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넘어서 베틀북 창작동화 7
황선미 지음, 한병호 그림 / 베틀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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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암시하듯 ‘울타리’는 물리적이라기보다 사람들 마음속의 장애물을 말한다. 이 책은 4편의 단편동화가 묶인 것인데 황선미 작가의 예전 동화와 신작이 함께 있다. 예를 들어 ‘앵초의 노란집’과 ‘괭이 할아버지’ 같은 것은 오래 전 작품이다.

 황선미는 내가 특별한 애정을 갖는 작가다. 그는 ‘늘 푸른 자전거’에 대한 나의 (알라딘에 올린) 리뷰를 읽고 메일을 보내주었다. 아버지에 대한 골 깊은 애정이 진실 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충실한 작가에 대한 믿음에 감동했다. 여러 해 전 내가 어린이 독서지도와 관련하여 공부를 할 때 한 어린이서점에서는 독자들 가까이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들려주었는데 영민한 눈동자를 빛내며 그린지대의 아파트 단지화와 어린이 도서관의 부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동화 밖에서나 안에서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힘은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은 건전함과 아이들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려는 자상함에서 나온다.

 이 책에 담긴 4개의 이야기도 작가 특유의 생활동화다. 이야기의 발단은 언제나처럼 소소하다. 집이나 학교, 동네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일을 그냥 넘기지 않고 이야기의 소재로 끌어온다. 표제인 ‘울타리를 넘어서’에서는 실제의 울타리를 등장시키지만 나머지 3개의 이야기에는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쌓은 마음속 울타리를 내세운다. 이야기는 친구 사이의 울타리와 이웃 사이의 울타리로 나뉜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주인공 아이들이 동물이나 노인에 대해 갖는 편견의 울타리도 들고 나온다. 물론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른들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울타리를 넘는 과정이 일상의 이야기 속에서 수수하니 펼쳐진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방식은 과장되지 않으면서 세밀하다. 툭 흘리듯 하는 대사나 비유적으로 배치한 소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3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다. 부담없이 잘 읽어냈다. 아이들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울타리뿐만 아니라 이상하게 보였던 이웃과도 어떻게 마음의 울타리를 허무는지, 소박한 이야기의 힘이 크다. 예전의 작품 둘은 조금 도식적인 결말이지만 요즘 판타지적인 이야기가 많다못해 황당한 내용의 동화도 있는데 비해 일상 속에서 소박한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꾸밈없는 이야기가 은근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계맺기에 서툰 나는 이런 동화를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때면 내 마음의 울타리부터 허물고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고 어느 서재주인처럼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자기 생을 사랑하는 길은 울타리를 허물고 먼저 다가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그런 점에서 어른들보다 낫다.

 

 삽화는 '황소와 도깨비'등의 그림책에서 소박하고 정감 가는 그림을 그려준 한병호 님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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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0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는 작가의 새 작품 찾아 읽기를 잘 해야 하는데, 저는 예전의 작품들만 뒤적이고 있어요. 어제 어머니독서회 첫 토론회로 황선미작가 읽기라서 '들키고 싶은 비밀, 나쁜 어린이표, 일기 감추는 날'등을 이야기 했어요.
님의 서재에서 새 책 알고 저도 울타리 허물아야겠다 생각하며 등교합니다. 감사^^

프레이야 2008-01-08 15:29   좋아요 0 | URL
독서회를 이끄시느라 늘 좋은 책을 찾고 눈과 마음을 열어두시는
오기언냐, 존경해요. 이 책은 저학년용 동화로 읽기에 좋아요.
2-3학년 정도^^

비로그인 2008-01-08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는 천천히 마음속을 여는 것이 보여요.
그것이 황선미 작가에게도 전달된 것이겠지요.
작가에게서 직접 메일을 받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님의 리뷰는 멋지고, 황홀하다기보다
머릿속으로 사악~ 스며듭니다.

프레이야 2008-01-08 15:30   좋아요 0 | URL
황선미작가는 정말 한마디 한마디를 어찌나 정성스레 내뱉던지
듣고 있자니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말처럼 글도 그렇구요. 승연 님, 늘 칭찬에 힘이 납니다.^^
내일 우체국 갈거에요^^

2008-01-08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08-01-0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선미, 저도 좋아합니다.
찾아 읽을게요.

