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평전 - 경험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사만다 로즈 힐 지음, 전혜란 옮김, 김만권 감수 / 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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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 문디
사유 - 판단 - 의지

한나의 연대순 저작물을 중심으로 많은 기록물을 요령있게 배치하고 한나 자신과 한나 “부족”들이 남긴 에세이와 편지글 같은 것으로 한나의 깊이 있는 정신과 다감하고 명철한 삶에 풍부하게 다가간다. 군더더기 없이 유연하게 읽히고 한 문장도 흘려버릴 수 없이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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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가 남긴 유산은 (소문의 여신,) 파마Fama의 두 가지 힘이 모두 발휘된 결과물이다. 한나는 살아생전 삶과 연구를 두고 끊임 없이 루머와 반쪽짜리 진실에 시달렸으나 죽어서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 306

한나는 사유를 ‘난간 없는 사유‘로 표현했다. 사유란 붙잡을 곳없는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한나의 은유에 따르면 붙잡을 곳 하나 없을지 몰라도 계단이라는 서 있을 곳은 주어진다. 자유롭게 밟고 디딜 이 계단이야말로 한나에게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었다.
한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는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사를 논하는 공적영역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 자체로 내 존재를 나타내며 나의 세상경험에 달렸다. 하지만 내 정체성이 내 운명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 P307

명성을 선택한 적 없듯이 여성으로 그리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도 한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세상이 말하는 그녀의 정체성이었다. 한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게르솜 숄렘의 비난을 부인하지 않았다. 민족을 사랑하라는 요구는 경험 세상은 보지 말라는 일종의 맹목적 사랑을 요구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한나의 입장에 한 가지 모순이 있다면, 한나처럼 비판하고 판단하려면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한나가 말하는 세계 사랑에 숨은 뜻이기도 하다. 악을 못 본 체하며 선만 취할 수는 없다. - P308

한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이 한계를 설정하며, 다시 배열하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언어로 새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나무 책상 너머 파란 타자기 앞에 서서 손에는 커다란 은빛 가위와 스카치테이프를 든 채, 이해 욕구를 반짝이며 텍스트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만드는 한나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끝.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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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살아가고 내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제대로 보려면 철학사상이 아닌 내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조건> 서문 말미에서 한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이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 발밑의 세계가 아닌 우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며, 잠시 멈추고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인간 조건의 활동에 대한 생각에 다가갈 수 있을지 고려하라는 간청이다.
한나의 1955년 8월 사유 일기를 보면 첫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던져진 게 아니라 정확하게 나아갈 방향을 갖고 있는 존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속성이 생겨나고 그가 속해 있는 길이 드러난다.‘ - P212

사회혁명이든 정치혁명이든 권위의 몰락이 필수 조건이다. 무력, 즉 경찰과 군대를 향한 충성심이 여전히 강한 상태에서는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정치 체제의 분열이 혁명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간절히 열망하고 날개를 펼치길 기다리면서 권력에 대한 책임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8세기에는 문인들hommes de lettres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
미국혁명을 통해 한나는 지역 정치에 뿌리를 둔 더욱 민주적 형태의 정부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한나는 공적영역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행복을 발견하는 시민의 모습을 상상하며,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의 저서를 읽고 의회 제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미국 같은 입헌공화국에서는 시민권을 보장해주지만 정치적 행동을 통해 그러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시민들 몫이다. 한나는 정치는 신념에서 나오는 용기가 아니라(신념은 어렵지 않다), 일상과 관습 속에서 경험한 용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대중의 행복 경험은 혁명 정신을 유지하는 데 필수다. - P252

세상 속 경험과 사건에서 사실이 비롯된다. 다시 말해 사실 존속 여부는 기억과 이야기에 달렸다. 누군가 사실을 각색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한 세상은 사라진다. (중략)

주어진 문제를 관찰하며 마음속에서 더 많은 사람의 관점을 떠올릴수록, 내가 그 사람들 처지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더 자세히 상상할수록, 타인을 대변하는 나의 사고 능력이 더 강해질수록 타당한 결론, 즉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끝없는 거짓말은 내 발밑의 땅을 앗아가 내가 설 땅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논문은 "진실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답하며 끝난다.
"개념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진실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고 내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다."
진실은 이 세상에서 내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항상 움직이는 땅과 하늘과도 같다. - P258

한나는 야스퍼스에게서 경청과 대화를 하나의 예술로 이해하고 이 세속적 활동들을 자신의 삶과 일의 중심에 끌어올린 한 남성을 보았다.

