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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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무한책임이 있다. 여기서 ‘글’은 논픽션(non-fiction)이다. 이 글은 적확한 사실과 주밀한 관찰에 근거하여 자기 주장이나 세계관을 정치하게 구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작가가 지난한 고통 끝에 잉태한 생명이다.”


1.

『네 번째 원고』(Draft No.4 ) (번역.유나영)존 맥피(1931~)의 2017년 연속에세이모음집, 모두 여덟 편에 걸쳐 ‘글쓰기 과정’을 소개했다. 샘 앤더슨에 따르면 이 글은 본래 ‘1975년 이래 프린스턴에서 강의한 강연록’(16쪽)에 근거하고 있다. 말을 글로 다시 옮긴 것이다. 한편, 번역 제목 『네 번째 원고』는 ‘초고를 수정하고 수정해서 네 번째 단계에 이른 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한 편의 초고가 세상에 나올 글로 완성되는 마지막 과정이다. 동시에 이 제목은 이 글쓰기 과정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를 함축한다.


2.

국내에 책이 출판된 이후 작가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저자는 미국 유력 신문사와 잡지에서 기자와 전문칼럼니스트로서 돋보이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평생 몰두했던 글쓰기 분야인 ‘논픽션’을 염두에 둔다. 기사나 언론 등에 실릴 기사나 칼럼을 쓰는 매뉴얼같은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글쓰기에 필요한 기술을 일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의 글쓰기를 ‘문학적 논픽션’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그가 게재한 기사와 칼럼이 ‘사실(fact)’과 ‘문학적 창의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려는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반적인 소설이나 시, 또는 개인수필과 같은 글쓰기를 직접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글쓰기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은 물론이고 우리 시대에 글쓰기의 의의에 대한 지나칠 수 없는 이념을 담고 있다.


3.

이 책은 모두 여덟 장에 걸친 저자의 글과 프롤로그 성격의 기고글(Sam Anderson, The Mind 0f John McPhee:A deeply private writer reveals his obsessive proces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28, 2017.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글은 서론 격이다. ‘존 맥피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에 유일하게 실린 이 기고문은 존 맥피의 글쓰기 속에 담긴 어떤 정신을 추적한다. 그 중 앤더슨은 ‘보존’을 언급한다. 좀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 말은 ‘대립되는 삶의 단면’을 조화롭게 담아서 삶을 전진시키켜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삶을 보존’하려는 ‘연대기적 의미(과거-현재-미래)’를 전제하면서 그 글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의(공시적인 의미로서 현재-과거-현재-미래)를 실현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맥피의 중요한 테마는 언제나 보존conservation이었다. 여기서의 보존이란 이 단어가 띠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보존, 즉 있음과 없음, 머무름과 떠남, 존재와 무 사이의 끝없는 긴장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지는 싸움이다.”(29쪽)(*‘지는 싸움’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져주는 싸움’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4

‘보존’이라는 주제는 맥피가 제안하는 글쓰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에 언급된 여덟 개 주제는 맥피가 제안하는 글쓰기의 실제 과정이다. 비록 주관적인 관점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글의 기획되고 완성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간과할 수 없는 적확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글이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장, ‘구조’와 여덟 번째 장, ‘생략’은 어떤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우선 ‘구조’는 글의 뼈대이자, 글이 흘러가는 길이다. 독자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도 작가 스스로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단계다. 특히 논픽션이 ‘문학’의 특징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 ‘구조’는 핵심이다. ‘글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이 구조에서 힘써야 할 부분은 ‘도입구’다.


“그러면, 도입부란 무엇인가? 우선 도입부는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끔찍하게 형편없는 도입부를 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104쪽)


도입부와 관련해서 맥피는 한 가지 재밌는 제안을 한다. ‘마중물’같은 도입부를 써보고 싶으면 ‘손으로 써본다’는 것이다. 생각을 자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마감하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든다. 그는 답한다. ‘작가의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게 끝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자주 묻곤 한다. 언제 끝마무리에 다다랐는지뿐만 아니라, 초고를 쓰고 다시 수정하고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제 더 이상 해 볼 게 없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언제가 끝일까? 그냥 안다.”(120쪽)


도입와 결론에 대한 확실한 구상이 끝났다면, 이제 그 사이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배열한다.


