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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ㅣ 학고재 산문선 3
박지원 지음 / 학고재 / 1997년 9월
평점 :
품절
박지원의 글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그지없다.
소설로 분류할 책도 있고, 기행문으로 분류할 책도 있지만,
대체로 산문이다. 소설이라 하는 것도 요즘 하는 이야기이고, 그의 글은 '문'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지만, 박지원의 말하기는 노자의 그것처럼 뒤집어서 말한다는 특징이 강하다.
그렇다곤 해도, 역설적 접근의 시각이 주된 것인가 하면 실학자의 실제로 보는 눈이 강조되기도 한다.
여느 사람이라면 별로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하여,
박지원은 '문제의 눈'을 들이댄다.
보통 사람들이 '눈으로 보아 무섭다'고 하는 강물을 그는 밤에 건너니 '귀로 들어 무섭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느 사람이 '눈이 시원한 장관'이라 할 것을 그는 '통곡할 만한 경치'라고 뒤집는다.
박지원은 '잘나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잘난 척, 가진 척, 아는 척'해대는 통에 미치겠던 사람이다. '3척 동자'는 지금 한국에도 넘쳐 난다.
연암이 '천하 대세를 살핀다'는 글에서,
중국을 유람하는 자의 병통을, 다섯 가지로 말한다.
1. 지위와 문벌이 서로 높다고 뻐긴다.
2. 우리 상투만이 최고라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
3. 명나라만을 섬기고, 만주국을 멸시하는 망령된 태도를 버려야 한다.
4. 중국에서 모든 학문을 배운 주제에, 중국을 멸시하는 태도도 웃긴다.
5. 중국인들에게 지조가 없다고 욕하는 태도도 망령이다.
즉, 당시의 현실에서 중국의 만주족 나라, 청을 받아들여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할텐데,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마치 루쉰 선생의 <아큐정전>에서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을 웃기고 자빠진 일로 묘사한 것처럼, 조선인들의 '정신적 우월감'의 착각을 날카롭게 꼬집는 살아있는 비판정신이라 할 수 있다.
역대로 사람이 많고 땅이 적은 것이 걱정이 아니라, 법을 세우지 못했거나 법을 준행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었다는 말은 만고 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새로 짓는 아파트가 그리 많아도,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 많으며,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저리 많지만, 미국은 필요도 없다는 한국에 쌀을 팔아 먹으려 한다.
땅이 적거나 쌀이 부족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 좁은 땅덩이에서 서로 종교가 다른 것도 아니고, 신분이 다른 것도 아닌데도,
네 분파로 흩어지고 쪼개어져서 다툼에만 전력하는 것을 본 홍대용은,
오히려 중국에 가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필담을 통하여 고담준론을 펼치고 온다.
아, 박지원을 읽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일이다.
내가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면 당연히 보았어야 할 부조리함들을 애써 눈감으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백 년 전의 상황을 조금도 낫게 하지 못하는 이 부조리한 땅덩이에 살면서,
자동차 좀 기어다니고 비행기 좀 날아다닌다고 발전이란 말을 할 수 있을까...를 돌아보는 일이다.
장자가 <기심>에서 기계를 만들어 부리면 그 혜택에 눈멀어, 잃어버리는 것을 다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고 했다.
맹인같던 이들이 <얕은 꾀에 눈이 뜨여> 흐트러진 세상을 보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나 아닌지... 도로 눈을 감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진저... 조용하게 냉수 마시고 속 차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