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안의 공원 주변에 온통 눈꽃이 피었다. 대낮에도 등불을 밝혀둔 것처럼 천지가 봄햇살처럼 화사하고 따스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폿살폿 내리는 눈꽃송이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 얄궂은 봄바람의 입김을 거스르지도 않고 괜한 어깃장을 부리며 투정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날리다 바닥으로 떨어져 앉은 눈꽃송이를 난 감히 밟지 못한다. 발소리도 안 내고 그 옆을 가만히 걸어간다.  

눈꽃송이들은 시시각각 다르게 보인다. 이른 아침에 이들은 막 잠에서 깬 듯 조용하다. 고요함으로 정지하여있다. 조심스럽게 하루를 열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줍어하며 또롱한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의 얼굴을 닮아있기도 하다. 어느 어머니가 식구들 깰까 물소리도 조용히 얼굴을 씻고 앉아 기도의 싯구를 읊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4월을 알리는 봄비가 내리던 날, 눈꽃송이는 젖고 젖어서 참 겸허해보였다. 자신에게 오는 차가운 물줄기를 피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받아들여서, 자신을 피워올려주는 줄기에, 뿌리에 자양분으로 내려보낸다. 비가 그친 후, 그토록 청아하게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눈꽃송이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눈꽃송이는 햇살을 받아 더 영롱하다.

아직은 커다랗지 않다. 올망졸망한 얼굴로 까르르 웃으며 모여있는 눈꽃송이는 유치원 셔틀을 기다리고 섰는 아이들의 얼굴을 닮아있다. 아이들이 좋아하여 냄비가득 튀겨낸 팝콘 같기도 하다. 토닥토닥 냄비안에서 나는 소리는 경쾌하다. 아마 눈꽃송이도 그런 소리를 내며 앞다투어 터졌을 것이다. 얼마나 밝고 귀여운 소린가. 소리가 멈추고 숨을 죽여 뚜껑을 열면, 고소한 내음을 풍기며 뽀얗게 피어나있다.

어제 저녁, 아이들 이모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랜만에 잠깐의 나들이를 했다. 아, 하얀 가로등불이 비춰주는 벚꽃송이들은 잠시 온 천지에 눈이 내렸나 착각을 불러왔다. "와아, 엄마, 눈꽃이다.~ 길에도 눈이 많이 내렸어." 황홀하여 쳐다보고 섰는 나를 아이들이 흔들어 깨운다. 

요즘은 어딜 간들 이보다 못할까. 전국이 봄나들이하러 나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을 텐데. 봄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나는 것보다 나만의 느낌으로 은밀하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그 길지 않은 벚꽃길이 날마다 나에겐 새롭다. 오늘은 어떨까 설레며 만나면 기껍다. 꽃은 아무 말이 없는데 나의 간사스러움이 날마다 다른 말을 걸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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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4-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정말 눈이 내렸나하고 생각을 했지 뭐예요.
꽃눈송이.... 정말 눈이 오는 것처럼 휘날리고 있더군요.
연휴 봄나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지도 소박하게 집근처에서....

겨울 2004-04-0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니는 길에도 벚꽃이 만개해서 바람에 날리는 모양이 꿈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똑같이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 자체로 행복하다는 생각이드네요.

프레이야 2004-04-1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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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연상되는 것은, 잔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엄선한 말로 아이를 지혜롭게 길러내고 싶은 엄마교육서 같은 것쯤으로, 단선적인 생각이다. 원제는 How My Mother Raised 10 Kids 25 Words or Less 이다.

