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를 리뷰해주세요.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사계절 출판사에게 각별한 책일 것이다.
조선일보에 연재와 중단을 반복하던 이 작품을 1985년 9권으로 출간했지만, 대머리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활판마저 압수당하는 등의 수난을 겪었던 것으로 들은 적이 있다.
1991년 다시 10권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책을 텍스트로 삼았다. 

벽초 홍명희는 고향이 충북 괴산이다.
그래서 괴산에서는 '벽초 홍명희 문학제' 같은 의미있는 행사를 열려 하였으나,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산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것이 이 나라의 한계다. 

고미숙의 임꺽정 읽기는 우선 재미있다. 

전혀 잰체하지 않는 문체로 임꺽정에 깃들인 벽초의 혼을 날줄과 씨줄을 풀어내는 느낌으로 읽어주는 이야기를 듣는 맛은 꽤나 쏠쏠하다. 

벽초의 임꺽정은 한 마디로 <은근한 멋>이 가득한 책이다.
그 책에 담긴 은근한 정서를 한 번 읽고 흠뻑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도 한 이십 년 전에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장길산 같은 책과는 또다른 감칠맛이 가득한 책이었다고 기억이 남아있다. 

은근한...의 속에는 <화끈한>, <적나라한>, <고상한> 의 반의적 의미가 담겨있다.
아주 은근한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을 잘 살려 쓰는 것도 정말 구수하고, 모시 적삼 속에 살풋 비친 아낙의 살빛처럼 야하지 않은 속에서도 사내들 속마음을 아릿하게 구워삶는 사랑이야기도 일품이다. 

<공부>로 <인생역전>을 모토로 삼은 고미숙이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의 측면에서 특별한 기준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의 글쓰기가 그야말로 요즘 자동차계에서 유행인 <하이브리드 식>이다.
임꺽정이란 텍스트를 <다종 다양한 잡종>의 집합체로 읽은 뒤,
그것들을 다시 헤쳐모여! 시킨 것이다.
어떻게 분류하여 정리하든 간에 벽초의 이야기는 "씹어본 자맛이 아는 맛"이다. 

내 기억을 나도 믿을 수 없지만,
대하소설의 별점을 매긴다면...
이병주의 지리산이 별 다섯
최명희의 혼불이 별 여섯
조정래의 한강이 별 여섯 반
박경리의 토지가 별 일곱
조정래의 아리랑이 별 여덟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별 아홉
황석영의 장길산이 별 아홉
홍명희의 임꺽정이 별 열 개 줘도 안 아깝다. 

고미숙의 하이브리드식 독서 일지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백수들의 공동체를 <케포이필리아>란 정체불명의 용어를 써가면서 맘껏 칭찬하고 있다.
공부를 통해 백수의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자유인이 되고픈 그의 소망이 이땅의 인문학적 어둠 속에서 환한 불빛이 되길 빈다.
하이브리드란, '한 쪽의 멸종'을 전제로 한 '한 쪽의 융성'을 거부하는,
요즘의 실용적 학문에 의한 인문학의 <포괄적 타살>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삶의 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의 발버둥들이 갈수록 결이 가다듬어 지는 듯 하여 마음이 든든하다. 

운명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고 니체가 말했다듯이,
그의 하이브리드식 독서를 따라 읽는 행운이 길섶마다 <인삼뿌리처럼> 숨어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유행하는 광고처럼 Wow에서 Ohlle!!!로 진보하도록... 

괴물과 싸우는 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도 곁들였는데,
한국의 서양사상사를 다룬 '윤리와 사상' 교과서엔 '니체'가 없다. ㅠㅜ
이 땅의 괴물은 밑도끝도 없이 곳곳에서 등장하여서... 도무지 그 본체를 찾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2008년 미친개들의 미친듯하던 물대포 앞에서 '온수'를 외치던 발랄함으로,
괴물이 되지 않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사상적 궤적을 더듬어 공부하는 일도 중요한 발걸음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래와 같이 미치게 하는 소식을 들으면, 괴물의 존재가 곳곳에 숨어 서식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벽초 홍명희 관련행사 잇따라 무산 뉴스>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chungcheong/view.html?cateid=100007&newsid=20090725060403952&p=newsis 

