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살아가고 내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제대로 보려면 철학사상이 아닌 내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조건> 서문 말미에서 한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이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 발밑의 세계가 아닌 우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며, 잠시 멈추고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인간 조건의 활동에 대한 생각에 다가갈 수 있을지 고려하라는 간청이다.
한나의 1955년 8월 사유 일기를 보면 첫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던져진 게 아니라 정확하게 나아갈 방향을 갖고 있는 존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속성이 생겨나고 그가 속해 있는 길이 드러난다.‘ - P212

사회혁명이든 정치혁명이든 권위의 몰락이 필수 조건이다. 무력, 즉 경찰과 군대를 향한 충성심이 여전히 강한 상태에서는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정치 체제의 분열이 혁명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간절히 열망하고 날개를 펼치길 기다리면서 권력에 대한 책임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8세기에는 문인들hommes de lettres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
미국혁명을 통해 한나는 지역 정치에 뿌리를 둔 더욱 민주적 형태의 정부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한나는 공적영역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행복을 발견하는 시민의 모습을 상상하며,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의 저서를 읽고 의회 제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미국 같은 입헌공화국에서는 시민권을 보장해주지만 정치적 행동을 통해 그러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시민들 몫이다. 한나는 정치는 신념에서 나오는 용기가 아니라(신념은 어렵지 않다), 일상과 관습 속에서 경험한 용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대중의 행복 경험은 혁명 정신을 유지하는 데 필수다. - P252

세상 속 경험과 사건에서 사실이 비롯된다. 다시 말해 사실 존속 여부는 기억과 이야기에 달렸다. 누군가 사실을 각색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한 세상은 사라진다. (중략)

주어진 문제를 관찰하며 마음속에서 더 많은 사람의 관점을 떠올릴수록, 내가 그 사람들 처지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더 자세히 상상할수록, 타인을 대변하는 나의 사고 능력이 더 강해질수록 타당한 결론, 즉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끝없는 거짓말은 내 발밑의 땅을 앗아가 내가 설 땅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논문은 "진실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답하며 끝난다.
"개념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진실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고 내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다."
진실은 이 세상에서 내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항상 움직이는 땅과 하늘과도 같다. - P258

한나는 야스퍼스에게서 경청과 대화를 하나의 예술로 이해하고 이 세속적 활동들을 자신의 삶과 일의 중심에 끌어올린 한 남성을 보았다.

이 작은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비할 데 없는 대화 능력을 펼치고 발휘했다. 매우 주의깊게 들었고, 언제나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냈으며, 인내심 있게 토론 주제를 음미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침묵으로 그칠 것을 공론화하고 대화 주제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말하고 들음으로써 그는 변화와 확장을 가져왔고 이를 더욱 갈고 다듬었다. 그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면, 밝게 비추었다.

한나에게 야스퍼스는 사유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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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10-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이 인상깊네요 ㅎㅎ

프레이야 2022-10-04 08:45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아 뭐라 말 못하겠지만 아렌트는 그것을 넘어섰어요. 청출어람. 69세로 일기를 마감하기 전 하이데거와 대화를 하려고 노년의 하이데거 부부를 찾아갔는데 그때도 부인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둘만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더군요. 일생에 걸쳐 뭔가 듣고픈 말과 하고픈 말을 가지고 찾아갔을텐데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