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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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데믹과 인포크라시의 시대

전염병의 시대다. 코로나19에 이어진 앤데믹(endemic)이다. 동시에 인포데믹(Infodemic)의 세계다. 앤데믹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면 인포데믹은 데이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대이다. 모두 피조물과 생활세계를 위협한다. 하나는 삶의 바깥으로부터 스며든 바이러스로, 다른 하나는 삶의 안으로부터 스스로 불러들인 총합적(holistic) 위협이다. 앤데믹은 보이는 유해 질병이다. 인포데믹은 보이지 않게 잠복되었다. 무해한 질병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질병이 모두 삶을 무차별적, 총체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이 치명적 전염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앤데믹은 누구에게나 혐오, 배척, 폐기의 대상이었다. 거리 두기와 비대면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인포데믹은 남녀노소에게 친밀과 무경계와 소유욕의 상대로 여전히 삶을 압도한다. 거리를 둔 친밀감과 왜곡된 이미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가상현실과 기계와 무한대면이 자연스럽다.

 

데이터 지배 사회 진단서이자 인간보고서

정보의 지배 Infokratie,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재독한인철학자 한병철의 글을 전병호가 번역하여 지난 2023년에 출판되었다(원서는 2021년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데이타(정보)지배 사회를 사회철학적으로 조준하여 해체한다. 저자는 스마트폰이 시대의 제왕이 되어버린 현실을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스마트폰은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바이러스의 근원지다. 설상가상으로 합리성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보이지 않는 무기다. 저자는 이런 스마트폰의 위협 시대를 인포크라시(Infokratie)’로 규정한다. 무엇보다 이 세계는 데이터 바이러스에 감염된 합리성 부재의 시대이다. 알지 못하는 순간에 자유를 소실한 정보 감옥의 시대이다. 그의 주장을 갈무리하면, 인포크라시는 정보체제에 의해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정치 분야에 영향을 미쳐 형성된 민주주의다(27).

원서의 제목인 ‘Infokratie(인포크라시)’는 저자의 신조어다. 저자는 우리 생활세계에 창궐하며 숨어있던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비가시적 세계의 왜곡된 정치체제를 가상한다. 그리고 이 은닉된 바이러스가 창출해낸 세계가 어떤 양상인지를 진단한다. 민주주의를 숙주 삼아 숨어있던 바이러스의 정체를 찾아낸 것이다. 번역본의 제목인 정보의 지배는 원서의 지향점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과도하게 스며있는 디지털 문명, 그 정보의 지배 아래서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는다는 의미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에서 암시하듯 이 책은 인포크라시의 구체적 현상과 그것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사회의 위기, 나아가 사회적 정의와 거짓이 판단 불가한 시대 상황에 던져진인간을 주목한다.

이 책의 성과는 스마트족이라는 신인류의 정체성을 일깨운 것이다. 이 인간류는 우리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소속되고 싶은 종족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발전된 문명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며 그 혜택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폐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비판을 애써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드러났다. 그 데이터 바이러스는 결국 삶의 활력 비타민이 아니었다. 치명적 전염병의 병원균으로 잠복해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방심하고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정치적 능력을 소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저자는 이 점을 적확하게 진단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사회 질병 진단서이다. 또한 이 질병사회 에서 삶의 자리가 악화된 채로 적응해가는 변종인간에 대한 관찰 보고서다.

 

책의 논지와 독서방법

저자가 출간한 책들은 대체로 분량이 길지 않다. 그럼에도 주제와 내용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12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소개된 피로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4투명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21리추얼의 종말-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전대호 역, 김영사), 가장 최근 2024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등이다. 대체로 짧은 분량에 거시적인 담론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이 책의 서술 특징은 문학적 기법을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제된 개념 정리를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 앞의 내용을 함축하는 정리 문단을 수사학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법은 개념의 대조, 대상의 상호 대구, 은유, 언어의 응축, 전환접속사의 생략(한편, 그런데, 이런 점에서 등등), 주제어의 반복(이것은 그의 책들이 그의 기본적인 철학에 기반해서 서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책과 책 사이에서도 동일 주장이 빈번하다) 등이다. 특히 단순한 서술이 이 책의 문학적 기법의 장점이다. 이로 인해 거시적 담론이라도 단순 담백하게 전개된다.


책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장들은 마치 한 주제를 다섯 개의 소단락으로 나눠 전개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일관된다. 저자의 핵심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정보지배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을 내적, 외적으로 위협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인간답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인식자유. 저자의 주장은 인간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생각하기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인식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책을 출간하고 난 뒤, 출판사 김영사와 나눈 인터뷰(2023. 3. 9)에 그의 핵심 주장을 읽을 수 있다(출처: https://m.blog.naver.com/gybook/ 223038295401? isInf=true). 정리하면, 냉철한 철학적 인식이 인간을 무의식적 바이러스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효율적으로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가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 만약 그가 말하는 인포크라시의 개념과 그의 정치사회 철학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2장 인포크라시와 제5장 진실의 위기를 읽는 것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핵심 주제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진실의 투명성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투명성은 치열한 담론 끝에 도달해야 하는 윤리다. 투명한 세계는 거친 토론과 이야기의 축적으로 함께 도달하는 공통 세계다. 둘째, 인포크라시 시대의 인간 이해다. 이 세게에서 타자 있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배제와 경청하지 않음은 결국 인간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치명적 바이러스다. 스마트종족의 출현은 타자 있음을 배척한 세계를 구성한다. 이는 함께존재해야 하는 태초의 인간 이해와 대립한다. 유한한 인간, 필연적으로 죽음에 직면할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주장은 명확하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 시대에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특히, 신을 따르는 인간)은 고착된 진리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권면한다. 진실을 분별하고 타인과 함께 그 진실을 철학하며 실행하는 용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인포크라시 시대, 진리에 의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한병철의 이전 글들은 정보의 지배와 대체로 비슷한 주제가 순환한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역, 문학과 지성사, 2011)등에서 다뤄진 그의 주장과도 연동한다. 이 책들에서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우리 시대의 관점을 재조명한다. 그것은 성과중심과 정보지배의 시대가 인간성을 먼지처럼 여겼다는 것에 대한 고발이다. 특히 진실추구 용기를 소멸시킨다. 이 용기는 인간성의 가장 핵심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 용기를 짓누르는 힘에 스스로 투항했다. 이로써 인간은 참과 거짓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며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태초의 본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작은 책은 인포크라시 시대에 태초의 인간성 회복과 유지를 위한 분투를 권고한다. 아쉽지만, 구체적 실천 대안을 제시하진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라는 정치제제에서만이라도 그 용기가 발현되길 희구한다. 인간의 생활세계 안에서 형성된 정교한 교리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 신념을 담론으로 내어 놓고 비판해 보자고 제안한다. 수없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이 우리 시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이끌어가는 맥락에 잘 놓여지도록 말이다.