여기서 '25 Words or Less'는 각종 콘테스트에 출품했던 응모작의 문구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2차대전 후부터 추첨식콘테스트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 디파이언스라는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 살았던 이블린 라이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10남매 중 여섯번째로 태어난 저자는 여러사람이 제공해준 자료와 이야기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이블린 라이언은 술주정을 일삼는 남편의 말에 의하면 '징글맞게'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실망하고 있기보다는 금세 다른 일에 몰두하며 희망 쪽으로 해바라기를 하는 그녀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삶이 고달프다고 짜증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앞의 조그만 희망의 불씨를 기회로 잡아 남편을 비롯한 11명의 가족들을 행복의 용광로에 빠뜨릴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재기 넘치는 글로 온갖 콘테스트에 당선되어 받은 갖가지 상품과 상금이 그들 12명 가족을 그럭저럭 꾸려가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불굴의 의지'라는 뜻을 담고 있는 디파이언스에 그녀가 살았던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블린 라이언의 자존심과 용기는 가난한 이들 가족을 성공으로 이끄는 버팀목이자, 등불이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또 그것으로 생활비를 벌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금처럼 여기며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위해선 어떠한 희생도 치르겠다는 엄마의 태도 앞에, 나약한 심성으로 자신을 파괴의 길로 몰아갈 아이가 몇 있을까. 빈곤이 오히려 이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고 걱정을 함께 하며 나눌 줄 알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쓸쓸히 보내게 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받아둔 상품들로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는 엄마의 재치와 자애로움 앞에 어떤 아이가 자신의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술술술 실타래에서 풀리는 털실처럼, 이블린의 화려한 콘테스트 당선 경력과 함께 이들 가족의 다사다난,  엎치락뒤치락, 황당하게 울고 웃는 세월의 이야기들이 풀려나온다. 부럽게도, 이블린의 탁월한 유머감각은 타고났다. 25단어 이하로 운율을 맞추어 문구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이블린은 다리미판 옆에 공책을 항상 두고 머리속에 '번쩍'하는 것을 메모한다. 소란스럽고 팍팍한 일상의 모든 게 그녀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마법에 걸린다.

아이들 글쓰기 지도는 함께 공책에 댓구가 되는 시를 한 행씩 적으면서 했다. 엄마가 먼저 한 행을 적어놓으면 뱃시는 다음 행을 기가 차게 적어놓았다. 많은 수의 아이들 이름도 다 동원하고 middle name을 이리저리 바꾸어 써가면서 하나의 업체에 여러 편의 응모작을 보내기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어느 문구가 당선이 되었는지 모를 때도 있다.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 의외로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할 때도 이블린은 실망을 모른다. 무심하고 무능한 남편의 태도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녀의 손에서는 멋진 시로 태어난다. 번역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빠져버렸겠지만, 운율이나 댓구는 거의 감상하기 어려웠다.

다소 과대광고 같은 면도 있지만 고농축의 단어를 골라 이중의 의미까지 담은 압축된 문장을 만들어놓은 것들에서, 하나같이 그녀의 낙천적, 긍정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지만 모두 그럴까. 이블린은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지키고 키워주었고, 타고난 생동감과 유머감각으로 가족들이 슬픔에 짓이겨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들 가족이 그리는 아름다운 그림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따뜻하고 정겹다. 이들이 함께 그리는 그림은 어느 시골길을 가다 길섶에 오밀조밀 낮게 누워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 같다. 수수하고 향기마저 은은한데다 볼수록 정이 가는 그런 모습이다.

아버지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장성한 아이들의 영원한 우상, 이블린은 암으로 조용히 투병하다 세상을 뜬다. 그 1주일 전까지도 단어의 개수가 정확히 25개인 시를 쪽지에 적었다. 그녀의 '샘솟는 활기'와 변함없는 '유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차선의 운명을 최대한 크게 팔 벌려 끌어안고, 징징거리지 않으며, 여유있게 살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증표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러서 인사를 하지.

    그래야 나중에 천국 문 앞에 가서 섰을 때 

    하나님이 "거기 누구야?" 하지 않으실 거 아니니.>> 

운명을 믿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은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나 나쁘게는 최악이 온다. 하지만 그것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진지하되 너무 무겁지 않게, 발랄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강하되 너무 딱딱하지 않게,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지키고 그것으로 주위 사람을 전염시킨 이블린. 그녀를 말할 때 딸 뱃시는 '위대한 웃음을 지니신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며 '기록과 윤색과 임의 삭제로 점철된 평생'을 사신 어머니라고 했다. 마천루의 어느 광고회사에서 멋드러진 카피를 쓰거나 신문의 칼럼을 쓰는 커리어우먼으로 살 수도 있었을 이블린은 결혼 전 생긴 뱃속의 생명과 앞으로 이어지는 9명의 생명들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로 여겼다.  

