 해도 나이가 열살 이상은 차이가 날 듯)와 가끔 페이스북 채팅을 하다가 "요새 뭐 읽어?"라는 질문에 톨스토이 책, 이라는 힌트를 주자 바로 "크로이체르 소나타?" 라고 물었다. 오잉 그건 뭐지? 


해서, 찾아본 이 책과 베토벤의 음악. 이 음악 연주 하는 것을 보고 질투에 사로잡혀 살인했다는 이야기라... 도대체 얼마나 매혹적이고 음란한 곡이기에? 라는 생각을 하며 들었다. 역시 아름답군.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화음을 그저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고 음악이 얽히고 사람이 얽히고... 같은 음탕한 생각을 하다니! (두근두근!)


이런 기대(?)로 읽었던 소설. 남들이 비추하면 이유가 있는 거다. 서술하는 사람이 광인인 탓도 있지만 기대했던 에로틱한 분위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내 기대는 배신으로 바뀌고 비지엠은 베토벤의 [운명]. 완전 이런 띠로리~~ 로리로리로리~


물론 대가인 톨스토이 작품인데 썩어도 준치는 준치라고 어떻게 후질 수가 있단 말이냐.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이런 권태를 알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도, 어느 미친 인간의 광기 어린 묘사를 따라 책장을 헐떡헐떡 넘기며 숨 쉬기 힘듬을 느끼게 하는 것도 대가니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책, 톨스토이 입문서로는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괜히 기분만 버리면 [안나 카레리나]까지 읽기 싫게 만들 수 있으니까. [안나 카레리나]를 읽는데 중간에 다른 책을 무지 찝적거리면서 1년이나 걸렸다. 근데도 뿌듯했다. 아니면 동명의 영화라도 보시길.. 역시 남들이 추천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


배경은 어느 기차 안. 나는 기차 안의 사람들과 결혼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된다. 변호사, 귀부인 여자, 고지식한 노인 그리고 어떤 신사. 토론은 어느새 논쟁이 되고 열을 올리는 신사는 결혼에 대해 심하게 냉소적이게 얘기하다가 자신은 부인을 죽였노라 고백한다. 그 후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차 안. 모두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한다. 신사는 눈치를 채고 자리에서 물러가고 사건을 일단락 된다. 신사의 이름은 포즈느이셰프. 계속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 신사는 결국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여주겠노라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부자였고 꽤 방탕하게 생활했다. 하지만 여자를 '아는' 보통의 방탕한 청년들과 달리 자신은 결혼을 한다면 결혼 생활에 헌신하려 결심했었다 한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고 여자는 가난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결혼했다. 그리고 많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해 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아내와는 이미 증오가 가득찬 상태. 애정과 증오의 온탕과 냉탕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동물처럼 싸우기만 한다. 의견차이일 때도 있고 그냥 말을 시작해도 반박만 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권태로운 부부사이. 아이들이 있든 없든 동물처럼 싸우기만 하는데 아내는 어느날 인가 부터 피아노를 연주한다. 가끔 바이올린과 합주를 하기도 한다. 유달리 피부가 하얗고 손이 부드러운 상대 남자. 그닥 눈여겨 보고 있지 않다가 서로 죽이겠다고 싸우며 약을 먹는 등의 쇼(?)까지 벌이는 동안 애증이 극에 달해 있던 이들 부부 사이에 그가 바이올린 합주를 하러 오고...


갑자기 돌아온 포즈느이셰프는 아직도 걸려 있는 남자의 코트를 보게 된다. 침착하게 구두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그의 주머니에는 칼이 들어있다. 두 남녀가 있는 방은 별 이상할 게 없지만 그는 남자를 향해 칼을 겨누고 그를 제지하는 부인과 실갱이를 하다 결국 부인의 옆구리를 찌른다. 괴로워하던 아내는 죽으면서 '당신 뜻대로 됐지? 그래도 양육권은 다 우리 언니가 가져갈꺼야.' 같은 말을 한다. 그때까지도 미워하는 감정이 남은 포즈느이셰프. 그날 밤 아내가 싸늘한 주검이 되자 그제서야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오열한다.