우리 시대에 모든 옳은 은 끝까지 옳아야 한다. 그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말이 놓인 세계 속에서 그 역사적 맥락이 옳다고 인식될 때이다. 예를 들어 자유공정을 주창하며 비틀거리는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공정을 되묻고 그 선악을 판단받아야 한다. 언론가와 문학가도 마찬가지다. 인포크라시에 가짜 뉴스로 점철된 정보지배로부터 군중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을 각성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한병철의 주장은 인포데믹 시대에 말과 글의 지도자들의 삶의 방식을, 글을 퇴고하듯, 반추하게 한다. 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이들을 위한 타자있음의 열린 세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음을 다해 의 시대를 반성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의 지배에 갇혀 스스로 감시를 받는 것도 모른 체 자신은 자유로운 듯 군중을 호도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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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간 - 여인숙 달방 367일
이강산 지음 / 눈빛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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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진예술가 이강산(1959~)다큐 일기. 다큐멘터리 일기에 사진과 실제 경험을 담았다. 저자는 지난 202079()부터 2021710()까지 대전역 근처 대덕여인숙에 머물러 달방 생활을 했다. 이 기간, ‘여인숙을 주제로 인간의 생존 공간 탐구를 시도했다. 따뜻한 르포(르포르타주).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큐. 여인숙 사람들의 삶을 직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기. 개인의 기록이면서 공적 담론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일기다. 특히 사진은 개인 경험을 사회 이슈와 직접 연관 짓는 경첩 기제(hinge mechanism)로 작동한다


"한 평짜리 에서 폭염과 한파와 빈곤 함정에 파묻힌 채 없는 듯, 죽은 듯 살아가는 달방 사람들, 시한폭탄 같은 소요와 폭력적 갈등을 제거하고 마지막 불씨처럼 꺼져가는 인간의 말과 체온 회복이 절실했다. 사진을 인화해서 나눠주면 부지불식 간에 의식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252)

 

책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여인숙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367, 여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다섯 계절 동안 경험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이방인이면서도 그들과 함께 산 이유는 명확하다.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손닿을 자리에서 함께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존과 공재(共在)가 목적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인숙 밖의 세상으로 두고 볼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2년 남짓한 시간에 철거 직전의 여인숙 두 곳에서 열대여섯 사람의 삶과 죽음이 교차했으니, 2년이란 실로 장대한 인간의 시간 아닐 수 없다...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역설적 인간의 시간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공간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한 평 남짓한 시공간에서 800여 일을 살아낸 이 기록을 나는 오늘 조심스럽게 여인숙 밖 세상으로 전한다. 당연하게 이 모든 것은 진실이다." (인간의 시간, 313-314).

 

이 말 속에 인간의 시간에 대한 정의가 있다. 그 시간은 죽음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인숙에서 체화하는 모든 삶, 크로노스(kronosis). 따라서 인간의 시간은 다층적 의미다. 한편으로 여인숙에 머무는 인간이 짐승처럼 다뤄지는 시간이다. 저자는 이것을 우회적으로 고발한다. ‘짐승의 시간속에 방치된 인간 권리를 항변한다. 다른 한편, 인권의 시간이다. ‘여인숙이라는 사회적 퇴물, 혐오의 공간으로 인식된 삶의 터전에서도 상호 간에 환대하며 인간의 당연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다움의 시간, 카이로스(kairosis)를 함의한다. 이 의미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저 권리마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탈취당한 땅의 사람들을 변호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저술 목적은 명확하다. 저자는 이 보고서 같은 일기문학으로 여인숙 밖의 사람들을 환대와 공존의 장인 여인숙 안으로 초대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숙의 사람들에게도 인간의 시간이 살아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죽음의 공간으로 치부해도 여전히 생()의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죽음 계곡 같은 공간에 흐르는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쟁취하여 재생하려는 것이다. 또한 여인숙 사람들의 삶은 사람다운이야기며, 그들의 관계는 샬롬(평화)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고대 사람들의 상상 속 죽음 공간인 스올(Sheol, 하데스) 같은 여인숙에도 매일 생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스올은 죽음의 빛이 밀려드는 생의 종점이다. 고대 지혜자 코헬렛(Qoheleth)이 말한 대로 더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전도서 9:10)곳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죽음 계곡 같은 여인숙에서 오히려 생()의 희망을 보았다. 삶의 생기가 흐르는 낙원의 흔적을 찾아냈다. 여인숙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코이노니아(koinonia, 관계)를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조명했다. 폐광 같은 여인숙에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의 권리와 끊어낼 수 없는 관계의 끈적함을 자기 몸으로 입증해냈다. 몸 하나 눕히면 꽉 차버릴 0.8평 공간에 자기를 밀어 넣는 방법을 선택하고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여름으로부터 숨마저 얼어버려 굳어버릴 것 같은 겨울, 다시 여름으로 되돌아오는 시간동안 사람들의 삶에 뿌리를 내린 생기를 함께 경험했다. 이처럼 이강산의 책은 인간 사이에 견고하게 자리잡아야 할 안전한 지대에 대한 분투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우리는 타인의 삶을 지키려 하는가?" 이강산의 책은 답한다. 죽음 같은 땅의 삶 너머에 자리한 생의 여백을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이 책의 의의는 이것이다. 즉 문학이라는 비폭력의 힘을 통해 이 세계가 안전한 지대, 생의 여백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이다. 이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미국 법철학자)이 주장하는 시()적 정의와 이 책이 같은 맥락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종종 둔감하고 무딘 상상력을 가진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사고나 감성 속에서나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만드는 그 능력에 있다." <“민주적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황은덕 역)오늘의 문예비평(2010. 11), 45.>