5.

저자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내용은 어느 글쓰기에서나 상당히 중요한 전략이다. 바로 ‘생략’이다. 글을 덜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단어를 교체하거나 함축, 요약, 개념화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선별이다. 글을 시작만하려 해도 언어에 존재하는 100만여 개의 단어 중에 한 단어, 딱 한 단어를 택해야 한다. 이제 앞으로 나아간다. 다음 단어로는 뭐가 올까?

(중략)

“글 한편의 분량은-더도 덜도 말고-그 글에서 택한 재료로 뒷받침할 수 있는 만큼이 적당하다.”(291쪽)


사실, 네 번째 초고에 이르는 과정은 결국 이 ‘덜어냄’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인 여백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는 “창의적인 독자”를 자극하는 셈이다. 


“창의적인 작가는 장과 장 사이, 절과 절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창의적인 독자는 이 여벽에 나타난, 적히지 않은 생각을 침묵 속에서 명료화한다. 이 경험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라.”(297쪽)


6.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글쓰기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공공성’이다. 비록 ‘논픽션’ 분야에 관한 글이지만, 이런 질문은 모든 글쓰기에서 유효할 것이다. ‘글쓰기’는 두 가지 개념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글’이다. 다른 하나는 ‘쓰기’다. 이 책에 따르면, ‘글’은 작가가 자기 몸으로 살아온 몸안과 밖의 경험을 실감나게 표현해내는 도구다. 그런 점에서 ‘쓰기’는 그 도구로서 우리가 지향하는 공공성을 자신과 타인에게 남겨두려는 아비투스(Habitus)다. 나는 이런 ‘글쓰기’와 관련해 맥피가 제안하는 두 가지 사실을 새겨둔다. 하나는 ‘진지한, 솔직함’이다. 다른 하나는 ‘친절한, 상세함’이다.

또한 나는 이 점에서 문학으로 논픽션이 가진 ‘공공성(公共性)’을 생각한다. ‘기사’나 ‘칼럼’이라는 글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맥피의 제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가짜뉴스를 아무렇지 않게 써내는 글도 적지 않은 시대다. 그런 점에서 『네 번째 원고』는 공공을 위한 글을 써내기 위해서 더욱 절실하다. 글을 쓰는 이들이, 사실에 근거하고, 구도를 명확하게 하며, ‘참조틀’(196쪽)을 정직하게하고, 결론을 독자에게 남겨두는 여유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7.

이 책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모든 예화를 소화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미국 사회 논픽션 기자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강연이기 때문이다. 그가 소재로 삼은 에피소드들은 읽는 대로 곧바로 동감하기 쉽지 않다. 굳이 이런 예화들을 정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모국어 아닌 영어권 글들이 대체로 두괄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각 문단에서 맨 첫 문장에 특히 유념해도 좋겠다. 글 전체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소개해 준 에피소드들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도 묘미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한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친애하는 조엘, 자네가 이를테면 회색 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치자. 그런데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다.(중략) 벽에 부딪혔다. 막막하다. 가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가? 그럴 땐, ‘사랑하는 엄마에게’라고 써라. 엄마한테 글을 쓰다가 막혔다고, 막막하다고, 나는 무능하고 가망 없는 인간이라고 써라.(후략)”(257쪽)


문득, 이런 “‘글쓰기’는 마치 생명을 잉태하는 듯한 수고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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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이다. 하루 해가 뜨고 진다. 앉을 겨를 없이 쉼없이 움직인다. 마침내 일손을 놓는다. 마쳤다. 여전히 맑은 저녁이다. 아침보다는 볕이 뜨거워졌지만 바람은 선선하다. 걷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조금 멀리 떨어진 전철역까지 걷는다. 이른 퇴근이라 역은 여유롭다. 

