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늘 그렇듯이, 길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길을 걷는 동안 가끔 서시를 되새긴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길에서 나는 이 ‘서시’를 다시 처음부터 되새겨 상상한다. 이른 바 나의 ‘도석(道釋)’이다. ‘길 위의 해석’. 집에 돌아와 아무래도 오늘 나의 해석을 조금 부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결과를 여기에 적어둔다.
1.
우선, 내가 길을 걸으며 시를 해석한 방식을 잠깐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히브리인들의 시를 즐겨 읽는다. 사실, 여러 시읽기 방법 중에 시 자체를 자세히 읽는(close reading)것을 선호한다. 이것이 어떤 방법인가 싶지만, 사실, 단순히 말하자면, 시를 무한 반복하여 되내이는 것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어가면서 반복하며 상기한다. 암송하면서 되새긴다. 핵심은 시를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고 떠올리는 것이다. ‘읊조린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린다. 그래서 어떤 해석이 도출될 것인지, 시에 부합되는 해석을 끄집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당연하다. 늘 과한 작업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시가 해석대상이 아니라 감상하는 것으로서 그 싯구를 통해 시인이 말하는 자기 정황(저자의 자리)를 이해하는 통로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시읽기를 통한 시해석은 일단 2차자료을 굳이 옆에 두고 대조할 필요가 적다는 점이 큰 유익이다. 당연히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시인이 남긴 그 시를 자기 세계로 억지로 끌어다가 매조지하는 경우다. 그리하여 시읽기 마지막은 시가 나에게 들려주는 것, 시가 나에게 읽히고 싶은 것, 시가 나를 읽고 남겨둔 그 소리를 귀담아 새겨두는 일이다. 시가 말할 때, 시 읽기는 끝난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을 말하고, 시는 시로써 말을 남긴 시인을 나에게 보여준다. 히브리인들의 시쓰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시는 글자 배열이 아니었다. (그들은 물론 암기목적에 부응하도록 댓구법을 정형으로 사용했다. 글이 귀했으니 듣기에 편리해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는 시인의 마음, 생각, 꿈, 이상을 글자로 그려낸 자화상이며 수채화다. 시의 분석은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일 때 마감되면 좋다. 어쟀든 오늘 이 시읽기는 나의 해석을 전제한다. 내가 ‘서시’에서 읽은 시인 윤동주의 마음, 생각이다. 이제 시작해 본다.
2.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그가 남긴 시 원본을 일단 보겠다. 이 시는 1941년 11월에 쓰여졌다. 200자 원고지에 세로쓰기(아마도 연필이었을텐데)로 모두 89글자다.(제목과 기록 날짜는 제외) 시 제목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싯구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여덟 줄을 연달아 썼다. 이어 한 줄 건너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마침표를 세 번 찍었으며, 쉼표를 한번 사용했다. 처음 썼던 글자를 수정한 경우도 한 번 있다. ‘나않테’를 ‘나안테’로. 물론 고친 것도 표기가 정확하지는 않다. 표준어라면 ‘나한테’가 맞을 것이다. 이후 필사자들은 수정해서 ‘나에게’로 쓴 경우가 많다. 여덟 번째 열 끝 단어 거러‘도 역시 오늘날 표기와 다르다. 대체로 ’걸어‘로 수정한다. 첫 열 ’우르러‘도 오늘날 표기는 ‘우러러’다. 나는 수정없이 읽는다. 이 정도가 시 원본에서 대략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글씨체다. 여느 원고도 그렇지만, 대체로 가지런하다. 오른쪽으로 조금 누운 듯한 모양새가 시종일관 유지된다. 아마도 시인이 시를 쓸 때 자세인 듯하다. 그는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또박또박 써낸다. 그것이 습관이었던 것 같다. 글씨만으로 보자면 이 시는 ’뭉특하고 단아하다‘
3.
이제 시를 보자. 시는 모두 세 문장이다. 여덟 행까지가 두 문장이다. 마지막 행이 한 문장이다. 이제 각 문장을 읽히는 대로 적어보자. 전문적인 분석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3-1 첫 째 문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문장에서 가장 눈여겨 읽어야 할 것은 두 번째 행(없기를,) 끝에 있는 ‘쉼표’다. 나는 이 쉼표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읽어서 아주 중요하고,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되새길 때, 이 쉼표에서 항상, 반드시 멈추면 좋을 것 같다. 이 쉼표를 고려하면 이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읽게 된다.