 

이 말은 정치와 법으로만 통치되는 이 세계에서 '공감의 철학'이 곧 문학의 정치적 실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그의 글은 땅바닥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삶의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을 자기 몸으로 확인한 탐사보도문이다. 그가 육화한 증거는 우리 삶 어딘가에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춰져 있는 생존 여백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생(微生)에 대한 사회적 공공선으로서 땅의 사람들과 공존해야 하는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해석학이며, ()철학적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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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정치 - 자유와 연대를 위한 신학적 제언
이용주 지음 / 동연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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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창조자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은 선과 악의 능력(가능성)이라는 자유로 

이 땅에서 자유와 연대라는 사랑의 정치적 행위, 교회적 삶을 실현해야 한다.”

 

1.

본서는 저자인 이용주 교수(숭실대학교 인문대학 기독교학과 조직신학)가 지난 2009년부터 2021년에 걸쳐 발표한 논문들을 취합하여 엮은 모음집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자신의 신학 함의 궁극적 주제에 대해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자유이다.”(5)라는 명제로 명시한다. 이 명제는 독일관념철학자인 셀링 철학에서 차용하여 재서술한 문장이다. 저자는 이 책을 구성하는 각 논문에서 자유,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함의적으로 서술한다. 이를 통해 자유의 철학적 관념과 신학적 관념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입증한다.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하나의 논지로 잘 엮여 빛나는 보석처럼 일관되게 구성되었다.

 

2.

이 책의 핵심 논지는 다음 몇 개의 연속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신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의 삼위일체적 활동을 합리적으로 진술하여야 한다. 이런 삼위일체적 신학에 근거해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도록 돕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 과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자유에 근거하여 사람들과 이 세계가 상호간 자유로운 친교의 공동체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 활동은 자유의 종착점으로서 사랑과 연대의 현실화이다. 사랑과 연대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공동 삶의 형태로 가시화된다.

 

3.

이런 논지를 효과적으로 논증하기 위해 저자는 성서에 견실하게 터를 세우고 독일 관념론자인 셀링, 창조주의적 관점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여 신과 인간과 창조 세계를 탐색한 판넨베르그, 사회주의적 사상을 신학과 목회에 접목한 하르낙과 바르트의 주장들을 그들의 글과 책, 다양한 문서들을 자세히 읽으며 조직신학적(또는 역사신학적)으로 치밀하게 다룬다. 이런 읽기를 토대로 구체적인 실천 대안으로서 루터의 신앙과 실천의 관계, 바르트의 신학 사상 초기부터 감지되는 사회적 관심을 재조명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신학적 사고와 대안이 어우러진 결과로서 정치 체제 중 하나인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실천 사례로 제시한다.

 

4.

이처럼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철학과 신학의 상호 관계를 깊이 탐색하고 독일이라는 특수한 국가 상황에서 발생한 신학자들의 분투를 적극 반영한다. 이런 저자의 노력에 의해 이 책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진 교회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을 전환시킨다. 저자는 그동안 한국교회 신앙이 이 세계의 다양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 함몰된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부정과 두려움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신학적 관점에서 적확하게 짚는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교회(와 신앙인)가 세계 밖이 아니라 세계 안으로 직접 들어와 인간과 함께 활동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생동감있게 체감하도록 추동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신앙인)는 그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자유로운 신앙인(인간)으로써 이 세상과 기꺼이 대화하고 섬기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런 일련의 교회의 삶에 신학적 도움을 주고 싶다는 동기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서의 자유론은 자유에 근거한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또는 목회 현장에서 실현 가능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5.

이 책의 서술 특징과 관련해서 덧붙일 것이 있다. 저자의 글쓰기 전략은 본서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사실, 각 논문들은 조직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니라면 단번이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염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저자의 각 논문들은 일정한 서술 형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일단 각 논문에서 저자는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게 밝힌다. 이어서 그 논지를 입증하기 위한 논거들을 변증법적으로 서술한다. 해당 주제를 요약하고 그에 반대되는 주장, 그리고 그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주제를 요약, 결론짓고 그 주제가 가진 함의와 한계를 함께 제시한다. 따라서 일반 독자는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자료들과 문서들을 느슨하게라도 따라가다보면 저자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6.