프레이야 2008-01-09 16:39   좋아요 0 | URL
그죠? 이야기마다 어찌나 다 마음에 드는지요.^^
 
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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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삼관 매혈기’를 쓴 위화를 만났던 기억이 무척 인상적이었던지 저자는 ‘매혈기’라는 문구를 인용했다. 위화의 대답은 그의 진지함을 희석시키는 것이었지만 책은 다소 비장감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요즘 자주 비유되는 낱말에 ‘연애’라는 게 있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일 테다. 조금 식상하게도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영화를 만나는 일을 그것에 비유하고 있다.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이성보다 감정이 우선할 것 같은 ‘연애’에 지성이 우선할 것 같은 평론이 잘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읽어보면 그는 피를 팔고 다시 피를 수혈 받듯이 영화평론을 쓴다는 대목에서 지독한 ‘연애’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김영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나는 전혀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었다. 그의 글을 읽어본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평론가 매혈기,라는 제목으로 오른 리뷰에 호감이 가서 읽게 된 책이다. 게다가 내가 조금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의 글이라고 하니 군침이 돌았다.

 그가 영화와 연애를 한 시기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3부로 나뉜 내용 중 첫 번째 장은 주로 그의 연애사라고 보면 된다. 간명하고 힘찬 헤밍웨이의 문장을 좋아한다고 썼듯이 그의 글도 꽤 간결하고 담담한 편이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 제목은 모두 206편 정도가 된다. 내가 보았던 영화도 있지만 못 본 영화들이 물론 훨씬 많다. 그 중 관심이 가는 것들은 챙겨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넘기며 하나씩 메모를 해 보았는데 무협영화에서부터 우리나라 영화까지 무작위로 오고가며 영화와 감독,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간택을 받은 감독들이다. 그의 영화 애정사를 보면 역시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의 깊이와 집요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2부에서는 특정 감독과의 조우를 통해 느낀 바를 술회하고 그 감독의 개성적인 부분을 사랑하게 된 내력을 읽을 수 있다. 3부에서는 영화 연애사에 깊이와 통찰을 더해준 위대한 국내/국외 영화감독들에 대한 이야기와 유명한 영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소제목으로 그 감독들의 이름을 적어두었더라면 후일에 다시 찾아보기에 편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는 객관적인 평론이거나 직관적인 감성으로 종횡무애 하면서, 일면 재미있는 비화들도 엿들을 수 있다. 관심이 가는 영화들이 많았다.

 글은 술술 읽힌다. 어느 감독과 만났던 인상적인 기억들도 들을 수 있고 어느 영화에 얽힌 자신만의 기억과 생각의 변화들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내게 의미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것은 인간(영화 속 인물이거나 감독이거나)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게 한다는 것으로 귀결될 듯하다. 비현실적으로 어두컴컴한 극장을 나오는 순간 과연 인간은 나아지고 있는가. 욕망이 꿈틀대는 그 작은 의자 공간 속에 푹 파묻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은 어느 한 순간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적어도 인간적인 그 무엇에 기준 한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책에서 읽게 된 가장 인상 깊은 감독으로 허우샤오시엔과 아네스 바르다를 꼽고 싶다. 허우샤오시엔은 '영화가 생활을 카피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자신의 영화가 대만에서 인기가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훌륭하다, 관객의 입맛에 혹은 독자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아네스 바르다는 “나이를 먹으면서 어떤 가벼움이 온다. 누군가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거나 비평받는 걸 두려워하는 감정이 없어진다. 내가 아무리 초연하려 해도 노년은 이미 내게 다가왔다.”라고 말하며 “좋아, 이제부터 이삭 줍기를 하는 사람들을 찍으러 가자. 나의 무거움, 사회적 책무를 갖고 영화를 만드는 나의 무거움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삶과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하는 나의 가벼움의 산물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늙은 손을 직접 비추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찍은 할머니 예술가다. 평론가 김영진이 존경해마지 않는.