아이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다 죽이고 살고 있다고 투덜대는 엄마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의 재능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학계의 명예를 얻고 지적허영을 채우기 위해 학위를 받고 하는 따위의 허울이 말해주는 게 아닐지 모른다. 자신의 보석같은 재능을,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누추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연마한 이블린을 오늘날 소박한 인물평전의 대열에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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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곤 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자녀 교육서 쯤으로, 님의 서평을 읽어 나가는 중엔 소설이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블린 라이언의 아들인 저자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쓴 에세이였군요.....
...정말 이블린 라이언의 평전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이야기같아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함을 강요받는 사회,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블린의 삶은 , 맞아요....뭔가를 건네주네요. ^^

프레이야 2004-04-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 아침에 주시는 커피 한 잔... 님의 커피잔만 보면 기분이 마구 좋아져요.
저자 테리 라이언은 딸이랍니다.^^ 한 사람의 엄마로, 아내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뭔가 멋진 주문을 걸고 오늘도 시작하렵니다.

2004-04-04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4-04-1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얘기, 몇년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다이제스트판을 본 적 있어요. 전 그렇게 좋은 인상만 받지는 않았어요. 여기 나오는 엄마는 그래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살아서 자식들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엄마가 결혼 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과 가정 양쪽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거든요.

프레이야 2004-04-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코멘트 반가워요. 실수(?)란 누구든 하며 사는게 아닐까요. 그 실수 자체가 저에겐 나쁜 인상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사랑의 결실을 실수라고 생각하기도 그렇고요. 오히려 그것에 대한(생명에 대한,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차선을 선택한 삶에 의미를 주는 것 같았어요.^^ 물론 딸이 글을 쓰는 과정과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미화된 부분도 많겠지요^^ 이런 이야기자리가 기쁘네요.
 
 전출처 : 水巖 > 결혼기념일

지난 달에 한 쇼핑업체에서 메일이 왔다.

[ 결혼기념일 ]을 축하합니다. 라는 멧세지 밑에 다음과 같은  기념일 명칭을 소개하고 있었다.

  • 1 주년  紙婚式 지혼식                          15 주년  水晶婚式 수정혼식( 수정식이라고도 함)
  • 2 주년  綿婚式 면혼식                          20 주년  陶磁器婚式 도자기혼식
  • 3 주년  革婚式 혁혼식                          25 주년  銀婚式 은혼식
  • 4 주년  花婚式 화혼식                          30 주년  眞珠婚式 진주혼식     
  • 5 주년  木婚式 목혼식                          35 주년  珊瑚婚式 산호혼식
  • 6 주년  糖果婚式 당과혼식                    40 주년  綠玉婚式 녹옥혼식
  • 7주 년  銅婚式 동혼식                          45 주년  紅玉婚式 홍옥혼식
  • 8 주년  靑銅婚式 청동혼식                    50 주년  金婚式 금혼식
  • 9 주년  陶器婚式 도기혼식                    55 주년  翡翠婚式 비취혼식
  • 10주년 朱錫婚式 주석혼식                    60 주년  金剛婚式 금강혼식
  • 11주년 鐵婚式 철혼식
  • 12주년  明紬婚式 명주혼식                   미국에서는 75주년을 diamond혼식이라고 한다.
  • 13주년 水婚式 수혼식
  • 14주년  象牙婚式 상아혼식                   햇수와 호칭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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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동이 말동이 문원아이 17
홍종의 지음, 하영민 그림 / 도서출판 문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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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아이들과 함께 우리창작동화를 읽었다. 창작동화는 과학도서나 지식위주의 책보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문학적인 상상력이나 상징적인 의미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는 아이도 있다. 이런 아이들은 글 이면의 의미와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좀더 의미있는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 나를 답답하게 한다.  

줄다리기가 원래부터 우리 고유의 전통놀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대체로 알려진 바에 따라 우리 전통문화에서 글알을 찾아내었다는 점에서 이 동화가 반갑다. 충남 당진의 틀못시에서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줄다리기를 소재로 우리 생활에서 흔히 있는 갈등을 엮고, 또 해소하게 한다. 줄다리기는 화합의 의미 이외에도 '다린다'라는 말에 있는 '누르다'라는 의미를 더해야 한다. 나쁜 생각이나 집착, 습관 따위가 내 안에서 활개치지 못하도록 눌러 없앤다, 라는 뜻을 품고 있다.