본서는 415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각 장은 저자의 관점이 드러날 수 있는 방식으로’(6) 재수집, 배열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관점이란 자유가 신학의 출발점이자 목표라는 것이다. 실제로 독자는 1장부터 15장까지 자유로부터 시작하여 자유로 마감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저자가 천착하는 자유개념의 출발은 프리드리히 빌헤름 요세프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1775-1854)자유론이다. 마감은 삼위일체적 창조자와 유비되는 신-인간-세계의 연대로서 현실의 사회민주주의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이 15개의 장을 하나씩 읽어나갈 때마다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현실 교회의 궁극적 지향점이 자유의 실현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적확하게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7.

이런 주제에 효과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서론격인 “1(1-4) 셀링과 신학을 세밀하게 읽는 것이 유익하다. 다만 1부의 제목이 셀링신학이라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좋다. ‘셀링의 신학이 아니다. 비록 신학으로 출발했던 셀링이지만 그의 태도는 점차로 독일 관념론 철학자로서 신학을 철학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출발인 자유론역시 철학이라는 큰 틀에서 신학적 개념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점이 독자들에게,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셸링이라는 학자는 물론이고, 그 철학적 신학이라는 서술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자의 조직신학적 탁견과 세밀한 서술 덕분에 이런 낯섦은 단숨에 불식된다.

 

8.

실제로 셸링은 신학 영역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다. 국내 철학 분야에서야 어느 정도 그 입지가 명확한 상황이겠지만, 신학 영역에서는 셀링의 철학은 여전히 탐구불모지이기 때문이다. 셸링을 신학 주제로 다루는 학계의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이용주 교수가 누구보다도 기독교 신학에 근거한 셀링의 철학을 치밀하게 논구한 학자일 것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셸링의 철학으로부터 신학으로 이행되는 주제를 천착해왔다고 할 수 있다.(이 책에 앞서 저자는 셸링과 관련하여 셸링 철학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신학적, 체계적 해석에 관하는 논문을 독일 튀빙겐 대학에 제출한 바 있다. 이후 국내에서는 셸링과 관련된 다음 책을 번역했다. Hans Michael Baumgartner/Harald Korten, 이용주 역, 셸링Schelling-절대자와 자유를 향한 철학(서울:동연, 2013). 원제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München: Beck, 1996)

 

9.

무엇보다 지난 15년간 저자가 셀링과 관련되어 국내에서 발표한 소논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특히 선과 악의 문제를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악을 이해하는 교회의 기존 관점을 각성했다는 것은 적지 않은 학문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반영하듯 본 서에서 저자가 1부에 배열한 논문들은 셸링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자유론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적용한 심도있는 연구결과들이다. 독자들은 악의 문제를 신의 관점과 연계하여 서술한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4장 악의 문제와 신-셸링의 자유론을 중심으로”).

 

 

10.

이제 본서의 구성을 잠시 살펴보려 한다. 큰 틀에서 본서는 셸링의 자유론의 개념을 창조신학과 연계하여 ()’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1). 이어 논의를 심화 확대시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지향해야 할 삶의 문제를 정치와 연계한 삼위일체 신론을 다루면서 그 정치 영역의 한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415). 즉 본서는 전반적으로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시작된 신() 이해가 사회민주주의라는 구체적인 정치 체제를 예로 들어 가시화되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 처음과 마무리 주장 사이를 연결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한 인간에 대한 논의다.(2부 창조와 인간 특히 6, 7, 8). 주목할 것은 이 단락에서 저자는 고전적인 인간 이해로서 창조신학적 관점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관점에서 오늘날 새롭게 제시되는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에 근거한 인간 이해를 아울러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이다.

 

11.

저자는 이런 구성틀을 책 제목에 이미 밝혀 두었다. ·인간·정치-자유와 연대를 위한 신학적 제언.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제목 속에는 신, 인간, 정치라는 세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은 인간과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궁극적인 신앙삶인 자유연대의 실체가 정치라는 항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예시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논의와 다소 이질적인 주제도 있다. “3부 자유주의 신학이다. 저자가 이미 밝힌 대로 이 단락은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쉽게 동의하지 않을 주제다.

 

12.

그러나 오히려 이 책의 특장(特長)은 바로 이 '3부 자유주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주의 신학은 오히려 자유의 확장이라는 근대적인 사회 변화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정신에 기초하여 추동하고자’(8)했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재조명한다면, 저자의 확언대로 하나님의 자유에 기초해서 인간의 자유를 근거 짓는 것이 신학의 결정적인 과제라는 사실에 새롭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은 한국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유지해온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제고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을 천착한 3부의 세 개의 논문은 자유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담론(1-2)이 실제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라는 인간의 삶의 자리(4)로 이행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특히 독자들은 ‘3부의 11장 바르트 신학에 대한 자유주의신학적 해석-렌토르프를 중심으로를 탐독한다면 이런 저자의 관점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제목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내용 흐름을 다음과 같은 구성틀로 이해할 수 있다.

1부 자유의 근거로서 신()

2부의 삼위일체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人間)

3, 4부 자유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결실로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政治體制)

 

13.

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쓰인 글이면서도 일관된 조직신학적 주제를 천착한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의 능력으로서 자유를 가진 인간은 삼위일체 창조의 신의 대리자로 이 세계에서 사랑과 연대를 토대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자유하게 하는 교회의 삶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제를 심도있게 논의한다. 이 책은 철학적 관점에 근거하여 신학적 주제를 논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신학적 관점이 철학적 주제를 상기시킨다. 학문적 주제의 통섭을 잘 보여준다. 또한 본서는 조직신학적 관점과 성서신학적 주제가 연동되고, 성서신학적 관점이 조직신학적 주제와 호응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조직 신학과 성서 신학이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조화롭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4.

