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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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책과 버리지 말아야 할 책을 구분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책을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포화상태인 책장을 보면 의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버려지는 책과 남는 책은 순전히 내 판단에 달려 있다. 판단하는 기준은 재미냐 아니냐 왠지 내 인생에 필요하냐 안 하냐이다. 방법은 다시 읽어 보는 수밖에.


몇 년전에 한 번 읽고 괴기스럼에 질렸다가 책 끝에 평론에 엘 그레코의 그림 정도를 떠올릴 수 있겠다는 평을 보고 동의의 물개박수를 친 기억만 난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 읽다가 못난 기억력에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고 4일간 질리는 표정으로 재독서를 하게 되었다.


150년 전에 발표된 '폭풍(=격정적인)사랑' 이야기인데 집착, 오해, 복수가 뒤얽혀서 몹시 거칠고 피로한 느낌을 주지만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특이한 것은 가정부 넬리의 입으로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인데 할머니가 들려주는 구수한 얘기 대신에 내용이 엽기적이라는 것이다. 드러시 크로스에 세를 살게된 록우드라는 사람이 주인인 히스클리프를 방문하려고 워더링 하이츠에 방문하는데 그 곳의 거친 날씨만큼이나 구성원들은 모두 악에 받쳐 으르렁거린다.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묶게된 록우드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묶었던 방의 전 주인인 캐서린의 환영이 꿈에 나타나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자 수상한 주인 히스클리프가 들어와 창문을 열고 몰아치는 바람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는다.

소름끼치는 경험을 한 록우드씨는 마음씨 좋고 현명한 가정부 넬리에게 두 저택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람이 몹시 부는 곳 웨더링 하이츠에 주인 언쇼는 어느 날 출처를 알 수 없는 남자아이를 하나 주워온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건강한 아이를 히스클리프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자녀 힌들리와 캐서린과 함께 자식처럼 키우려고 한다. 훌륭한 교육이 무색하게 언쇼씨의 아이들은 모두 난폭하고 잔인한 기질이 있었는데 이건 아마도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 때문에 항상 짜증이 나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힌들리는 주워온 자식에게 잘해주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상하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서로 몹시 사랑했다.

입양된 운에 무색하게 언쇼씨는 금방 운명하고 히스클리프에게는 그에게 적대적인 힌들리와 서로 사랑하는 캐서린이 남게 된다. 옛날이라 모든 권한은 아들인 힌들리에게 있었으므로 히스크리프를 몹시 미워하던 그는 자기 부인과 힘을 합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학대한다. 하지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더 돈독해지기만 한다. 어느날 드러시 크로스 저택을 방문하게 된 캐서린은 그 집 도련님인 에드거를 알게 되고 결국 둘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결혼하기 전에 캐서린은 넬리와 대화를 나누는데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결혼할 수 없어.. 걔는 뭐가 안 좋고 뭐가 안 좋고.. 린튼은 뭐가 좋고 뭐가 좋고..." 여기서 숨죽여 몰래 듣고 있던 히스클리프 퇴장. "하지만 너가 알다시피 나는 히스클리프를 목숨보다 사랑해" 이렇게 오해가 생긴 젊은 연인은 각자의 길을 가고 복수의 마음의 품은 히스크리프는 몇 년 동안 말도 없이 사라진다. (한국말만 끝까지 들어야 되는 게 아니다. 영어도 끝까지 듣는게 중요하다. 제인 오스틴도 그렇고 그 시대 영국 여류 작가들은 이런 식의 오해를 좋아하는 듯.)

몇 년 후, 복수의 마음을 품고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어쩐지 달라보인다. 그 사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힌들리는 부인이 죽은 이후로 술과 노름에 절어 살고 있다. 아들 헤이턴이 있지만 아들을 돌보지 않고 술에 절어 비참하게 살아간다. 히스클리프는 돈을 모두 갚아주고 사실상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되고 이들 남매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힌들리와 힌들리의 아들 헤이턴을 거의 바보로 만들고 에드거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 도망 결혼을 하고 애정없는 부인을 마구 학대한다. 캐서린을 비참하게 만들어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캐서린은 신경쇠약 등으로 자기를 광적으로 몰아가다 뱃속에 딸, 캐시를 낳고 죽는다. 한편,이사벨라는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 아들 린튼 히스크리프를 낳고 몰래 키우다 아들이 14살 정도가 되자 건강 악화로 죽어버린다. 그리고 캐시의 아버지 에드거도 드러시 크로스 저택과 딸 캐시, 조카인 랜튼을 지키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건강 악화로 죽는다. 워낙 약체였던 어른들이 픽픽 죽어나가자 히스크리프는 가장 잔인한 복수를 시작한다.