이 작은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비할 데 없는 대화 능력을 펼치고 발휘했다. 매우 주의깊게 들었고, 언제나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냈으며, 인내심 있게 토론 주제를 음미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침묵으로 그칠 것을 공론화하고 대화 주제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말하고 들음으로써 그는 변화와 확장을 가져왔고 이를 더욱 갈고 다듬었다. 그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면, 밝게 비추었다.

한나에게 야스퍼스는 사유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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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10-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이 인상깊네요 ㅎㅎ

프레이야 2022-10-04 08:45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아 뭐라 말 못하겠지만 아렌트는 그것을 넘어섰어요. 청출어람. 69세로 일기를 마감하기 전 하이데거와 대화를 하려고 노년의 하이데거 부부를 찾아갔는데 그때도 부인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둘만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더군요. 일생에 걸쳐 뭔가 듣고픈 말과 하고픈 말을 가지고 찾아갔을텐데 말이죠. ^^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였다.
《전체주의의 기원》 서문에서 한나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유감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유대인 문제가 정치적 문제임을 적군은 알았으나 정작 유대인 친구들(유대인 자신들)은 몰랐다는 것이다."
한나는 유대인에게 고향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유대 민족국가 건립은 반대했다. 《아우프바우》에 게재한 칼럼에서 한나는 모든 유대인이 고향을 가질 수 있는 유럽식 연방제를 지지했다. 그래야만 유럽에서 그랬듯 민족국가 체제가 실패하더라도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한나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에 항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는 이를 "권리를 가질 권리"로 공식화했다. 한나는 유대인 전선을 원했고 여러 국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연대를 바랐다. - P157

1951년 여름, 유럽 여행 후 한나는 뉴 헤이븐에 가서 그가 남긴문학적 유산을 살펴보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H. B.에게〉라는 시를썼다.

살아남았다.
그런데 죽은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을까? 말해다오,
그들의 친구의 목소리는 어디로,
한때의 그들의 몸짓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면 좋으련만.

그들을 떠나보내고
그들의 텅 빈 눈에 드리운 베일을 끌어당기는
그 애통함을 누가 알까.
도대체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자신을 보내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마음을 바꾼다. - P175

한나가 마르크스를 비판한 주된 이유는 마르크스가 노동 활동을 인간 조건의 근본적 활동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었다.
"노동은 인간의 창조자다."
마르크스의 이 한 문장은 한나에게 모든 걸 말해주었다. 한나는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를 각각 구분하면서 우리를 자연 그리고 우리의 동물 상태에 묶는 것이 노동이라고 가정한다. 한나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노동 활동만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공적영역으로 나아가 말과 행동으로 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 - P211

"정치를 논하는 작가는 이 세계를, 인간사pragmata ton athropon가 뒤얽힌 이 세계를 사랑한다."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혹은 한나의 표현에 따르면 "실제로 벌어진일들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모르 문디는 한나가 《인간의 조건》 서문에 적은 "멈추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구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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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는 자기가 내 비위를 맞추고 있다고 믿는다. 또 자기가 날 측은해 한다고 생각한다! 수는 나를 구속하고 있는 이 집의 관습과 피륙들이 곧 자기를 구속하게 되리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 집의 방식을 배워 나간다. 모로코 가죽이나 송아지 가죽이 책을 단단히 잡듯이 집의 관습이 수를 잡아매리라……. 나는 이 집에서 크면서 자신을 책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제 나는 내가 책처럼 느껴지고, 수는 책을 보는 식으로 나를 본다. 수는 책을 읽지 못하기에 내 겉모양은 보아도 그 안에 쓰인 글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창백하네요!」 수가 말한다. 내 하얀 피부는 알아차리면서도 그 아래로 빠르게 흐르는 더럽혀진 피는 눈치채지 못한다. - P375