다만, 본서가 다룬 주제들이 대체로 독일을 중심으로 수집된 자료라는 점은 다양한 관점의 자유론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그러나 이런 점에서 좀 더 다양한 자료들에 의해 이 논의가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즉 자유론에 근거한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사회적 체제는 물론이고 , 전도서 같은 히브리 성경에서 주목하는 선과 악의 문제 등과 신학적 관련성을 심도있게 모색하는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 상황에서 바르트 신학을 주목하며 추앙하는 목회자들이라면 오랫동안 경시되어온 바르트의 자유주의 신학을 재점검하고 그 목회적 장점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책의 표제에 , 인간, 정 치라고 정 치가 띄어쓰기 된 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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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 게 아니라 어색한 거야 - 여전히 삶이 어색한 마흔 살의 여물지 않은 이야기
소재웅 지음 / 훈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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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여든 아홉 편과 하나 덧붙여진 글 등 모두 90편의 글로 구성되었다이 책을 천천히 다 읽고 난 뒤, 나는 아흔 한 번째 글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2015년 작약을 무척 좋아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하늘로 돌아간 날이 생각난 것이다. 그 하루 전, 나는 청산도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었고, 어머니는 귀천 직전 아들이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었던 것 같다. 생애 마지막 몇 년은 삶이 아예 단순해졌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하늘과 창밖 꽃을 보고, 아들이 한두 번 씩 찾아와 가볍게 식사를 차리고 먹여주며, 그 옆에서 투박한 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셨던 것이다. 솔직히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문득 나의 엄마의 김치찌개가 살아난다. 쑥스러운 게 아니라 어색한 거야(훈훈, 2022)는 나에게 그 미안하고 고마운 추억을 선물로 남겨주었다.

 

2.

작가 소재웅은 글로써 삶과 삶을 훈훈하게 이어주는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가 앞서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여러 책들과 다른 이들의 삶을 엮어 출판한 책들, 그리고 곳곳에서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들은 그 노력의 결실들이다. 특히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갑자기 어머니를 상실한 큰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그것과 함께살아가려는 내적 분투를 글로 남긴 훈훈한 에세이다. 저자는 부재를 부재로 받아들이는 지난한 과정”(10)을 통해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억지로 벗어나기보다 그것을 보듬고 살아가는 법을 한 편 에세이에 담아 독자들과 나눈다. 그의 글 속에는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겪는 이들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저자는 그 부재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기억에 근거한 인내라는 것을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인간미와 온기가 스며있다.

 

3.

슬픔은 수다가 어렵다. 기쁨이야 누가 묻지 않아도 쏟아낼 말이 차오를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은 질문을 받을수록 점점 더 수렁에 들어가는 듯한 감정의 늪이다. 그런데 그간의 글쓰기를 보면 저자는 이 슬픔의 위력에 당당하게 대응해왔던 것 같다. 특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기가 느닷없는슬픔에 대응한 방식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면, “장례식장은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이지만, 이곳엔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따뜻한 위로가 들끓는다.”(7. 다소 그리운 에세이. ‘결국, 이야기는 남는다.’(28))는 말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그가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그 슬픔에 과거의 기억, 현재의 일상, 심지어 미래의 소망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는 것이다. 슬픔을 자기 삶의 옆자리로 기꺼이 초대하는 것이다. 슬픔을 오히려 따뜻한 수다의 글로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기 슬픔 속에서 남모르게 분투하는 이들에게 공감(empathy)하는 것이다. 그 공감은 서로 보이지 않아도 공존(co-exist)한다는 위로다.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일상의 에세이들은 사소한 경험으로 보인다 해도 슬픔의 일상에서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따뜻하게 제안한다. 슬픔과 함께 사는 훈훈한 삶의 안내서다.

 

4.

사실 슬픔은 물컹하다. 물풍선 같다. 조심하지 않으면 담겨진 물이 곧 터질 듯 위태로운 감정이다. 그래서 그것은 딱 부러진 정답이 없다. 그냥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스스로 소멸해서 새로운 기쁨으로 드러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좋다. 이 책에서 이런 저자의 태도를 잘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슬픔이 삶의 모든 것에 어느 정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안내한다. 저자가 글의 소제목으로 설정한 다소라는 말은 어디에나 어느 정도로 스며있는 그 슬픔의 일상성과 위태로움을 잘 드러낸다. ‘다소(多少)조금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라는 의미이다. 이 특유의 조어법(助語法)은 이 책을 쓰는 동안, 아니 이 후에도 저자가 경험할 슬픔, 사랑하는 이, 사랑하는 것을 상실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억지로 감추지 않은 흔적이다. “엄마가 남긴 글들은 허투루 쓴 글이 하나도 없다. 그 순간에 한 존재를 향해 깊이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갔다.”(136)(37. 다소 엄마생각나는 에세이 작은 목소리를 줍다) 그러니 이 책은 슬픔 극복이나 회피가 아니라 나의 슬픔에 공감하는 누군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가장 특별한 사실을 평범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한 번에 다 읽지 못했다. 아홉 개로 구성된 이야기 단락들을 하루에 하나 씩 읽었다. 읽으면서 각 에세이에서 저자가 남긴 문장들을 천천히 다시 적어두었다. 언젠가 내 삶에서 느닷없는 슬픔이 밀려올 때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일깨우는 적절한 문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을 넘어 누구라도 자신의 슬픔을 오히려 글로 남길 수 있다는 용기를 조용히 자극한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자신이 겪은 슬픔을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한 편의 책으로 남겨둔다는 것은 참 소중한 수고다. 이 책이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이 느닷없는 슬픔으로 삶이 위태로워진 사람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슬픔은 혼자 삭혀야 할 분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소중한 인생 자산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만 생각하자는 생각으로 엄마에 대한 마음을 마음껏 표현했다. 마음껏 표현했다는 건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면서도 내 마음을 조각하는 기분으로 다듬어가려고 애썼다.(‘한 존재의 삶은 죽음으로서 완성된다‘.중에서)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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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0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올려주셨네요. 잘 지내시죠?^^

밥헬퍼 2023-02-09 07:48   좋아요 1 | URL
아이쿠...댓글까지 달아주셨네요.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사실, 그동안 묵혀두었던 박사 논문을 지난 1년간 다시 정리해서 제출했습니다. 17년만에 마무리했습니다. 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tella.K 2023-02-09 09:54   좋아요 1 | URL
어머, 그러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자주 뵙는건가요? ㅎㅎ
 

0.