 써비쓰~~

사계절 출판사의 <벽초 홍명희  독서 감상문 대회 감상>

http://www.sakyejul.co.kr/event/hong/hong_4.as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를 쓴다는 일은... 휴대 전화라는 편리한 이기에 묻혀 이젠 잊혀져버린 일이 되어버렸지만... 글자가 생긴 수천 년 전부터, 현대까지 ... 서로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며 정을 나눌 수 있던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널찍하게 펼쳐진 편지지를 책상앞에 놓고는... 우선 한숨을 한 번 몰아 쉬고... 

머릿 속에 든 것들을 속살거리고 풀어 내노라면, 상대방에 대한 정이 새록새록 새삼 솟구치는 법이다. 

 

퇴계 1501-1570   고봉1527-72  

스무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이 두 사람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의 기틀을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 성리학은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큰 틀이 되어 사고를 넓히기도 하고 제한하기도 하는 일이다. 서로 묻고 답하며 의문을 풀어가는 글들은 아름답다.

조선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세뇌시키는 데 그만큼 큰 공력을 들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기도 했다. (아, 한 세계관을 퍼뜨리기 위해서 문자까지도 창제한 조선이여!) 그리하여 유교적 가치관이 가득 담긴 소학을 언해하고, 삼강행실도를 그림까지 넣어서 출간했으며, 두보의 우국충정이 담긴 시들의 언해사업까지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성리학적 세계관이란 관념론으로 무장하고 서구 문명의 벼락을 막아내려던 조선 후기의 흥선대원군의 바가지는 단박에 깨져버리고 마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책의 편지글들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부러웠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면서도 '지음'인 듯,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황은 정도전 실패의 유교 이상주의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정통으로 인정하며, 중국 근대 사상사 양계초는 공자급의 이부자로 부를 정도였다. 정도전은 세조가 다섯 번 찾았으나 절개를 버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의 편지글들에서 두고두고 읽고픈 부분들을 베껴 둔다.

44 이치에 정밀하지 못하고 의지가 굳지 못하면 스스로의 결정이 마땅함을 잃게 됨을 면하기 어렵다.

45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고,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48 매번 사색하다가 의심이 생겨 여쭈어볼 곳이 없을 때면, 문득 선생을 더 이상 뵐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말없이 아픔을 삼키려 하지만 스스로 그칠 수가 없습니다.

82 하고 싶은 말을 만 분의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83 산천이 막혀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 답장도 제대로 이을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간절합니다.

107 검소함을 덕으로 삼아 자취를 감추는 것이 비로 처세의 법이지만, 몸을 세우고 도를 믿는 것도 실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거취의 어려움은 한때이지만, 처세의 마땅함은 후세에 널리 전해지는 것이니, 이것으로 헤아리고 결단하신다면 그 속에 반드시 하찮은 것과 소중한 것,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있을 것.

112 앞뒤를 돌아보지 않거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서 유독 벼슬에 나아가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모조리 옛 도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이것은 이른바 한 다리는 짧고 한 다리는 길다는 것이니, 어찌 엎어지는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대장부의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면서 감히 분발하여 곧추 나아가 일을 맡겠다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22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힌다. 학자들의 병폐... 곡학아세

131 마치 낚시에 걸린 고기처럼 갇혀있으면서도 다시 뻔뻔스레 녹이나 타먹을 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탄식

133 독서당 : 젊은 문인들이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설치, 들게 되면 따로 번거로운 일을 맡지 않음 湖堂

241 그대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생각이 없으십니까. 제가 이토록 낭패하여 구차히 여러 가지 일에 묶여 있으면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하고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된 까닭은 오로지 헛된 이름이란 두 글자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저에 대해서 지나치게 추켜세워 임금께 아뢰었다 하더라도 그대는 오히려 마땅히 힘써 막고 덜어내어 저로 하여금 하늘을 속이는 죄를 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터인데, 지금 도리어 저를 크게 높여 임금의 귀를 어지럽혔습니다. 
 

