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연상되는 것은, 잔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엄선한 말로 아이를 지혜롭게 길러내고 싶은 엄마교육서 같은 것쯤으로, 단선적인 생각이다. 원제는 How My Mother Raised 10 Kids 25 Words or Less 이다.

여기서 '25 Words or Less'는 각종 콘테스트에 출품했던 응모작의 문구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2차대전 후부터 추첨식콘테스트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 디파이언스라는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 살았던 이블린 라이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10남매 중 여섯번째로 태어난 저자는 여러사람이 제공해준 자료와 이야기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이블린 라이언은 술주정을 일삼는 남편의 말에 의하면 '징글맞게'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실망하고 있기보다는 금세 다른 일에 몰두하며 희망 쪽으로 해바라기를 하는 그녀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삶이 고달프다고 짜증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앞의 조그만 희망의 불씨를 기회로 잡아 남편을 비롯한 11명의 가족들을 행복의 용광로에 빠뜨릴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재기 넘치는 글로 온갖 콘테스트에 당선되어 받은 갖가지 상품과 상금이 그들 12명 가족을 그럭저럭 꾸려가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불굴의 의지'라는 뜻을 담고 있는 디파이언스에 그녀가 살았던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블린 라이언의 자존심과 용기는 가난한 이들 가족을 성공으로 이끄는 버팀목이자, 등불이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또 그것으로 생활비를 벌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금처럼 여기며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위해선 어떠한 희생도 치르겠다는 엄마의 태도 앞에, 나약한 심성으로 자신을 파괴의 길로 몰아갈 아이가 몇 있을까. 빈곤이 오히려 이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고 걱정을 함께 하며 나눌 줄 알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쓸쓸히 보내게 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받아둔 상품들로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는 엄마의 재치와 자애로움 앞에 어떤 아이가 자신의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술술술 실타래에서 풀리는 털실처럼, 이블린의 화려한 콘테스트 당선 경력과 함께 이들 가족의 다사다난,  엎치락뒤치락, 황당하게 울고 웃는 세월의 이야기들이 풀려나온다. 부럽게도, 이블린의 탁월한 유머감각은 타고났다. 25단어 이하로 운율을 맞추어 문구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이블린은 다리미판 옆에 공책을 항상 두고 머리속에 '번쩍'하는 것을 메모한다. 소란스럽고 팍팍한 일상의 모든 게 그녀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마법에 걸린다.

아이들 글쓰기 지도는 함께 공책에 댓구가 되는 시를 한 행씩 적으면서 했다. 엄마가 먼저 한 행을 적어놓으면 뱃시는 다음 행을 기가 차게 적어놓았다. 많은 수의 아이들 이름도 다 동원하고 middle name을 이리저리 바꾸어 써가면서 하나의 업체에 여러 편의 응모작을 보내기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어느 문구가 당선이 되었는지 모를 때도 있다.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 의외로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할 때도 이블린은 실망을 모른다. 무심하고 무능한 남편의 태도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녀의 손에서는 멋진 시로 태어난다. 번역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빠져버렸겠지만, 운율이나 댓구는 거의 감상하기 어려웠다.

다소 과대광고 같은 면도 있지만 고농축의 단어를 골라 이중의 의미까지 담은 압축된 문장을 만들어놓은 것들에서, 하나같이 그녀의 낙천적, 긍정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지만 모두 그럴까. 이블린은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지키고 키워주었고, 타고난 생동감과 유머감각으로 가족들이 슬픔에 짓이겨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들 가족이 그리는 아름다운 그림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따뜻하고 정겹다. 이들이 함께 그리는 그림은 어느 시골길을 가다 길섶에 오밀조밀 낮게 누워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 같다. 수수하고 향기마저 은은한데다 볼수록 정이 가는 그런 모습이다.

아버지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장성한 아이들의 영원한 우상, 이블린은 암으로 조용히 투병하다 세상을 뜬다. 그 1주일 전까지도 단어의 개수가 정확히 25개인 시를 쪽지에 적었다. 그녀의 '샘솟는 활기'와 변함없는 '유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차선의 운명을 최대한 크게 팔 벌려 끌어안고, 징징거리지 않으며, 여유있게 살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증표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러서 인사를 하지.

    그래야 나중에 천국 문 앞에 가서 섰을 때 

    하나님이 "거기 누구야?" 하지 않으실 거 아니니.>> 

운명을 믿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은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나 나쁘게는 최악이 온다. 하지만 그것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진지하되 너무 무겁지 않게, 발랄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강하되 너무 딱딱하지 않게,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지키고 그것으로 주위 사람을 전염시킨 이블린. 그녀를 말할 때 딸 뱃시는 '위대한 웃음을 지니신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며 '기록과 윤색과 임의 삭제로 점철된 평생'을 사신 어머니라고 했다. 마천루의 어느 광고회사에서 멋드러진 카피를 쓰거나 신문의 칼럼을 쓰는 커리어우먼으로 살 수도 있었을 이블린은 결혼 전 생긴 뱃속의 생명과 앞으로 이어지는 9명의 생명들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로 여겼다.  

아이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다 죽이고 살고 있다고 투덜대는 엄마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의 재능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학계의 명예를 얻고 지적허영을 채우기 위해 학위를 받고 하는 따위의 허울이 말해주는 게 아닐지 모른다. 자신의 보석같은 재능을,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누추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연마한 이블린을 오늘날 소박한 인물평전의 대열에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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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곤 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자녀 교육서 쯤으로, 님의 서평을 읽어 나가는 중엔 소설이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블린 라이언의 아들인 저자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쓴 에세이였군요.....
...정말 이블린 라이언의 평전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이야기같아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함을 강요받는 사회,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블린의 삶은 , 맞아요....뭔가를 건네주네요. ^^

프레이야 2004-04-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 아침에 주시는 커피 한 잔... 님의 커피잔만 보면 기분이 마구 좋아져요.
저자 테리 라이언은 딸이랍니다.^^ 한 사람의 엄마로, 아내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뭔가 멋진 주문을 걸고 오늘도 시작하렵니다.

2004-04-04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4-04-1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얘기, 몇년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다이제스트판을 본 적 있어요. 전 그렇게 좋은 인상만 받지는 않았어요. 여기 나오는 엄마는 그래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살아서 자식들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엄마가 결혼 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과 가정 양쪽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거든요.

프레이야 2004-04-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코멘트 반가워요. 실수(?)란 누구든 하며 사는게 아닐까요. 그 실수 자체가 저에겐 나쁜 인상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사랑의 결실을 실수라고 생각하기도 그렇고요. 오히려 그것에 대한(생명에 대한,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차선을 선택한 삶에 의미를 주는 것 같았어요.^^ 물론 딸이 글을 쓰는 과정과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미화된 부분도 많겠지요^^ 이런 이야기자리가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