수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리고 얼굴 앞에서 손을 가볍게 내젓는다………. 수의 행동은 그게 다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불끈거린다. 그 함몰 혹은 추락, 그 안엔 너무나 큰 공포가, 너무나 큰 암흑이 있고, 나는 그것을 공포 혹은 광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수가 돌아서서 기지개 켜고 방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본다. 내가 그토록 탐욕스럽게 그리고 오랫동안 주시해왔던, 거칠 것 없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지켜본다. 이런 게 욕망인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모른다니 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욕망이 좀 더 작고 좀 더 단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맛이 입에 한정된 것이듯, 시력이 눈에 한정된 것이듯, 욕망도 욕망의 기관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에 걸린 것처럼, 이러한 느낌이 자꾸만 들면서 내 안에 머무른다. 피부처럼 나를 덮어 감싼다. - P415

우리는 풀밭을 지나고 울타리를 넘어 달렸다. 밤이 아직 캄캄해 길이 잘 보이지 않았으며, 처음엔 너무 겁에 질려 시간을 가지고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찰스가 자꾸만 구르거나 옆구리에 손을 대고 숨을 돌리려 발걸음을 늦추곤 했고, 그러면 나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귀 기울이곤 했다. 그러나 새 소리, 바람소리, 쥐소리만이 들려왔다. 곧 하늘이 밝아지면서 우리는 희미한 길을 하나 찾아냈다. 「어느 쪽 길로 가죠?」 찰스가 말했다. 나도 몰랐다. 길에 서서 어디로 갈지 고민해 본 지도 벌써 몇 달 만의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땅과 동트는 하늘이 갑자기 광대하고 두렵게 보였다. 그리고 찰스를 보자, 찰스는 나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을 생각했다. 「이쪽이야.」 내가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리고 공포가 사라졌다. - P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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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0-0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명작 중 하나..^^

프레이야 2022-10-01 12:59   좋아요 0 | URL
완벽하게 재미있게 읽히는 매력이요
~^^
 

신간 평전이라 새로이 읽히는 부분이 있다.
원래 시를 좋아했고 시적이었던 한나 아렌트. 저자 사만다 로즈 힐은 아렌트의 시를 모아 <한나 아렌트의 시>도 집필했고 2023년 출간 예정이라고 책날개에 적혀 있다.
<한나 아렌트 평전>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과 영구 보존 기록물, 시와 편지 등을 새롭게 발굴해 한데 엮었다. 한나의 더 깊은 정신세계 이해에 도움닫기.

한나는 여러 스승과 전통 독일철학에 힘입어 박사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발표함으로써 독자적 사상가로 거듭났다. 한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웃 사랑 개념에서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발견했으며,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건 살아 있는 경험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 amor, 욕망 cupiditas, 박애caritas를 서로 구분했는데, 한나는 이를 바탕으로 아모르 문디 Amor Mundi라는 자신만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는 세계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인간은 세계를 사랑함으로써 이 세계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이 세계에 오롯이 기대어 내 안에서 선과 악을 발견한다. 그제야 세계와 인간은 세속적으로 변해간다." - P71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은 한나에게 참된 존재란 속세와 떨어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여러 비판 세력이 있었으나 한나의 《사랑 개념과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창성과 통찰력 면에서 만점을 받았다.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한나는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일평생 한나의 대화 친구였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표현 및 이웃 사랑, 세계 사랑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과거와 미래 사이》,
《정신의 삶》 등 한나의 여러 저서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한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찾은 것은 1953년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장‘이데올로기와 테러‘를 쓸 때였다. ‘새로운 시작‘을 성찰하며, 독자들이 제대로 된 희망을 일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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