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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1991
신나라뮤직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양희은은 이제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빼놓기 힘들 정도로 거목이 되었다. 양희은의 맑은 음색과 넉넉한 성량과 곡을 소화하는 능력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정도로 최고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CF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거나 상품을 소개해도, 라디오 디제이로 아줌마 프로그램에서 수다를 떨어도, TV 토크쇼에서 예의 그 큰 웃음으로 소소한 일상을 재잘거려도 국민가수로서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양희은의 이미지는 노래 잘 부르는 가수에 머물지 진정한 아티스트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적어도 이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는...
본의 아니게 청년 문화의 기수로, 국민 저항음악 '아침이슬'을 부르는 가수로 자리매김했지만, 그에게 있어 김민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위대한 존재였다. 김민기가 없었더라면 양희은도 없었다. 양희은은 김민기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가장 멋지게 소화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였다.
난 가수와 아티스트의 차이는 그가 열정적으로 부른 노래의 제작과정에 얼마나 관여하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멋진 노래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잘 부르더라도, 그 가수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지라도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작사나 작곡과 같은 제작과정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양희은이란 이름으로 나온 앨범만도 벌써 30여종이다. 그러나, 베스트 앨범이 이미 여러번 그의 디스코그라피에 중복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앨범의 족적은 뚜렷하지 않았다. 양희은은 1991 앨범에서 거의 전곡을 작사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준다. 김민기란 위대한 아티스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천리길, 두리번거린다, 하얀 목련 등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작사작곡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앨범 전체적으로 아티스트적 면모를 띈 최초의 앨범이 아닐까 한다.
첫 곡 '그해 겨울'부터 어린왕자에서 모티브를 따온 '잠들기 바로 전'까지 두 곡을 제외하곤 그의 입으로 세상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삶을 이야기했다. 천혜의 그 목소리가 여기에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물론 이 앨범에서는 이병우라는 걸출한 기타리스트이자 음악가가 있었기에 그 힘을 정확히 발휘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 그룹 '어떤 날'에서 가요사에 빛나는 발자욱을 남겼던 그는 양희은과 함께 한 이 음반에서 그의 재능을 한껏 내비친다. 모든 곡에서 이병우 기타소리와 양희은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칫 지루하기 쉬운 조용한 레퍼토리를 쥐락 펴락하며 살려내는 것은 양희은의 노래 장악력이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그의 기타는 뒤에서 노래를 어루만져 준다. 노래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 앨범에서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란 노래 한곡만이 현재까지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리고 입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노래도 그의 다른 앨범의 노래들과 섞여 베스트 앨범에서 소리를 내는 것보다 여덟 곡이 조화를 이루며 분위기를 이어가는 가운데 7번째로 조용히 우러나오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
이 앨범 이후로도 베스트 앨범과 기념앨범이 나왔지만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저 하늘에 구름따라'와 같은 앨범들을 꾸준히 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지켜간다.
그가 근래에 출연하는 공연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아줌마들을 겨냥한다. 아줌마를 위한 공연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청중은 그 시절의 향수를 기억하러 모인 나이 많으신 아줌마들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의 목소리는 전 세대에 걸쳐 설득력이 있다. 중후한 중년가수의 과거에 천착하지 않는 다양한 음악적 실험이 다채롭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