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아벨
알레산드라 로베르티 그림, 세르지오 라일라 글, 김완균 옮김 / 효리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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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벨의 이야기는 헤어짐에서 시작한다. 사랑하는 부모님과의 이별이다.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물건들을 잘 간직하고 아벨이 도착한 곳은 숲이다. 숲은 자연이다. 이곳에는 주인이 이미 있다. 바로 늑대라는 녀석이다. 그런데 이 주인은 손님이 반갑지 않다. 허락도 없이 자신의 땅에 들어온 아벨이 못내 못마땅하다. 아벨이 나무를 이용해 집을 짓고 밭에 씨앗을 뿌려 채소를 가꾸는 행동이 얄밉기만 하다.

숲의 주인, 늑대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아벨은 가지고 있다. 칼로 나무를 깎고 씨앗을 뿌리고 냄비에 재료를 넣어 요리를 한다. 무엇보다 아벨은 날마다 무슨 책을 보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지혜가 담긴 책이다. 늑대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아벨을 괴롭혀보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게다가 아벨이 냄비에 요리한 음식을 훔쳐와 먹다보니 입맛에 길들여져 날 것으로는 어떤 것도 맛이 없다.

아벨은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사용하고 농사를 짓고 문자를 해독한다. 아벨은 숲의 주인이 늑대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남의 땅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 주인과 친해지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 땅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러나 늑대는 처음부터 적의를 품고 아벨을 내쫓고 싶어했다. 승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인간인 아벨이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늑대를 품어준다. 아벨은 지혜의 책을 날마다 보며 그 해답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해치려고만 하는 늑대를 오히려 감싸주고 돌봐준다. 늑대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새 풀어졌고 아벨은 자신 안에서 적이 아닌 친구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그림책은 평온한 얼굴을 한 아벨의 가족사진에서 출발한다. 첫그림이 마치 퇴색한 옛날가족사진처럼 느껴진다. 그 다음 장부터는 전면이 그림으로 넓게 펼쳐진다. 전체적으로 채도를 낮추어 차분하고 편안해보이는 인상을 주면서 색연필로 그린듯 섬세하기도 하다. 아벨은 영특하고 순해보이는 얼굴이다. 늑대의 곤두선 털은 그와는 반대의 느낌을 준다. 앞부분의 속지와 뒷부분의 속지에는 숲의 빽빽한 나무들이 보인다. 앞부분의 늑대와 아벨, 그리고 뒷부분의 늑대와 아벨이 서로 어떻게 하고 있나를 보면서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시작과 끝을 잘 연결한 세심한 일러스트레이션이다.

<늑대와 아벨>은 몇 가지 생각거리를 풀어볼 수 있는 책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 문명의 발달을 가져온 인간이 먼저 나서서 해야할 일 같은 게 아닐까싶다. 가장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생각거리는 '관계를 좋게 만드는 방법'이다. 바람직한 관계는 '우정'이 바탕이 되어야된다고 생각한다. 친구 같은 관계는 수평적이며 열린 관계이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도와주는 일이란 말처럼 쉽지가 않지만 아벨은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던 늑대에게 그런 행동으로 대응한다. 이는 상대의 마음을 송두리째 풀어주고 내 쪽으로 오게 하는 비법 아닌 비법이라 생각된다. 아벨의 지혜의 책!! 그 내용을 친구랑 토닥거리기 일쑤인 아이들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하는, 할아버지 손바닥처럼 품 넓은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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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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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이 믿음직하면서 살갑다.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밖을 보는 통로는 '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안을 훔쳐보는 통로도 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도 문을 열어야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내 보인 '문'은 햇살이 은은하게 비쳐 온기를 담고 있다. 세상 밖과 안이 불투명하게 막혀있지 않고 잘 통할 것만 같이 열려있는 느낌이다. 비록 그 문이 닫혀있다해도 말이다. 그 문 옆에 앉아 책을 펼치면 속눈썹 위로 햇살이 아른거리며 기분 좋을 정도로 눈이 부시고 잠이 스르르 들 것만 같이 편안하다.

