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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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1932년 황해도 신막에서 지주 집안(부끄러운 기억으로 담고 말은 잘 하지 않지만)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0년 6월, 해주사범고등학교 재학 중 졸업을 일주일 쯤 앞두고(그때 북한은 6월 말에 졸업식이 있었다고 함) 한국전쟁의 발발로 생의 방향이 뒤틀렸다. 인민군으로 끌려가기 싫어 2층 방 창문으로 뛰어내려 그길로 산으로 도피했다. 그것이 가족과의 생이별이자 영이별이 되었다. 무작정 남으로 향하여 피난길에 오른 그는 발바닥 껍질이 두어 번 훌러덩 벗겨질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동상은 물론이다. 지금도 그의 발은 유난히 두툼하고 거칠다. 문구칼로 자주 발바닥을 긁어낸다.

 

 

 낙동강변에 도착한 그는 주머니에 달랑 들어있던 파커 만년필을 팔아(북한돈은 쓸모가 없었으므로) 단팥죽 한 그릇을 사 먹고 남은 돈을 밑천으로 구포강둑에서 고구마도 팔고 대파도 팔았다. 그는 자수성가하여야 했기에 이산의 슬픔을 곱씹을 여력이 없었다. 일 년 365일 휴무일 한 번 없이 가게일을 하고 여흥이나 관광 같은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오로지 성실과 노력으로 살아왔고 (1931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서울대를 중단한 박완서 작가와는 달리) 문학상을 비롯해 상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의 취향은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는 오늘 일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다. 그저께 일요일 저녁, 맏딸이 친정식구들을 모두 초대해 아버지 생일상을 차렸다. “캬! 나이 참 어지간히 많이 먹었다. 그치?” 허허 웃는 홍조 띤 얼굴이 육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외출할 땐 선크림을 꼭 바르고 저녁엔 알로에 영양크림을 챙겨 바르는 등 피부관리를 철저히 하는 덕인지. 그의 유일한 오락거리로 기분을 띄워 드리자고 노래방으로 모두 갔다.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섭섭하셨을 게 뻔하다.


 

 그의 많은 이름 중 하나는 ‘나의 아버지’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노래방 가서 흥청망청 노래 부르고, 몰려다니며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따먹지 못하는 포도를 보고 분명 시고 맛없을 거라고 냉소하며 속으론 버럭거렸던 여우와 비슷하였다고 할까. 아버지가 노래방을 좋아하게 된 건 오래도록 생업으로 종사했던 가게를 그만둔 후 언제인가부터였다. 소프라노 음색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음치였다. 하지만 그저께 우리는 모두 놀라고 말았다. 음치 탈출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열 곡도 훨씬 넘게 부른 노래 모두 한 번도 책(!)을 보지 않고 손수 번호를 척척 눌렀던 아버지의 반짝이는 기억력 때문이었다. 얼마나 자주 가셨으면?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날도 ‘2348’을 바로 기억칩에 저장하시는 걸 보고 ‘무명의 노년 가수’에 탄복했다. 그건 좋은 기억력의 문제라기보다 의미화의 문제다. 뇌는 내게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을 기억하고 저장한다. 예전에 사전 책장을 뜯어먹듯이 영어단어를 달달 외웠다시던 아버지의 암기력은 인정한다고 해도, 이런 아버지는 분명 아이러니다.

 삶은 아이러니하다는 말은 흔하지만 살아갈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이러니하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모순덩어리들이 모순덩어리 같은 삶을 요리조리 굴리며 놀 줄 아는 나이가 노년의 여유랄까. 아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는 당장 죽을 듯이 눈물이 글썽해서 상심해하던 늙은 아버지에게 소박한 식사 한 끼 같이 하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여인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얼마나 짜릿하고 멋진가.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얼마 전 나는 남편으로부터 넌지시 그와 관련한 말을 듣고 아버지가 품고 사시는 젊음의 샘을 알아버린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술도 안 하고 별다른 취미도 없고 사회적으로 이뤄놓은 것도 없는, 뒤늦게 데뷔한 가난한 무명가수(!)가 무슨 낙이 있겠어.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어야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래야 살지. 그렇게 사는 거지.