(1)과거 회상:이 경우 이 쉼표는 문장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눌 수 있다. 쉼표 앞 문장은 상상하는 사색 문장이 된다. 자기 마음 속 말이며, 간직하고 살아왔던 고백이다. 이어 쉼표 뒷문장 ‘나는 괴로워했다’는 자기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자기가 살아오는 시간내내 그는 ‘부끄럼이 없기를’ 희구했지만 실제로는 늘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보인다. 그는 심지어 ‘잎새에 이른 바람에도’ 괴로운 것이다. 이 때는 과거회고문장으로 읽힌다.
(2)현재 성찰:다른 한편, 나는 이 쉼표가 도치 구문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어 ‘나는’과 서술어 ‘괴로워했다’ 사이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하늘을 우러러...’라는 괴로움이 지배하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가 ‘부끄럼’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현재가 된다.
이제 시인이 첫 문장에서 사용한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자. 마치 계절어같다. ‘잎새’라는 말 속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생동하는 느낌이 강하다. 바람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잎이라지만 살랑살랑 부는 모습이 선명하다. 시인은 미세한 감촉을 발휘애서 관찰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이 ‘괴로워’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괴로워했는가? 만약 앞서 본대로, 현재를 성찰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현재가 그렇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아직도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괴로움'을 자초하면서까지 자기 삶을 자기 고백에 부합하도록 견인하고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는 자기 의지를 선명하게 확인한다. 괴로움은 그런 흔적이다. 시인은 언제나 하늘을 향한 자기 시선을 간직하다가 미세한 바람에 살랑이는 잎새를 직시한다. 마침내 그 시선은 자기자신을 관조한다. 이런 시선의 이동은 시인이 자기가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하늘-잎새-자신에게로 초점화하여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쉼표를 과거 회상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3-2 둘째 문장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언뜻 읽으면, 두 문장처럼 보인다. 사실 한 문장이다. 두 번째 행 ‘사랑해야지’ 다음에 문장기호가 없다. 어색하게 접속사 ‘그리고’를 굳이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앞 뒤 구문은 서로 병렬 형태가 되었다. ‘A 그리고 B다’ 그렇다면 두 개는 같은 내용에 대한 나열일 가능성이 크다.
A.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B.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이 두 문장은 동일한 내용을 나열한 것같지가 않다. 이질적인 내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그리고B’는 시간의 연속, 이어짐일 수 있다. A가 먼저 일어난 일이고 B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A가 실현되지 않으면 B는 일어나지 않는다. A여야 B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그리고’를 쓴 이유는 명확해진다. 그는 시간적으로, 사건적으로 언속적되는 표현을 원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두 내용을 동일한 사건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 A 문장부터 좀 더 읽어보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너무 서정적이어서 손대기가 머뭇해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일단 앞문장 끝에 ‘으로’부터 보자. 이 표현은 어떤 방법이며, 수단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떤 방법인가? 무엇을 상상하는 것인가? 혹시 시인이 유학을 떠나기 전, 용정 밤하늘에 펼쳐졌던 그 별들을 보며 괜한 감정이 솟아올랐던 것일까? 그럼 ‘별을 노래한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일까? 정확히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노래를 한다는 것인지, 은유적인지. 알 수 없다. ‘별’을 이상화된 세계로 쉽게 내다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시인에게 ‘별’이 이상화된 대상이라면 이어지는 다른 모든 것도 다 비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시 첫 문장과 견주어 본다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 모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곧 ‘하늘을 우러러’라는 행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첫 문장에서 ‘하늘을 우러러’가 빛이 가득한 낮을 연상하게 한다면, 별을 노래하는’라는 표현에는 깊은 밤이 어울린다. 시를 되새기다 보면, 시의 리듬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그려냈는지, 아니면 ‘별을 노래하는마음’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그가 연상하는 것은 ‘별인가’ ‘마음인가?’ 당연히 별을 보고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은 ‘별을노래하는 마음’이라는 리듬으로 읽는 것이 좋다. 그랬을 경우, ‘별을노래하는 마음’이 곧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던 그 고뇌와 이어질 것 같다. 시인에게는 낮과 밤 어느 시간에도 자기 삶을 관조하는 영역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괴로워했’던 것도 새롭게 변주된다. 바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잎새’가 살아나는 묘사라면, ‘죽어가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다. 