이토록 결혼이 못할 짓인지 아님 미친짓 인지. 결혼제도가 이제 몇 년이냐... 아주 아주 오래 지속되는 동안에도 풀리지 않는 숙제인가봐, 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젤 친한 친구가 "나 결혼할지도 몰라" 라고 발표하자마자 사진 촬영 일정을 떡 하니 발표하고 엄마가 심각하게 나 돈 모아둔 거 있으니.. 혹시 돈 모잘라서 결혼 못한다는 말 말고 일단 엄마한테 말하라고 심각하게 선언한 오늘............ 몹시 심란하다. 이십대 후반의 새해는 이렇게 시작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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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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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책과 버리지 말아야 할 책을 구분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책을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포화상태인 책장을 보면 의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버려지는 책과 남는 책은 순전히 내 판단에 달려 있다. 판단하는 기준은 재미냐 아니냐 왠지 내 인생에 필요하냐 안 하냐이다. 방법은 다시 읽어 보는 수밖에.


몇 년전에 한 번 읽고 괴기스럼에 질렸다가 책 끝에 평론에 엘 그레코의 그림 정도를 떠올릴 수 있겠다는 평을 보고 동의의 물개박수를 친 기억만 난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 읽다가 못난 기억력에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고 4일간 질리는 표정으로 재독서를 하게 되었다.


150년 전에 발표된 '폭풍(=격정적인)사랑' 이야기인데 집착, 오해, 복수가 뒤얽혀서 몹시 거칠고 피로한 느낌을 주지만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특이한 것은 가정부 넬리의 입으로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인데 할머니가 들려주는 구수한 얘기 대신에 내용이 엽기적이라는 것이다. 드러시 크로스에 세를 살게된 록우드라는 사람이 주인인 히스클리프를 방문하려고 워더링 하이츠에 방문하는데 그 곳의 거친 날씨만큼이나 구성원들은 모두 악에 받쳐 으르렁거린다.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묶게된 록우드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묶었던 방의 전 주인인 캐서린의 환영이 꿈에 나타나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자 수상한 주인 히스클리프가 들어와 창문을 열고 몰아치는 바람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는다.

소름끼치는 경험을 한 록우드씨는 마음씨 좋고 현명한 가정부 넬리에게 두 저택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람이 몹시 부는 곳 웨더링 하이츠에 주인 언쇼는 어느 날 출처를 알 수 없는 남자아이를 하나 주워온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건강한 아이를 히스클리프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자녀 힌들리와 캐서린과 함께 자식처럼 키우려고 한다. 훌륭한 교육이 무색하게 언쇼씨의 아이들은 모두 난폭하고 잔인한 기질이 있었는데 이건 아마도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 때문에 항상 짜증이 나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힌들리는 주워온 자식에게 잘해주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상하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서로 몹시 사랑했다.

입양된 운에 무색하게 언쇼씨는 금방 운명하고 히스클리프에게는 그에게 적대적인 힌들리와 서로 사랑하는 캐서린이 남게 된다. 옛날이라 모든 권한은 아들인 힌들리에게 있었으므로 히스크리프를 몹시 미워하던 그는 자기 부인과 힘을 합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학대한다. 하지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더 돈독해지기만 한다. 어느날 드러시 크로스 저택을 방문하게 된 캐서린은 그 집 도련님인 에드거를 알게 되고 결국 둘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결혼하기 전에 캐서린은 넬리와 대화를 나누는데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결혼할 수 없어.. 걔는 뭐가 안 좋고 뭐가 안 좋고.. 린튼은 뭐가 좋고 뭐가 좋고..." 여기서 숨죽여 몰래 듣고 있던 히스클리프 퇴장. "하지만 너가 알다시피 나는 히스클리프를 목숨보다 사랑해" 이렇게 오해가 생긴 젊은 연인은 각자의 길을 가고 복수의 마음의 품은 히스크리프는 몇 년 동안 말도 없이 사라진다. (한국말만 끝까지 들어야 되는 게 아니다. 영어도 끝까지 듣는게 중요하다. 제인 오스틴도 그렇고 그 시대 영국 여류 작가들은 이런 식의 오해를 좋아하는 듯.)

몇 년 후, 복수의 마음을 품고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어쩐지 달라보인다. 그 사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힌들리는 부인이 죽은 이후로 술과 노름에 절어 살고 있다. 아들 헤이턴이 있지만 아들을 돌보지 않고 술에 절어 비참하게 살아간다. 히스클리프는 돈을 모두 갚아주고 사실상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되고 이들 남매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힌들리와 힌들리의 아들 헤이턴을 거의 바보로 만들고 에드거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 도망 결혼을 하고 애정없는 부인을 마구 학대한다. 캐서린을 비참하게 만들어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캐서린은 신경쇠약 등으로 자기를 광적으로 몰아가다 뱃속에 딸, 캐시를 낳고 죽는다. 한편,이사벨라는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 아들 린튼 히스크리프를 낳고 몰래 키우다 아들이 14살 정도가 되자 건강 악화로 죽어버린다. 그리고 캐시의 아버지 에드거도 드러시 크로스 저택과 딸 캐시, 조카인 랜튼을 지키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건강 악화로 죽는다. 워낙 약체였던 어른들이 픽픽 죽어나가자 히스크리프는 가장 잔인한 복수를 시작한다.