 평론은 예술 작품을 텍스트로 한다. 지상의 어느 평론가도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피를 뽑아 쓴다기보다, 작품의 피를 빨아먹고 또 새롭거나 조금은 다른 형의 피를 불어넣기도 하는 평론이란 작업에 얽힌, 그만큼 꼬장꼬장하면서도 겸손한 영화 평론가의 밀담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밀하지 않은 게 되어버렸지만 공유된 직관과 경험이 읽는 맛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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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0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 사 놓기만 하고 손 안 댔어요~~ 그래서 2008년은 일단 지름신을 묶어 두고 있어요. 님의 리뷰 읽으니 빨리 봐야할 것 같지만, 워낙 밀린게 많아서 언제 차례가 올지ㅠ
우리 같은 G조라서 너무 반가워요! ㅎㅎ 사실은 경쟁관계인데도 말이죠! ^^

프레이야 2008-01-04 13:4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도 벌써 지름신 강림하사 어제 한 박스 받았어요.
책 두권에 음반 둘, 채플린 전집 디비디로다가..
있는 거나 잘 읽고 봐도 될텐데 말에요.
우리 조 아자아자 잘 해보자구요^^ 님이랑 한 조라서 헤벌쭉이에요ㅎㅎ
 

어제 조덕배, 조정현, 한영애 콘서트에 갔다왔다. 옆지기한테 표가 생겨서이지만 모두 기대되는 가수였다. 첫번째 무대는 조덕배. 검은안경을 쓰고 유독 물을 많이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미성보다는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노래를 모두 마치고는 목발을 짚고 일어서 걸어들어갔다.

조정현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노래는 처음 들어보는데 목소리가 좋았다. 16살 아들이 자기보다 훨씬 키 컸고 무대까지 올라와 인사를 하고.. 슬픈바다, 이 아픔까지 사랑한거야, 그리고 팝송 두 곡.

제일 기대한 가수 한영애. 무대와 청중을 이끌어가는 카리스마가 목소리만큼 대단했다. 우~~ 누구없소를 비롯해 많은 곡을 불렀는데, '푸른 칵테일의 향기' 이 노래가 좋았다. 일어서서 같이 흔들며 즐기는 콘서트는 아니었고 좌석에 얌전히 앉아서 들었지만 다리가 자동으로 까딱까딱... 에고..앵콜곡으로는 한영애의 굳세어라 금순아!!  연령층이 좀 높았던지라 우우~~ 옆지기는 '건널 수 없는 강'을 안 불러줘서 섭섭하다고 하고..  나이가 50이 다 되어가는 한영애 목소리 매력적이다. 젊고 정열적이다. 굳세어라~



  
   보는 순간 나의 마음속으로 걸어온 사람
   멋진 모습보단 맑은 그 울림이 아름다운

   가까이 있어도 왠지 알수없는 사람같아 그대는
   푸른 칵테일의 향기 그댈 닮은 모습에

   말하고 싶을세라 자꾸 맘속으로 쓰는 이야기
   은은한 그대 두눈 그눈에 내모습 비춰질때
   난 사랑을 봤어 오 ~ ~ 비밀의 빛깔 비밀의 향기

   그대에게 취하는 설레는 마음
   오 ~ ~    만날때마다 다른 빛깔로
   그대에게 물들수록 세상이 아름다워

   맑은 눈을 뜬채 아름다운 꿈을 꾸는듯해
   그대의 모든것 내겐 신비로운 여행으로

   먼곳에 있어도 왠지 자꾸 나를 유혹하는 그대는
   푸른 칵테일의 향기 그댈 닮은 모습에

   말하고 싶을세라 자꾸 맘속으로 쓰는 이야기
   은은한 그대 두눈 그눈에 내모습 비춰질때
   난 사랑을 봤어 오 ~ ~  비밀의 빛깔 비밀의 향기

   그대에게 취하는 설레는 마음
   오 ~ ~  멈춰진 슬픔 멈춰진 어둠
   새로워진 내일을 선물한 그대
   오 ~ ~  만날때마다 다른 향기로
   그대에게 물들수록 세상이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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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30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1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1-01 21:02   좋아요 0 | URL
조덕배 저도 좋아요. 나의 옛날이야기는 그날 안 부르고 무슨 신곡 두곡도
불렀어요.ㅎㅎ 아빠가 한영애 팬이시구나. 멋져요. 옆지기도 팬이거든요.
걸물이더이다. 님, 아프지 말기에요~
 