이런 분위기는 이 책의 책장을 다 덮을 때까지 이어진다. 굳이 예스러운 문체를 고집하지 않는 이야기방식도 그렇고 사라진 인물들을 살려내는 데 있어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또한 그러하다. 이는 무리없이 읽어내려가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특히 초반부)  다소 몽환적이다싶은 묘사가 이덕무란 인물을 현실비관적이거나 유약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서두의 이런 분위기는 점점 현실적이고 강인한 미래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덕무이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을 간서치라 하며 겸양한 태도를 보인다. 또한 자신이 책과 만나는 독특한 방식을 감동스럽게 풀어낸다. 가난한 살림에 할 수 있는 건 책 읽는 일밖에 없는 무능한 자신의 처지를 한스러워하며 책을 팔아 생계를 잇는 대목은 콧등이 찡하며, 한편 답답하다.

중간부분에서, 억눌린 한을 참된 벗들과의 교제를 통해 나누고 시대를 함께 아파한 그는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같은 마음의 벗들을 소개한다. 또한 홍대용과 박지원을 더 큰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케한 스승으로 소개한다. 모두 저자의 입을 통해 상상력에 힘입어 소개되는 형식이다. 실제 연도와 구체적인 일화, 살아있는 대화와 웃음을 통해 각 인물들의 사상과 업적, 이덕무와의 연관성이 소개된다. 간혹 중복되는 사항도 있어 조금 다듬었더라면 하는 곳이 살짝 보인다. 

인물들은 모두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책 밖으로 걸어나온다. 이렇게 과거의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는 순간의 설렘이 가장 큰 미덕이다.  이덕무가 오감을 통해 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나누었듯이,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대부분 실학자들)은 오감으로 느껴지는 개성적인 사람들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홍대용이다. 과학과 기술을 중히 여기고 혼천의를 만든 실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인물인데 완전히 생명력이 부여되어 튀어나왔다. 왕산악 뺨치는 수준급의 거문고 소리라니, 얼마나 멋스러운가. 그 시대에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자세한 관찰과 예리한 비판의 눈으로 물음표를 던지고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 이는 자기 개혁으로부터 세상의 개혁도 나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식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덕무가 벗과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넓혀가듯, 공간적으로도 작은 방 안에서 시작하여 백탑으로 중국으로, 다시 규장각으로  넓혀간다. 이들, 변혁의 의지를 품은 인물들의 배후에는 정조가 있다. 이들이 세상 속으로 나와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이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실현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며 정조의 개혁의지가 담겨있었던 화성 담의 매끈한 벽돌이 떠오른다. 이것을 실어나르기 위해서도 수레가 필요하다가 피력한 박제가가 거침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실현되지 못한 이상을 예견했을까. 이덕무가 책만 보는 바보라고 자칭한 이름에 세상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깔려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과거의 일과 과거의 인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조선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맺는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이지만 책 속 이야기 서술 속에서는 미래에 속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 이어져있는 시간이듯이 과거의 인물과 우리는 연결되어있다. 구세대는 신세대와 맺어져있고 옛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깊이 연관지어져 있다. 서로 나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나누지 않으면 이어질 수 있는 고리가 마련되지 않을 것 같다. 

버려졌던 발해의 역사를 오랜 세월 찾아 모으고 <발해고>를 쓴 유득공을 비롯하여 녹색눈의 호걸 박제가 등 막연했던 인물들이 성격을 띄고 살아나오니만큼,  읽고 나면 나이와 적서를 가리지 않고 진정한 벗을 삼은 이덕무의 지혜와 인품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실학자들과 그 시대의 못다 이룬 혁신에 대해 근거있는 상상력으로 쉽고 재미나게 풀어쓴 책이면서 지금 우리의 미래까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는  이 책에 나오는 인물과 책에 대해 가나다 순으로 간략히 정리를 해 놓아 참고하기에 괜찮다.  