자리에 앉아 아침 그 책을 꺼낸다. 펼친다. 읽는다.

"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그 벽에 창문을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의미의 길을 세우고, 존재 이유를 만들어내고, 즉흥적이든 혹은 지속적이든 흥분을 만들어내고, 존재감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 결과는 때로 오래 걷기를 통해 자신 앞에 열린 길과 관계된다."
(221쪽)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가만히 이 글을 보고 있으니 
광화문에서 부산역까지 길게 걸었던 
그 때 그 길이 스르륵 열린다. 










길 끝에는 '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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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역을 지나자 예상대로 맑은 하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다비드 르 브르동의 <<느리게 걷는 즐거움>>(글항아리, 2014/2020)이다. 아무데나 펼쳐 읽는다. 앉아있어도 걷는 기분이다.햇살도 촣다.

아침 로스팅 첫 원두는 Colombia D.caf이다. 다크하지만 순수한 원두다. 불꽃 속에서 변화하는 콩을 향과 색으로 본다.

익어가는 동안, 타인의 서재를 찾아본다. 유익한 글들이 많다. 오늘 특히 독일 사회주의 신약성서학자 G.타이센의 글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비아,2019)에 대한 포스팅을 잠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히브리성서(TNK)의 코헬렛(전도서) 한 구절이 소개되었다.전도서 9장7절이다. 히브리본문도 곁들여 한번 다시 읽어본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표준새번역개정)
오늘 하루 기분 좋은 날일듯 하다.

전도서는 참 좋은 책이고 나도 참 좋아한다.
자크 엘룰의 <<존재의 이유>>도 조금씩 같이 읽으면 더욱 좋다.

덧.그 포스팅 글에 이 구절이 잠언7:9로 소개되어있어서 확인도 해 볼 겸 덕분에 한번 더 읽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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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소리가 난다』(김장성 글/정지혜 그림, 사계절, 2007년 06월 18일)


1.

여유로운 오후, 맑았던 아침날씨가 오후 되니 흐릿해진다. 햇살이 사라지면 신기하게 사방이 조금 무거워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기도 하다. 가볍게 시간을 보내다가 무심코 그림책 한 권을 떠올린다. 출판된 지 10년도 훨씬 넘었다. 흐린 오후는 시원한 커피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책을 펼칠 필요는 없다. 읽어둔 책이라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어떤 장면, 문장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 그림을 자주 기억한다.

이 그림책은 골목을 따라 흐르는 소리를 찾아다닌다. 그 소리 뒤로 조금 허전한 눈빛이 뒤따른다. 이 허전함에는 이유가 있다. 골목에 가득 찼던 그 ‘소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함이 깊다. 물론 그 소리를 개발비용으로 기꺼이 지불한 건 어른들이라는 아쉬움도 크다.

어떤 소리든지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소리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들이 내뿜는 생존증명이다. 소리로써 슬픔과 즐거움이 드러난다. 아우성과 탄식, 환희와 기쁨도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소리에는 ‘눈빛’이 담겨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어떤 눈빛이 함께 있다. 소리와 눈빛이 공존하는 세계, 거기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은 골목이다. 


2.

그림책에 담긴 ‘소리’를 떠올리다보니, 간단한 영화 한편도 생각난다. 2009년 개봉 독립영화「워낭소리」다. 구차한 소환일 수도 있으나 이즈음에 한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이 세계를 살아내는데 적절한 방법, 즉 ‘공감(empathy)’이며, ‘공존(co-exist)’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소리’와 ‘눈빛’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나와 너, 나와 그것, 너와 그것, 나-너-그것’ 사이의 연대다.













이충렬감독, 다큐멘터리(78분), 2009-01-15개봉


2-1 소리, 소리들

영화 ‘워낭소리’는 소리가 중심이다. 소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를 보는 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를 따라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한 마리의 소가 있다.