 *********** 옥에 티가 아닐까 싶은 곳들... 

429쪽에 빔과 신령함을 논한 곳에서 빔을 이라고 한 주장... 이란 구절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빔을 신령함이라고 한 주장...이 아닐까 한다. ‘형체를 넘어서는 빔(형이상)’과 무극이태극 등을 이야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434쪽의 ‘찐덥지 않았는데’는 ‘미덥지’의 오타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규항이 본격적으로 쓴 책으론 처음이란다.
하긴, 전에 나온 책들을 읽으면서, 김규항이 여기저기서 적었던 글들을 짜깁기해서 편 책이어서 좀 실망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는, 전적으로 만족이다. 

성경을 읽은 것이 언젠지 모르나, 김규항처럼 눈을 뜨고 읽었던 기억은 없다.
성경에서 예수가 반말을 하는 한국은 예수가 오해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사회(14)라는 말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요즘 예수팔아 먹고 사는 사탄들이 워낙 많아 예수님이 눈물흘리실 판국이지만, 그의 예수전은... 가장 초창기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을 통한 예수의 모습을 읽고 풀이한 책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66) 

예수가 살았던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다. 제국과 유랑하는 민족의 갈등이 지극히 심하던 시대. 저항운동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해석하는 이의 맘대로 평화를 푸는 것은 아전인수의 목적이 있으렷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처지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힐 것.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97) 홍세화 선생 말대로, 계급을 배신하는 의식을 갖도록 의식화시키는 것.
한국 사회의 예수가, 반공 정신만이 전쟁 후의 목숨을 부지하던 시절에 목숨을 부지하는 한 요소로, 예수 믿는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희한한 등식으로 이땅에 벌겋게 불지핀 것도, 예수의 계급에 걸맞지 않는 의식에 기여하게 된 일말의 스토리가 있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인민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천재 감독 이창동은 말했다. <밀양>에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다들 세상이 좋아지고 달라졌다고 해도 어느 한 귀퉁이엔가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예수를 좇는 사람은 지배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256)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아, 한반도의 예수님이 교회에서 가가대소를 금치 못하실 노릇이다. 나도 가소롭게 사는 인간의 하나일 뿐이고...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를 모른다.
그들의 분노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 용서는 불의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낸다.(189)
예수를 좇음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겠다는 내 얄팍한 생각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 

봉건 사회에 비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과 노력이 사람의 삶을 결정하므로 정당하다고 이야기하기 쉽다. 아니, 한국의 가진자들이 이런 논리를 늘 편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그런가... 하는 것이다. 평범한 노동자 한 명이 재벌 총수만큼 벌려면 한푼도 안 쓰고 50만년을 모아야 하는... 이것은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뜯어 고쳐야 할 <악의 구조>다.(161)... 그가 예수를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구조가 뜯어 고쳐야 할만큼 고장났을 때, 누군가가 혁명가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그 혁명가의 모범을 예수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 혁명가의 생각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승리한 후엔 용서함으로써 보복하지 않을 줄 아는 사랑. 

예수믿고 천국갑시다.
그들을 단지 타락한 교회라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그들은 교회의 탈을 스고 하느님 나라와 대적하는 순수한 사탄들이다.(164) ... 더 덧붙일 말이 없다.
그 교회들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 하며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외쳤듯,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외쳐야 한다.(180) 

대개 자유 민주주의로 자본주의를 착각하고, 예수적인 체제로 여기며,
사회주의는 예수와 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는 것.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닌,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며,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자'가 아닌, <특별한 사회주의자>여야 한다는 것이 김규항이 이 책을 쓴 소론의 결말이다. (204)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멋진 돌이며 얼마나 멋진 건물입니까!"
"당신은 저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지요?
그러나 돌 위에 돌 하나도 여기에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입니다."(13:1-2)
성전은 하느님의 거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도 아니며 외세와 결탁해 인민을 억압하고 벗겨 먹는 강도들의 소굴일 뿐이며, 많은 인민들이 그 휘황함에 현혹되어 있기에 예수는 더욱 단호할 수밖에 없다.(212) 아, 더 많은 믿는 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슬프더라도, 슬픔 속에서 극복해야 할 것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가진 게 많은 사람, 큰 부와 명예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주목하여 그들을 축복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으로 짜인 세상의 구조와 가치관을 하느님이란 가상의 대상에 <투사>했을 뿐이란 그의 말은 몸서리치게 삶의 정수리를 찌른다.(225) 