옛 서화집을 넘기듯 오른쪽 책장의 우측에 세로로 그려져 있는 삽화에서 은은한 묵향이 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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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06-01-17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참 인상적입니다. 제목만 보고 스쳤던 책이었는데 한데 읽어보고 싶군요.

프레이야 2006-01-1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재미난 책입니다. 중상주의 실학자 이덕무로만 알고있었던 인물이 말을 걸더군요.

글샘 2006-01-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잘쓴 책이지요. 리뷰도 참 멋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우리 집에 온 마고 할미 돌개바람 3
유은실 지음, 전종문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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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할미>는 솔거나라 시리즈로 나온 보림의 그림책이다. 작가는 이 그림책에서 멋진 동화를 재탄생시켰다. 그렇게 키 크고 발도 큰 마고할미가 어떻게 윤이의 집에 왔을까.

윤이의 엄마는 무척이나 바쁜 분이다. 그래서 아빠가 집안일을 대신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손이 세심하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아 집안곳곳이 지저분하고 음식의 맛도 별로다. 그래서 윤이는 다른 애들은 남기기 일쑤인 학교급식이 상당히 맛있다. 여기서 난 찔린다.^^

도우미로 온 할머니는 이름이 없다. 아니, 잊어버렸을테다. 이 할머니가 마고할미일거라고 짐작하는 윤이가 귀엽다. 그 상상력에 웃음이 절로 난다.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는 영락없는 마고할미다. 무섭고 퉁명스럽지만 못하는 게 없는 할머니, 집안을 반짝반짝하게 해놓고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할 줄도 아는 마법사같은 할머니. 이 분에게 비밀이 있다니, 더욱 놀랍지 않은가. 절대 가방을 열어보아선 안 된다니...

표지의 그림을 보면 이 할머니는 우리네 외할머니처럼 구수한 인상에 편안한 웃음을 짓고 계신 분이 아니다. 깐깐한 표정에 고집스러워보이는 미간의 주름, 이가 다 빠져있는 커다란 입과 날 선 매부리콧날, 힘줄이 다 드러나보이는 목선 그리고 참빗으로 넘겨 쪽을 진 숱없는 머리. 겉으로 보기에는 강직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할머니는 맑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름다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밤이면 집안에서 책을 보고 있는 윤이의 손을 이끌고 공원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이다.

할머니가 아는 옛이야기는 윤이가 책에서 본 것과는 다르다. 작가는 할머니의 입을 통해 판에 박힌 옛이야기를 좀더 진취적으로 바꾸어 흥미를 준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본 그 이야기는 여자라고 권위에 순종해야만 하고 운명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식과는 다르다. 그래서 훨씬 생동감있게 윤이에게 전해진다.

처음엔 두렵기만 했던 할머니와 어느정도 친해지면서도 할머니의 비밀은 윤이를 계속 궁금증에 빠져있게 한다. 윤이는 어느날 목격을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윤이의 상상이나 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많은 걸 할 수 있는 힘은 산처럼 많이 먹는 밥이 아니라 연두치마를 입고 날이 밝아오도록 추는 춤에 있었다. 아, 여기서 놀라워하는 윤이 못지않게 이 책을 보는 우리들 표정이란!!  낭만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마고할미>에서도 긴 팔을 올려 초승달을 손가락을 살포시 쥐고 있는 마고할미는 연두치마를 입고 있다. 연두치마는 새싹이 파릇파릇 올라온 대지를 떠올리게 한다. 별을 보며 그리움 가득한 표정이 되었던 것처럼 춤을 출 때의 할머니는 선녀처럼 아름다웠을 테다. 그 옛날의 꿈을 꾸는 소녀의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에서처럼 남성신화가 보편적인 관념으로 자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여성신화에 접근할 수 있게 한 점이 또한 돋보인다. 2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읽었다. 여자 아이들이어서 훨씬 할 이야기가 많았다. '왜 이름없는 할머니에게'라고 씌어있을까, '할머니는 왜 윤이집에 왔다가 비밀이 탄로나자 왜 집을 나가셨을까', '할머니는 연두치마를 입고 춤을 추며 왜 행복해하셨을까', '할머니가 나가신 후 윤이네 가족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았더니 아이들은 눈망울을 굴리며 나름대로 대답을 풀어놓기도 했다.

