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고등학교 시절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었나보다. 졸업 후 모교를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정 하나 없는 졸업생이 되고 말았다. 공부와 성공만 강조했던 고3때 선생님이었지만 학생들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그래도 밉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학교가 지역방송에 소개될 만큼 낙후된 시설로 유명했었고, 고교 평준화 이전에는 이른바 “줄 서면 갈 수 있는 삼류 따라지” 학교였고, 뭐 내세울만한 선배는 더더욱 없었기에 모교에 대한 애정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흔히 보이는 여러 정부 인사들의 하마평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출신고등학교니 각종 권력집단의 출신고 해부 등의 기사를 통해서 느꼈던 거부감은 어쩌면 소외감이나 열등감이었을까? 그게 소외감이건 열등감이건, 아니면 학벌주의 타파란 이름의 고귀하고도 기특한 생각이었건 나는 출신고니 동창회니 학연 따위의 도움을 받아 내 앞날에 이익이 되는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은 한 번도 가진 적 없다.
그래도 3년 동안 다녔던 학교에 대해 어찌 조금의 정이라도 없을 수 있겠는가? 시설은 전국 꼴찌였지만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만은 최고였던 기억, 비록 89년의 그 열풍 속에서 전교조 교사 한명 배출하지 못했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던 선생님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고, 무엇보다도 힘든 시기에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기억이 있는데 말이다. 이런 생각이 이어지면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좋지 않은게 어찌 그 학교만의 탓이겠는가 모두 시대 탓이지 하는 온정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아무튼 얼마 전 방영했던 ‘닥터 깽’이란 드라마 첫 회에 우리 학교가 배경으로 나온 것에 대해서 펄쩍 뛰며 열광했었고(그리고 아름다운 한가인이 극중에서나마 우리 학교의 후배로 나왔다는 사실에 더더욱!), 가끔 언론에서 보이는 우리 학교 출신들의 활약상이 기쁜 것은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인가보다.
비호감 캐릭터에서 이젠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이 선배님
요즘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영원한 체육인이자 연기자인 동기놈
권력의 핵심에서도 제 목소리 확실히 내시는 서울법대 교수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 하고 계신지 참 의심스럽지만 나름 열정적인 이 분
그러나 네이버 인물 검색에도 나오지 않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 박종철.
87년 여름 고1 시절,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내가 좋아했던 한 젊은 남자 영어선생님이 흥분된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하면서 “우리도 드디어 민주화를 이룩했다”라고 했을 때의 그 단어들과 표정.
그러나 그 물결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이 우리 학교 졸업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대학 들어온 후였다. 내가 시대에 관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에 보수적인 학교의 분위기 탓이라서 그랬는지 박종철이란 이름을 학교 졸업까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몇 년 전, 벌써 10여 년의 세월을 허비하고서야 겨우 총동창회의 노력으로 박종철이라는 사람의 흔적을 이 학교의 교정에 추모비란 이름으로 조그맣게 세울 수 있었다. ‘기독교학교에서 우상화란 있을 수 없다’는 억지스런 학교의 방해공작을 힘겹게 이겨나고서야 말이다.
박종철 선배는 자신이 일부 사람들에게 “열사”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성품대로 “나는 그냥 고문 받다가 죽었을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하지 않을까?
출신고등학교가 화제가 되는 대화 중에 제 선배 중 박종철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아, 네” 하고는 그냥 넘어간다. 그만큼 박종철이란 단어는 사람들에게 입 밖에 내기 참 부담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알라딘에서 만난 어떤 님은 “참 자랑스러우시겠어요.”란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자랑스러움이라.
솔직히 말하면 자랑스럽다기보다는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그도 내가 공부했던 교실에서 같은 의자와 책상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선배를 가르쳤던 선생님들께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탁 트인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교정에서 같은 달빛 아래 늦은 밤 찬 바람 마시며 귀가도 했을 것이다. 그런 공감대 속에서 박종철 선배 하면 자부심이나 뿌듯함보다는 애잔한 감정, 써늘한 감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물론 사고였지만) 지키고자 했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신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순수했던 시절의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정말 원통한 것은 그가 끝까지 행방을 대기를 거부했던, 그래서 타의든 자의든 생명을 내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행방을 대길 거부했던 그의 선배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를 고문했던 정권을 계승한 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도 어느 선거구 국회의원에 출마했다는 사실이다. 출마하면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어떤 이상을 꿈꾸며 어떤 공약을 내세웠을까? 탄핵 정국 탓에 보기 좋게 낙선했지만, 신문에서 당 이름이 새겨진 어깨띠를 두르고 웃으며 인사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을 때, 정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은 이래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며칠 전 박종철 선배 사망 20주기 추모식이 모교에서 열렸다. 정말이지 인터넷 뉴스 사진에서 추모식이 열렸던 학교의 붉은 벽돌교사를 보니 정말 반갑더라. 그리고 정말 자랑스럽더라. 박종철 선배님이 우리 학교 출신인 것이, 그리고 지금은 그의 이름도 모르는 후배가 많다는 모교 대학도 아니고, 내가 졸업한 또 선배가 생활했던 고등학교 교정에서 추모식이 열렸다는 사실이.
여전히 동창회는 안 나가고 싶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모교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했다. 모교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자. 선배의 일생에 몇 퍼센트나 긍정적인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신념을 위해 악착같았던 선배 같은 사람들도 키워내지 않았던가?
〈종철이의 편지 중에서〉중 일부 - 이산하
이 교정에서
함께 미래를 꿈꾸었던 벗들,
또 우리의 뒤를 이어오는 후배들,
당신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아직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