꽃들을 보면, 대여섯 장의 꽃잎의 특정한 꽃잎에 특정한 점들이 쿡쿡 찍혀있다. (컴터 사정상 그림이 안 들어가는데, 한번 철쭉 이미지를 찾아 보시라.)
그 점들을 <허니 가이드>라고 하는데, 그 점들은 대개 수술의 위쪽(햇볕이 비치는 쪽) 꽃잎에 자리잡고 있다.
곤충들이 보기에, 허니 가이드는 자외선의 영향으로 번쩍번쩍 빛을 내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꽃들이 한창 에너지를 붉은 빛깔에 쓰고 있을 때, 곤충들이 허니 가이드를 따라 날갯짓을 하면서 꿀을 빨아들이는 동작에 따라 그의 날개와 다리들에 수술에서 꽃가루가 묻어 암술머리에 붙게 된다고 한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수술과 암술들은 한결같이 허니 가이드를 따라 휘영청 구부려져 있다. 

이런 것이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꽃송이 하나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나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그런 것.
자신의 에너지를 최고로 끌어올려 빛깔에 쓰다가, 일단 가루받이가 끝나면 시들한 색깔로 퇴색되어버리고 씨앗의 성장에 에너지를 모두 쓰는 그런 것. 

인간이 조금 더 가졌다고 뽐내는 것.
조금 부족하다고 얕잡아보는 것.
건강하게 오래 살자고, 가까운 사람들부터 주워 섬기는 것.
<아군>과 <적군>으로 나눠서 아군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적군의 멸망을 바라는 그런 것.
이런 것이 자본주의적인 삶이라면,
자본주의야 말로 반자연적인 것이고, 반생태적인 것이고, 반인간적인 것이고, 반하느님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김규항의 허니 가이드에 따라 그 번득이는 가르침에 따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꽃가루받이도 일어날 노릇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씨앗이 영글어 가기도 할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09-05-06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씨가 본격적으로 쓴 책이 처음이라니 의외네요. 그러고 보니 제가 본 책도 모두 여기저기에 썼던 글들을 모아놨던 것이네요.
부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책을 좀 많이 봐주기를 바라는건 욕심이겠죠?

글샘 2009-05-06 02:44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기독교가 비판의 눈을 감고 있음을, 예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 이런 책인데요... 별로 안 좋아할 할 듯...
 
완역 이옥전집 1 :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완역 이옥 전집 1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옥을 자신을 '실로지인'(길잃은 사람)이라 하였다. 스스로를 체제 바깥의 아웃사이더 또는 소수자로 인식하였으며, 선비의 일원으로 생각지 않았다.
깊은 소외의식을 가진 탓에 경세, 사회의식을 반영하는 글이 적으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늘어놓는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글의 형식은 부, 기, 서 등 다양하다.
그의 시선은 백성을 훈계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이욕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응시한다.
비로소 인간을 '이상적 훈도의 대상'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 본 것이다.
그의 글에선 감정이 풍부한 하층 여성, 시정의 인정물태 등 선비들이 몰가치하다고 여긴 영역에 주목한 점이 돋보이며, 민중의 언어를 풍부하게 사용하였다. 

작은 물고기가 없다면, 용은 뉘와 더불어 임금 노릇을 하며, 저 큰 물고기들이 또한 어찌 으스댈 수 있으리.
용의 道란, 그들에게 구구한 은혜를 베풀기보다, 차라리 먼저 그들을 해치는 족속들을 물리쳐야 한다...<물고기에 관한 부> 멋진 말이다. 