따라서 ‘잎새’와 ‘죽어가는 것’은 삶의 시작이과 동시에 삶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좀 더 주목해보자. 오늘 내가 이 서시를 생각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것을’과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시인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쓴 것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이라고 필사하는 경우다. 단수와 복수라는 차이가 선명하다. 시인은 단수로 쓰고, 이후 필사자들 중 어떤 이들은 ‘복수’로 썼다. 우리말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가 그리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며, 그리 큰 문제랄 수는 없다. 나와 우리가 혼용되는 일은 흔하다 복수형 어미 ‘들’도 사실은 그 앞에 전칭 단어들(예. 모든, 다, 전부)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단수로 쓰는 것이 특별해 보인다. 시인은 그 앞에 이미 ‘모든’이라는 말을 썼다. 따라서 뒤에 ‘들’이 있던 없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인이 상상하는 것이 단수의 경우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을 맨 앞에 씀으로써, 이 말은 ‘죽어가는 것’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하나씩 모인 전체를 전제한다. 그저 ‘모든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로 존재하다가 모든’으로 모인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시인은 ‘죽어가는 것’ 하나하나를 보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에 시선을 둔다. 이제 시인이 ‘사랑한다’는 말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첫 문장, ‘괴로워한다’와 대응했을 것이다. ‘사랑’이 ‘괴로움’이다. 괴로워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것’을 하나하나 자기 마음에 담아두고, 괴로워하며 사랑한다. 자신도 그 ‘죽어가는 것’에 포함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는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괴로워한다. 그렇게 살아오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B문장이다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그리고’에 이어지는 문장이다. 일단 ‘그리고’는 ‘그리고 난 뒤’라는 시간이어짐으로 읽는다는 것이 좋겠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걸 가정하고 읽으면, ‘나한테 주어진 길’은 다름 아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연동된다. 다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고 분투하는 삶’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그 삶은 자신이 만든 길, 자신이 해보고자 하는 길이 아니다. 여기서 ‘길’은 전적으로 현실이다. 상징, 메티포로서 ‘길’은 아닌 듯하다. 자신이 직접 살아온, 살아가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지금 그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한다. 다짐이다. 결의이며, 다시 괴로워 할 것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걷고 걸을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길을 걷는 시인이다. 그는 뛰거나 서두르거나, 다급해하지 않는다. 한글자 한글자로 쓰고 있는 시어는 그가 걸어가는 걸음을 투영한다. 자기 운명을 기꺼이 자기 걸음으로 재현한다. ‘~겠다’라는 이 표현이야말로 ‘괴로움’과 ‘사랑해야지’라는 자기 결의를 극한까지 심화시킨다. 지금도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가야겠다는 자기 고백이 여실히 묻어난다.
나는 이 시를 되뇌이면서 오늘,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주목해보고 있다. 첫문장이 회고라면, 두 번째 문장은 전망이다. 지난 날도 그렇게 살았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이제 시인은 고국을 떠나 타국으로 떠날 참이다. 고향 용정에서 보낸 하루하루, 낮과 밤에 그는 숱한 자기 결의와 고백, 다짐을 해왔다. 이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세계로 나갈 것이다. 거기는 어쩌면 더욱 더 ‘죽어가는 것’으로 가득찬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그 죽어가는 것을 괴로워하고, 사랑하기 위해, 운명처럼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상상해보면, 그는 지난 날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자신의 ‘시’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3-3 셋째 문장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숨을 한번 고른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자기 고민이 깊어지고, 자기 사랑이 더욱 짙어가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는 이 시를 쓰면서도 ‘괴로워’하는 회한과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에 뒤섞인 자신을 보고 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문장을 쓴다. 나는 반복해서 읽는다. 걸으면서, 앉아서, 생각하면서 말없이 쉬지 않고 되새긴다. 그의 떨리는 손이 떠오른다. 깊은 호흡소리도 들린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그는 시를 쓰고, 자기 길은 주어졌다. 그는 이제 앞서 써 두었던 싯구에서 두 단어를 다시 꺼낸다. ‘별’과 ’바람‘이다. 앞선 대목에서 ’별‘은 ’마음‘과 이어졌었다. ’바람‘은 여린 생명과 맞닿았다. 시인에게 별과 바람은 자기 존재와 상관된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 여리기만 한 생명,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자신 말이다. 별이 자신이라면, 바람은 생명을 어루만져주는 힘이다. ’별이 바람에‘라는 표현은 주어와 부사구가 어울리지 않는다. 서술어를 보면 명확하다.