할머니가 나가고 홀로 남은 흰 머리카락 한 올을 윤이는 <마고할미> 뒷장에 붙여두었다. 언제고 윤이가 아주아주 바라는 날, 할머니는 다시 이 집에 올 것이다. 윤이에게 맛있는 반찬도 만들어주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재미난 이야기도 들려주고 집안도 윤이 나게 바꿔놓을 것이다. 윤이가 '연두치마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날, 그 할머니가 윤이에게 다시 오는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땐 윤이가 연두치마를 품속에 간직하고 겉으론 굳세고 못하는 게 없으면서, 목숨있는 것들에 촉촉한 연민을 품을 줄 아는 '마고할미'가 되어있을테니 말이다.

손에 들기도 좋은 크기와 두께, 시원시원한 글씨, 해학적인 삽화, 무엇보다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전개가 마음에 쏙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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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1-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책이에요. ^^

하늘바람 2006-01-1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유은실 작가 좋아하는데

프레이야 2006-01-18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전 유은실 작가 첨 들었어요. 좋더군요.^^
아영엄마님, 혜영이랑 아영이랑 사진 보고 왔어요.^^ 귀여운 쁜이들~~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GoAhead & Co. 지음, 김한울 옮김 / 에이지21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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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빨간 하이힐구두가 도발적이다. 책 표지의 간단한 그림 못지않게 책의 제목 또한 그렇다. 특이하게도, 일본 최대의 인터넷사이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글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책 표지의 뒷면에는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고뇌하는 남자와 그를 지켜보는 네티즌들이 당신에게 <성숙한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라고 적혀있다.

성숙한 사랑.. 난 아직도 이 고지의 반의 반에도 와 있지 못하다. 며칠 째 '방식의 차이'란 말이 걸려 마음이 복잡하다. 세상 사는 모든 방식을 다 이해한다해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에 기준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상대의 것에 따라주어야하지 않을까.

여기 책 속의 남자는 결혼 17년째의 평범한 남편이다. 일 중독이 평범한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일을 가진 아내는 육아와 바깥 일 그리고 집안일로 조금씩 지쳐있는 상태인가보다. 무엇보다 일로 바쁜 남편과는 정다운 시간을 가진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져가는 여자다. 쓸쓸하고 외로웠을 거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을 테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문제는 서로가 조금도 그런 것에 대해 보살펴주는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소한 것으로 상처받고 슬퍼지는 순간들에 대하여 그때그때 내어놓고 서로의 입김으로 바람을 쐬어 말려주었어야하는 일이다.

드러내기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심, 질투, 요구, 사랑. 이 모든 감정의 가장 치졸해보이는 부분까지 드러내기란 감추기보다 오히려 힘이 든다. 하지만 드러내어야 상처로 곪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도 예전부터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차라리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상대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테다. 많은 네티즌들의 답변이 있지만 남자는 결국 자신 스스로 해답을 내린다. 아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이 흐르는 사이 여자의 표정에는 날 선 칼날이 사라졌다. 강한 척 거드름피우고 합리화하고 있기보다 솔직한 가슴을 보여주는 남편에게서 그 예전 사랑에 빠졌던 기억이 살아난다.