 팔순을 앞둔 박완서의 최근 소설집을 읽으며 노을빛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사로운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애도 여느 누구의 생만큼이나 대하소설 감이지 않은가. 청소년문학은 청소년을 독자로 삼는 문학이라면 노년문학은 노년을 독자로 삼아야하지만 이 소설에 노년문학이라는 이름을 단다면 ‘박완서’라는 건재한 노년작가가 쓴 작품이란 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 소설집은 노년보다 오히려 청장년의 독자가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삶에 대한 이보다 더 예리한 통찰과 유쾌한 반어가 어디 있을까. 한평생 인간에 대한 몰이해와 허풍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틈에서, 등장인물들은 자기 생을 열렬히 사랑하며 폭발적인 젊음을 과시한다. 젊음이란 말이 적어도 ‘생의 열정과 환희를 놓치지 않는 영민함'에 있다면.

 작가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는 글이 독자를 위로하면 좋겠다는 말은 나에게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한 가지 더 있다.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생을 안아주는 법’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마음속에 영원한 그리움의 섬 하나 앉혀두기<그리움을 위하여>, 젊은 날의 외설스러운 순결주의 따윈 비웃어주기<그 남자네 집>, 위선도 용기도 자신 없지만 생의 소박하고도 느글느글한 것들을 짐승 같은 식욕으로 먹어치우며 순간순간 엑스터시 맛보기<마흔아홉 살>,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아주고 온몸의 갈라진 틈새에 고향냄새(광범위한 모성) 스며들게 하기<후남아, 밥 먹어라>, 대충주의나 책임회피성 두루뭉수리에서 벗어나 거저는 사절하고 책임감 갖기<거저나 마찬가지>, 알아듣기보다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운 새로운 사실들 앞에서 마음의 촛불 꺼지지 않게 하기 그리고 (비아냥거림 섞인 말이지만) 서로 불빛을 확인하는 거리에 사는 걸로 관계맺기에 만족하기<촛불 밝힌 식탁>, 생이 내리는 통증마저 내 존재감을 위한 것이라 여기고 오롯이 ‘나’로서 자신을 사랑하기<대범한 밥상>, 치욕을 견디는 더 큰 사랑으로 삶을 자유하기, ‘죽음’을 던져서 갱생하기<친절한 복희씨>, 그럼에도 낙천성을 잃지 않고 남이 내게 축복이 되듯 남에게 나도 축복이 되기<그래도 해피엔드>.

 

 

 김점선 화가가 그린 표지의 선물보따리를 풀면 소박해 뵈는 이야기 속에서 전개되는 의외성과 놀라운 반전,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 속도감 있게 내달린다. 전체적으로 한 문단의 길이가 꽤 긴 편이라 호흡을 길게 하여 죽죽 타고 읽어 내려가는 맛이 있다.

 이 소설집의 재미는 여기서만이 아니다. 청년 같은 노년의 그가 걸쭉한 입담으로 실컷 갖고 요리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 병폐와 사람들의 위선적인 시선을 꼬집는다. 황혼녘에 선 노인의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한 무지, 방만한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풍경, 여자들(고부 혹은 친구) 간의 이질감과 반목을 낳는 가부장적 사회의 잔재, 입양천국, 이기적 핵가족화, 노인의 성과 복지, 수치스러운 거지근성과 만연한 학벌주의. 그리고 말 한 마디의 축복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무례한 인간들의 악한 본성에 한 방 먹인다. 점잖게 한 방 맞으면 오히려 시원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박완서 작가와는 1년 차이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나의 아버지, 그리고 <친절한 복희씨>, 당신들이 있어서 나도 건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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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8-01-15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궁금했어요^^

비로그인 2008-01-1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부지.. 음.

멋진 리뷰입니다. 혜경님
추천!!! 하하


순오기 2008-01-16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감동이에요! 꾹~~~~~
이 책을 사기는 두권이나 샀는데, 나보다 세살 위 언니 두분(친언니와, 이웃 친정언니 같은 언니)의 생일 선물로 드려 아직 못 읽었어요.

프레이야 2008-01-16 21:36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읽어보심 무지하게 마음에 드실거에요.
전 박완서가 부러워요^^

향기 2008-01-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혜경님 ^ ^
오랜만에 들렀다 가요 ,
주말에 시험 끝나고 꼭 읽어봐야겠어용 ~

프레이야 2008-01-16 21:37   좋아요 0 | URL
향기 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주말에 시험 잘 보세요!! 서재에 올만에 가보니 신포도와 여우
이야기가 있더군요.^^

네꼬 2008-01-1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어야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래야 살지. 그렇게 사는 거지.


줄줄이 어쩌면 이렇게 정갈한 글인지.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혜경님글에, "오늘도 감동 먹고 갑니다" 2. 혜경님, 고맙습니다. 추천을 두 번 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08-01-16 21:38   좋아요 0 | URL
네꼬냥, 어여 오세요.^^ 히죽 웃고 있는 네꼬 얼굴 보면 얼마나
즐거운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