‘스치운다’. ‘스친다’를 현재 사역형같이 표현했다. ’~ㄴ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작이다. ’오늘 밤에‘라는 표현이 이 시제와 상응한다. ’~우~’는 사역(다른 이에게 시키는 동작)이다. 하지만 묘하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수동형같기도 하다. 동작이 주어에게 영향을 준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별이’이고 서술어는 ‘스치운다’이다. ‘별이 스치운다.’ 시키면서 영향을 받는 동작을 감안하면 이 문장은 두 요소가 섞여있다. 하나는 ‘별이 스치게 하다’ 다른 하나는 ‘스침을 당하다’. 이제 부사구 ‘바람에’를 넣어 읽어보자. 사실, ‘바람이 별을 스친다’.라고 했다면 선명했을 것이다. 바람이 하늘에 떠있는 별 곁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되지 못했다. 시인은 ‘바람이 별 옆을 스치게 하고 동시에 별은 바람이 스쳐감을 당한다’는 의미를 창조했다. 이 표현은 저 첫 문장 ‘잎새에 이는 바람’에 대한 정확한 대구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잎새가 겪는 바람이 이 마지막 문장에도 나타난다. 동시에 ‘주어진 길’에서처럼 수동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바람이 별에게 부는 모습이기도 하고, 별이 바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객체인지 구별하는 일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별이 바람에, 바람이 별에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별’이 자기가 관조하는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기 운명과 동일하게 되었다. 바람은 생명을 일깨우고, 자기존재를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자기 운명을 안내하는 힘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오늘밤에도’ 그렇다. ‘~도’는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다. 그가 지내온 평생에 늘 만났던 ‘오늘밤’마다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밤’에 ‘낮’을 떠올리고, 아침을 기다리는 습속을 간직했다. 별을 보며 하늘을 보고, 바람을 보고 별을 떠올린다. 시인의 시점은 대체로 ‘밤’을 기준으로 아침과 낮으로 향한다. 밤은 현실이며 과거이다. 아침과 낮은 미래이며 과거이다. 시인은 밤이어도 상관없다. 그는 언제나 빛과 밝음의 세계를 내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 ‘시’가 그 길이다.
4.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시인 윤동주가 자기 첫 번째 시집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맨 마지막에 썼다는 것을 항상 상기한다. 서시(序詩)는 마지막에 쓰고 모든 시 앞에 두는 자기 고백이다. 시집을 시작하는 시. 이 시는 자기가 남겨놓을 ‘시’ 19편에 대한 회고였으며, 전망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삶을 걸었던 ‘시’를 모아 세계에 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때 시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서시를 남겼다. 시인은 시가 남겨질 때마다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실패같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 편 시가 태어날 때마다 미세한 바람에도 괴로워해야만 했다.
동시에 시인에게 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담아 둔 자기 고백이다. 이제 자기 시는 ‘죽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그 죽어가는 시를 괴로움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뿐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인’의 길을 시와 함께 걸어가겠다고 한다. 한걸음, 한걸음씩 걸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삶을 견인하는 지고한 힘이며, 토대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가볍지 않았고,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시로써’ 어둠을 밝히려한다. 시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어둔 밤에 빛나는 별을 보며 그 마음에서 시를 꺼낸다. 그 별에 바람이 스쳐가고 별이 바람을 스치우게 한다. 잎새에 그랬던 것처럼 별에도 파동이 일었을까? 아니 바람은 별로 인해 추동했을까? 시인이 별을노래하는 마음으로 남긴 시들은 이제 바람을 흔들어 잎새에 일게 하고 마침내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삶을 일깨울 것이다. 그가 이듬해 시를 마음에 품고 몸 하나로 현해탄을 넘어 밤의 나라, 군국에 물들어있던 땅으로 고요하게 밀고 들어갔듯이 말이다.
오늘 나는 서시를 읽으며
‘죽어가는 시’로써 죽음을 이겨냈던
시인 윤동주를 마음에 다시 품는다.
그는 시인이다.