늘 그렇듯이, 길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길을 걷는 동안 가끔 서시를 되새긴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길에서 나는 이 서시를 다시 처음부터 되새겨 상상한다. 이른 바 나의 도석(道釋)’이다. ‘길 위의 해석’. 집에 돌아와 아무래도 오늘 나의 해석을 조금 부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결과를 여기에 적어둔다.

 


1.

우선, 내가 길을 걸으며 시를 해석한 방식을 잠깐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히브리인들의 시를 즐겨 읽는다. 사실, 여러 시읽기 방법 중에 시 자체를 자세히 읽는(close reading)것을 선호한다. 이것이 어떤 방법인가 싶지만, 사실, 단순히 말하자면, 시를 무한 반복하여 되내이는 것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어가면서 반복하며 상기한다. 암송하면서 되새긴다. 핵심은 시를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고 떠올리는 것이다. ‘읊조린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린다. 그래서 어떤 해석이 도출될 것인지, 시에 부합되는 해석을 끄집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당연하다. 늘 과한 작업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시가 해석대상이 아니라 감상하는 것으로서 그 싯구를 통해 시인이 말하는 자기 정황(저자의 자리)를 이해하는 통로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시읽기를 통한 시해석은 일단 2차자료을 굳이 옆에 두고 대조할 필요가 적다는 점이 큰 유익이다. 당연히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시인이 남긴 그 시를 자기 세계로 억지로 끌어다가 매조지하는 경우다. 그리하여 시읽기 마지막은 시가 나에게 들려주는 것, 시가 나에게 읽히고 싶은 것, 시가 나를 읽고 남겨둔 그 소리를 귀담아 새겨두는 일이다. 시가 말할 때, 시 읽기는 끝난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을 말하고, 시는 시로써 말을 남긴 시인을 나에게 보여준다. 히브리인들의 시쓰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시는 글자 배열이 아니었다. (그들은 물론 암기목적에 부응하도록 댓구법을 정형으로 사용했다. 글이 귀했으니 듣기에 편리해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는 시인의 마음, 생각, , 이상을 글자로 그려낸 자화상이며 수채화다. 시의 분석은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일 때 마감되면 좋다. 어쟀든 오늘 이 시읽기는 나의 해석을 전제한다. 내가 서시에서 읽은 시인 윤동주의 마음, 생각이다. 이제 시작해 본다.

 

2.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그가 남긴 시 원본을 일단 보겠다. 이 시는 194111월에 쓰여졌다. 200자 원고지에 세로쓰기(아마도 연필이었을텐데)로 모두 89글자다.(제목과 기록 날짜는 제외) 시 제목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싯구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여덟 줄을 연달아 썼다. 이어 한 줄 건너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마침표를 세 번 찍었으며, 쉼표를 한번 사용했다. 처음 썼던 글자를 수정한 경우도 한 번 있다. ‘나않테나안테. 물론 고친 것도 표기가 정확하지는 않다. 표준어라면 나한테가 맞을 것이다. 이후 필사자들은 수정해서 나에게로 쓴 경우가 많다. 여덟 번째 열 끝 단어 거러도 역시 오늘날 표기와 다르다. 대체로 걸어로 수정한다. 첫 열 우르러도 오늘날 표기는 우러러. 나는 수정없이 읽는다. 이 정도가 시 원본에서 대략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글씨체다. 여느 원고도 그렇지만, 대체로 가지런하다. 오른쪽으로 조금 누운 듯한 모양새가 시종일관 유지된다. 아마도 시인이 시를 쓸 때 자세인 듯하다. 그는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또박또박 써낸다. 그것이 습관이었던 것 같다. 글씨만으로 보자면 이 시는 뭉특하고 단아하다

 

3.

이제 시를 보자. 시는 모두 세 문장이다. 여덟 행까지가 두 문장이다. 마지막 행이 한 문장이다. 이제 각 문장을 읽히는 대로 적어보자. 전문적인 분석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3-1 첫 째 문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문장에서 가장 눈여겨 읽어야 할 것은 두 번째 행(없기를,) 끝에 있는 쉼표. 나는 이 쉼표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읽어서 아주 중요하고,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되새길 때, 이 쉼표에서 항상, 반드시 멈추면 좋을 것 같다. 이 쉼표를 고려하면 이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읽게 된다.

(1)과거 회상:이 경우 이 쉼표는 문장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눌 수 있다. 쉼표 앞 문장은 상상하는 사색 문장이 된다. 자기 마음 속 말이며, 간직하고 살아왔던 고백이다. 이어 쉼표 뒷문장 나는 괴로워했다는 자기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자기가 살아오는 시간내내 그는 부끄럼이 없기를희구했지만 실제로는 늘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보인다. 그는 심지어 잎새에 이른 바람에도괴로운 것이다. 이 때는 과거회고문장으로 읽힌다.

(2)현재 성찰:다른 한편, 나는 이 쉼표가 도치 구문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어 나는과 서술어 괴로워했다사이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하늘을 우러러...’라는 괴로움이 지배하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가 부끄럼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현재가 된다.