영화 속 소리는 서로 다르다. 그에게서는 그 소리만 난다. 할아버지의 소리와 할머니의 소리는 다르다. 노부부의 소리와 워낭소리도 확연히 구별된다. 할아버지의 소리는 낮고, 자기를 향해 구부러진 소리다. 들릴 듯 말듯하다. 자칫 왜곡되기 쉽다. 소리의 양은 너무 적어서 상대방에게 겨우 전달될 정도다. 그러니 자칫 이기적인 소리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는 할 소리만 하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먹으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종종 끄집어내자마자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그 때마다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감도 가물가물하다. 이 할아버지 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다. 워낭소리와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이다.


할머니의 소리는 어떤가. 할머니의 소리는 높고, 꽹과리 치듯 요란하다. 말에 담긴 단어 수는 할아버지의 것에 비할 데 없이 많다. 음색은 얼음장 갈라지듯 얇다. ‘쩡’하고 날카롭게 갈라져 그 파편이 사방에 꽂힌다. 할머니의 소리는 먼저 상대방을 겨냥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한다. 자기 삶에 대한 이유 없는 한탄이 끼어든다. 까닭 없이 상대에 대한 한이 서려있다. 동음반복일 때가 많다. 그 이유인지 몰라도 그 말들은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한다. 할머니 주위를 빙빙 돌고만 있다. 소리는 할머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할머니는 소리를 놓아주지 못한다. 할머니에게서 떠났다 싶은 말도 무슨 메아리처럼 이내 다시 돌아온다.


소의 소리는 또 다르다. 소는 자기 소리는 물론이고 또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다. 태생과는 무관한 인위적인 소리다. 워낭소리다. 아이러니지만, 소는 자기 울음소리로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워낭소리’만이 존재감의 근거다. 이렇듯 소의 존재감은 인위적이다. 피동적이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 자가 있을 때만 비로소 존재의의를 갖는다. 영화에서 소의 워낭에 반응하는 이는 유일하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손길이 아니면 잠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음식은 물론이고, 자기 거처에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도 없다. 설령 할아버지 도움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할아버지가 만취되었을 때 소가 집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안정된 쉼을 취할 수는 없다. 소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드러낼 수 없다.


2-2 관계, 관계들


이 소리들은 서로 연관되어있다.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 둘째, 할아버지와 소,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소의 관계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치 기름과 물과 같다. 두 소리는 한 집에서 울리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그친다. 대체로 할머니는 소리를 내고, 할아버지는 반응하지 않는다. 아예 흘려버린다.(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듣지 않은 척 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다른 소리를 더 잘 듣고 싶기 때문이다. 두 소리를 모두 듣기보다 자신이 더 기울여야 할 그 소리를 선택한 것뿐이다.


둘째, 할아버지와 소는 할아버지가 적극이다. 할아버지는 소의 ‘모든 소리’에 응답한다. 소도 그러할까? 짐작컨대 그러할 것이다. 소는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특이한 것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소에게 자기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소를 위해 불편한 자기무릎을 꿇은 채 꼴을 벤다. 소의 먹을거리를 위해서라면 농약도 치지 않고 직접 잡초를 제거한다. 그는 말을 하기보다 그 말을 자기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는 소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한다. 그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치 수행자답다. 그의 침묵 속에 소는 그의 소리를 듣는다.


끝으로, 할머니와 소는 무관심이다. 할머니에게 소의 소리는 없는 소리다. 무의미하다.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 자기 삶을 더욱 핍절하게 만들어버린 원인일 뿐이다. 그녀에게 소의 소리는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것만큼이나 섬뜩한 소음일 뿐이다. 소리가 커질수록 할머니의 고통도 깊어진다.


소의 자리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척점이다. 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자다. 그렇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잇대어 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닿아있다. 워낭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드러나지 않았던 눈빛이 보인다.