열네 살의 인턴십 - 프랑스의 자유학기제를 다룬 도서 반올림 12
마리 오드 뮈라이유 지음, 김주열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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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소년소설도 소재나 내용면에서 전보다 솔직하고 대담해졌다. <열네 살의 인턴십>은 프랑스 작가의 청소년소설이다. 우리 것보다 확실히 더 대범한 표현이 많다. 열네살의 주인공 루이는 우리나이로 중학교 3학년이다. 그네들은 졸업을 앞두고 일주일 간의 인턴십 기간을 갖는 걸 원칙으로 하나보다. 꽤 부러운 제도다. 현실적으로 여건이 갖춰진다면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이런 기간을 갖게 하면 참 좋겠다 싶다.

 이 책은 루이라는 남학생의 성장기를 다룬다. 공부에는 취미도 능력도 별로 없고 내성적이고 남성미보다는 여성적인 섬세한 매력을 풍기는 루이는 다정함과 세심함이 장점이다. 말수가 적은 루이는 그래서 나중에 “아빠 최고야.”라는 한 마디로 적대적이었던 아빠와 깊은 공감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말수가 적은 자의 말의 힘'이다. 루이는 인턴십을 앞두고 일자리를 골라야하고, 어렵지 않게 고른 자리는 미용실이다. 할머니의 제안이 있었지만 그것은 루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할머니의 부추김이었던지도 모른다. 외과의사인 아빠의 반대에 부딪혀 갖가지 사건이 빚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아주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는 건 루이만이 아니다. 집안일만 할 수 있다고 여긴 엄마의 소극성, 자수성가한 아빠의 고루한 가치관을 바꾸어나가게 된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보다 더한 보너스는 루이 한 사람으로 인해 바뀐 미용실 사람들의 삶이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일들 앞에서 루이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이보다 더한 경험의 가치가 어디 있을까. 경험은 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가치가 있다고 했다. 루이는 일주일 간의 인턴십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학교를 빼먹고도 미용실에 갈 지경에 이른다. 다행히도 루이의 재능을 알아본 미용실 식구들도 놀라워했지만 그런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 앞에 가장 경이로운 사람은 바로 루이 자신이다. 취미도 능력도, 별다르게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한 자신이 그런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발견인가.

 나는 때때로 아이가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말할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도 중학생 때 그랬던가 싶으면서도 왜 그렇게나 많은 직업 중에서 하고 싶은 게 없을까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직업이라는 경계를 너무 좁게 두르고 그 안에서 복닥거리며 갇혀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적성이나 능력은 무시한 채 그저 남의 이목과 사회적 평가로 진로를 결정하려는 건 아닌지. 저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해보지 않은 채 그저 다른 애벌레들이 기를 쓰고 올라가니까 무작정 따라 올라가는 애벌레들의 탑과 다르지 않은 게 우리네 교육현실 같다. 진로를 먼저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적절한 코스를 밟아 배우고 닦아가는 길을 택한다는 다른 나라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제도 속에 아이들이 갇혀있다.

 루이의 인턴십부터 우여곡절을 겪고, 10년 후의 일로 결말에 이른다. 10년 후의 장밋빛 찬란한 루이의 모습과 성과는 가히 놀랍다. 이 부분은 상당히 희망적이고 진취적이다. 하지만 너무 승승장구한 것처럼 그려져 있어 자칫 성급한 결정이나 꿈의 실현에 대해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너무 개방적이라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다. 하기야 이것도 규범에 매여있는 나의 노파심일런지 모른다. 큰딸에게(중2) 먼저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인데 어떻게 읽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책의 장점은 개성적인 인물들의 독특한 삶과 모습이 하나하나 그려진다는 점이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풀처럼 자력으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을 보며 루이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터득해간다. 그들은 모두 하나씩의 아픔을 갖고 있었고 생의 한복판에 나와서는 그런 것들을 진한 화장으로 가리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가 겉으로 보는 모습은 얼마나 무지한 이해심을 초래하는지. 사람이 사람을 깊이 이해하게 된 게 루이가 인턴십에서 얻은 최고의 소득이라고 보인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재산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가슴 한 가운데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네 생이 그리는 무늬는 한 가지일 수가 없다는 사실 또한 평범한 말이지만 잊기가 쉽다.  