이미 죽은 캐서린을 아직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히스크리프는 힌들리의 아들과 캐서린의 딸,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캐시를 결혼시켜서 드러시 크로스 저택도 갖게된 히스크리프는 귀하게 자란 캐시를 마구 학대한다. 결혼의 임무를 띈 약한 아들도 곧 죽어 버리고 캐시는 팍팍한 생활에서 의지할 곳이 없이 악만 남은 여자가 되어간다. 자신의 남을 사촌을 무식하다고 놀리고 무시하며 화를 심보를 부리고 평생 일해본 적 없는 집안일까지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한 히스크리프는 며칠만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다행인지 남은 가족, 캐시와 헤이턴은 화해를 하고 관계가 급 진전되어 새로운 세상을 살 것을 암시한다.


매우 정상적(?)이고 보수적(!)인 내가 보자면 '미친 두 남녀의 개같은 사랑' 이라고도 일축해 버리기는 쉽다. 위대한 소설로 꼽히는 중에 주인공들이 이렇게 미운 소설은 없을 것 같다. 심지어 줄거리를 쓰다가 지쳐서 리뷰를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사랑꾼'들의 복잡한 사랑놀음에도 질려버렸다. 이야기도 과잉되고 감정도 필체도 모두 과잉되었지만 강렬한 서사에 왜 명작으로 뽑히는지 이해가 간다.(이 책을 쓰고 건강이 급 악화되어 죽음까지 잃었던 작가의 생애가 이해가 될 정도다.) 나도 휴양지보다는 거친 자연을 좋아하는 편이라 저택을 중심으로 바람이 몰아치는 워더링 하이츠에 갇힌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은 특별한 독서 경험이었다. '섹스 엔더 시티'의 주인공이 캐리가 아니라 실은 '뉴욕'인 것 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지만 실은 워더링 하이츠의 거친 자연, 거친 바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수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는 보지도 않았는데 제목이 참 끌린다. 열등감의 화신 히스클리프가 살아가던 힘은 건강한 신체에서가 아니라 안 건강한 복수의 정신이었던 것 같다. 용서보다 복수라는 소재를 더 좋아하는 나는 왜 이 소설이 무서울까. 망각이 안 될만큼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란 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시청하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매일 죽은 부인의 무덤에 찾아가는 늙은 남편에 대한 사연이 나올 때가 있다. 완전한 남인 우리 엄마는 혀를 찬다. 남에 말이라서 쉽게 하는 거지만 저건 병이다, 라고 단언하듯 말했다.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유품을 바로 정리하던 할머니와 엄마, 예전 남친과 맞췄던 옷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울 언니를 보면 우리집 여자들 입에서는 저런 말이 나오는 것도 그리 놀랄 것은 아니다.

방송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은 죽은 부인에 대해 무척 애틋한 감정을 가진 것을 보니 애증의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생에 자신의 부인이 된 것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할아버지들의 사연은 내게 감동적인 대신에 의아함을 자아냈다.

책을 읽고나서 흔한 질문이 떠올랐다. 쿨한 사랑과 뜨거운 사랑. 이 둘중에 뭐가 정답일까? 뜨거운 사랑은 떠나가고서도 일생에 걸쳐 애가 타야하는 것인지. 우연인지 필연인지 책 읽기를 끝내고 아니라고 생각하던 관계를 정리했다. 후회는 없지만 심란함은 남는다.




발길에 채는 것이 당연한 벌이라는 것을 아는 듯 하면서도 그 아픔 때문에 발로 찬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미워하는 사나운 똥개 같은 얼굴은 하지 마 (p.95)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p. 243)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p. 263)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것은 헤어튼이란 놈이 나를 몹시 좋아한다는 사실이지! 그 죽은 악한이 자기 자식을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무덤에서 기어 나올 수 있다 해도, 나는 그 자식 놈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 친구에게 욕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를 되쫓아 보내는 것을 재미있게 보고 있을 거란 말이야! (p.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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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에버그린북스 2
생 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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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서점을 가서 이 아름다운 삽화로 둘러싸인 이 책을 뒤적거리고 보고 있자, 엄마는 아무 말없이 이 책을 사주었다.(얼마나 책을 안 읽었으면...)  

그리고 집에 와서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읽다가 결국 예쁜 삽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생텍쥐베리는 머리 글에 어른은 자신의 친구에게 책을 바치면서 어린이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이 책을 어린이에게 바쳐야 하지만 그는 순수한 어른이기 때문에 용서해달라고. 