3.눈빛

눈빛은 존재들이 보내는 메시지다. 영화 속 세 존재는 눈빛을 보여준다. 그 눈빛은 두 종류이다. 애틋함과 애처로움이다. 애틋함은 사랑하는 감정이고, 애처로움은 질투하는 감정이다. 애틋함은 소와 할아버지가, 애처로움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소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눈빛은 관계를 말한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음을 의미한다. 상호 의미

있음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유대종교철학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애틋함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애처로움은 ‘나-그것’의 관계를 암시한다과 할 수 있다. 소와 할아버지는 서로 교감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 있다. 소와 할머니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할머니는 소를 하나의 사물로 대한다. 그것은 가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소와 할아버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할머니는 그 두 존재가 자신에게 애처로울 뿐이다.


영화 첫 장면은 계단을 함께 오르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말없이 오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이가 있다. 할머니다. 나는 생각해 본다. 할머니는 홀로 걷는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 깊이 애틋함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소와 함께 있을 때, 할머니 눈에 할아버지는 그저 애처로운 상대일 뿐이다. 소가 사라지고 나면 할머니의 본래 마음은 ‘애틋함’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기를 원치 않을 때가 있다. 눈빛은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눈빛은 사람이나 가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 역시 또 다른 눈빛이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빛을 대변한다. 감독의 눈빛은 어떠한가? 그는 이 노부부와 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를 추억해보니, 감독의 눈빛은 자주 할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워낭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사실은 더 자주, 눈을 들어 ‘할머니’를 주목한다. 카메라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한다. 그리고 그 눈을 직시한다. 할머니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다. 관객을 소리로 안내하는 동안 카메라는 할머니 얼굴을 비춘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자주 카메라에 노출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빛보다도 할머니의 얼굴과 그 눈빛을 더 잘 기억한다. 아마도 카메라의 눈빛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카메라가 할머니를 응시한 이유가 궁금하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눈빛을 수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할아버지를 향한 소와 자신의 동병상련을 암시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악연?’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지 의미가 확산된다. 서로 물려있는 관계. 고착되지 않고, 일방적이지 않고, 틀에 박힌 방향이 아닌 말 그대로 상호 그물망이 되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소는 어떤 한 방향으로 그 관계가 규정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소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카메라의 눈빛을 통해 나는 할머니와 소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함께 걷고 있다. 그래서 소와 노부부는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한 자리에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사람과 사물 사이 관계는 눈빛, 시선으로 극화될 때가 많다. 대면해서, 표정을 보며, 눈빛을 감지하면서 관계는 깊어진다. 기계를 통해 들리는 말과 소리를 넘어 말 그 자체, 소리를 들음으로써 우리는 관계의 정도를 가늠한다. 그 소리에 실린 눈빛으로써 관계의 질적 깊이를 확인한다.


아쉽지만, 소리가 사라진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끝이 언제일지도 모른다. 비대면이 자연스럽고,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불문율이다.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눈빛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소리는 들리지만, 눈빛을 가까이 보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기도 모르는 ‘바람’이 휘돌아 감는다. 그 바람으로써 이 세계는 생존할 이유를 찾는다. 바람을 타고 들리는 소리, 그 소리에 실려 오는 눈빛이 선명할 때, 우리는 공동체다운 연대감을 공고히 만들어갈 수 있다.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홀로 있되 함께 있는 그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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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독교의 경전 중 한 부분인 신약성경 고린도전서13장은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널리 알려져 상식같이 여겨지는 그 구절 중 한 부분은 이렇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편지 제13장 4,11,13절-

이 노래는 읽으면 읽을수록, '사랑' 개념보다 행동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사랑한다’는 동사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사랑에 대해 관념(의식)과 행동(실증)사이를 무한 방황하는 나를 한층 곤혹스럽게 만든다.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하고 익숙한 끝에 다다르긴 한참 멀었다. '사랑'(*사실, 1세기 헬라어 표현에서 agape나 eros, phileo 등은 의미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은 아직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실, 나는 '사랑'을 하나의 기술(art)이라고 말하는 E.프롬의 견해에 동의한 지 오래다. 그가 사랑을 '기술'로서 정의할 때는 단지 감정(feeling)을 경시하자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technic)과 감성의 조화였다. 프롬보다 훨씬 앞선 1세기 사도바울이 말한 바도 그것이다. 그의 노래를 곱씹어 읽어보면, '사랑(agape)'을 '기술'과 '감정'이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완성해주는 긴밀한 연결고리라는 점을 경각시킨 것이다.