갈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진세와 승기의 아이다운 경쟁심과 질투심이 부르는 갈등이 그 한 가지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며느리(진세의 엄마)와 나이드신 시골의 할머니(진세의 할머니)간에 있는 세대간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아이를 못 가지는 며느리에게 비녀장을 한 암줄과 숫줄의 줄을 고아 달인 물을 먹으라고 권한 할머니를 며느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긴 어려울지 모른다. 그 물은 버려졌고 진세는 시험관시술로 태어난 아이다.

늘 어르렁거리던 진세와 승기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 틀못시로 가서 줄다리기에 참여한다. 그 전에 갔던 스키장 장면과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 전통놀이는 서양놀이에 비해 좀더 집단공동체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작게는 지역(마을)공동체적이어서 마을 사람들끼리의 단합된 감정을 고양한다. 이 점에서 비판적인 눈을 드러낸 아이에게 난, 좋은 감정을 지역감정으로 부추긴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함께 어울려 화합하고 오랜 기간을 공들여 준비하고(4만 킬로그램의 무게, 지름 1미터의 줄을 지푸라기에서부터 만들어내려면), 이기고 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어느 편이 이기든 '다 좋은 것'이다. 아랫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윗줄이 이기면 병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승기가 들어간 편이 승리했지만, 이기고도 아무도 으쓰대지 않는다는 걸 안 승기는, 이긴다는 게 반드시 승리는 아니란 걸 깨닫는다. 수학시험에서 자기만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허위로 예상문제를 만들어 친구들을 현혹시켰던 행동도 반성했을 것이다. 누그러진 승기에게 말동이가 되어달라며 줄동이 진세는 자신만만하게 화해의 말을 내밀고, 둘은 형제처럼 '줄동이말동이'가 된다.

좀 거슬리는 점은, 갈등이 해결되는 계기가 비약적이란 점이다. 그렇게 경쟁심이 많고 승부욕도 많은 승기가 너무 쉽게 마음이 풀어진다. 진세의 엄마가 '줄동이'를 인정하는 대목도 뜬금없이 나온다. 골이 깊었을 미신에 대한 나쁜 감정이 아무런 납득할 만한 대목도 없이 풀려있다. 줄다리기를 하는 장면은 좀더 박진감 넘치게 빠져들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교훈을 너무 드러내려 한 점도 그렇다. 주인공은 항상 멋지고 착하고 잘 되는 것으로 나오는 게 싫다고 한 아이의 말에 좋은 대답을 못해주었다. 우리 동화의 특징이자 한계인가. 이 아이가 다른 외국창작동화도 다음 기회에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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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랑 2004-04-1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감사합니다.
'줄동이 말동이'를 쓴 동화작가입니다.
예리한 평 감사드리며 좋은 동화를 창작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프레이야 2004-04-1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종의님, 반갑습니다. 뭐라 해야할지... ^^
저의 졸평을 너그러이 좋게 받아주시니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책임있는 생각으로 동화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동화 또 기대하겠습니다. 나오면 알려주실래요?
 
뫼르피와 실수 대소동 - 즐거운 책 읽기 1
안드레아스 슐뤼터 지음, 카롤리네 케어 그림, 최병제 옮김 / 초록모자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초록모자'에서 출간된 즐거운 책읽기 시리즈 첫 권이다. 뫼르피 시리즈는 작가의 모국 독일에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후속편이 기대되고 있다한다. 그러고보니 즐거운 책읽기 시리즈 두번째 권은 '뫼르피와 실수도둑의 습격'이다. 4학년이 된 아이들과 함께 <뫼르피와 실수 대소동>을 읽었는데, 이 녀석들 벌써 두번째 권이 더 기대된다고 그 책 읽고 싶다고 애교를 떤다.

이 동화는 한마디로 재미있다. '실수'라는, 누구나 하면서 살고 어쩔 수 없이 반복하고 사는 사소한 그것을 동화의 글알로 삼았다는 점에 우선 점수를 주고 싶다. 게다가 '뫼르피'라는  작고 못생긴 천방지축 뻔뻔한 그러면서도 귀여워 꽉 깨물어주고 싶은 도깨비를 등장시킨 점도 이야기 전체에 생기발랄함을 불어준다. 주근깨 투성이 얼굴, 뻐드렁니, 돼지꼬리처럼 말려올라간 머리카락 양끝, 옷의 단추는 맞지않게 채워져있고 양말도 짝짝이(왠지 삐삐가 연상된다), 한 손엔 실수 삼지창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한 손을 허리에 척 걸치고 있다. 