 

이제 시인이 첫 문장에서 사용한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자. 마치 계절어같다. ‘잎새라는 말 속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생동하는 느낌이 강하다. 바람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잎이라지만 살랑살랑 부는 모습이 선명하다. 시인은 미세한 감촉을 발휘애서 관찰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이 괴로워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괴로워했는가? 만약 앞서 본대로, 현재를 성찰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현재가 그렇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아직도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괴로움'을 자초하면서까지 자기 삶을 자기 고백에 부합하도록 견인하고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는 자기 의지를 선명하게 확인한다. 괴로움은 그런 흔적이다. 시인은 언제나 하늘을 향한 자기 시선을 간직하다가 미세한 바람에 살랑이는 잎새를 직시한다. 마침내 그 시선은 자기자신을 관조한다. 이런 시선의 이동은 시인이 자기가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하늘-잎새-자신에게로 초점화하여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쉼표를 과거 회상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3-2 둘째 문장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언뜻 읽으면, 두 문장처럼 보인다. 사실 한 문장이다. 두 번째 행 사랑해야지다음에 문장기호가 없다. 어색하게 접속사 그리고를 굳이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앞 뒤 구문은 서로 병렬 형태가 되었다. ‘A 그리고 B그렇다면 두 개는 같은 내용에 대한 나열일 가능성이 크다.

 

A.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B.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이 두 문장은 동일한 내용을 나열한 것같지가 않다. 이질적인 내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그리고B’는 시간의 연속, 이어짐일 수 있다. A가 먼저 일어난 일이고 B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A가 실현되지 않으면 B는 일어나지 않는다. A여야 B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그리고를 쓴 이유는 명확해진다. 그는 시간적으로, 사건적으로 언속적되는 표현을 원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두 내용을 동일한 사건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 A 문장부터 좀 더 읽어보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너무 서정적이어서 손대기가 머뭇해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일단 앞문장 끝에 으로부터 보자. 이 표현은 어떤 방법이며, 수단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떤 방법인가? 무엇을 상상하는 것인가? 혹시 시인이 유학을 떠나기 전, 용정 밤하늘에 펼쳐졌던 그 별들을 보며 괜한 감정이 솟아올랐던 것일까? 그럼 별을 노래한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일까? 정확히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노래를 한다는 것인지, 은유적인지. 알 수 없다. ‘을 이상화된 세계로 쉽게 내다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시인에게 이 이상화된 대상이라면 이어지는 다른 모든 것도 다 비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시 첫 문장과 견주어 본다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 모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곧 하늘을 우러러라는 행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첫 문장에서 하늘을 우러러가 빛이 가득한 낮을 연상하게 한다면, 별을 노래하는라는 표현에는 깊은 밤이 어울린다. 시를 되새기다 보면, 시의 리듬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그려냈는지, 아니면 별을 노래하는마음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그가 연상하는 것은 별인가’ ‘마음인가?’ 당연히 별을 보고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은 별을노래하는 마음이라는 리듬으로 읽는 것이 좋다. 그랬을 경우, ‘별을노래하는 마음이 곧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다짐하던 그 고뇌와 이어질 것 같다. 시인에게는 낮과 밤 어느 시간에도 자기 삶을 관조하는 영역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괴로워했던 것도 새롭게 변주된다. 바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잎새가 살아나는 묘사라면, ‘죽어가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다. 따라서 잎새죽어가는 것은 삶의 시작이과 동시에 삶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좀 더 주목해보자. 오늘 내가 이 서시를 생각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것을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시인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쓴 것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이라고 필사하는 경우다. 단수와 복수라는 차이가 선명하다. 시인은 단수로 쓰고, 이후 필사자들 중 어떤 이들은 복수로 썼다. 우리말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가 그리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며, 그리 큰 문제랄 수는 없다. 나와 우리가 혼용되는 일은 흔하다 복수형 어미 도 사실은 그 앞에 전칭 단어들(. 모든, , 전부)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단수로 쓰는 것이 특별해 보인다. 시인은 그 앞에 이미 모든이라는 말을 썼다. 따라서 뒤에 이 있던 없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인이 상상하는 것이 단수의 경우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을 맨 앞에 씀으로써, 이 말은 죽어가는 것하나하나를 따로따로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하나씩 모인 전체를 전제한다. 그저 모든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로 존재하다가 모든으로 모인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시인은 죽어가는 것하나하나를 보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에 시선을 둔다. 이제 시인이 사랑한다는 말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첫 문장, ‘괴로워한다와 대응했을 것이다. ‘사랑괴로움이다. 괴로워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것을 하나하나 자기 마음에 담아두고, 괴로워하며 사랑한다. 자신도 그 죽어가는 것에 포함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는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괴로워한다. 그렇게 살아오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삶이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B문장이다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그리고에 이어지는 문장이다. 일단 그리고그리고 난 뒤라는 시간이어짐으로 읽는다는 것이 좋겠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걸 가정하고 읽으면, ‘나한테 주어진 길은 다름 아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연동된다. 다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고 분투하는 삶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그 삶은 자신이 만든 길, 자신이 해보고자 하는 길이 아니다. 여기서 은 전적으로 현실이다. 상징, 메티포로서 은 아닌 듯하다. 자신이 직접 살아온, 살아가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지금 그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한다. 다짐이다. 결의이며, 다시 괴로워 할 것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걷고 걸을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길을 걷는 시인이다. 그는 뛰거나 서두르거나, 다급해하지 않는다. 한글자 한글자로 쓰고 있는 시어는 그가 걸어가는 걸음을 투영한다. 자기 운명을 기꺼이 자기 걸음으로 재현한다. ‘~겠다라는 이 표현이야말로 괴로움사랑해야지라는 자기 결의를 극한까지 심화시킨다. 지금도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가야겠다는 자기 고백이 여실히 묻어난다.

