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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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이 믿음직하면서 살갑다. "나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밖을 보는 통로는 '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안을 훔쳐보는 통로도 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도 문을 열어야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내 보인 '문'은 햇살이 은은하게 비쳐 온기를 담고 있다. 세상 밖과 안이 불투명하게 막혀있지 않고 잘 통할 것만 같이 열려있는 느낌이다. 비록 그 문이 닫혀있다해도 말이다. 그 문 옆에 앉아 책을 펼치면 속눈썹 위로 햇살이 아른거리며 기분 좋을 정도로 눈이 부시고 잠이 스르르 들 것만 같이 편안하다.

이런 분위기는 이 책의 책장을 다 덮을 때까지 이어진다. 굳이 예스러운 문체를 고집하지 않는 이야기방식도 그렇고 사라진 인물들을 살려내는 데 있어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또한 그러하다. 이는 무리없이 읽어내려가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특히 초반부)  다소 몽환적이다싶은 묘사가 이덕무란 인물을 현실비관적이거나 유약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서두의 이런 분위기는 점점 현실적이고 강인한 미래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덕무이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을 간서치라 하며 겸양한 태도를 보인다. 또한 자신이 책과 만나는 독특한 방식을 감동스럽게 풀어낸다. 가난한 살림에 할 수 있는 건 책 읽는 일밖에 없는 무능한 자신의 처지를 한스러워하며 책을 팔아 생계를 잇는 대목은 콧등이 찡하며, 한편 답답하다.

중간부분에서, 억눌린 한을 참된 벗들과의 교제를 통해 나누고 시대를 함께 아파한 그는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같은 마음의 벗들을 소개한다. 또한 홍대용과 박지원을 더 큰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케한 스승으로 소개한다. 모두 저자의 입을 통해 상상력에 힘입어 소개되는 형식이다. 실제 연도와 구체적인 일화, 살아있는 대화와 웃음을 통해 각 인물들의 사상과 업적, 이덕무와의 연관성이 소개된다. 간혹 중복되는 사항도 있어 조금 다듬었더라면 하는 곳이 살짝 보인다. 

인물들은 모두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책 밖으로 걸어나온다. 이렇게 과거의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는 순간의 설렘이 가장 큰 미덕이다.  이덕무가 오감을 통해 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나누었듯이,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대부분 실학자들)은 오감으로 느껴지는 개성적인 사람들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홍대용이다. 과학과 기술을 중히 여기고 혼천의를 만든 실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인물인데 완전히 생명력이 부여되어 튀어나왔다. 왕산악 뺨치는 수준급의 거문고 소리라니, 얼마나 멋스러운가. 그 시대에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자세한 관찰과 예리한 비판의 눈으로 물음표를 던지고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 이는 자기 개혁으로부터 세상의 개혁도 나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식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덕무가 벗과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넓혀가듯, 공간적으로도 작은 방 안에서 시작하여 백탑으로 중국으로, 다시 규장각으로  넓혀간다. 이들, 변혁의 의지를 품은 인물들의 배후에는 정조가 있다. 이들이 세상 속으로 나와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이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실현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며 정조의 개혁의지가 담겨있었던 화성 담의 매끈한 벽돌이 떠오른다. 이것을 실어나르기 위해서도 수레가 필요하다가 피력한 박제가가 거침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실현되지 못한 이상을 예견했을까. 이덕무가 책만 보는 바보라고 자칭한 이름에 세상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깔려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과거의 일과 과거의 인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조선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맺는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이지만 책 속 이야기 서술 속에서는 미래에 속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 이어져있는 시간이듯이 과거의 인물과 우리는 연결되어있다. 구세대는 신세대와 맺어져있고 옛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깊이 연관지어져 있다. 서로 나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나누지 않으면 이어질 수 있는 고리가 마련되지 않을 것 같다. 

버려졌던 발해의 역사를 오랜 세월 찾아 모으고 <발해고>를 쓴 유득공을 비롯하여 녹색눈의 호걸 박제가 등 막연했던 인물들이 성격을 띄고 살아나오니만큼,  읽고 나면 나이와 적서를 가리지 않고 진정한 벗을 삼은 이덕무의 지혜와 인품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실학자들과 그 시대의 못다 이룬 혁신에 대해 근거있는 상상력으로 쉽고 재미나게 풀어쓴 책이면서 지금 우리의 미래까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는  이 책에 나오는 인물과 책에 대해 가나다 순으로 간략히 정리를 해 놓아 참고하기에 괜찮다.  

옛 서화집을 넘기듯 오른쪽 책장의 우측에 세로로 그려져 있는 삽화에서 은은한 묵향이 배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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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06-01-17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참 인상적입니다. 제목만 보고 스쳤던 책이었는데 한데 읽어보고 싶군요.

프레이야 2006-01-1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재미난 책입니다. 중상주의 실학자 이덕무로만 알고있었던 인물이 말을 걸더군요.

글샘 2006-01-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잘쓴 책이지요. 리뷰도 참 멋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