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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이야기
모로하시 데쓰지 지음, 조성진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철학적인 언명의 연속으로 이어진 <노자>가 글자와 구절의 풀이에 힘을 싣는 이론서라면,
우화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장자>는 풀이하기가 쉽지 않다.
이야기에 너무 무게를 두면 그저 우화집에 머물고 말고,
그렇다고 장자의 사상을 캐내기에는 이야기가 난삽하다.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모로하시 데쓰지의 <장자 이야기>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으면서, 장자의 사상을 공맹의 사상과 비교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두께가 두꺼운 책들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이 두려움을 불사하고 내가 봄방학동안 빌려온 책이 이 책과 <감각의 박물학>이다.
그런데, 사실은 두께가 두꺼운 것 외엔 별로 두려울 일 없는 듯 하다.
이 책에 얻어 맞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 책의 장점은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얽어주는 역할을 저자가 잘 하고 있다는 점과
사이사이에 장자의 이야기가 허황한 점을 공자와 비교해서 알려 주기도 하고,
그렇지만 장자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하기도 한다.
때론 노자를 인용하기도 하고, 절묘하게 이야기를 끌어 대기도 한다.
원래 장자란 텍스트는 사물에 빗대어 얘기하는 우언(寓言), 남의 권의를 빌어다가 자신의 얘기에 힘을 싣는 중언(重言), 비었다가 차는 술잔처럼 이렇게 얘기했다 저렇게 얘기하는 치언(梔言)의 형식이 마구 뒤섞여 있어서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교훈적이라고 하기에는 변설이 강하고, 역설이 많아서 곤란을 겪게 된다.
동양의 고전들이 지나치게 교훈적인 측면에 완전히 파격을 부른 셈이다.
이 책에선 그 변설과 교훈의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해내고 있는 것이 저자의 힘이다.
<양생>의 방도로 장자를 읽을 수도 있지만, <삶의 철학>으로서 장자를 택할 수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치 필요없는 군살이나 혹이 붙어있을 뿐이고, 죽어야만 이것이 말끔히 사라진다.
삶을 죽이는 자에게 죽음은 없고, 삶을 살려고 애쓰는 자에게 삶은 없다.
이런 철학적인 측면은 불교에 닿아있다고도 하겠다.
그렇지만 보통 <장자>라는 텍스트는 노자의 후예로써, <소요유>에 처하며 <무하유의 이상향>을 지향한다고 읽히기도 한다. 무하유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아득히 넓어서 아무 것도 없는 세계. 크고 작음, 옳고 그름, 삶과 죽음의 차별이 없는 세계. 이건 불교의 <我相>을 없애라는 말과도 유사한 생각이기도 하다.
춘추 전국 시대는 <삶>의 시대라기 보다는 <죽음>의 시대였다.
고우영의 십팔 사략에는 얼마나 도너츠 표식을 단 주검들의 그림이 많이도 그려져 있는지...
이 죽음의 시대를 넘어 <살 수 있는 처세술>로서의 책이 장자이기도 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을 때에는 굳고 강해진다. 살아있는 만물과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모든 것은 말라 딱딱하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산 것이라는 노자의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에서 풀어낼 따름이다.
마음을 거울과 같이 쓰면 至人이라 할 만하다. 거울은 지난 일을 좇지 않고 장래를 앞당겨 걱정하지 않는다.(不將不逆) 요즘 서양인들도 명상을 배운다고들 하는데, 마음의 다스림, 마음 공부의 요체는 이것 아닐까? 지난 일은 거울에 없다. 장래도 거울에 없다. 지금 여기나 살아라...
마음을 비우면(虛) 맑아지고, 맑아지면 고요해 진다.(靜)
한국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스포츠로 양궁과 쇼트트랙이 있다.
이들의 기예는 어찌하여 그리 뛰어난 것일까? 그 답은 장자에 있다.
진정한 경지에 오르려면 활을 쏜다든지, 칼을 쓴다든지 하는 생각을 잊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완전히 허심의 상태가 되어야 진정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금메달을 따려고, 추월을 하려고 조바심을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전을 연습처럼... 하는 말처럼, 연습에서 <지옥을 넘나드는 훈련>을 거친 자들이 아니고서는 이 허심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의 화두는 <양생>이다. 영어로 웰빙이라 한다.
잘 먹고 영양이 과다하고 스트레스가 많아 생기는 질병들.
길어지는 노후 생활과 맞물려 <양생>은 최고의 지향이 된다.
장자는 말한다. 인생 전체를 보신해야 한다고.
보통 섭생이라 하면 건강을 지키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노장의 섭생은 그런 생각을 뛰어 넘어 <삶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고 유유히 살아가는 양생법이다.
내가 읽은 철학적 측면, 전국 시대 노장 사상의 측면, 처세나 마음 공부, 양생의 어떤 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장자>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우언들은 궤변으로 읽고 욕할 수도 있지만, 여느 철학서가 지닐 수 없는 <역설적 직관>이 장자엔 있다. 그래서 소요하고 싶을 때, 장자의 한 마디를 읊조릴 수 있을 것이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고,
오리 다리가 짧다고 덧대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