 

나는 이 시를 되뇌이면서 오늘,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주목해보고 있다. 첫문장이 회고라면, 두 번째 문장은 전망이다. 지난 날도 그렇게 살았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이제 시인은 고국을 떠나 타국으로 떠날 참이다. 고향 용정에서 보낸 하루하루, 낮과 밤에 그는 숱한 자기 결의와 고백, 다짐을 해왔다. 이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세계로 나갈 것이다. 거기는 어쩌면 더욱 더 죽어가는 것으로 가득찬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그 죽어가는 것을 괴로워하고, 사랑하기 위해, 운명처럼 주어진 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상상해보면, 그는 지난 날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자신의 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3-3 셋째 문장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숨을 한번 고른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자기 고민이 깊어지고, 자기 사랑이 더욱 짙어가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는 이 시를 쓰면서도 괴로워하는 회한과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에 뒤섞인 자신을 보고 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문장을 쓴다. 나는 반복해서 읽는다. 걸으면서, 앉아서, 생각하면서 말없이 쉬지 않고 되새긴다. 그의 떨리는 손이 떠오른다. 깊은 호흡소리도 들린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그는 시를 쓰고, 자기 길은 주어졌다. 그는 이제 앞서 써 두었던 싯구에서 두 단어를 다시 꺼낸다. ‘바람이다. 앞선 대목에서 마음과 이어졌었다. ’바람은 여린 생명과 맞닿았다. 시인에게 별과 바람은 자기 존재와 상관된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 여리기만 한 생명,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자신 말이다. 별이 자신이라면, 바람은 생명을 어루만져주는 힘이다. ’별이 바람에라는 표현은 주어와 부사구가 어울리지 않는다. 서술어를 보면 명확하다.

스치운다’. ‘스친다를 현재 사역형같이 표현했다. ’~ㄴ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작이다. ’오늘 밤에라는 표현이 이 시제와 상응한다. ’~~’는 사역(다른 이에게 시키는 동작)이다. 하지만 묘하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수동형같기도 하다. 동작이 주어에게 영향을 준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별이이고 서술어는 스치운다이다. ‘별이 스치운다.’ 시키면서 영향을 받는 동작을 감안하면 이 문장은 두 요소가 섞여있다. 하나는 별이 스치게 하다다른 하나는 스침을 당하다’. 이제 부사구 바람에를 넣어 읽어보자. 사실, ‘바람이 별을 스친다’.라고 했다면 선명했을 것이다. 바람이 하늘에 떠있는 별 곁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되지 못했다. 시인은 바람이 별 옆을 스치게 하고 동시에 별은 바람이 스쳐감을 당한다는 의미를 창조했다. 이 표현은 저 첫 문장 잎새에 이는 바람에 대한 정확한 대구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잎새가 겪는 바람이 이 마지막 문장에도 나타난다. 동시에 주어진 길에서처럼 수동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바람이 별에게 부는 모습이기도 하고, 별이 바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객체인지 구별하는 일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별이 바람에, 바람이 별에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가 관조하는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기 운명과 동일하게 되었다. 바람은 생명을 일깨우고, 자기존재를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자기 운명을 안내하는 힘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오늘밤에도그렇다. ‘~는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다. 그가 지내온 평생에 늘 만났던 오늘밤마다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을 떠올리고, 아침을 기다리는 습속을 간직했다. 별을 보며 하늘을 보고, 바람을 보고 별을 떠올린다. 시인의 시점은 대체로 을 기준으로 아침과 낮으로 향한다. 밤은 현실이며 과거이다. 아침과 낮은 미래이며 과거이다. 시인은 밤이어도 상관없다. 그는 언제나 빛과 밝음의 세계를 내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 가 그 길이다.

 

4.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시인 윤동주가 자기 첫 번째 시집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맨 마지막에 썼다는 것을 항상 상기한다. 서시(序詩)는 마지막에 쓰고 모든 시 앞에 두는 자기 고백이다. 시집을 시작하는 시. 이 시는 자기가 남겨놓을 ’ 19편에 대한 회고였으며, 전망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삶을 걸었던 를 모아 세계에 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때 시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서시를 남겼다. 시인은 시가 남겨질 때마다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실패같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 편 시가 태어날 때마다 미세한 바람에도 괴로워해야만 했다.

 

동시에 시인에게 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담아 둔 자기 고백이다. 이제 자기 시는 죽어가는

이다. 시인은 그 죽어가는 시를 괴로움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뿐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인의 길을 시와 함께 걸어가겠다고 한다. 한걸음, 한걸음씩 걸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삶을 견인하는 지고한 힘이며, 토대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가볍지 않았고,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시로써어둠을 밝히려한다. 시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어둔 밤에 빛나는 별을 보며 그 마음에서 시를 꺼낸다. 그 별에 바람이 스쳐가고 별이 바람을 스치우게 한다. 잎새에 그랬던 것처럼 별에도 파동이 일었을까? 아니 바람은 별로 인해 추동했을까? 시인이 별을노래하는 마음으로 남긴 시들은 이제 바람을 흔들어 잎새에 일게 하고 마침내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삶을 일깨울 것이다. 그가 이듬해 시를 마음에 품고 몸 하나로 현해탄을 넘어 밤의 나라, 군국에 물들어있던 땅으로 고요하게 밀고 들어갔듯이 말이다.

 

오늘 나는 서시를 읽으며

죽어가는 시로써 죽음을 이겨냈던

시인 윤동주를 마음에 다시 품는다.

그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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