이미 죽은 캐서린을 아직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히스크리프는 힌들리의 아들과 캐서린의 딸,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캐시를 결혼시켜서 드러시 크로스 저택도 갖게된 히스크리프는 귀하게 자란 캐시를 마구 학대한다. 결혼의 임무를 띈 약한 아들도 곧 죽어 버리고 캐시는 팍팍한 생활에서 의지할 곳이 없이 악만 남은 여자가 되어간다. 자신의 남을 사촌을 무식하다고 놀리고 무시하며 화를 심보를 부리고 평생 일해본 적 없는 집안일까지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한 히스크리프는 며칠만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다행인지 남은 가족, 캐시와 헤이턴은 화해를 하고 관계가 급 진전되어 새로운 세상을 살 것을 암시한다.


매우 정상적(?)이고 보수적(!)인 내가 보자면 '미친 두 남녀의 개같은 사랑' 이라고도 일축해 버리기는 쉽다. 위대한 소설로 꼽히는 중에 주인공들이 이렇게 미운 소설은 없을 것 같다. 심지어 줄거리를 쓰다가 지쳐서 리뷰를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사랑꾼'들의 복잡한 사랑놀음에도 질려버렸다. 이야기도 과잉되고 감정도 필체도 모두 과잉되었지만 강렬한 서사에 왜 명작으로 뽑히는지 이해가 간다.(이 책을 쓰고 건강이 급 악화되어 죽음까지 잃었던 작가의 생애가 이해가 될 정도다.) 나도 휴양지보다는 거친 자연을 좋아하는 편이라 저택을 중심으로 바람이 몰아치는 워더링 하이츠에 갇힌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은 특별한 독서 경험이었다. '섹스 엔더 시티'의 주인공이 캐리가 아니라 실은 '뉴욕'인 것 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지만 실은 워더링 하이츠의 거친 자연, 거친 바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수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는 보지도 않았는데 제목이 참 끌린다. 열등감의 화신 히스클리프가 살아가던 힘은 건강한 신체에서가 아니라 안 건강한 복수의 정신이었던 것 같다. 용서보다 복수라는 소재를 더 좋아하는 나는 왜 이 소설이 무서울까. 망각이 안 될만큼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란 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시청하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매일 죽은 부인의 무덤에 찾아가는 늙은 남편에 대한 사연이 나올 때가 있다. 완전한 남인 우리 엄마는 혀를 찬다. 남에 말이라서 쉽게 하는 거지만 저건 병이다, 라고 단언하듯 말했다.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유품을 바로 정리하던 할머니와 엄마, 예전 남친과 맞췄던 옷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울 언니를 보면 우리집 여자들 입에서는 저런 말이 나오는 것도 그리 놀랄 것은 아니다.

방송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은 죽은 부인에 대해 무척 애틋한 감정을 가진 것을 보니 애증의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생에 자신의 부인이 된 것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할아버지들의 사연은 내게 감동적인 대신에 의아함을 자아냈다.

책을 읽고나서 흔한 질문이 떠올랐다. 쿨한 사랑과 뜨거운 사랑. 이 둘중에 뭐가 정답일까? 뜨거운 사랑은 떠나가고서도 일생에 걸쳐 애가 타야하는 것인지. 우연인지 필연인지 책 읽기를 끝내고 아니라고 생각하던 관계를 정리했다. 후회는 없지만 심란함은 남는다.




발길에 채는 것이 당연한 벌이라는 것을 아는 듯 하면서도 그 아픔 때문에 발로 찬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미워하는 사나운 똥개 같은 얼굴은 하지 마 (p.95)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p. 243)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p. 263)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것은 헤어튼이란 놈이 나를 몹시 좋아한다는 사실이지! 그 죽은 악한이 자기 자식을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무덤에서 기어 나올 수 있다 해도, 나는 그 자식 놈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 친구에게 욕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를 되쫓아 보내는 것을 재미있게 보고 있을 거란 말이야! (p.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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