 다소 신파적인 글귀라면 아래와 같은 것인데 나쁘진 않다. 내성적인 루이가 내내 고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정의하는 이 아이는 충분히 의젓하고 사랑스럽다. "인생은 불행만은 아니다. 인생이란, 꿈이고, 욕망이고, 열정이고, 사명감이요......" "인생은 소망하는 것이기도 해요. 제가 소망하는 것은 ...... 아빠!" 서로를 이해하게 된 아빠와 루이 또한 필연이다. 끈끈한 가족애는 그런 것이다.

 부모는 특히 아빠의 존재는 가장 든든한 정신적 지원자의 역할이다. 근사한 청년이 된 루이의 머리속에서는 작은 나사 하나가 내내 돌아가고 앞만 보고 달리면 될 것 같은 고속도로가 놓여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만 이 책의 결말은 그렇게 희망적이다. 게다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교장선생님)을 잊지 않으려는 루이는 얼마나 미더운가.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려보는 미래의 참 좋은 모습이다.

나는 지금 루이 같이 청소년의 시기를 힘들게 지내고 있는 딸의 감정을 최대한 받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느라 부쩍 짜증을 내는 날이면 다독여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인내심은 부모가, 어른이 먼저 발휘해야할 것 같다.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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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야 이기는 내기 베틀북 철학 동화 7
조지 섀넌 지음, 김재영 옮김, 피터 시스 그림 / 베틀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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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의 철학동화들은 우화를 내거는데 이 책은 세계 곳곳의 민담을 가져와 이야기를 들려주듯 엮어놓았다. 책의 뒷장에는 15편 민담의 출전을 밝혀두었다. 민담은 오랜 세월 구전되어온 옛이야기에 해당된다. 배경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사건의 전개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다소 얼토당토않다고 여겨질 정도로 사건의 전개는 우연에 기반한다. 하지만 그게 민담의 효력이 발생되는 기반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효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옛이야기(민담)를 읽으라고 말한다.

 민담의 주인공은 약자다. 돈도, 권력도, 신분도 없는 약자들이 현실에서 억눌림을 가하는 강자를 지혜로 이기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그들의 지혜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잘 발휘된다. 지혜는 생각의 뿌리에서 나오는데 의외로 간단한 생각에서부터 기발한 생각까지 그들의 생각사다리를 같이 타다보면 흥미로운 해결방법을 찾게 된다. 각 이야기마다 끝에 ‘생각의 사다리’를 두어 지혜를 정리해두고 저명한 사람들이 남긴 격언을 한 줄로 적어 마무리해 두었다. 그사람들의 이름은 아이들에게 생소할 테지만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거짓은 다리가 짧다'라는 격언을 아이들이 재미있어했다.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는데 이야기마다 아이들에게 격언을 만들어 적어보게 하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배경이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나라이름 정도는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호기심이 생기게 하는 나라이름이나 화폐단위(예를 들어 루피)도 나온다. 단순히 옛이야기와 지혜와 교훈에만 국한하지 말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문제해결방법을 더 찾아보는 것도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독후방법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이다. 현자의 지혜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스스로 지혜를 발휘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스스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어 역지사지의 교훈이 되기도 한다. 왕이나 부자나 벼슬아치가 여성, 아이, 보통 사람들에게 지혜로 이기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대리만족도 되고 즐거운 경험이 된다. 지식은 지혜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니 무릎을 칠 일이다.

 나처럼 세상을 사는 지혜를 아직도 터득하지 못한 어른들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일들로 어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문제에 늘 부딪히는 아이들에게 쉽고 재미있는 그리고 의미 있는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철학동화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싶은데 마지막 이야기는 비교적 철학적이다. 헌 배일까, 새 배일까?, 라는 제목인데 세상에는 해답을 낼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것이다. 해답을 낼 수 없는 문제 중의 최고 문제라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는 일이 읽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두께는 얇고 내용은 두껍다. 특히 이야기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그린 삽화(연필 스케치 같은)가 매력적이다. 때로는 환상적으로 대개는 섬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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