거북을 읊은 부는 언어 유희의 극치를 경험하게 한다. 시경의 시들을 자유자재로 배치하는 능수능란한 글솜씨를 보여준다.
개구리 울음, 벌레 소리를 읊은 부, 거미... 등에서는 섬세한 관찰자의 눈을 표현한 근대 정신의 발현을 느낄 수 있다. 

학질을 저주하는 사에서는 붓으로 벌주고 먹으로 포위하는 것이 한 때의 크나큰 상쾌함이라고 하여 글쓰는 맛을 보여주며,
오자구부에선 아들을 낳은 여인이 군역, 세금 등의 과도한 징수에 대한 현실 비판이 드러난다. 

길고 장엄한 규장각부를 통하여, 칭찬과 폄척 등의 선인의 평가를 통하여 도낏자루와 수레바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모범과 격식을 얻을 수 있는 규장각의 설치를 극찬하였다. 

이런 부 賦란 장르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으면서도 외우고 읊조려서 풍자하고 찬미하여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는 역할을 하여 이옥이 즐겨 쓰는 장르가 되었다. 

나비가 바람에 나부껴 연못 물에 빠져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는 몸을 가벼이 여기고 놀이를 좋아하는 세태를 꾸짖고 있고,
한거부에서는 화려한 문채를 품고 팔여다 월형을 받은 이야기를 들여와서 순정한 문체를 어지럽힌다고 충군의 역에 처해진 자신의 처지를 빗대기도 하였다. 

350-351쪽의 나한전 오백나한상 묘사는 절묘하고 재미있는 재치가 돋보이며,
귀양가는 길에 면화로 베를 짜는 과정을 세밀하게 적은 데서는 일꾼의 노력과 수고가 기록되고 있다.
382쪽의 북한산의 누정 묘사도 탁월하여, 산수 변화를 누에 기문으로 남길만한 것이라 하고 있다. 
낮부터 저녁까지 날씨가 맑더니 이튿날 아침에는 구름이 끼었다.
산색의 어둡고 밝음과 수기의 흐름과 맑음을 이번 걸음에서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
다시 보니 저녁 산은 마치 아양을 떠는 것 같아 고운 단풍잎이 일제히 취한 모양이요
아침 산은 마치 조는 것 같아 아련히 푸르름이 젖어드는 모양이다.
저녁의 물은 매우 빠르게 흘러 모래와 돌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며,
아침의 물은 기가 있어 바위와 구렁이 비에 적셔진 것과 같다.

불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드러나는데,
살지고 손이 부드러운 승려는 잘 먹고 일 안함을 비판하고 있다.
부끄러워 피하는 승려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백성들의 말(斗)이 다름은 관에서 도량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함에 대한 비판글이다. 

야인(백성)은 군자를 봉양한다.
저 군자여, 하는 일 없이 녹을 먹지 않는가? 

아, 이 마지막 구절은 나를 뜨끔하게 한다.
자라나는 세대를 훌륭하게 가르치라고, 야인들이 주는 녹을 받아 먹으면서,
과연 아이들을 잘 지도하고 있는지... 부끄러워할 따름이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조선의 <유교 중심 세상>을 부흥시키려는 일환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국왕이 국경까지 도망간 사건과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사건 이후로 국가와 지배계급을 보는 눈은 예전같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떠난 이에게 아무리 사미인곡 류의 "향묻은 나래로 꽃마다 앉았다가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날인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하며 러브레터를 날린다 하여도... 이왕지사 물건너간 마음엔, 느끼한 사랑노래가 더 신물나게 할 뿐이다.
이옥이 관심을 가졌던 저잣거리의 인정, 시정의 풍물들이 소품문으로 숨겨져 있다가 이제서야 얼굴을 드러낸다. 이런 고전들의 축적이 문화를 이끌어가는 힘이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인문학적 관심이 많으시지만, 이쁜이들과 시간 보내시느라 이런 책 읽기 힘드시다고 내게 먼저 선물로 보내주신 *&^%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의 옥에티...
337쪽의 신루기를 신루이야기로 옮기지 않고 신루기 이야기라 적었다. 오류겠지? 아니면 신기루 蜃氣樓 이야기라고 적으려다가 실수를 한 거든지... 