오랜 세월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십칠년 전에는 못했다. 좀 마음에 안 들어도 내 마음이 문제라고 자책하고 좋은 척 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나쁘다. 젖어서 냄새 나는 빨래는 햇볕에 널어 그때 그때 말려야한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가 시원하게 그 냄새를 날려보낼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에 대해 상대가 먼저 알아주는 사람도 있지만 마음의 눈길이 깊지 못하면 그 방식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속상해하지 말고 내가 먼저 말로 표현했어야했다. 그러지 못하고 지나온 세월동안 멀어지고 낯설어지고 몸 속으로 황량한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 책은 상처를 공공연히 내어건다는 의미에서 용기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란 그리 거창한 것에서라기보단 이렇게 통속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뭔가. 기본이 흔들리지 않아야 다른 것들도 튼실한 법. 눕혀져있는 빨간 구두가 우리의 감추어진 욕망만 같다. 그걸 신고 또각또각 걸어나가고 싶어지는, 어디론가.. <연애의 목적>이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겹쳐진다. 하얀 눈길 위를 걸어가던 홍의 빨간 외투랑 어딘지 비슷한 이미지는 또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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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1-1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나 좋습니다. 별세개짜리 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신기료 장수 아이들의 멋진 크리스마스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73
바버러 쿠니 그림, 루스 소여 글, 이진영 옮김 / 시공주니어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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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많은 산타클로스가 있어요.

나라마다 종교마다 그리고 아이들의 꿈마다, 산타는 변신을 하고 나타나지요.

아이들은 산타가 정말 있냐고 묻더군요. 다 거짓말 아니냐구요?

전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 산타는 우리들 마음 속에 언제나 있단다. 변신도 잘해서 어떤 때에는 엄마 아빠로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로린왕으로도 나타나지. 그리고 산타들도 일년 내내 바빠. 아이들도 다 살펴봐야지,

  선물도 준비해야지, 그리고 순간이동의 마법도 부릴 수 있어서 그 많은 선물을 다 나눠줄 수 있지.

요즘 크리스마스와 관련하여 보게 된 그림책들이 하나같이 어쩜 이리 멋진지, 반할 지경입니다.

특히 이 책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과 산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어주는 매력이 있어요.

알프스 산자락의 지하왕국 요정 왕은 왕답지 않게도 거칠고 난폭한 성격에 옷도 허름하고 외모도

보잘 것 없어요. 바로 로린 왕이랍니다.

로린 왕은 크리스마스 이브면 산자락에 사는 꼭 한 집만 찾아가 선물을 주고 가버려요.

올해에는 삼형제의 집에 들렀어요.

엄마도 없지만 밝고 따스한 성품을 잃지 않고 서로 돕고 다정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요.

로린왕이 아무리 심술궂게 굴어도 전혀 화를 내지도 않아요.

그저 불쌍해보이는 키작은 아저씨를 잘 대해주고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내자고 제의하지요.

아이들의 물질적 부족함은 그런 풍족한 마음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요.

그와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족한 요즘 아이들은 나눌 줄 모르죠.

이 그림책은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해요. 아이들의 물구나무서기 장면은 신이 나지요.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스키를 타고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땔감을 구하러 가는 걸로 보이질 않네요.

가난한 아이들이 스튜가 끓는 것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며 내지르는 장단이 재미있어요.

스니츨, 스노츨, 스누츨 !

작은 것에 기뻐하고 작은 것도 나누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참 사랑스러운 그림책입니다.

프리츨이 물구나무서기로 몇 번을 돌면 황금빛 오렌지들과 금색은색 종이에 싸인 사탕들

그리고 여러가지 맛과 모양의 크리스마스 쿠키가 쏟아져내려요.

금화 은화도 바지 주머니에서 마구 나오네요.

이런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겠죠.

아무 댓가 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책을 보고 이야기 나누다보면

내년에는 산타에게도 선물을 주고 선물을 못 받은 친구들에게도 선물을 나눠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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