2.나는 여러 일들이 기술과 감성의 조화로 완성된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일주일에 하루 담당하는 로스팅도 그렇다. 내가 다루는 로스터기는 은근히 신경써야 할 상황이 많다. 그러고보니 이 일은 조금 기술이 필요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감성이 필요하다. 이것은 사실, 지난 몇 년간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인지한 일이다. 물론, 로스팅은 기술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숙련되고 그 시간에 비례하여 좀 더 수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로스팅은 '감성'영역으로 진입한다. 단순히 시간과 열과 공기를 한 웅큼 커피빈과 절묘하게 만나게 하고, 적절한 시간에 배출해내야 하는 기계적 기술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몸이 기계를 집중하면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고작 15분내외다. 기술도 필요없을 것 같다. 그저 커피콩이 익기를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고, 기압도 확인하며, 콩이 드럼 안에서 변화해가는 과정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조금 늦지 않도록, 너무 빠르지 않도록, 겉은 잘 익은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풋내가 아직 남아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은 일련에 로스팅되는 콩과 내가 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술이 압도해야 하지만, 콩을 대하는 나의 감성적인 마음이 오히려 적절한 로스팅을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


3.

내가 사는 이 땅은 갈수록 기술이 감성을 압도한다. 비정서가 주도하는 세계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 아니 이성으로 감성을 제거하는데 익숙하다. 기술을 옹호하고, 감성을 배척한다. 기술에 함몰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도 모르게 감성 제거 기술자들이 될 여지는 크다. 세계는 생존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명에 대한 감성도 진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과 즐거움에 잇대어 있는 슬픔과 아픔을 간파하고 공유하는 깊은 감성이 이 세계를 세계답게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허튼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지한다. 그것은 능숙해져야 할 기술이 아니며, 단지 개인적 감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적 기술이면서 세계의 감성이기에 나를 넘어서고, 가족을 벗어나고, 사회, 국가를 넘어서 결국 그가 누구든지 '한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한다는 말은 늘 조심스럽다. 사랑의 기술'만 편만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타인을 위한 삶’에 기초한다고 '나는 믿는다(Credo!)'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Art)’이다. 기술과 더불어 감성이 조화로운 삶이라는 것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미래는 개인과 개인이 단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려는 공동체성으로서만 유지될 것이다. ‘내’가 소중하듯, ‘너’도 중요하다. 그 ‘너’가 누구이든 말이다.


4.내친김에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야기에 하나 덧붙여보자. 바울이 사랑을 기술(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향락에 길들여진 고린도지역 신앙인들이었다. 오죽하면 ‘고린도화하다(to Corinthianize)’는 동사가 생겼을까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사랑하다’를 제시한다. 하여 ‘사랑하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기술(art) ’이 되길 바랬다. 바울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만은 아니다. 또한 개인 감성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기술이며 감성이다. 고린도 사회에 건강하게 확립하고 유익을 주는 삶이다. 공동체에서 사랑은 타인과 더불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언제나 모든 것에 상대를 향한/위한 삶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그 사랑은 지금부터 삶의 끝이 올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마침내 부분적인 것들을 완전하게 바라보도록 유일하게 남아있는 힘이다. 바울이 노래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차별, ‘그렇지 않은 듯’ 서로를 분파로 갈라버린 고린도 사회 속 교회공동체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차별하는(혐오하는) 나를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힘이다. 선량한 자신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타인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은총이고, 위로부터 오는 공동체 생존의 ‘방식, 길’(ὁδός’,호도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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