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순풍 산부인과'는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던 기억이 난다.

오지명이 원장으로 있는 산부인과의 표간호사(표인봉)는 다혈질 원장에게 불만이 있을 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성격 탓이겠지. 그래도 표간호사는 나름의 반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표현 방식이 아주 기가 막힌다. 근무가 끝나고 회식 자리에서 원장이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는 척 하면서 잔을 받치고 있는 왼손을 약간 뗀다. 결국 자기는 원장의 술을 한 손으로 받는 방식으로, 원장에게는 절대 들키지 않게, 반항했다고 자위한다.

드라마 인물에 대해 일치감을 느끼는 경우가 그리 흔치는 않은데, 이번 경우는 절대적으로 그러하다.

박정희식의 민족주의에 대해 어설픈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 시간이 너무 불편하다. 국민학교 시절 공터에서 실컷 놀다가도 5시 땡하면 국기하강식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을 경건하게 가지고 국기를 받들여 모셨던 기억, 신나게 영화를 보기 전에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열심히 했던 기억. 나름의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 대해 '속았다'란 느낌을 갖게 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난 국기에 대한 맹세가 거북스러웠다.

다행히도 정권이 바뀌면서 일상 생활에서 그러한 애국의식고취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국가(에서 예산을 지원하는) 기관에 다니게 되면서 이러한 갈등상황이 도지게 되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직원 모두가 강당에 모여 태극기를 향해 맹세 또는 애국가 제창이 있는 것이었다.

쪼잔하기로는 이등이라면 서러운 나, 항상 속으로만 씩씩거리는 나로서는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표간호사식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 "국기에 대한 경례!" 구호가 떨어지면, 나는 가슴에 손을 얹은 척은 하되 제대로 된 경례를 하지 않는다. 혹여나 남들이 잘 안보이는 자리에 앉았다면 은근슬쩍 손을 다시 내려놓기도 한다. 쪼잔한 방식이란 거 안다. 그러나 내 인생이 그래왔나보다. 그렇다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지 않는데 적극적으로 경례하는 것도 이율배반이다.

그럼 나는 애국자가 아닌가? 나도 나름대로 대한민국 사랑한다. 대한민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물론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도 없지만), 이민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다른데, 이를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것 뿐이다.

그런데, 오늘 한겨레 21을 보다 보니 종교적 신념이 되었든 양심이 되었든 국기에 대한 경례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였다가 고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한 일이 얼마 전까지도 있었다고 하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6/01/021003000200601030592011.html

요즘 말이 많은 유시민 의원도 '국기에 대한 맹세는 파시즘의 잔재'라는 발언을 했다가 언론의 맹공을 받았다고 하니, 역시 소신이 딱부러진 사람은 헤쳐나가기 힘든 세상인 모양이다. 나같이 기회주의적이고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속마음도 숨기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모양이다.

이번 기회에 정치계에 입문이나 할까? 푸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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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1-0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서 학교 행사에 기미가요 울리고 일장기에 경례하는 거 거부하는 교사와 학생들은 장하다고 보도하면서, 왜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고 고등학교 입학을 거부하는 걸까요. 앞뒤가 안맞다고밖에 생각이 안들어요.

마늘빵 2006-01-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무슨 행사할때마다 국기의 경례하는데 참 애들 앞에서 안할 수도 없고, 마음은 하기 싫은데. 흠.

oldhand 2006-01-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국가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기에는 이른 모양입니다.

미미달 2006-01-06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탐 공부할 때, 법과사회시간에 신체의 자유부분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는 학생은 예외로 한다는 점을 공부하면서 참 의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깍두기 2006-01-0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에서 학급회의할 때 저런 의례를 몽창 생략하는 것으로 쪼잔한 반항을 하고 있습죠^^
우리나라도 이제 촌스러운 짓 좀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