이런 능청에 당시 어린이었던 나는 무척 흥분하며 책을 넘겼고, 딱 봐도 뱀이 코끼리를 삼킨 그림에, 이걸 어른들은 모자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놀라서 읽다가... 어린왕자가 모험하며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읽자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주변에는 술주정뱅이도, 잘난척하는 사람도, 교수도, 집이 얼마짜리냐고 묻는 사람도, 장미도, 여우도, 바오밥나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저 삽화를 보려고 페이지를 후두둑 넘긴 것이다. 

요즘은 어린 왕자를 읽으며.. 왠지 생택쥐베리는 더 오래살았어도 이만한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거나. 그는 어쨌거나 인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가끔 그에 관한 기사를 볼 때가 있으면 너무 반가운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전쟁에서 그가 탄 비행기를 쐈다는 독일인의 증언이더라도. 아니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있는 어린 왕자 마을에 대한 기사라도. 

어린 왕자가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우화는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뭐, 어린 아이는 무조건 순수하다는 것에 100% 동의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릴 때의 나는 이 책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하는 나는 좀 때가 묻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갑자기 양을 그려달라고 말하는 어린 아이들 상상해보면 왠지 "저리가 임마"를 말할 것 같은 나를 떠올리고는 약간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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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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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인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생생하긴 하지만 곳곳에 묻어나는 자기연민의 감정이 도무지 편하게 생각되질 않아서다. 기억의 특성상,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남게 될 뿐더러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성을 지닌 작가들은 거기서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전적인 글은 자기연민일 가능성이 많다. 

요즘 다시 프랑스 여자들의 자유로운 삶이 대두되는 모양인데, 말년에 40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그의 품에 안겨 죽었다는 뒤라스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국내에 번역이 다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각본과 사회 참여활동까지 여러 분야에서 두루두루 활동했던 정력적인 이 여인은, 어떤 이에게는 동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어떤 이들 중 하나가 나였는데, 어디서 끓어 오르는 건지 에너지가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게다가 동명의 영화 [연인]에 나온 제인 마치의 청순한 차림을 90년대 완전 잘나갔던 희선이 언니와 우희진 언니가 벤치마킹 했다니, 관심이 안 갈 수 없었다. 

영화도 영화지만, 원작인 소설은.. 슬프다기 보다는 아프다는 느낌이 든다. 남들과 다른 삶을 지향하던 나에게도 읽는 이까지 고통스럽게 하는 삶은 살았던 작가에게 동정이 가기까지 했다. 프랑스 령의 베트남에 살던 꼬마 숙녀는 가난하고 불완전하고, 애착과 집착으로 뒤엉켜 있던 가족 탓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고 만다. 너무 일찍 늙어 버린 소녀는 메콩강을 건너는 배에서 부자인 중국청년을 만난다. 사실 소녀가 그를 꾀어낸 것이 맞다. 

성인도 되지 않은 백인 소녀는 식민지에서 그녀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매일 밤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않고 그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큰 오빠만을 사랑하는 미치광이 어머니,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큰 오빠, 그리고 그들에게 눌려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랑하는 작은 오빠. 가족은 소녀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고, 소녀의 중국 연인은 잠시 피난처가 되는 듯 하였다. 

어머니와 큰 오빠의 학대, 중국 연인과의 우울한 관계 속에서도, 소녀는 꿋꿋이 성장하였다. 어머니에게 경멸을 당하면서도 글쓰기를 갈망한 것을 보면, 그는 정말 글쓰는 것에 타고난 사람이었나보다. 

'누보로망'이라고 하여 어떤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여타의 소설과는 형식이 많이 달라서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한다. 뭐 본인은 누보로망이다 뭐다 하는 형식의 구애에는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는데, 고통스러운 텍스트가 아니었다면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했을 것 같다. 

여기, 한국 땅에서 붙박혀 살아 어린 시절을 외국, 이름도 생소한 곳에서 보낸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다. 뭔가 다른 경험을 갖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다소 삐뚤어진 성격이나 방황도 향수병인가 하여 그것마저 부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근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몇 개의 언어능력이나 특별한 경험이 부럽기는 하지만, 이렇게 힘든, 특히 가족들만 의지 할 수밖에 없는데 가족들까지 날 힘들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래서 급한 거 집어먹는 심정으로 도피처를 찾는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실로 오랜만에 무겁고 슬프고 아픈 글을 읽었다. 이래서 요즘은 가벼움이 미덕이라고 하나? 읽는 내내 왠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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