발그레한 양볼과 귓볼은 앙증맞다. 뫼르피를 이렇게 그려놓은 것부터 해서 모든 삽화가 아주 개성있다. 각 페이지의 쪽수번호 위에 뫼르피의 앞모습과 뒷모습이 반복해서 그려져있는 것도 어찌나 귀여운지, 작은 배려가 아이들로 하여금 부담스러운 책이 아니라 재미있는 장난감처럼 여겨지게 한다. 책읽기를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는, 책이 자신을 짓누르는 게 아니라 행운을 주는 마스코트나 친한 친구같은 느낌으로 책을 만날 수 있게 편집이나 북디자인에서 각별한 정성을 보이는 책이 다소 도움이 된다.

이 동화에는 명언이 몇 나온다. 예를 들자면 '어리석은 자만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 ,  ' 실수로부터의 자유!'  혹은 '어영부영 일을 처리하느니 차라리 크게 실수하는 것이 낫다!'  같은 것들이다.  실수할까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나 완전무결하기만 하려는 마음 자체를 지워버리라고 충고하는 말이다. 그리고 실수를 남 탓으로 돌리며 불평하거나 앓는 소리를 내지 말고 실수로부터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배우고 빚어질 수 있는 새로운 결과를 더 즐거워하라는 말로 들린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도 대충 끝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크게 실수를 한다면 오히려 깨닫고 배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뫼르피는 이런 실수를 '환상적인 실수'라 이름하며 이런 실수를 아주 좋아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환상적인 실수를 잘 저지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실수도깨비이기도 하다. 요하나는 이혼한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종종 있다. 알렉산더는 엄마의 남자친구인데 완전한 것을 너무 좋아하는 그 사람이 집에 와 있으면 실수를 더 잘 저지른다. 이런 경험은 아이든 어른이든 했을 것이다. 너무 잘 하려고 긴장하면 오히려 실수를 하게 된다.

유익하지 못한 실수, 즉 환상적이지 못한 실수를 저지르는 알렉산더에게 뫼르피의 천적 제트천사들이 공격하고 뫼르피와 요하나는 힘을 합해 알렉산더를 구한다. 그 방법은 어떻게든 알렉산더가 스스로 '환상적인 실수'를 저지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실수삼지창과 실수비누방울을 가지고 작은 전쟁이 일어난다. 제트천사는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에 쫓기고 매달려 있으면 그 대상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전화, 시계, 금고, 서류가방, 지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강박증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비친다. 

뫼르피가 요하나에게  하는 '실수'에 대한 짧은 강의는 프로이드를 연상하게 한다.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잘못을 만들어야지 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뿐' 이라고, '가끔 실수를 저지르겠다는 소망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에게 착 달라붙지. 그런 다음 실수를 저지르게 하는 거야.'

프로이드는 우리가 흔히 하는 사소해보이는 말실수가 사실은 우리 안의 소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비단 말실수만이 아니라 행동의 실수도 사실 들여다보면 은연중에 자신의 바라고 있었던 것이 표현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다면 그런 '실수를 통해서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동화는 그렇게, 내면 저 아래의 어두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건강하고 밝게 그려내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슬기를 주려한다. 재미와 교훈과 대리만족이 통쾌하게 잘 섞여있다.

새학년이 되어 아이들은 한 학년씩 높아졌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주위에서 기대하는 것만큼 부담도 안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실수를 하게도 되고 때론 좌절감을 맛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아이는 작은 실수에도 자기 머리를 막 때리며 괴로워한단다. 이런 아이에게 <뫼르피와 실수 대소동>을 주고 싶다.

'차례' 옆의 속지에 이런 글이 적혀있다.

<훌륭한 사람의 난관>

"무슨 일을 하십니까?" / K씨에게 물었다. / K씨가 대답했다.

"나는 애써 무척 많은 일을 해요. 그리고 다음 잘못을 준비한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코이너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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