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mbc 작가(정확히는 프로덕션)와 통화를 했다.
작가 - "내일 저희가 집에서 출근준비하시는 것 찍고 싶거든요? 괜찮으시죠?"
나 - "아, 웬만하면 집밖에서 찍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는데요.."
작가 - "그래도 아내되시는 분이 옆에서 출근 도와주시는 것을 찍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 - "아, 제 아내는 아침에 출근 안도와줍니다. 그냥 잡니다. 그래서 찍을 수도 없어요.."
작가 - "아, 다른 일 하시나보죠?"
나 -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아침에 못일어나요.."
작가 - "그래도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찍으려면 아내분이 나오시는 것이.."
나 - "우리집 별로 안단란하거든요?(사실 좀 오버했음) 그러니 만약 집안을 찍더라도 아내는 출연 절대 불가입니다. 본인도 싫어해서요.."
작가 - "(당황하며) 그래도.. "
아내가 옆에서 출근을 도와주느냐 마느냐가 단란한 가정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나는 드라마, 특히 일일연속극과 같은 단란가족 드라마를 보면서 참 의아한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내가 눈여겨보기 시작한 이후로 한번도 빠짐없다. 일상적인 가정일 경우, 남편이 퇴근을 하고 코트나 양복 윗도리를 벗으면 그 옆에서 아내가 장롱 문을 열고 옷을 반드시 받아서 옷걸이에 걸고 장롱문을 닫는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 쉴새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갈등이 있는 날에도 (아내가 큰 잘못을 한 경우에라도) 서로 말은 주고받지 않아도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는 행동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단 한번도 내 아내가 퇴근하는 나의 옷을 받아준 적이 없다. 집에서 쉬고 있을 때라도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장면에서 여자는 맞벌이 아닌 일반 주부로 나온다. (단란한 일일드라마에서 맞벌이가 퇴근하는 장면은 거의 못봤다.) 맞벌이가 아니기에 이런 장면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물론 현실적일 수 있다. 나를 뺀 모든 부부가 이런 장면을 매일 밤 연출할 수도 있겠지.(그렇진 않겠지만)
영화에만 클리셰가 있나? 드라마에도 당근 있다. 대부분 여자들일 작가들은 어찌하여 맨날 이런 대본만 쓰는가? 피디의 연출이지 작가의 의도는 아닐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어찌 저항하지도 못하나.
일하느라 아이 보느라 피곤해서 아침에 제대로 못일어나는, 그래서 '출근을 도와주지도 못하는' 내 아내와 나는 그래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오손도손 살아간다. 작가들이여, 주위의 꽉 막힌 틀에서 벗어나라. 당신들이 먼저 그 틀을 깨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