343쪽의 지도에서 부산, 대구, 광주가 들어간 건... 글쎄... 그 당시에 알맞은 지명들인지... 궁금하다. 

369쪽의 상랑의 한자가 향랑으로 되어 있는데... 오류인 것 같다. 상랑은 尙자를 쓰고, 향랑은 向자를 써야하는 데 상랑 옆에 向랑(계집랑이 안 나옴...ㅠㅜ)이 적혀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4-24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6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9-04-27 16:06   좋아요 0 | URL
지난 주, 애들 셤공부 시켜놓고 읽었죠. ^^ 글이 시원시원해서 읽기 좋더라구요.

반딧불이 2010-1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루가 뭔지 몰라 국어사전을 뒤져보니 '신기루'라네요. '신루 이야기'나 '신기루 이야기'로 적었어야하는 것을 잘못 적은 것 같아요.

글샘 2010-11-01 16:44   좋아요 0 | URL
네. 신루기...니깐, 신루에 대한 생각을 적은 거죠. 착오인 것 같습니다. ^^
 
처음 만나는 도덕경 - 나를 변화시키는 자유의 철학,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참삶을 위하여
백진웅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노자를 감상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겠지만,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짜증나는 것이 도올의 것이고, 가장 맘에 드는 것이 이 책이다. 

전문적으로 노자를 연구하면서 각주를 붙인 책도 아니면서, 노자의 핵심은 거의 다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자의 어려운 해석들을 슬쩍슬쩍 다루면서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품이 제법 작가답다. 

인생은 여행길임을 누구나 안다.
영원히 살 수도 없는 일이고, 그 여행길은 누구에게나 그닥 길지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꼭 여행에서 회장을 맡으려 하는 이가 있다.
총무처럼 무던하게 회비를 걷고 지출하는 사람은 필요하지만, 굳이 하는 일도 별로 없는 회장 자리에 목을 매는 사람이 있단 말이다.
그들에 대한 어리석음을 들으면서, 나도 거기서 멀지 않다는 반성을 한다. 

물처럼 사는 일이 가장 좋다든지,
죽어버린 것은 뻣뻣하다. 산 것은 말랑말랑하다는 말은,
논어에서 만나는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은 원망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럼을 알고 또 격식을 알게 된다고 하는 말고 견주어 본다. 

나는 얼마나 뻣뻣한 선생인지...
아이들에게 말랑말랑하게 다가서지 못하는지...
얼마나 규칙이란 잣대를 들이대면서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 도록 하려면, 말랑말랑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회장 자리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작가는 마지막에,
혹시 도덕경 원문 전체를 보다 깊이있게 공부하고 싶다면,
오강남의 <도덕경> 현암사
이경숙의 <완역 이경숙 도덕경> 명상
호승희의 <노자 : 꼭 읽어야 할 인문고전 동양편> 타임기획
을 참고하길 바란다...고 하고 있다.  

나는 도덕경을 처음 만나는 이라면, 백진웅의 '처음 만나는 도덕경'을 권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한 권 사 주는 일도 좋겠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09-04-02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강남 풀이의 <장자>는 매우 인상깊게 읽어서, 오강남 풀이의 <도덕경>도 집에 두고 있습니다. 먼저 정민선생의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를 읽기 시작한지라, 아직 시작은 못하고 있지만...

^^;; 요즘 들어서 장자나 노자는 항상 관심이 가는지라, 이와 관련된 리뷰나 책이 나온걸 확인하고는 한답니다.

물론 장자에게 더 관심은 가게 되지만요...

글샘 2009-04-02 16:21   좋아요 0 | URL
저도 오강남의 장자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 정민 선생의 18세기 지식인은... 뭐, 논문이라 단행본으로서의 내용은 아니지만, 나름 괜찮지요.
노자와 장자는 상당히 다르면서도, 왠지 유사한 면이 있는 듯 하죠.
장자가 좀더 재밌고, 노자는 원론적인 것 같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